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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23호

[길벗 광장] 가난과 깃들임에 대하여 (2)

by 성프란시스 2024. 7. 12.

                          가난과 깃들임에 대하여 (2)  -인간다움의 실현과 행복

                                                                                                                김동훈 (성프란시스대학 예술사 교수)

지난 호 길벗 광장 칼럼에서는 행복이라는 말의 어원적 의미와 그 변천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원래는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낸다는 뜻을 지녔던 () 자와 서양의 여러 언어에서 신에게 은총을 받아 따로 거룩하게 구별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던 blessed, beatus, μακριος, אשׁר , ברך  등이 어떻게 점차 물질적, 세속적 성공을 뜻하게 되었는지를 추적해 가면서 성서에서 말하는 행복한 가난의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하고자 했다. 헬조선안에서 이른바 루저로 낙인찍혀도 행복할 수 있으려면 행복의 의미를 다르게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를 끝으로 일단 글을 맺었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성서에서 말하는 가난한 이들의 행복은 고통스러운 삶을 회피하려는 일종의 수사에 불과한 말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우선 분명한 사실은 혼자서 행복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사회 속에 존재하고 그것을 벗어나 살아갈 수가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사실을 간파하고 인간은 그 당시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회형태였던 폴리스, 즉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동물(초온 폴리티콘; ζον πολιτικν)이라고 말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이 말을 그 현대적 의미에 따라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뜻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원래 사회 안에서만 인간이 존재한다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권모술수가 넘치는 이전투구의 장으로 생각하는 정치와는 상관이 없는, 진정한 정치의 근원으로서의 폴리테이아(πολιτεα), 즉 폴리스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한 지식과 지혜를 가리키는 말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 말을 더욱 깊이 숙고해 본 뒤 폴리스는 인간이 이웃(호 펠라스; ὁ πλας)들과 함께 존재하며 살아가는 삶의 중심으로 해석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혼자 행복할 수 없다. 언제나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란 말속에는 어떤 어원적 의미가 숨어 있고 사회를 가리키는 서양 언어들의 단어에서는 어떻게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가 이해되고 있을까?

우선 한자어로 사회는 모일 사()자와 모일 회()자를 합쳐 만든 단어다. 그런데 두 단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사뭇 다르다. ()자는 시()자와 토()자의 합성어다. ()자를 살펴볼 때 보았던 것처럼 시()자는 제사 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거기에 땅을 뜻하는 토()자가 합쳐져서 땅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행위를 가리키게 되었고 땅의 신 자체를 가리키게도 되었다. 고대사회 특히 농경사회에서 땅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는 어떤 부족에게든 가장 큰 행사였고 당연히 모든 부족민이 다 모여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자가 모인다는 의미로 쓰이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고대인들은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면 토지신의 축복을 받아 농사가 잘될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자는 이와는 조금 다른 어원을 가지고 있다. 한자 사전에서는 쌀을 찌는 도구에 뚜껑을 한다는 뜻으로 상하가 합치는 데서부터 만나다, 모이다의 뜻이 되었다고 말한다. ()자는 쌀 찌는 도구고 집()자는 뚜껑을 가리킨다. 그런데 어원학 사전에 따르면 회()자는 사람의 입을 가리키는 집()자에 말한다는 뜻을 지닌 증()자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다. 증 자는 말한다는 뜻을 지닌 왈()에 뜻을 더 강하게 해주는 팔()자와 과거를 뜻하는 𡆧자가 합쳐져 과거에 대해 말한다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자는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서 과거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부족의 가장 큰 행사였던 제천행사에는 언제나 그 부족의 과거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이 이 글자의 기원이 되었으리라는 거다. 내 생각에는 어원학 사전의 이야기가 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모여서 어떤 주제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하는 뜻을 지닌 회의(會議)라는 단어도 어원학 사전의 해석에 무게를 실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사회 역시 고대의 제천행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어다. 제천행사를 잘 치르게 되면 복을 받는다는 면에서 사회가 그 기능을 잘하게 되면 그 구성원 모두가 복을 받는다는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인간의 도리를 다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산다면 사회 전체가 행복해질 거라는 생각 말이다.

