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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6호

[인물 인터뷰] 나는 살아있는 손종식입니다

by vie 2021. 4. 25.

글/ 강민수
인터뷰어/ 강민수, 김연아
인터뷰이/ 손종식 (16기 졸업동문)


지난 2020년은 코로나19로 유난히 힘든 한 해였다. 안전한 집이 없고, 의지할 가족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손종식님(61세)도 그런 사람이었다. 누구보다도 그런 사람이었다. 36년 전에 사망신고 된 그에겐 자기 자신마저 없었으니까. 내가 나임을 증명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해내기 위해, 작년 3월, 성프란시스대학(거리노숙‧쪽방‧고시원 주민 등 주거취약계층을 위한 시민대학)에 지원했다. 서울역에 온 지 15년만에 세운 그 결심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1년이 지난 2021년 2월 15일, 그는 법원으로부터 ‘사망사유 말소’ 판결을 받았다. 3월 10일엔 동주민센터에서 지문을 등록하고 임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다. 그다음날인 3월 11일, 성프란시스대학 16기로 졸업식을 마쳤다. 

3월 17일, 18일 이틀에 걸쳐 손종식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왼쪽부터 손종식님, 필자, 김연아 자원활동가.

 

   안 되면 또 다시 일어나고, 안 되면 또 다시 일어나고, 근데 그게 진짜 이루어진 거예요. 오뚜기라는 그게, 맨 처음에 해놓은 그 별명이 드디어 이뤄져 버린 거예요.”

 

‘오뚜기’는 손종식님이 2020년 5월(원래는 3월 입학인데 코로나로 2개월 연기됐다) 성프란시스대학 입학 오리엔테이션에서 지은 자신의 별명이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사망신고된 자기 자신을 살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성프란시스대학에 입학했다. 이미 혼자서 수차례 시도를 했지만, 복잡한 절차와 길어지는 기간 앞에서 고비를 넘지 못했다. 이번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성프란시스대학에 입학해보라는 주변의 권유는 3년 전부터 있었다.

 

    “다시서기센터에 있으면서 입학해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13기인가 졸업한 그 사람이 인문학 한번 하라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13기, 그 사람이 13기일 거예요. 제가 그때 신분증도 없고 어떻게 그걸 하느냐 했더니 얘기만 하면 된다고 한번 해보라고 그러더라고요. 하면은 신분증 만드는 데도 아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때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말을 안 들었어요. (왜요?) 설마 그렇게 될까. (아, 의심하셨구나.) 예. 의심했어요.”

 

주민등록번호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이 많다. 아니, 되는 일이 없다. 다 포기하고 살았다. 건강보험, 통장개설, 자격증 취득, 근로계약서 작성, 기초생활수급 신청. 이런 건 둘째치고 남들 다 만드는 핸드폰도 가져본 일이 없다.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을 못 했다. 가장 마음이 아픈 건 지금껏 한 번도 투표를 해보지 못한 일이다. 누구나 ‘하찮게’ 생각하는 기본적인 권리조차 가져보지 못한 손종식님이 ‘인문학 대학’ 입학을 꿈꾸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그랬던 그가 성프란시스대학 입학을 결심한 계기가 있었다.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인문학 하는 사람은 아닌데, 나 같은 경우인 한 사람이 1년 좀 넘게 걸려서 [주민등록증을] 만들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 말 듣고 아, 한번 해보자 그래가지고 하게 됐어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던 누군가가 ‘해냈다’는 사실이 그에게 와 용기가 됐다. 손종식님은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또 다른 누군가가 용기를 냈으면 하고 바란다. 그게 부담스러울 수 있을 인터뷰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다. 그의 곁에는 아직 속사정을 모르지만, 겁이 나서 망설이고 있는 친구가 있다.

 

    “내가 [그 친구에게] 다 얘기를 했죠. 나는 인문학 마명철 국장님이 도와줘서 지금 대한민국 사람이다, 얘기를 해줬어요. 겁이 난대요, 자기는. 친구 말로는 그런 걸 기다리고 하는 게 겁이 난대요.”

