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 진관사 답사기
700121 정동주(인문학 20기)
서울의 4월과 5월은 온통 축제의 연속입니다. 궁궐, 공원, 광장 할 것 없이 곳곳이 공연장이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들뜨곤 합니다. 그런데 신명나고 북적댐보다 조용히 사색하며 걷고 싶다면 사찰보다 좋은 곳은 흔치 않은 듯 합니다. 이른 아침 바람을 타고 울리는 풍경소리는 영혼을 정화시켜주는 듯 느껴지곤 하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제가 수학하고 있는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에서 소풍으로 천년고찰인 진관사에 답사를 간다고 하네요. 답사는 답사지의 정보를 얼마나 미리 숙지하고 가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 느낄 수 있는 것들의 깊이가 달라지기 때문에 미리 보편적인 사찰의 구조와 의미들 그리고 진관사에 대한 정보들을 숙지하였습니다.
진관사는 서울 근교의 4대명찰(동쪽:불암사, 남쪽:삼막사, 북쪽:승가사, 서쪽:진관사) 중 하나로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총본산 조계사의 말사입니다.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1011년(顯宗 2년)에 왕권다툼에 휘말려 죽게된 자신을 보살피고 살려준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이후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라 하여 고려시대 여러 임금이 왕래하면서 왕실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게 됩니다. 1090년(宣宗 7년) 10월에 선종(宣宗)은 진관사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성대하게 봉행하였으며, 1099년(肅宗 4년) 10월에는 숙종(肅宗)이 진관사에 친행하였고, 그 후 1110년(睿宗 5년) 10월에는 예종(睿宗)이 진관사에 순행하는 등 역대 왕들이 참배하고 각종 물품을 보시하는 국찰(國刹)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비오는 토요일 일주문앞에서 인문학20기분들과 교수님들 학교관계자분들이 이른 아침 모였습니다. 극락교를 건너 해탈문을 지나서 홍제루를 통해서 경내로 진입하자 마치 하늘이 열리는 듯한 느낌의 평온함이 우리를 맞아 주었습니다. 고요함 속에 목탁소리가 들리니 내 발자욱 소리조차도 크게 들리는 듯 하네요. 어디든 조용히 앉아 쉬어도 누구하나 무어라고 하는 이 없는 고요한 산사가 자격지심에 타인의 눈치를 보며 노숙을 했었던 제게는 감사함과 자비함으로 다가왔습니다.
한 걸음 한걸음 대웅전에 가까워 질수록 마치 대웅전의 가운데 문이 열리면서 부처님께서 나타나실 것만 같은기대감 마저 들었습니다.
나한전에서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도량이 깊은 곳이라고 하네요. 아픈 곳을 치료해 준다는 약사여래상이 있는 곳도 보이네요. 경내의 한 켠에는 '전통찻집'과 사찰 음식으로 이름난 절답게 '산사음식연구소'도 보입니다.
함월당이라 이름붙은 건물에서는 템플스테이도 이루어 진다고 합니다. 함월당의 식당에서는 템플스테이하시는 분들과 일반이용객들이 함께 사찰음식도 드실 수 있다고 하고, 스님의 좋은 말씀도 듣고 가족과 체험을 할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진관사는 대부분의 전각들이 한국전쟁 때 폭격 및 공비소탕작전으로 소실되고 나한전(羅漢殿), 칠성각(七星閣), 독성전(獨聖殿) 등 3동의 불전(佛殿)만 남았습니다. 그 중 칠성각과 독성전이 2009년도 5월부터 전면적으로 보수작업을 하게 되어 건물해체과정 중 대들보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어 1911년에 칠성각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5월 26일 칠성각 내부해체 과정에서 칠성각의 불단(佛壇)과 기둥 사이에서 한지로 된 큰 봉지가 벽면에 부착되어 있어서 이를 떼어내자 태극기를 보자기처럼 사용하여 싸여져 있는 독립신문 등 20여점의 독립운동 관련 유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발견된 태극기는 1919년 3.1운동 당시 기관이나 단체가 제작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린 것으로 태극기 및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신대한신문 2, 3호가 최초로 발견되는 등 신대한신문 3점, 독립신문 4점, 조선독립신문 5점 등 1919년 6월 6일부터 12월 25일까지 제작된 다수의 사료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료들은 3.1 운동 당시의 생생한 역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입니다.
발굴된 진관사 태극기와 문서를 보관, 은닉했던 장본인으로 여겨지는 백초월 스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부터 임시정부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을 뿐 아니라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을 연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는 1920년 초반, 일제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으며, 고문 후유증으로 반미치광이 될 정도가 되어 출옥하였지만 민족의식을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후에는 동학사 강사(1930년대 초반), 월정사 강사(1935), 봉원사 강사(1936) 등을 역임하였고, 1938년 초부터 다시 진관사 마포 포교당에 다시 머물면서 포교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1939년경에 발생한 이른바 ‘독립만세 낙서 사건’으로 일제에 피체되었습니다. 즉 진관사 마포포교당에 거주하면서 용산 철도국의 작업부로 일하던 박수남이 봉천행 화물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낙서의 배후자, 영향을 준 인물로 지목되어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나왔지만, 또 다른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결국 그는 1944년 6월 청주 교도소에서 옥중 순국하였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으로서 독립운동의 상징인 태극기와 신문들을 일제의 살벌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칠성각 불단 깊은 곳에 숨겨 놓은 후 그것을 숨겼던 주인공이 세상을 떠나고 90여 년이 흐른 뒤에 발견되었습니다.
역사의 한을 품고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오다가 불심으로 발견된 진관사 태극기는 단순히 태극기라는 명칭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역사성, 민족성, 사찰의 애국심, 스님의 구국정신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단 하나뿐인 국가유산으로써 그 가치가 인정되어야 하며, 후대들이 한때의 불행했던 한・일간의 치욕적인 역사를 영원히 기억하고 교훈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자료관의 유물로써 보존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관사 소장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는 2021년 10월 25일에 국가유산-보물로 지정(동록)되었습니다.
진관사는 우리들에게 사찰이 주는 고유의 자비의 평안함과 더불어 시대의 아픔에 대해 생각해보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백초월스님의 숭고한 뜻까지 가슴에 새길 수 있는 의미 깊은 답사지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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