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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20호

[인물 인터뷰] 사람과 함께 하며 의미를 찾은 사람, 박경장 교수님

by 성프란시스 2024. 1. 16.

글/ 이현아

인터뷰어/ 이현아 | 박석일

인터뷰이/ 박경장 (성프란시스대학 글쓰기 교수, 한국작가회의 평론가)

 

 

오늘 소개할 분은 2008년부터 지금까지 17년째 성프란시스대학에서 글쓰기 수업을 담당하고 계신 박경장 교수님입니다. 교수님은 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이 긴 시간 동안 성프란시스대학과 함께하신 것일까 궁금한 마음을 담아 교수님을 찾아뵈었습니다.

 

Q.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동안 몇 차례 다른 매체에서 인터뷰에 참여하신 적이 있는데 오늘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교수님의 이야기들을 더욱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래도 이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성프란시스대학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A. 성프란시스대학과는 2008년도 4기 때부터 함께했는데요, 그 당시에 우리 학교를 설립하셨던 임영인 신부님이 1,2,3기 글쓰기 교수로 계셨던 최준영 교수님의 후임으로 선택한 분이 있었어요. 당신 교회에 연이 있는 아주 훌륭하신 분으로 후임을 선택하셨는데 그분이 도저히 본인 사정 때문에 하고 싶어도 참여를 하지 못해서, 자기가 생각하기에 여기에 너무 어울리고 적합한 분이 있다고 저를 강력하게 추천을 했답니다. 그분은 저와 대학원에서 같이 공부하는 동학이었고, 그냥 같이 공부하는 사이를 넘어서 그 시대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동지이기도 했지요. 종교적인 문제, 사회에 대한 문제, 삶에 대한 문제를 아주 깊이 있게 같이 이야기 하고 뜻을 같이 했던 그런 친구였고, 지금도 정말 너무 훌륭하게 홍은동 지역에서 대안 공동체를 꿈꾸며 실천하며 사는 그런 분인데 그분의 추천으로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Q. 교수님을 추천해주신 분이 그 시대의 동지였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 시절 고민하셨던 사회적 문제나 종교적 문제에 어떤 게 있으셨을까요?

 A. 저희는 85년도 86년도에 대학을 졸업했던 세대니까 386에서는 최고 선배 위치였는데 박정희가 죽은 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바로 전두환, 광주로 이어지는 시대를 경험한 거에요. 그런 사회정치적 혼란기 또 과도기에 대학에 들어왔고, 저는 종교가 기독교였는데 아주 보수적인 교단에서 컸어요. 그러다 20대 중반에 종교적인 은사, 멘토를 만나게 됐어요. 그분이 김찬국 목사님이자 교수님이십니다. 연세대학교 교수셨는데 민청학련 사건으로 퇴직당하고 옥고를 치른 분이세요.

 그분이 옥고를 치르고 나오셨을 때 미국으로 유학 간 자신의 제자의 교회에 설교 목사로 초대를 받고 제가 살던 지역에 오셨어요. 그리고 제가 그 목사님 밑에서 청년 활동을 하게 됐죠. 그때 제 보수 신앙이 한번 변화하게 됐는데 김찬국 선생님은 강단의 민주화를 시초로 보여주셔서 저는 교회에서도 이렇게 민주시민 의식을 학습할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그 완고한 장로교 전통에서 여자들도 강단에 올라와서 대표 기도를 하게 하셨고, 심지어 교인이 아니더라도 특별 절기에는 일요일 설교단 위에 우리나라의 재야 인사들을 초청하셨어요. 3.1절 예배 때는 함석헌 선생님을 초대하셨고, 제가 청년 활동을 할 때는 이철 의원, 전교조가 막 시작될 때 전교조위원장 이런 분들을 초청하셔서 우리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해주셨어요. 그때 김찬국 선생님이 저를 굉장히 이뻐하셨거든요. 그래서 함석헌 선생님을 3.1절 특별예배 설교단에 세우셨을 때 제가 기미독립선언문 전문을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들은 항상 장례 집회를 하셔야 하는데 김찬국 선생님은 저더러 박군은 목소리 자체가 기본적으로 슬프고 비가 스타일이라고 교인이든 당시 활동하셨던 재야인사이든 누가 돌아가셔서 그 장례 집전을 하실 때 저를 항상 데리고 다니시며 조가를 부르게 하셨어요.