인터뷰 글이 나오면 그 친구에게 제일 먼저 전해주고 싶다.

 

    “나도 이렇게 해서 도움받았으니까 나처럼 비슷한 친구들도 그런 기회를 줘야 될 거 아니에요. (...) 인문학 하면은 네가 생각하는 거하고 영 반대의 세상이 있다고 얘기를 해줬어요. 네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 있다고. 우연히 그런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된다, 내가 얘기를 했거든요.”

성프란시스대학을 통해 그가 경험한 세상이 궁금했다.

 

    “옛날 학창시절 생각도 나고요. 뭐라 그럴까, 쉽게 말하면 술, 담배에 찌든 세계가 아니고 이런 세계도 있구나라는 걸 느끼게 됐어요. 저 같은 경우는. 술, 담배에 찌들어가지고 포기하고 살았는데[15년 전에 결핵을 앓은 이후로 술은 거의 마시지 않는다], 이거 하면서 옛날 생각 같은 것도 많이 났구요. 견문이 넓혀진다 그럴까요? 세상 생각하는 게 달라지더라구요. (...) 지칠 때 사막에서 물 얻어먹는 그런 느낌? 그런 것 같아요.”

성프란시스대학 글쓰기 수업을 듣는 손종식님

 

처음엔 그의 말이 얼른 와닿지 않았다. 서서히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알게 됐다. 손종식님이 말하는 ‘옛날 학창시절’은 중학교 시절이었다. 전라남도 구례가 고향인 손종식님은 중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일을 하기 위해 서울로 떠났다. 아버지는 일용직으로 일하셨고 4남매를 키우기엔 가정형편이 벅찼다. 장남이었던 손종식님은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7살의 어린 나이에, 그는 ‘중국집 배달 보이’가 됐다.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주말도 없이 일했다. 한 달에 한 번 쉴 수 있었다. 월급은 팔천 원에서 만 원을 받았다(지금으로 치면 50만 원 정도. <경기도 행정역사관> 사료에 따르면, 1975년 당시 공무원 월급이 4만 8백 원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먹고살기 어려워서 중국집 배달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경쟁률이 셌다. 중국집에서 먹고 자며 생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손종식님도 배달 일과 주방보조를 하면서 20년간 중국집 다락방에서 생활했다(이후 주방장이 되면서 월세를 얻을 여유가 생겼다). 혼자 지낼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한 방에서 2명이 생활했다.

 

그가 20살이 됐을 때, 함께 일하던 형이 잘 아는 중국집이 있으니 광주로 내려가자고 했다. 형을 따라 광주로 내려갔다. 1979년 10월이었다. 그때쯤 부산과 마산에서 ‘시끄러운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7개월이 지났다. 1980년 5월이었다. 5월 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5월 18일이 되기 며칠 전부터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같이 일하던 형은 무슨 일인지 밖에 나가보자고 말했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이었다. 공수부대가 내려오고 나서 상황이 급변했다.

 

    “다 봤죠. 한번 맞으면 거의 내가 봤을 땐 아마 사망 아니면 살아돌아가도 아마 폐인으로만 살 정도로 심하게 패고 그러더라고요. 완전히 말로 해서 그렇지 현장에 있으면 있잖아요, 진짜 겁이 나가지고 오줌이 찔끔찔끔 나와요. (...) 몇백 명이 모여 있으니까요. 앞에 있는 사람들만 많이 그렇게 하고 뒤에 있는 무리들은 거의 다 도망가가지고 숨고. 형이 그때, 앞으로 가자 그러는데 나 뒤에 있는다고, 그러는 바람에 내가 살아있는 거 같아요. 안 그랬으면 나도 아마 죽었을 거예요.”

 

손종식님은 말을 아꼈다. 아무리 말로 해도 그때 그 상황은 전달이 안 될 거라고 했다. 함께 나갔던 해병대 출신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형이 어떻게 됐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며칠간 중국집에 숨어 창문으로 바깥 상황을 지켜봤다. 당시 계엄군은 시위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밖에 있는 젊은이들은 ‘무조건 다 죽였다’. 보름 정도 지나자, 중국집 사장님이 서울로 도망치라며 택시비를 주었다. 택시를 타고 나주까지 가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목격자’가 되었고,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었다.

