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기수 신입생 면접을 할 때마다 특별히 내 마음을 붙잡는 분이 한 명씩은 꼭 있다. ‘이 분이 일 년을 견뎌내고 졸업한다면 올 일 년 인문학 농사는 성공이겠다’고 느끼게 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사람. 21기 면접 때 임채영 선생님이 그런 분이었다.
임 선생님은 면접과정부터가 좀 남달랐다. 누구의 추천도 없이 스스로 지원했는데, 면접 전날 갑자기 대구 엄마에게로 내려가게 돼서 인문학에 참여할 수 없다고 면접불참 통보를 해왔다. 그런데 면접 당일 내려가기 전, 교수님들에게 인사라도 하고 가겠다고 면접에 참여하셨다. 40대 중반으로 1미터 65센티 정도 키에 깡마르고 얼굴빛이 검었다.
“고향이 전라도이신데, 어머니가 대구에 계신가 봐요?”
. . .
“수업에 참여하진 못해도 인사라도 하고 가시겠다고요. 고맙습니다.”
. . .
“혹시라도 대구에 내려가지 않게 되거나, 다시 올라오게 되면 선생님 자리 비워둘 터이니, 꼭 연락하셔요.”
대답이 분명치 않아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면접 내내 눈을 바로 맞추지 못한 첫 인상의 기억이 또렷하다. 뭔가에 쫓기는 듯한 표정과 불안한 자세는, ‘어떻게든 나를 붙잡아주세요. 제발’하고 호소하는 듯했다.
입학식을 하루 앞두고선 배 국장님으로부터 임 선생님이 대구 어머니 집으로 내려가지 않고 아직 서울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배 국장님은 임 선생님의 정신질환 병력을 전해주었다. 3월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배 국장님으로부터 더욱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임 선생님이 극단적 선택을 하셨어요. 다행히 빠르게 발견해 병원으로 이송했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대요.” 며칠 후 임 선생님은 김포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이송 돼 장기 입원치료를 받게 됐다고 했다.
글쓰기 첫 수업 숙제는 21기 카페에 등록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 카페에 올리는 것이다. 삼행시 숙제검사를 하는데, 면접 때부터 나를 놀라게 한 그 이름과 또 마주쳤다.
임: 채영이는
채: 채소를 따고 집으로 가는 중에 산에서
영: 영영 길을 잃었어요.
인문학에 참여하고 싶었으면서 왜 대구 엄마에게 내려가야 한다고 했을까. 내려갈 거면서 왜 면접에는 참여했을까. 극단적 선택은, 글쓰기 숙제는, ‘왜 왜.’ 선생은 그 후로도 숙제로 내준 글쓰기과제를 꼬박 꼬박 카페에 올렸다.
3월 한 달 내내 ‘영영 길을 잃은’ 임 선생님의 불안한 표정과 자세가 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안되겠다 싶어, 4월 15일 배 국장님과 함께 임 선생님 면회를 갔다. 여기까지 찾아와 주셨다고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는 임 선생님은 이번에도 눈을 똑바로 맞추지 못하셨다. 잠은 수면제로 겨우 자고, 뭘 통 먹지를 못한다고 했다. 면접 때 보았던 불안한 표정과 자세는 그대로였다.
“선생님, 일기처럼 병원에서의 일상이나 생각나는 것이면 무엇이든 글로 써 카페에 올리세요. 그럼 출석하는 걸로 간주할게요. 그리고 2학기 때 건강한 몸으로 학교에서 보는 겁니다. 동기 분들이 선생님 얼마나 응원하고 계신 줄 아세요.” 그 뒤로 선생님이 카페에 올린 글 속에서 나는 그 ‘왜들’의 답을 조금은 엿들을 수 있었다.