 그 후에 좋은 시절이 와서 김찬국 선생님은 결국 연세대로 복권되셨고 교회를 떠나시고 그 교회에는 유학을 떠났던 제자 목사님이 돌아왔어요. 이미 그 때는 90년대로 접어들어서 제가 결혼도 하고 지역도 옮기고 하다가 90년대 중반에 향린교회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30대 후반부터 50대 초반까지 향린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데 제가 김찬국 선생님을 만난 것이 제 신앙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였다면 이건 그것보다 더 강한 만남이었어요. 제가 그때 안병무 선생님의 민중신학을 만나게 됐거든요. 안병무 선생님 아카이브의 책들을 쭉 읽으면서 제 신앙에 엄청나게 충격이 왔죠. 향린교회가 7,80년도에 종교계 쪽에서 적어도 기독교 쪽에서는 민중들을 대변하는 대변인 교회의 역할을 했는데 제가 있을 때에도 사회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활동하고 참여했고, 저는 사회부장 선교부장을 오래 했었어요.

 그때 민중신학을 통해 제 신앙의 전환이 온 것을 설명하려면 또 기독교 교리를 얘기해야 하는데, 그 이전의 교리는 독일의 신학자 불트만이 강조한 케리그마(*편집자주: '선포'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교리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경 전체가 우리가 알다시피 일목요연한 기승전결이 있어서 인간이 타락을 했고 신이 결국 자기 아들 예수를 희생해서 구원을 했다는 거죠. 안병무 선생님이 그것을 깨부순 것이 바로 민중신학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라는 신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역사에 수난이 먼저 있었다. 수난 당한 자들을 신약성서가 써진 그리스어로는 오클로스라고 하는데 우리 식으로 하면 민중이지요. 수난당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있고 거기서 우리 수난자들과 함께 고생하고 그들을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고민하며 그 역사에 참여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도 그 수난사에 참여하면서 자기가 메시아라는 구원의 메시지를 스스로 깨닫는 사건과의 만남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게 우리나라의 민중신학으로 시작이 됐습니다.

 연세대 서남동 선생님, 한신대 안병무 선생님, 또 문익환 목사님. 그분들이 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다가 갑자기 전태일 분신 사건을 만나고 역사적 현장으로 나오는 겁니다. 제 신앙관은 이런 민중신학을 만나고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고 제 신앙관의 가장 중심에 절대 구원은 나에게로 오지 않는다, 구원은 너로부터 오는 것이다, 예수가 ‘너희들’이라는 수난자를 만나서 자기의 메시아성을 깨달았듯 내 구원도 그 이전에 복음주의권처럼 예수 믿고 믿음으로 구원, 이런 것이 아니고 어떤 수난 당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내 삶의 의미가 발견되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역사적 예수를 만난 것이죠.

저를 성프란시스대학에 소개해준 그 친구와 이런 이야기들을 했었어요.

 

Q. 이 이야기를 들으니 교수님께서 성프란시스대학에 오랜 시간 계신 것이 설명이 되는 것 같아요.

A. 제가 동지였던 친구의 소개받아서 왔다지만 우연하게도 우리 학교에 오기 2년 전에 이런 일도 있었어요. 2006년도에 용산에서 거리 선생님 두 분이 주무시다가 차단막에 압사당해서 돌아가신 사건이 있었어요. 아주 큰 사건이었는데 향린교회는 이런 쪽으로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용산 쪽에서 노숙인들의 복지를 위해서 일하는 실무자 중심 역할을 하시는 분이 '압사 당한 두 분의 노제가 있으니 와서 대금이라도 한 자루 불러주시오'해서 제가 용산 노숙인 노제에서 대금을 분 적이 있어요. 묘한 인연이지만 그로부터 딱 2년 후에 제가 여기 와서 선생님들과 직접 만나게 된 것이죠.