 

    “밤에 잠을 못 잤었죠. 트라우마가 있어가지고. 안 없어지고 계속 이어졌죠, 트라우마가. (지금까지도 그러세요?) 지금도 깜짝깜짝 자다가 놀래죠. 생각하면은. 그 옛날에 곤봉으로 맞아가지고 쓰러진 사람들 생각하고 있으면. (기억이 나는구나) 예예, 기억이 나가지고 밤에 잠을 못 자요.”

 

서울로 올라온 그는 ‘가족한테 연락할 경황이 없었고 내 몸 살려고 막 피해 지냈다’. 40년이 지난 지금 간략하게 표현하는 그의 마음을 다 이해하기는 어렵다. 가족들은 손종식님이 광주로 일하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5년 동안 연락이 없자, 1985년에 기다림의 끈을 놓아버렸다. 어머니가 사망신고를 했다는 사실을 손종식님이 알게 된 건 그러고도 10년 후의 일이다. 처음엔 경황이 없었고, 나중엔 신체검사를 받지 못해 병역기피자로 잡혀갈까 봐 겁이 났다. 헌병들한테 끌려가면 반 죽어나온다는 말을 들었다. 자꾸 광주 생각이 났다.

 

    “삼청교육대라고, 서울 올라오니까 또 그게 살벌하게 있었어요. 5‧18 일어나고 얼마 안 있다가 또 문신 있고 한 사람들 다 잡아갔어요. (...) 명동에 노는 날 나왔는데, 군바리하고 형사들이 나와가지고 젊은 사람들 다 잡아다가 올려 보내고 (불심검문을 해서) 예. 문신 있고 한 사람들 죄다 차에 태워가지고 바로 데리고 가버렸어요. 살벌했었죠. 문신이 있으면 죄다 잡아다가 만약에 반항하고 하면 그냥 조인트도 까고 곤봉으로 막 때리고 그때도 그랬어요.”

 

그가 기억하는 시대는 ‘살벌했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명동에서 불시에 삼청교육대로 끌려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자신 같았다. 20살이 되고 아직 주민등록증도 만들지 못한 그였지만, 중국집에서 일을 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중국집 다락방에서 지내니 전입신고를 할 이유도 없었다. 달리 할 줄 아는 일도 없었기에 30년간 성실히 중국집 일만 하며 나중엔 주방장까지 되어 8, 9년을 일했다. 주방장이 되자 전보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지만(주방장 월급은 180~230만원이었다), 여전히 일은 고됐다. 주말 없이 한 달에 한두 번을 쉬었다. 매일 밤 10시 반이 넘어서 집에 돌아왔다. 남 모르는 상처와 스트레스를 술로 풀었고, 통장이 없어 저축을 못 하니 돈이 모이질 않았다. 결혼도 꿈꿀 수 없었다. 사망신고가 되어 있는 현실이 점점 그의 삶을 옥죄어 왔다. 결국 주방장 일을 그만두고 잠시 쉬던 차에 그는 경마를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잃었다.

 

<선바위>

무시무시한 바위산
전설의 고향 남태령 고개를 지나 선바위
구미호에 홀려 나는 오늘도 감옥에 간다.

미친 불나방처럼 족쇄에 매여서
오늘도 나는 죄수가 된다.