서양의 경우 사회라는 단어의 어원이 동양과는 사뭇 다르다. 우선 사회를 뜻하는 영어 단어 society의 어원은 소치에타스(societas)라는 라틴어 단어이고 이 단어는 소치우스(socius)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친구, 동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함께 하는 모든 사람, 즉 반려자나 가족, 혈족을 가리키기도 하고 동맹군이나 동업자 등을 가리키기도 했다. 이와 유사한 뜻으로 사용된 고대 그리스어 단어는 필로스(φλος). 친구 사이의 우정을 가리키는 말인 필리아(φιλα)가 여기서 파생되어 나왔다.

독일어의 경우에는 사회라는 뜻을 지닌 단어가 두 가지다. 하나는 공동체라는 뜻을 지닌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라는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집회, 결사라는 뜻을 지닌 게젤샤프트(Gesellschaft). 전자가 유기체적이며 자연발생적이며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이 강한 데 반해, 후자는 목적의 달성을 위해 사람들이 결합함으로써 발생하며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은 그다지 강하지 않다. 전통사회의 형태를 게마인샤프트, 자본주의 발생 이후의 근대사회 형태를 게젤샤프트로 분류하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다.

소치우스에는 두 가지 의미가 뒤섞여 있었지만, 독일어에서는 이렇듯 두 가지 사회형태가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다. Geselle라는 독일어 명사는 중세시대에는 장인에게 수공업 기술을 배우던 도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어원을 따져보니 이 말은 공간, 방을 뜻하는 잘(sal)이라는 말에서 나와 같은 방, 같은 공간을 쓰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 아마도 도제들은 한 방에서 같이 먹고 자면서 대부분의 생활을 함께했을 것이다. 그래서 동무, 친구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스승인 장인에게 기술을 잘 배워 익히기 위해 함께 노력했을 것이고 나중에 장인이 되어서도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동업자로서 평생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언제나 같은 직업에 종사하고 따라서 이해관계를 공유한다는 속성이 먼저이지 혈연관계나 그저 그 사람이 좋아 만나는 친구 관계가 먼저인 것은 아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기능의 습득과 그로 인한 부의 획득이 우선이고 그것을 위해 동업자적 유대감을 갖는 것이 그다음이라는 말이다. 그나마 동업자 의식마저 점점 희미해져 버린 근대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의 획득과 관련된 물질적 이해관계만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면 예전에는 동업자 의식으로 인해 서로에게 가지고 있던 호의가 점차 그 힘을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는 혈연이나 친구 관계처럼 어떤 물질적인 이해관계보다 먼저 존재하는 서로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과 유대감이 그 사회의 구성원리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앞서 말한 그리스어 필리아가 바로 이러한 유대감을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이 말은 원래 일상어에서는 친구(필로스)끼리 갖는 우정을 가리키는 말인데 거기서 더 확장되어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갖는 감정도 가리키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에서 필리아의 적용 범위를 더 확대하여 친구 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우호적인 감정이라고 넓게 해석한다. 젊은 연인들이 서로에게 갖는 감정, 길동무나 동료 군인들 사이의 유대감, 같은 종교집단, 같은 종족의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갖는 감정 등에도 폭넓게 사용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갖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가 내게 유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내게 즐거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는 그 사람 자체가 그저 좋기 때문이다.

첫 번째의 경우는 친구가 부자이거나 힘이 세거나 해서 내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 친구를 좋아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러한 관계는 그가 재산을 잃거나 권좌에서 몰락하게 되면 해체되어 버리고 만다. 당연히 그 친구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도 사라질 것이다. 두 번째는 그 친구가 나를 즐겁게 해주기 때문에 좋아하는 경우다. 유머 감각이 뛰어난 친구가 옆에 있으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서 그를 좋아하는 경우나 연인 사이에는 상대방이 제공하는 성적인 쾌락이 좋아서 그를 좋아하는 경우를 들 수가 있다. 동호회 사람처럼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나 술자리에서 죽이 잘 맞는 사람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 이런 경우에는 그러한 즐거움을 상대방이 제공할 수 없게 되면 역시 필리아도 사라진다.