Q. 인터뷰 전 식사 시간에 유년시절을 금호도라는 작은 섬에서 보냈다고 말씀해주셨는데 그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A. 저희 시골에 전기가 들어온 게 중학교 1,2학년 때였어요. 그 이전까지는 전기가 없었고 풍경을 생각해보면 아프리카나 적도 지역의 조그만 섬의 아이들, 그들과 거의 똑같았어요. 맨날 낚시하고 배 타고 놀고. 깨벗고 바닷가에서 놀고.

 

Q. 깨벗는다는 것 발가벗었다는 뜻인가요?

A. 그렇지요. 일곱여덟 살이니까 여름에 거긴 다 깨벗어요. 아마 제가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 이 전까지는 금호도에 발동기선이 없었어요. 배들이 다 풍력선이었습니다. 황포돛배. 저는 지금도 영원히 잊지 못하는 게 저녁 때 되면 조그만 동산에 제가 자주 올라다니곤 했는데 동산에 올라가 있으면 노을이 집니다. 바닷가 살아보면 알겠지만 해가 바로 눈앞에서 떨어져요. 왜냐면 눈앞에 보이는 게 수평선이니까. 그럼 바다가 붉게 물이 드는데, 저녁이 되면 고깃배들이 하나 둘씩 오목하게 된 항구, 조그만 포구로 들어옵니다. 황포돛배들이 바람을 가르면서 양쪽에서 들어오는데 언덕에서 해가 지면서 붉은 태양빛을 머금은 그곳에 그 붉은 황포돛배 두 대가 바람을 가로지르면서 마치 경기하듯 포구로 들어가는 모습을 제가 언덕에서 보고 있던 기억이 지금도 너무 선명해요. 그 모습이 아마 저를 압도했고 그것이 평생 저의 뇌리 속에 남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문학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걸 할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이미지가 저를 평생 붙잡았던 것 같습니다.

 

Q. 그게 대략 몇 살 쯤이셨을까요?

A.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학교 다니기 이전이니 다섯 살에서 일곱 살 사이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Q. 방금 말씀하신 풍경들을 친구들과 함께 보신 건가요?

A. 지금 말씀드린 광경들은 저 혼자 봤던 것 같아요. 우리 시절에 친구들은 주로 어떤 친구들이냐면, 거기가 박씨, 윤씨. 최씨 이렇게 세 성씨 집성촌이었는데 우리 박씨 형제들은 다 사촌 팔촌들이죠. 그러면 거기도 골목대장이 있습니다. 같은 또래 중에서 누가 대장이냐? 자연스럽게 수영을 가장 잘하는 친구가 섬에서는 무조건 대장입니다.

 혹시 영화 <그랑블루>를 보셨다면 제 어린 시절과 똑같은 느낌인데 거기는 누가 깊이 다이빙하느냐를 경주해서 나중에 세계 신기록까지 내는 이야기에요. 우리 어렸을 때는 대장을 어떻게 뽑느냐면, 우리 섬 금호도가 있으면 본토 섬인 진도까지 나룻배가 있었어요. ’금호도의 다리‘라는 뜻으로 배 이름이 금다리호인데 이게 이제 동네 나룻뱁니다. 하루에 아침 저녁 딱 두 번 왔다 갔다 하는데 이 배에는 아침 9시면 탈 사람이 다 모여요. 그러면 시골 애들이 한 10명씩 배를 여기저기 붙잡습니다. 깨벗은 애들이. 배 타는 사람들은 다 자기 어머니, 삼촌, 이모, 할아버지, 할머니에요. 그러면 다 같이 웃으면서 배 타고 갑니다. 배 타고 30-40분 가야 뭍, 진도 육지에 닿는데 가기 전에 50미터, 100미터, 150미터 해가지고 자기 깜냥, 그러니까 내가 수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깜냥을 봐서 한 사람씩 배를 놓고 돌아가는 거에요. 그런데 어떤 놈이 하루는 자기 깜냥이 안되는데 내가 오늘은 이겨보겠다고 조금 더 가. 그럼 거기 배에 타고 있던 할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야, 빨리 가야. 너 수영쳐서 가것냐? 뭐 허는 짓이대?” 하면서 이렇게 미는 놈은 가는 거고 그렇게 그날 맨 마지막까지 남아서 다시 돌아오는 애가 대장인 겁니다.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죠.