미친 광란의 질주가 있는 곳
어마어마 막지한 간수가 있는 곳
렛츠런 감옥으로

무소불위 철장권세를 가진
머니(돈) 시추하기 위하여

 

손종식님은 성프란시스대학 글쓰기 시간에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시를 썼다. 관악산 남태령고개에 구미호가 있다는 전설처럼, 그 시절 구미호에 홀린 듯 ‘렛츠런’ 경마장에 다녔다. IMF 사태 이후로는 중국집도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일을 다시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의 나이 벌써 사십대 후반이었다. ‘죽어 있는’ 사람이니 다른 자격증을 딸 수도 없고,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었다. 영등포 OB공원에서 노숙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 신분증으로 일용직 일을 나가면 한 일주일은 여인숙에서 지냈다. 1년 6개월이 지났고, 그게 한계였다. 몸은 급속도로 안 좋아져 결핵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서는 노숙도 어려워진 몸으로 13년간 줄곧 다시서기센터(서울역 거리홈리스를 지원하는 사회복지기관. 성프란시스대학을 설립‧운영한다) 일시보호 잠자리를 이용했다. 자연스럽게 술과 경마를 끊었다.

야외 글쓰기수업 백일장에서 글을 쓰고 있는 손종식님

 

성프란시스대학의 학무국장과 자원활동가들이 본 손종식님은 ‘잘 웃어서 주위까지 환하게 만드는 사람’,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을 안 하는 사람’, ‘의지가 강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한때 술과 경마에 빠져서 돈을 잃었지만, 30년 동안을 한 달에 한두 번 쉬어가며 중국집 일을 했고, 성실함을 인정받아 배달 보이에서 주방보조로, 결국 주방장까지 됐다. 입학 후 1학기 동안 그는 한 번도 수업을 빠지지 않았다. 성프란시스대학의 학무국장과 진행한 사망신고 복원과정은 첫 단추부터 쉽지 않았다. 매순간 위기에 봉착했다. 스트레스로 정신과 증상이 나타나 결국 1달 반 동안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첫 번째가, 본인임을 확인해야 하는데. 사망신고돼있으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예요. 내가 나라는 거를. 본인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가족을 찾을 방법도 없고.” (마명철 사회복지사)

 

사망신고를 정정하려면 가정법원에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일단 (연락되는)가족이 없으면,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고향인 구례까지 내려갔지만, 동주민센터에서는 사망신고돼있는 ‘그 사람’이 이 사람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으므로, ‘사망신고’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제적등본조차 떼어주지 않았다. 자신이 ‘신원불명’의 사람이라는 사실부터 확인되어야 했다. 손종식님은 마명철 사회복지사와 함께 서울역 파출소를 찾아가 십지문 확인을 요청했다. 그마저도 처음엔 거절당했지만, 노숙인 담당 경관인 박아론 경사가 이야기를 듣고 십지문 확인을 도와줬다. 지문이 등록되지 않은 ‘신원불명’의 사람이라는 이 경찰 공문이 자신을 증명하는 첫 번째 서류였다.

 

공문을 들고 남대문 경찰서를 찾아 ‘가족찾기’ 신청을 했지만, 전쟁이나 해외입양 등의 사유에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또 다시 거절당했다.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손종식님은 ‘옛날처럼 막히는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행히 회현동주민센터에서 경찰 공문을 보고 사유를 인정해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위한 임시 사회보장번호를 발급해주고, 제적등본을 열람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자신이 사망신고되었다는 공식 서류를 36년만에 직접 확인한 순간이었다.

회현동주민센터에서 기초생활수급신청을 하는 손종식님

 

다시서기센터에서 대학생 때부터 자원활동을 한 박기태 변호사가 법원에 제출할 서류 작성을 도왔다. 다시서기센터의 사회복지사 2명이 ‘손종식님이 손종식님이 맞다’는 인우보증서를 작성했다. 법원에서는 가족의 인우보증서와 유전자검사 확인서 등 ‘손종식님이 손종식님임을’ 증명할 자료를 보완하라고 명령했다. 법원의 명령문이 있으니 드디어 동생들의 초본을 열람할 수 있었다. 주소가 있었지만, 연락처는 알 수 없었다. 마명철 사회복지사는 동생분이 사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전화해 사정을 이야기했다. 여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지 못하던 손종식님은 그때서야 ‘일이 됐다’ 싶었다.

 

    “마 국장님이 그때 딱 전화 오게 만든 거 보고. 될 것 같다. 바로 전화가 오더라구요.”

