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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6호

[길벗광장] 다시 도반들과 함께 길에 오르며

by vie 2021. 5. 1.

안성찬 (성프란시스대학 철학 교수)

 

성프란시스대학에서 첫 강의를 했던 해가 2007년이니 이곳과 인연을 맺은 지도 어언 14년이 되었다. 10년간 맡았던 문학 강의를 내려놓은 후 지난 몇 년 동안은 심화과정 강의만 해오다가, 올해 정규과정 철학 강의를 맡아 선생님들의 학교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 다시 우리 선생님들의 길벗이 되어 인문정신(Humanitas)이라는 깃발을 앞세우고 교가 가사의 한 구절처럼 손에 손을 잡고함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잠시 지난 세월 걸어온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장정에 대한 각오를 마음에 다져보고자 한다.

 

2007년 초 임영인 신부는 내게 강의를 맡아달라고 요청하면서 성프란시스대학의 설립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사회에서 빈곤계층이 빈곤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내가 15년 이상 빈곤계층을 위한 사역을 해오면서 내리게 된 결론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한 채로 살아갈 수만은 없지 않은가! 비록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자신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길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소극적인 체념이 아니라 적극적인 태도로 자신들을 억누르고 있는 현실에 저항하여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꿈을 꾸며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인문학이 사람들을 이 길로 인도하리라는 생각에서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인 노숙인들에게 인문학을 강의해 보자는 뜻을 가지고 성프란시스대학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임영인 신부는 이러한 취지가 성공적인 결실을 맺은 사례가 있다고 하면서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을 내게 건네주었다. 그 이래로 이 책은 내가 성프란시스대학에서 강의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다시 강의를 맡게 된 지금까지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다. <희망의 인문학>에는 얼 쇼리스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 클레멘트 코스를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지표로 삼았던 정치철학과 교육철학이 명료하게 제시되어있다. 그의 정치철학은 빈곤계층을 폭력 속에 방치하거나 심지어 폭력으로 내모는 무력(force)과 성찰적 사고에 입각한 합법적이고 정당한 힘(power)을 구분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의 희망의 인문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성찰적 사고의 힘을 일깨워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질서가 세워놓은 폭력의 장벽을 허물어뜨리려 하는 불온하고 위험한 사상이 되고자 한다. 그의 교육철학은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을 통해 성찰적 사고 능력을 계발하여 기존 질서 내에서 작동하는 무력과 폭력을 통찰하고 이에 저항하는 힘을 기르는 것을 지향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역에 평생 몸 바쳐온 임영인 신부와 얼 쇼리스의 현장경험과 사상이 서로 만나 생겨난 성프란시스대학은 설립 이후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로 불리며 소외계층을 위한 인문강좌가 우리 사회에 자리 잡고 확장되는 데 기여해 왔다. 지금의 시점에서 돌아볼 때 흥미로운 것은 얼 쇼리스가 미국의 클레멘트 코스의 사례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 한국의 성프란시스대학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거나 한국의 상황에 맞춰 유사하게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십수년 전 얼 쇼리스의 글을 처음 읽으면서 강의를 맡은 입장에서 특히 클레멘트 코스 교수들과 관련된 내용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초빙한 교수들이 처음에는 1년만 가르치고 그만둘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교수진의 지속률이 놀라울 정도였다고 보고했다. 그 이유 또한 단순하면서도 놀라웠는데 거의 모든 교수들이 자신들이 가르친 만큼 학생들로부터 똑같이 배우는 경험을 하기 때문에 가르치는 일을 지속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의 성프란시스 대학 교수진의 지속률은 10년을 훨씬 넘기고 있으며, 역사를 강의하는 박한용 교수는 15년이 넘게 이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우리 교수진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면 모두가 클레멘트 코스의 교수진과 같은 대답을 하리라고 믿는다. 대학에서 정년을 코앞에 둔 나이에 왜 이곳에서 다시 강의를 시작했냐고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면 나 또한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얼 쇼리스는 클레멘트 코스를 수료한 수강생들에게서 일종의 후광 같은 것을 볼 수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을 멀리서도 즉시 알아볼 수 있었다는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성프란시스대학 수강생들의 졸업식에 참석한 학내외 사람들도 이와 유사한 체험을 한다. 강의에 처음 참석했을 때 조심스럽고 불안한 눈빛으로 사람을 경계하던 우리 선생님들이 학기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벽을 허물고 말문을 열기 시작하고, 학기말이 되면 점차로 자신의 삶에 대해 그리고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나름으로 분명한 생각을 표현한다. 그리고 졸업 이후 생기있는 눈빛과 당당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선생님들을 만나는 일이야말로 성프란시스대학에서 고락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에게 가장 보람 있는 체험이다.

 

그러나 워낙 열악한 형편 속에 있는 만큼 좌절의 늪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선생님들도 물론 있다. 지병으로 인해 사회에서 내몰려 결국 노숙에 이르게 되었거나 노숙 생활을 통해 지병을 얻게 된 분들이 특히 그러한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완전한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폭력적 환경과 고독하게 맞서 싸우는 이분들의 분투는 눈물겨울 정도다. 15년이 넘는 동안 수많은 수강생들을 배출한 결과 지병을 앓고 있던 졸업생 중에서 유명을 달리하는 분들이 매년 생겨난다. 최근에도 졸업생 중 한분의 부고를 전해 들었다. 이런 경우 드물게 가족들이 장례를 맡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다시서기센터와 성프란시스대학 사람들이 함께 이분들의 장례를 치른다. 성프란시스대학에서 있었던 첫 장례에서 졸업생 중 한 분이 내게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노숙 생활을 하면서 가장 두려운 게 뭔지 아십니까? 내 주검이 그저 기관과 관청에 의해 처리되고 내 삶과 죽음 전체가 아무도 애도해주는 사람 없이 그저 잊혀지고 사라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프란시스대학에서 졸업생 장례를 치러주는 것을 보니 내가 죽어도 이제 나를 애도해줄 사람이 있고 내 삶을 기억해줄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커다란 위안과 용기를 갖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깊은 울림으로 내 마음에 다가왔던 이 경험을 계기로 나는 성프란시스대학에서 강의하는 일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때 떠올랐던 단어가 도반이었다. 불교에 귀의한 수도승들이 깨달음을 향한 길을 함께 선택한 동료 수도승들을 일컬어 도반이라고 한다. 우리 성프란시스대학의 교수진과 수강생들은 인문학을 인연으로 서로 만나 배움을 주고받으며 함께 인생길을 걸어가는 도반, 순수한 우리말로는 길벗들이 아닌가 한다. 어떤 자리에서 이 생각을 이야기하자 많은 분들이 공감을 표명했고, 이후 이 웹진의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올해 성프란시스대학 입학식과 첫 강의에서 17기 선생님들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분들이 내 새 도반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다시 도반들을 얻어 길에 올랐으니 손에 손을 잡고힘차게 걸음을 옮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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