 

Q. 대장을 한번 해보셨나요?

A. 저는 마지막까지 수영으로 대장은 못했구요. 제 사촌이 수영을 제일 잘했어요. 저는 개구졌던 것 같아요. 남의 집 부뚜막에서 고구마란 고구마는 다 먹고 애들하고도 많이 싸웠다고 하더라고요. 또 우리 집에 뗏마라고 하는, 기껏해야 4-5미터 되는 큰 배에 닿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배가 있었는데 마을 애들과 같이 그 뗏마로 노 지어가지고 무인도에 가서 놀다 오고 바닷가 아무 데나 가서 닻 내려놓고 수영하고. 그땐 밑에 깊이가 몇 십미터 되는지 감각도 없는 거에요. 그런 데서 마구 놀고 그랬어요. 그래서 서울 올라와서도 1년 정도는 학교 생활에 적응을 잘 못했던 것 같아요.

 

Q. 교수님께서는 서울에 오고 싶어 하셨나요?

A. 당시에 저희 부모님은 서울에 계셨고 제가 오남매 중 장손이어서 저만 금호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어느 날 우리 어머니가 이제 서울에서 학교를 보내겠다고 저를 데리러 왔어요. 난 누가 어머닌지 모르니까 어머니 보고 ’고모, 고모‘ 그랬는데 어머니라고 그러니까 치마를 꼭 붙들고 놓칠까봐 한 번을 안 놓고 있었대요. 그리고 그 다음 날 어머니가 서울에 간다고 했는데 새벽이 되니까 제가 없어진 거에요. 마을을 다 찾아보니까 제가 나룻배에 혼자 타고 있더랍니다. 자기 떼어 놓고 갈까봐. 저는 호랑이 할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주변에 어머니 밑에서 크는 애들을 보고 얼마나 서러웠겠어요.

 

Q. , 그러니까 서울에 오고 싶으셨다기보다 어머니랑 같이 가고 싶으셨던 거구나.

A. 그랬나봅니다.

 

Q. 지금도 금호도에 가곤 하시나요?

A. 이제 금호도에는 저희 친척들은 거의 돌아가시고 사촌 한 사람만 있고요. 금호도에서 바로 마주 보는 곳이 해동이라는 곳인데 가계리라는 곳에는 사촌들하고 작은 아버지가 계셔서 2년에 한 번은 갑니다. 그리고 몇 기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성프란시스대학 졸업 여행을 저희 고향으로 한번 간 적이 있어요. 저희 사촌 형수가 음식점도 하는데 거기서 식사도 한 끼하고 제 고향을 선생님들에게 구경시켜 드린 적이 있습니다.

 

Q. 교수님께서는 어린 시절에도 책을 좋아하셨나요? 언제부터 문학을 좋아하신 걸까요?

A. 어렸을 때는 동화 한번 읽어본 적이 없고요 제가 대학교 때 군대를 좀 일찍 갔어요. 1학년 1학기만 마치고 일찍 갔다 온 다음에 이청준이란 작가를 만나게 됐어요. 이청준 소설은 소위 말하면 남도의 이야기들이 다 있는 것이라서 제가 너무 깊게 빠지게 되었고 옛날 그 황포돛배 이미지를 다시 떠올리게 됐고요. 그리고 섬은 수많은 이야기가 떠도는 곳입니다. 어느 섬이든지. 그 이야기들이 머리에 맴돌았고. 그리고 대학교 3학년 때 훌륭한 은사를 만났어요. 그분한테 문학 평론을 한다는 게 문학을 해석한다는 게 어떤 건지 배우게 되면서 어차피 문학을 하되 영어과를 했으니까 영문학을 하게 됐죠.