 

17년 전에 마지막으로 수소문해 만났던 여동생이었다. 당시엔 동생들도 형편이 어려워 손종식님을 돕지 못했다. 서로를 향해 참았던 그리움과 속상함이 교차했다. 동생들은 인우보증서를 작성했고, 유전자검사를 받았다. 손종식님은 그동안 자활근로를 해 모아두었던 돈으로 유전자검사비와 서류 비용을 부담했다. 여동생은 요즘 거의 매일 손종식님께 전화해 안부를 묻는다(마명철 국장이 자신의 명의로 선불폰을 개통해주었다). 인터뷰 중간에도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는 손종식님의 목소리가 유난히 부드러웠다. 다음주에 주민등록증이 나오면, 봄이 지나기 전에 동생을 만나러 갈 것이다.

 

동생들의 인우보증서와 유전자검사 확인서까지 제출했지만, 법원에서는 손종식님의 어릴 적 사진을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다행히 여동생이 손종식님의 초등학교 동창을 알고 있었다. 1979년, 광주로 내려가기 직전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본 친구였다. 40년만이었다. 다시서기센터에서 만난 친구는 초등학교 졸업사진을 보여주었다. 친구가 보여준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은 낯설었다. 자신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변명한 적이 없다. 때로는 말로 해도 전달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두 차례에 걸친 인터뷰 말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손종식님의 초등학교 시절 사진

 

    “(광주에서의) 그때 상황이, 여기서 얘기해봐야 현장감이 없잖아요. 현장감이 없는데, 인문학 하면서 모든 게 생각도 안 나게 되고 그럴 것 같아요. 옛날의 잘못된 거 생각도 안 나게 되고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아요.”

 

그는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남들은 1, 2년씩 걸린다는 사망신고 복원을 그는 10개월만에 끝마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였다면 중간에 포기했을 것이다.

 

    “나한테 인문학은 천군만마예요. 모든 걸 다 이루어줬잖아요. 이때까지 내 평생의 소원을 이루어준 게 인문학이라, 평생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것 같아요.”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이 모든 일이 그가 서울역에 온 지 15년만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왜 더 앞당겨지지 못했을까? 성프란시스대학의 학무국장인 마명철 사회복지사에게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이전에 현장지원팀에 있을 때는 거리 응급구호활동, 응급 보호 후에 시설이나 병원에 연계하는 일들을 주로 했어요. 단기간에 많은 사람을 상담하고 지원하는 일이었죠. 그런데 성프란시스대학에서는 이렇게 1년이란 과정 동안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까 한 사람, 한 사람 깊이 알아갈 수 있다는 게 장점인 것 같아요. 짧은 시간에 잘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걸 판단해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아니고 충분히 계속 만나면서 그런 과정들을 지속한다는 게요.”

 

성프란시스대학엔 매년 15명이 입학한다(원래는 25명이었지만 작년부터 대기업 후원이 끊겨 공간 문제로 입학정원이 줄었다). 글쓰기, 철학, 예술사, 문학, 역사 과목을 1, 2학기로 나눠 듣는다. 중간중간 소풍도 가고 현장답사도 간다. 당장 수백 명의 거리홈리스를 상담하고 지원해야 하는 상황에서 15명을 위한 인문학과정은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이에 정부와 서울시의 지원도 언제까지 이어질지 불확실한 상황이다. 하지만 정작 인간의 삶은 ‘효율적인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을 때, 바뀔 수 있는 것 아닐까? 손종식님은 16기 졸업문집 <마중물>(손종식님의 아래 글에서 제목을 따왔다)에 이렇게 적었다.

 

    “지난 1년 인문학을 만나 참으로 새롭고 신기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치열하게 살지 못했던 저를 돌아보고 제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인문학을 마주했던 그 마음으로 생활해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도움주신 교수님들, 마국장님 고맙습니다.
    코로나19로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난 1년은 내 인생의 마중물의 시간입니다.
    근본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줄을 더할 차례다. “나는 대한민국 사람, 살아있는 손종식입니다.”


* 이 인터뷰는 오마이뉴스 기사로도 게재되었습니다.
(omn.kr/1sm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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