마지막 경우는 그 사람 자체가 좋기에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가 내게 무엇을 해주지 않아도 그를 좋아하게 되며 아무런 사심 없이 그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우리가 아무런 조건 없이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할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첫 번째로 드는 예는 부모와 자식 간의 필리아다. 부모나 자식이 서로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는 것은 돈이나 권력 때문도 아니고 상대방이 유머러스하기 때문도 아니라는 데 긴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친구 관계에서도 이런 관계가 가능할까? 예전 같으면 대부분 사람이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과연 그럴는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어떤 사람이 돈이 많거나 권력을 지니고 있거나 잘 생겼거나 유머 감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좋은 때가 있다. 그럴 때 주로 우리가 드는 이유는 그 사람의 됨됨이일 것이다. 어떤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아무런 유익이나 즐거움이 없어도 그 사람을 좋아하게 만들어줄까? 그것은 그의 모습이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모습일 때일 것이다. 성품이 좋고 언제나 선한 의도가 있으며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마도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참된 사람이며 인간다움을 실현한 사람이다.

여기서 다시 행복의 문제가 등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인간이 행복해지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되게 해주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속성, 즉 이성을 제대로 발휘해서 그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이성은 그리스어로는 로고스(λγος)라고 한다. 이 말은 원래는 말하다라는 뜻을 지닌 레고(λγω)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말속에는 우리가 파악하는 세상의 모습이 담겨 있고 그것이 곧 세상의 운행원리와 맞닿아 있다고 하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각이 로고스가 언어 안에 담겨 있는 세계의 운행원리, 그러한 원리의 담지자인 신까지 가리키게 했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1절에 나오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구절에서 말씀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가 바로 로고스다. 이 단어가 곧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본질 규정을 이야기할 때 어떨 때는 인간은 언어를 가진 동물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고 한다. 이 규정들은 얼핏 보기에는 서로 다른 현상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원래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일한 현상의 양면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어쨌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을 발휘해서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행복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그것이 바로 참된 필리아의 전제조건이자 결론이다. 인간다움을 실현해야만 진정한 필리아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그런 사랑이 곧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테니까.

그의 스승이었던 플라톤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명예나 돈을 획득함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소피스트의 주장에 맞서 그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설사 그 목적을 달성한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에 만족이 없고 언제나 불만과 불안이 그를 사로잡기에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을 때만 다른 사람을 좋아하거나 옆에 둔다. 그런데 그러한 관계는 언제나 불안정하기에 결코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인간이 인간다움을 실현하기 위해서 발휘해야 할 이성을 무언가를 논리적으로 파악하는 인식능력으로서의 이성과 구분하여 실천이성이라 불렀다. 진정한 행복은 명예나 돈이 아니라 실천이성에 따라 옳은 바를 실천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게 살펴본 바에 따르자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사회 속에서 동료 인간에 대한 필리아 사랑을 가지고 이성을 사용해 인간다운 삶을 실현해야만 얻을 수 있다. 나는 감히 성 프란시스 인문학 과정이 이런 인간다운 삶을 연습해 가는 곳이라고 말하고 싶다. 금수저와 흙수저를 나누고 모든 것을 돈의 액수에 따라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현대사회에서 노숙인은 그저 루저일 뿐이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내가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 성프란시스대학은 노숙인 학생들과 자원활동가, 교수진, 실무진들이 어우러져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함께 실천해보는 길벗들의 살림 터전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물질적 성공으로 판단해서는 얻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찐(!) 행복을 누려왔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 행복에 동참하는 길벗 도반들이 더욱 많아져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 또한 극복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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