 

Q2. 교수님께서는 키도 크시고, 수영도 잘 하시고, 축구도 잘 하시고, 노래도 잘 하시고, 대금도 잘 하시고, 못 하시는 게 없거든요. 재능이랄까 이런 예체능의 끼의 바탕이 된 교수님만의 독특한 점이 있습니까?

A. 나중에 혹시라도 진도에 가서 외지인이라고 소개를 하고 택시를 타면, 택시 운전사가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 진도에 오면 세 가지 자랑하지 말라고 그런 말들을 주로 합니다. 알다시피 진도는 남도 소리가 태어난 곳이잖아요. 진도 오면 소리 잘 한다고 자랑하지 말라고 해요. 그리고 우리나라 남종화의 본산인 운림산방이 있는 곳이 진도이고 그래서 그림 잘 그린다고 하지 말라고 하고. 또 하나는 그쪽 섬들이 다 유배 섬들이에요. 누가 진도에 유배를 오면 지역에서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섬 있는 데까지 다 공부 배우러 오고 그래서 서예 글씨 잘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글씨 잘 쓴다고 하지 마라. 이런 말이 있어요.

저희 어렸을 때도 저희 부모님 형제들이 모이기만 하면 막걸리 한잔에다가 홍어 무침 들어가면 다들 육자배기에요. 돌아가면서. 어렸을 때부터 항상 그 육자배기를 듣고 자라서 저희 형제들은 육자배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다들 그렇게 노래 한 자루씩들 합니다. 끼들이 좀 있고. 또 제가 그런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저희 아버님이 국제적인 마도로스셨어요. 60년대 70년대 당시엔 누가 외국에 한번 가보는 것도 힘든 때였는데 아버님은 1년 중에 한 달 정도만 저희랑 계셨고, 집으로 오시면 아버님 친구분들 선장분들 다 오셔서 멧부리 담뱃대에다가 파이프 담배를 하시고 양주를 드시는데, 저는 거기서 웃통 벗고 기타치고 기쁨조로 노래하곤 했어요.

그리고 어렸을 때 시골 기억이, 이 시골이 희한합니다. 그 당시에는 시골에 누나 형들도 있었거든요. 누나 형들은 왜 낮에 시골 사투리로 갱변에 안 나오고 왜 안 놀고 그래? 했었는데 우리는 어두워지면 다 집에 들어가는데 누나 형들은 어두워지면 나와요. 갱변가에 나가보면 소곤소곤 소리가 들리는데 시골에서 수리가 필요한 배는 육지에 올려 놓습니다. 그런데 꼭 누나 형들이 그 배 뒤에서 소곤소곤 저녁 때만 되면 나와. 그리고 어디선가 하모니카 소리가 이렇게 배 뒤에서 들려요. 그 소리가 너무 듣기 좋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돼지 저금통을 따서 하모니카 하나를 사고 그때부터 평생 독학을 했어요. 제가 저희 집사람이랑 첫 데이트를 한 게 동구릉이라는 곳인데 그곳에 첫 데이트를 갔을 때 비가 왔는데 어떤 전각 밑 대들보에 둘이 앉아서 그 사람은 우산을 받쳐 들고 제가 하모니카를 불어줬어요. 그렇게 둘이 첫 사랑으로 만나서 8년을 연애하고 결혼해서 그 좋은 이십대 대학 시절 미팅 한 번 못해본 거죠.

  

Q2. 성프란시스대학의 소모임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어져 오고 있는 두드림(*편집자 주: 성프란시스 대학 내 풍물 동아리)이 창단될 때 교수님이 주도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떤 계기가 있으셨습니까?

