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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화전

리어카를 끌고 여름 바다로!

by vie 2022. 9. 21.

리어카를 끌고 여름 바다로!

박진홍

 

나는 서울역을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하지만 몸이 안 좋아서 아무도 나를 일에 안 써주었다. 어떻게 하다가 평택인가를 돌아다니는데 나보다 어린애가 고물을 줍고 있었다. 그걸 보고 나도 서울역에 올라와, 처음으로 고물을 모으기 시작했다. 돈을 좀 모아서 리어카를 하나 장만했다. 안에 두 명이 누울 만큼 큰 리어카였다. 나는 리어카에서 자면서 고물을 모아 팔았다. 60만 원 모았을 때 문득 바다가 보고 싶었다. 갑자기 그 생각이 리어카만큼 자라났고 간절해져서, 바다를 보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였다. 난 준비를 했다. 리어카를 끌고 부산으로 바다를 보러 갈 준비를.

때는 봄에서 여름으로 막 넘어가기 시작한 5. 나는 스물아홉이었다. 일단 단골집 고물상 주인에게 이것저것 도움을 받았다. 잠잘 침낭과, 고물 하다 보면 꼭 필요한 가위, 드라이버, 자석 등을 얻을 수 있었다. 자석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왜냐하면 구리와 철의 가격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구리는 철보다 더 비쌌다. 그래서 구리인지 철인지 구별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자석을 댔을 때 붙으면 철이고, 안 붙으면 구리다. 리어카를 끌고 가는 사람을 가만 보면 대개 양쪽으로 포대기 하나씩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한쪽은 구리 포대기, 다른 한쪽은 철 포대기. 철 포대기 쪽에는 으레 자석이 걸려 잇었다. 준비는 끝났다. 주머니엔 60만 원. 나는 내처 부산으로 향했다. 그렇게 리어카 행군이 시작됐다.

길은 간단했다. 무작정 큰 길을 따라 부산 쪽으로 걸어가는 거였다. 가다가 길이 좁아지면 좁아진 대로, 산길이 나오면 산길이 나오는 대로, 포장도로든 비포장도로든, 자갈길이든 흙길이든 주구장창 걸었다. 돈이 떨어지면, 거리에서 파지나 구리나 철을 주워 그때그때 고물상에 가져가는 게 유일하다면 유일한 계획이었다. 잠은 물론 리어카에서 잤다. 리어카는 중앙에 바퀴 두 개가 있어, 제대로 세울 수 없다. 늘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래서 나는 길가에 놓은 의자가 있으면 의자 등받이에 리어카 손잡이를 걸쳐 놓고, 바퀴 뒤축엔 돌이나 파지로 받쳐 놓았다. 그러면 리어카가 편편하게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그 안에 박스를 차곡차곡 쌓아놓고, 침낭을 놓고 잠을 잤다. 하늘이 지붕이 되고 아슬아슬하게 평행을 이룬 리어카가 내 침대였다. 그게 꼭 내 처지 같았다.

한 번은 박스를 산처럼 쌓고 끌고 가고 있었다. 고물상에 팔아넘기려는데, 아무리 가도 가도 고물상이 안 보였다. 딱 가고 있는데 7시간인가 8시간 만에 길가에 있던 사람에게 조금만 가면, 금방 고물상이 나올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근데 조금 가서 보니 고물상이 있기는 있었는데 높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거였다. 힘 팍 주고 오르막을 낑낑대며 올라갔다. . 다행히 고물상 사장님이 돈을 많이 쳐주고, 내게 필요한 것들을 건네주었다. 그 고물상 사장님은 내게 이런 말도 했다.

왜 어린애가 이런 일을 해? 이해가 안 가네. 차라리 이거 하지 말고 여기서 일해볼 생각 없냐?”

이렇게 묻는 말이 고마웠다. 하지만 선뜻 하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난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지를 못하니까. 특히 이혼한 뒤로는 더했다. 그 후유증이랄까. 나는 사장님에게 명함만 받고 고물을 판 돈을 들고 그곳을 나와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사장님은 부산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번 꼭 들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후한 고물상 주인들 덕분에 후에 올라올 때도 내려온 길 그대로 따라 올라갈 수 있었다.

리어카를 끌고 또 길을 갔다. 조치원에서 청주로, 거기서 대전으로 돌아서 부산으로. 계획이 그래서가 아니라 길이 그렇게 이어져서 그 길로 갔다. 리어카를 끌면서 나는 내 지난날도 끌고 있었다. 이혼한 와이프가 생각났다. 처음엔 같이 그림을 그리다가 만났다. 와이프는 병이 하나 있었는데, 긁는 병, 카드를 긁는 병이었다. 하지만 정작 헤어진 건 다른 것 때문이었다. 어느 날인가 아끼던 후배와 와이프가 압구정동 카페에서 만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 와이프는 전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다. 그저 만날 수도 있는 일이라 나도 그러려니 하고 믿고 넘어갔는데, 전혀 아무 사이도 아닌 게 아니었다. 두 번째 걸렸을 때는 나한테 배 째라는 식이었다. 결국 이혼 수순을 밟았다. 혼인신고를 한 것도 아니어서 헤어지면 그대로 끝이었다. 아끼던 후배도, 와이프도 그렇게 잃었다. 그 뒤로 사람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림을 같이 하던 이들이라, 그쪽 일로 만나는 사람들과도 모두 연락을 끊었다.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신 후였고, 나는 서울역을 전전하며 그냥저냥 되는 대로 살기 시작했다. 파지를 줍기 시작한 것도 그 이후였다.

리어카가 무거워졌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날씨도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서울역에서 길을 내어 쭉 남으로 남으로 내려온 지 벌써 한 달 반이 지나 6월의 가장 뜨거운 때로 진입하고 있을 때, 드디어 부산에 도착했다.

해운대였다. 파도가 밀려오고 백사장엔 피서객들이 또 가족들이, 연인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렇게 염원하던 바다를 보고,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도대체 여기 왜 온 걸까.’

너무 보고 싶었는데 그래서 충동에 끌려 돌연 내려왔고 원하던 바다를 보면 가슴의 뭔가가 뻥 뚫리겠다 싶었는데, 막상 바다를 보곤 뜬금없이 후회가 몰려왔다. 난 여기 왜 왔나. 남들은 편하게 오는 길을 왜 이렇게 고생스럽게 왔는지, 허무했다. 놀러 온 가족들이 모래밭에서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나, 되게 허무했다.

바다가 물었다.

너 왜 왔냐?”

내가 대답했다.

고물일 하고 있는데, 너무 힘들고 네가 너무 보고 싶어가지고.”

바다는 말이 없었다.

나는 다시 리어카를 끌고 해운대를 서성이다 자갈치 시장에 들른 뒤, 내려온 길 그대로 따라 짚어 서울역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서울역 사람들은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어린애가 리어카를 끌고 부산까지 갔다 왔다는 걸. 그리고 그게 바로 나라는 걸. 물어보면 다 안다. 아마 그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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