| 제 고향은 전남 나주시 다시면 봉압리입니다. 하지만 고향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어요. 어렸을 때 친구를 사귈 때쯤 되면 이사를 갔거든요. 수도 없이. 미아리에서 유치원 다녔고, 동두천에서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때까지 살다가, 서울로 올라와 동명 초등학교로 전학갔어요. 사귀어본 친구는 한 명도 없고, 번번이 사고 친 기억만 있어요. 중·고등학교는 입학만 하고 무학동 쪽 바지 공장에 다녔지요. 월급은 도박으로 다 날린 악독 사장 때문에 돈 한 푼 못 받고 형, 누나 따라 부산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싸움만하다가 친구가 칼에 찔려 죽는 걸 눈앞에서 봤어요. 난 실형을 받고 청송 소년원에서 1년을 살았습니다. 소년원을 나와서도 독고다이로 조폭들과 매일 싸움을 하며 길거리를 배회했어요. 스무 살 때 서울행 기차에 올라 눈을 감고 지나온 날들을 생각했습니다. ‘험한 세상에 굴복하지 않다가, 칼도 맞아보고, 야구방망이로도 맞아보고, 칼에 찔린 친구보고 눈 돌아간 내 자신을 보았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나? 무엇을 위해 길거리 파이터가 되었나?’ 서울역에서도 내 삶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술, 싸움, 마약. 교도소. 출소한 후 20대 중반에 일거리를 찾아 전라도 신안으로 내려갔어요. 어둠 속에서 주먹 하나 갖고 여태까지 버티면서 살아온 나. 막둥이로 낳아준 어머니, 생이별 아닌 이별로 17년 만에 만난 어머니. 쭈글쭈글 늙은 어머니 얼굴 보며 울던 아들. 행복이 뭔지 사랑이 뭔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 모두 떠나보내고 후회했어요. 하늘로 먼저 떠나보낸 옛 친구만이 내게 말을 건네주는 것 같았습니다. ‘문득 외롭고 울고 싶을 때 하늘을 보라고 구름 속 옛 친구가 보일 거라고.’ |
꼬박꼬박 글출석하는 임 선생님을 보며 7월을 손꼽아 기다렸다. 2학기 청파동 새 교사로 옮기면 환영식을 해야지. 동기와 자원활동가 샘들 한분 한분과 눈 맞추며 뒤늦은 신입생환영식을. 선생님은 자원활동가 샘이 보내준 책까지 읽으며 마치 교실에 있는 학생처럼 날이 갈수록 모두와 편하게 소통했다.
| 아침 6시에 호실과 천장에 불이 들어오면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6시30분 밥을 먹고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다보면 뿌연 연기 사이로 내 모습이 흩어진다. 9시 국민체조를 해주시는 선생님이 오셔서 같이 함께 몸을 푼다. 국민제조가 끝나면 핸드폰을 보거나 책을 읽는 게 나의 유일한 하루다. 오후 10시 수면제 먹고 다음날 아침7시~7시30분까지 잔다. 약 먹으라는 소리가 들린다. 간호사 선생님과 보호사님이 나를 깨운다. 약 먹을 시간이다. 그 후론 잠이 안와서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가지고 논다. |
선생님은 잠이 안 온다 했으나 늦은 밤 일기숙제를 검토한 나는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었다. 이제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숙면 후 개운한 아침 ‘카톡!’ 낭랑한 소리가 들렸다. “임채영 선생님이 오늘 새벽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성프란시스 교실로, 동기들 품으로 돌아오는 길을 몇 발자국 앞에 두고 선생님은 영영 길을 잃었다.
2026년 1월 28일 성프란시스 인문학과정 21기 졸업생 아홉 분께 수여할 상장문구를 작성한 후, 나는 다시 자세를 바로하고 마지막 열 번째 상장문구를 작성했다.
행 복 상
임 채 영
위 사람은 장기입원치료로 비록 몸은 교실에 없었으나, 단 한 번만이라도 사람 사이의 행복을 배우고 느껴보려는 필사의 의지로 마음만은 늘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그 거룩한 마음을 기리어 인문학 21기 동문들과 성프란시스 인 모두의 마음을 모아 이 상을 수여합니다.
2025년 1월 28일 성프란시스대학 학장 곽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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