A. 제가 스물 한 살 때 처음 설악산에 가본 이후로 20, 30대는 공부하는 것 빼면 거의 산에 미쳐서 설악산만 공격적으로 다녔던 것 같아요. 40대 중반부터는 지리산을 다니고, 50대 초반 쯤에는 전국의 어느 산이든지 아무 산이나 다 좋아서 다녔어요. 방학만 되면 집사람 허락 하에 10일 씩 가출을 해서 일종의 글 길을 따라 갑니다. 딱 메모지 하나 들고 간단한 배낭으로 산에 갈 준비를 하고 코펠, 버너, 책 한 두 권, 그리고 낚싯대 하나를 챙깁니다. 산에 가는데 왜 낚싯대를 가져가냐고 하는데 제가 전국 산을 다니면서 제 나름대로 여행 노하우를 짜는 건데 모든 물은 산에서 만들어지잖아요. 혹시나 산에서 길을 잃으면 물길만 따라오면 됩니다. 그렇게 내려가면 반드시 마을이 있습니다. 물을 같이 쓰는 곳이 마을이 세워지는 곳이거든요. 그러니까 꼭 산에는 저수지가 적어도 두 세 개는 있어요. 저는 꼭 저수지 있는 코스로 내려가서 혼자 일인용 텐트 치고 고기를 낚아서 내가 먹을 만큼만 해서 끼니를 때워요. 그때 느끼는 별별 경험들이 많은데 그때의 글은 정말 누가 받아적으라고 할 정도로 온몸에서 문장이 쏟아지는 거에요. 저희 집사람도 그런 걸 아니까 방학 때만 되면 무조건 갔다 오라고 해서 노트 한 권을 채우고 오곤 하는데 오감이 막 살아나는 거에요. 그런 경험은 가장 나다운 세계였거든요. 그리고 그 기원은 어렸을 때 시골에서의 강력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2008년에 학교에 들어와서 선생님들을 보니까 오랜 외로운 생활에서 가장 먼저 공통적으로 몸들이 망가져 있어요. 제가 보기에 몸들이 망가져 있다는 건 오감이 망가졌다는 것이고 오감이 망가졌다는 건 모든 것에 무덤덤해졌다는 거거든요. 특히 뭘 봐도 감동하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글쓰기에서도 가장 강조하는 것이 오감 글쓰기에요. 예를 들면 이번 주에 먹은 음식에 대해서, 어떤 맛인가 이야기하기, 이런 감각 글쓰기에 가장 신경을 씁니다.

어떤 철학자가 ’감동은 진리에 이르는 최고의 지름길‘이라고 말한 걸 잊지 못하는데 저는 제가 어렸을 때 산과 강을 쏘다니면서 경험한 살아있는 오감, 감동할 수 있는 것, 그런 것들을 선생님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제가 성프란시스대학 4기 때는 향린교회에서 국악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우리 선생님들이 신명나는 걸 좀 했으면 좋겠다 해서 처음에는 동아리 형태로 한 건 아니고 졸업식 때 연주를 한번 보여주자고 해서 제가 다니는 교회에 풍물 후배 선생을 초대해서 졸업 연주를 준비했던 겁니다. 그랬더니 그중에 몇몇 선생님들 몇몇이 너무 좋다, 계속 하자 하셔서 그게 두드림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겁니다.

 

Q2. 두드림 이외에는 최근에 18기 최경식 선생님의 연극이나 김순철 선생님 집들이, 혹은 17기에서는 송년회로 각 기수들이 모일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 성프란시스대학 선생님들이 10월 쯤이 되면 '이제 졸업하고 뭐 하지', '여기는 유급도 없나' 이런 아쉬움을 많이 느끼거든요. 그러다 보면 졸업하고 가끔 선생님들이 교수님들을 어떤 인연이나 기회로 만났을 때 한참 떨어져 살았던 엄마아빠를 만나는 듯한 느낌이 있더라고요. 교수님들 바쁘시겠지만 가끔 아주 가끔 어떤 인연이 되면 기수 별로 교수님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요?

