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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화전

깨지지 않는 거울

by vie 2022. 9. 21.

깨지지 않는 거울

김대영

 

눈이 가득 쌓인 이른 아침, 어느 쉼터 공터에 관광버스가 몇 대씩 들어오고 당시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그들의 목적지와 대상을 알았을 때, ‘인문학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누구는 잠을 자지 못해서 늦은 밤이든, 이른 새벽이든 꽁초를 찾아 헤매는데 달랑 가방 하나 들고 버스에 올라타는 그들의 모습이 그렇게도 부러울 수 없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그 시절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왔다. 부러워하던 관광버스에 가방 하나만 맨 채 가볍게 올라타 봤고, 사회보호계층(실직 노숙인)에서 두 단계 상승해 차상위계층(최저생계비 120퍼센트)을 넘어 공공근로 계층으로 올라서기까지 했다. 작년에 처음 알게 된 사회복지사라는 것도 인문학 수업을 들으면서 과정을 마쳤고, 내 생애 최초로 자격증이라는 것을 취득했다. 이제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상담하는 일을 한다.

이게 다 인문학 덕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문학은 현실과 동떨어졌다. 오히려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에 수업을 듣는 이에게 더 많은 피곤을 안겨줬다. 하지만 수업을 듣는 순간은 마음이 편했다. 같은 처지의 동료들이 있어서 그런지 몰랐다. 오히려 나보다 더 험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동료들이었다. 교수님도, 자원활동가 선생님도 살갑게 대해주셨다. 더럽고 냄새나고 이빨도 없어 발음이 줄줄 새는 얼토당토않은 얘기들을 신앙고백 들어주듯 들어주시고 말씀하신다. 수업 시간에는 많이 배우고 높은 분들이나 하는 얘기들도 많이 나누었다. 물론 인문학 과정을 졸업한 후로는 그런 얘기할 기회도 없고 공간도 없어졌지만 심화 수업을 통해 그나마 갈증을 풀기도 한다. 아쉽게도 아직 심화 수업에 참석을 하지 못했다. 심화 수업 일정을 보며 꼭 참석해야지 하면서도 아직 방탕함과 게으름이 몸과 마음을 유혹한다.

인문학은 현실을 또 외면한 채 풍물이라는 것도 알려주었다. 사회복지 시설에서 공연을 하고, 졸업식 때 공연도 하게 했다. 오 이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게 만들다니……. 개인 사정으로 지금은 풍물을 하고 있지 않지만 다른 동료들과 인문학 6기 후배들은 아직도 풍물을 하고 조금 있을 공연 준비도 하고 있다. 얼마 전 한일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날, 성균관대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직접 공연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풍물패 두드림은 그렇게 인문학을 통해 알게 됐다.

인문학은 호사스럽게도 연극, 영화, 뮤지컬, 박물관 관람도 모자라 지리산 여행, 남도 여행까지 하게 만들었다. 기껏 시장통 한구석 냉동 수입 삼겹살에 소주나 먹으면 잘 먹는 거였고 남산 올라가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버스를 대절하여 이리저리 유람까지 하게 되었다. 작년 겨울, 쉼터에서 버스에 올라타는 그들을 부러움으로 바라보던 나였는데…….

여행은 정신없이 시작됐고 지나갔다. 그 속에서 먹는 음식은 맛도 맛이거니와 소화도 너무 잘되어 늘 배고플 지경이었다. 네모진 강의실을 벗어나 사방팔방 뻥 뚫린 자연 속에서 나누는 대화들은 그 어떤 책이나 말씀보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거기다가 막걸리까지 곁들이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 천국에서 노래방까지 갔으니……. 마치 첫 소풍을 다시 갔다 온 것 같았다.

인문학은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주었다. 선배도 알게 되고 후배도 알게 됐다. 글쓰기를 가르쳐주시는 박경장 교수님 댁에 겨울 땔감 나무를 한다는 핑계로 가서 고기도 구워 먹고 등산도 하고 축구까지 한 날이 있었는데 친한 이웃집에 놀러 간 것 같았다. 동료들끼리 편을 갈라 축구를 할 때도, 길가 적당한곳에서 막걸리를 마실 때도, 남산에 올라가 소주를 깔 때도, 자전거를 타고 한강 공원을 갈 때도, 몰래 사온 소주를 풀 더미 속에서 먹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술 먹고 같이 싸울 때는 인문학을 관두고 싶었다. 그런 동료들이 졸업을 하고 각자의 길로 가고 있다. 어느 동료는 교육청 상을 받기도 하고,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고,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어 열심히 일을 하기도 하고, 임대주택에 입주해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도 한다. 서울역에서 자주 보는 동료들도 있고, 술 한 잔 기울이는 동료도 있다.

인문학은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만든다. 생각하기도 싫은 과거지만 뒤를 돌아보게 만들어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거울을 만들었다. 거울을 통해 이 세상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겨우 몇 발자국을 떼어서 그런지 아직 그 옛날의 못된 습성이 남아 있다. 그래도 거울은 깨지지 않고 늘 내 앞에 있어 인간이 되어라주문을 외운다. 카드빚을 갚기로 하고 신용 회복 지원 신청을 했고, 욱하던 성질도 많이 죽어 경찰서 가는 일이 없어졌으며, 지나친 음주와 술주정으로 파출소 가는 일도 없어졌다. 아직 술을 끊지 못했지만 남들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지난날처럼 살지는 않을 거 같다. 그래도 내 몸에 흉터를 가끔씩 보면 한심하다 못해 안쓰러울 때도 있다. 그 안쓰러운 인간과 같이 사는 우리 집사람에게 한없이 고마움을 느끼며 미안한 생각뿐이다.

이제 인문학이라는 보호막과 끈이 없어졌다. 다시금 그 혜택을 입을 수 없으니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도시 골목을 걸어가는 것 같다. 차라리 산길이었으면 별이라도 보고 갈 텐데 말이다. 이제 신분 상승은 없다. 영원한 공공근로 계층에 머물지라도 내가 할 일이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하나둘 생겨날 것이다. 어차피 진흙탕에서 뒹구는 인생, 모래 위에서 뒹구나 자갈에서 뒹구나 더 이상 땅으로 꺼지지 않으면 인생 성공인 듯하다. 그러다 보면 남을 위해 일하는 시간 늘어날지도 모른다. 인문학이 나에게 준 건 깨지지 않는 거울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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