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웹진/제23호

[성프란시스대학 2024년 1학기 심화 강좌 특집] " 독립 전쟁의 영웅 홍범도 이야기", 박한용 성프란시스대학 한국사 교수

by 성프란시스 2024. 7. 12.

                                                                                                                       박한용 (성프란시스대학 한국사 교수)

202463일 심화 강좌 3강은 박한용 교수님의 독립전쟁 영웅 홍범도 이야기로 진행되었습니다.

작년에 정부와 육사는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지청천 장군, 이범석 장군, 김좌진 장군, 이회영 선생 그리고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이전하겠다 하여 독립유공자 단체와 시민들의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더구나 홍범도 장군의 삶과 항일 운동을 공산주의와 연결하는 흐름이 생기면서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는 홍범도 장군의 삶과 그의 항일 운동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고, 사회 일각에서는 홍범도 장군의 삶과 그의 항일 운동에 대한 올바른 평가 작업 논의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박한용 교수님께서는 이렇듯 사회적 논쟁의 주제가 된 홍범도 장군의 삶을 심화 강좌에서 강의하면서 독립운동사에서 장군이 맡았던 역할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박한용 교수님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2021년에 대한민국에 봉환되고, 육사생도들의 사격 훈련 결과 쌓인 탄피로 홍범도 장군을 위시해서 지청천 장군 등 다섯 분의 흉상을 만들어 육사 교정에 모시어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그분들을 추모하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흉상 설치의 유래가 이러한데도 뜬금없이 발생한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문제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위해 홍범도 장군의  삶과 항일운동사를 살펴보자고 하셨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1864년 평안도에서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증조부께서 홍경래 난에 관여되어 가족 전체가 숨어 살게 되었는데,  홍범도 장군이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 가셨고, 9살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셔서 매우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15~19세에 군 생활하다가 탈영하여 제지 공장에서 노동자로 근무하다가 22살되던 해 금강산 신계사에 숨어사는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이옥구/이옥녀를 만나고 그녀와의 사이에 아이를 가져 환속하는 과정에 부인과 헤어지고, 그 이후 포수로 활동하다가 서서히 소규모 의병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기적과 같이  헤어졌던 부인을 다시 만나게 되고, 짧은 시간이지만 2년 동안 가족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1907년 일제의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에 저항하여 차도선 등과 결합하여 70여명의 산포대를 조직하여 일본과 교전하여 여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에 일본은 홍범도 장군의 부인과 아들을 인질로 삼고 홍범도 장군을 회유하나 부인은 저항하다 고문으로 옥사하고, 홍범도 아들은 아버지를 회유하려 했는데, 그러자 아들에게 총을 겨눌 만큼 장군의 항일투쟁 의지는 강고했다고 합니다. 그후 아들 홍양순은 아버지와 항일 운동을 하다가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은 이처럼 자기 부인의 목숨도 지켜 주지 못하고, 자식과 함께 항일 전선에 뛰어 들어야 했던 냉엄한 현실 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을 회유하라는 일본의 폭력적 고문에 굴하지 않고 옥사한 홍범도 장군의 부인이나 아버지와 항일 운동을 하다가 전사한 아들의 이야기는 가족사로서도 비극이지만 이런 비장한 일화를 그 안에 담고 있는 항일운동사 자체가 비극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1908년 이후 함북 일대와 만주 그리고 연해주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쓰며 항일 무장 운동을 전개하다가, 1919년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에 참가하고, 대한독립군단을 창립하였습니다.

이렇듯 항일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무장 투쟁의 역량이 축적된 결과가 1920년 간도 지역에서 전개된 홍범도 장군의 부대가 주축이 된 대한독립군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 장군의 부대가 주축이 된 북로군정서군의 청산리 전투입니다. 이들 전투에서의 대승은 우리 민족 항일운동사의 일획을 그었으며, 이들 전투의 승리가 없었다면  우리 항일 운동사는 세상에 내놓을 만한 업적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찬란한 홍범도 장군의 무장 항일 운동의 발자취입니다.

이후로 우리 무장 독립운동은 당시 국제 정세로 인해 자유시 참변과 같은 슬픈 역사를 겪었습니다. 당시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민족해방과 사회주의 국제 연대를 결합하려는 흐름이 있었는데, 당대 일본과 대치하던 소련은 1937년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게 되는데, 그 행렬 안에 홍범도 장군도 있었습니다. 결국 오늘날 카자흐스탄이라 불리는 곳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홍범도 장군은 194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 투쟁으로 민족해방을 이룩하기 위해 만주로 연해주로 거점을 여기 저기 옮겨 다녀야 했으며, 야만적인 제국주의의 억압에 대항하여 민족 해방을 성취하기 위해 사회주의와 연대해야 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냉전 체제의 틀로 좌냐 우냐 편가름하는 것은 참으로 한심스런 후손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아래 동영상을 통해 박한용 교수님의 열정적인 강의를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