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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23호

[2024년 5월 ~ 6월 성프란시스대학에서 있었던 일] 현장 수업_경복궁 답사

by 성프란시스 2024. 7. 12.

                                                                경복궁 답사기                             

                                                                                                 700121 정동주(인문학과정 20기)

작년 시월 비극적 영화의 주인공인양 급작스럽게 나의 정체성이 홈리스가 된 이후 8개월만에 처음으로 서울역과 숙대입구를 벗어나 도심한복판에 있는 광화문, 경복궁을 인문학수업의 일환인 궁궐답사를 이유로 방문하게 되었다. , 개인에게는 나만의 동굴에 갖혀있다가 다시 세상속으로 걸음을 내 딛는 의미와 함께 공황이라는 증세를 극복해야하는 숙제가 있는 트립이었다. 답사가기 전에 답사지에 대한 사전지식은 그 답사를 의미있게 만드는 전제조건이기에 경복궁에 대해 이미 알고있던 것들과 잊고 있던 지식들도 상기시킬겸 인터넷에서 경복궁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보고 우리 인문학20기들이 어느선까지 알면 좋을지 고심하며 정리를 해보았다.

경복궁(景福宮, Gyeongbokgung Palace)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에 위치한 조선왕조의 법궁(法宮, 정궁)이다. 1395년 창건되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도성과 궁궐의 건축원리를 담은 중국의 '주례 고공기'에 입각하여 건축되었다. 33조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외조, 내조, 연조이다. 내조는 근정전을 중심으로 하는데, 궁 밖에서 근정전까지 바깥부터 광화문, 흥례문(세종대에 홍례문이란 별칭붙음), 근정문이다.

경복궁 전경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 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1592,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이후 법궁의 역할을 창덕궁에 넘겨주었다가 1865(고종 2)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이 시작되었다.

1910년 한일병합 후 일제강점기에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개최와 1926년 조선총독부 건설로 많은 전각들이 철거 혹은 훼손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박물관과 잔디밭을 비롯한 정원이 들어섰다. 이러한 모습은 1945년 해방 후에도 이어졌으며 6.25전쟁을 거치면서 일부 전각이 추가로 소실되었다.

1392년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즉위 3년째인 139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태조 3)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 및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 처음 새 궁궐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남경 이궁(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협소하여,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웠다. 새 궁궐 경복궁은 태조 4(1395)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 경기우도의 인부 5,000,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29일에 1차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해인 1395년 음력10월 태조는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이 지어졌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 높이 201, 둘레 1813(: 6)의 담을 쌓고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을 두었다. 조하를 받는 정전인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을 비롯한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은 편전이며,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에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실록 내용을 통해 창건 당시 경복궁의 기본 배치를 짐작하자면, 경복궁은 남북축 선상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문, 정전, 보평청, 연침의 순서로 남북 직선축을 따라 중심 전각이 나란히 놓이고, 중심 전각 주변에는 행각이 좌우 대칭으로 네모반듯하게 감쌌으리라 추정된다. 그리고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보는 외전은 궁궐 앞쪽에, 내전은 뒤쪽에 배치하는데, 내전의 각 전각과 정전은 천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의 외곽 울타리인 궁성을 건설한 것은 궁궐을 완성한 지 3년 뒤인 태조 7(1398)의 일이었는데, 이 해 1월에 민정을 징발하여 궁성 공사에 들어갔다. 공사는 겨울 동안에 대체적인 궁성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그 해 7월이 경기 좌도와 충청도 군사 3,700명을 동원하여 궁성을 수축하였다. 궁성에는 정문인 남문 외에 동문과 서문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북쪽은 궁성과 문을 갖추지 못하고 목책으로 둘러쳐 있다가 세종대에 와서야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궁궐이 창건되었을 때 실록 기록 말미에 "(뒤에) 문 만쪽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각 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고 나와 있어서 궁성 문 남쪽에 의정부나 육조 등 여러 관청이 좌우로 조성된 것은 궁문이 조성돤 태조 7년 때(1398년)로 추정된다. 

  경복궁은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전각이 더 지어지고 보완되었는데, 태종11(1411)에는 명당수를 파서 이를 홍례문 앞 금천으로 끌어들여 궁궐의 상징성과 풍수적인 형국을 보완하였고, 경회루를 지어 외국 사신과 조정 관원들의 연회 장소로 이용케 하였다. 경복궁이 조선 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갖춘 것은 세종 때였는데, 1426(세종 8) 왕명을 받은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올렸으니 광화문, 홍례문(현재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이 이때 지어진다. 그리고 1429년 사정전과 경회루의 중수를 시작으로 주요  전각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였다. 그 밖에 간의대 등의 관측 시설이 세종 때 완비되었다. 경회루는 1474년 보수되고, 근정전과 광화문에는 청와(靑瓦)가 올라간다. 

 

명종8(1553) 9월에는 강녕전에 큰 불이 나서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을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역대로 내려오던 진귀한 보배와 서적, 왕과 왕비의 고명, 의복, 거마 등이 불타버렸다. 불이 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1554년 봄에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9월에 낙성하였다. 이때 동원한 인력은 부역 2,200, 품팔이꾼 1,500명이었다고 한다. 명종 15년 때 건립한 경복궁을 그린 한양 궁궐도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

 

광화문앞에 모여 박한용교수님께 풍수에 입각한 경복궁의 위치에 대해 경청하고 있는 인문학 20기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법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1968년 광화문 복원을 시작으로 경복궁의 본모습을 되찾기 위한 각계의 관심과 노력이 증대되어,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 계획이 시작되었다. 1995년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2001년 흥례문 권역 복원, 2010년 광화문 목조 복원, 2023년 광화문 월대 복원을 비롯하여 각 권역별 주요 전각들을 오는 2045년까지 복원시킬 계획에 있다고 한다. 내 나이 77세 때이긴하지만 복원을 한다니 제대로 좀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때 다시 방문할 때 내 모습과 마음은 어떨지, 또 나는 경복궁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지 기대가 된다.

한국사 현장 수업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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