A. 박석일 선생님께서 너무 이야기를 잘 꺼내주셨는데 최근에 안성찬 교수님과 함께 최경식 선생님 연극을 보러 가고, 또 김순철 선생님 집들이에 갔을 때 안 교수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너무 뜨거운 만남, 재회였어요. 최경식 선생님은 18기 졸업생인데 생활 연극을 해서 무대에 서셨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자기 동기들만 초청하신 게 아니라 저희도 초대해주셔서 저와 안 교수님이 기꺼이 가서 연극을 보고 뒤풀이도 가고 그랬죠. 그리고 같은 18기인 김순철 선생님의 경우엔 행복주택 아파트에 들어가게 되셔서 이 분이 동기들과 집들이도 하셨고 저희는 시간이 맞지 않아서 안 교수님과 제가 따로 둘만 갔는데 집이 그림 같았어요. 집에 갔더니 원룸이지만 인테리어를 했는데 벽이 온통 전부 다 성프란시스대학과 관련된 거에요. 당신이 성프란시스대학에 들어오면서부터 그렸던 그림들, 사진 찍은 것들. 그날 집들이 하고 그 근처에서 선생님과 산책했던 것도 너무 좋았고. 저는 이런 기회가 어느 한 쪽의 노력만 가지고는 안 될 것 같고 아까 말씀하셨듯이 기수가 어떤 연유로 모임을 하실 때 그 자리에 저희를 초대해주시면 교수님들도 너무 좋죠. 그거야말로 우리 성프란시스대학이 향후 20년간 나아갈 길에서 중심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관계, 결국 관계인데 저에게는 정말 풍경 같은 아름다운 이미지로 남아있어요.

 

Q.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교수님께서는 정말 살아있는 인생을 살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진짜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요?

A. 제가 환갑을 넘기면서 제 성격에 맞지 않게 주변 사람들한테 막 얘기하고 다녔어요. 이제 내 전성기가 시작되는 것 같다고. 저는 우리 선생님들하고 지내온 저의 40대 후반, 50대가 내 인생에서 어떻게 보면 가장 여물었던 시기인데 전 정말 개인적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해요. 교회는 오래 전에 졸업을 했는데 선생님들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떤 의미냐면, 하이데거란 철학자가 인간은 도대체 자신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라고 했는데 내가 만약에 우리 선생님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 삶이 얼마나 의미가 있었을까. 혹은 다른 사람들이 지금처럼 당신 참 삶에 의미가 있다라고 나한테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을까 싶어요. 전 정말 예수가 오클로스라는 민중을 만나서 구원을 받았듯이 선생님들을 만나서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된 것이죠. 인문학자로서도 제가 학교를 그만두게 되는 시점에 현장 평론가로 등단을 하면서 서울역 선생님들 하고 연을 맺게 된 건데 그때 정말 자신 있게 20년 동안 있었던 강단을 미련 없이 내려올 수 있었어요. 환갑을 지나면서 제 나름대로 인생의 의미 이런 것들이 더 확신이 가고 선생님들과 함께 한 16년 동안은 이것보다 더 행복했던 시절은 없다라고 생각해요.

 짧게 하나 예를 들면 저희 아버님이 작고하신 지 6,7년이 됐는데 저희 여름 수련회 가기 전날쯤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수련회 전 날 빈소에 우리 선생님들이 오신 거에요. 제가 얼마나 감격을 했는지. 선생님들을 우리 가족들에게 소개를 했더니 우리 막내 여동생이 있는데 “오빠, 여태까지 오빠가 문상객 받는데 그렇게 반가워하고 밝은 모습으로 문상객 받는 건 처음 봤다”고 하더라고요. 선생님들은 제 삶에 의미와 행복을 주셨어요. 제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이제야 내 전성기가 시작됐다. 진짜로 그렇게 느낍니다.

 

교수님은 누구보다 자연에서 거대한 감동을 찾으시고 그만큼의 감동을 사람들에게서 특히 사람의 이야기에서 발견하는 분이셨습니다. 주어진 삶을 부지런히 관찰하고 고민하고 투쟁하다 보면 나도 교수님처럼 감동을 가득 느끼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기대하게 되었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박경장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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