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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14호

[인물 인터뷰] 복 많은 사람 이승복~ 인문학을 배우다

by vie 2022. 9. 15.

글 / 성지후
인터뷰어 / 강민수, 성지후
인터뷰이 / 이승복
(성프란시스대학 18기)

 

왼쪽부터 이승복 선생님, 성지후 자원활동가, 김순철 선생님.

 

세상에 태어나 학교도 잘 모르는 나
복이가
이 많아 인문학을 배우네.”

 

이승복 선생님은 성프란시스대학 18기 회장님입니다. 스스로 복이 많다고 말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여름과 가을 사이 하늘이 높은 날 선생님과 마주 앉았습니다.

 

Q : 성프란시스대학 18기 이승복 회장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A : 네~ 제 이름은 기억하기 쉬워요.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어린이와 이름이 같으니까요. 초등학교 다닐 때 그때는 한창 ‘반공 교육’ 했을 때라 이름 갖고 놀림도 참 많이 받았어요.

 

Q : 선생님 성함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을 ‘승’ 자에 복 ‘복’, ‘복을 잇는 사람’이라는 좋은 뜻을 가진 성함인데, 이름 관련해서 담임선생님에게 상처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시다고요.

A : 네. 그러니까 머리가 희고 나이가 좀 있으신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우리 초등학교 때 그거 얼마지 350원인지 700원인지 육성회비가 있었어요. 그걸 내야 하는데 밀리니까 돈 갖고 오라고 집으로 돌려보냈어요. 왜냐면 그때는 그게 선생님들 실적이었거든. 그때 3명이 못 내고 있었는데 그중 2명은 거기 난지도의 고아원에 사는 아이들이었고 나는 부모님 계시니까, “야, 너는 이름이 이을 ‘승’ 자에 복 ‘복’인데 이을 게 없어서 월사금 밀리는 걸 잇느냐.” 뭐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죠.

 

Q : 어린 승복에게 그 말은 굉장한 상처가 되었을 거 같아요.

A : 그렇죠. 상처이기도 했지만…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때도 생각이 없는 놈이었어. 노여움도 모르고 시기도 모르고 그냥 다 좋으면 좋은 거야, 당시 상암동에 살았는데 버스도 칠십몇 년에 들어왔을 정도로 외진 곳이었어요, 난지도 쓰레기장이었고 먹고 살기 힘든 곳이었지. 내가 정상적인 사람이었으면 아마 머리가 어떻게 됐을 텐데, 난 그런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라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예요. 그래도 중학교 때 과학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진짜 영향이 컸지. 어느 날 양호실 청소를 하는데 그 선생님이 그러더라고. “승복아, 너는 세상에 소금 같은 사람이 돼라.” 그게 뇌리에 딱~! 어떻게 보면 젊었을 때 그게 좌우명이 되다시피 했죠.

 

Q : 와! 멋진 선생님이셨네요. 몇 학년 때였어요?

A : 중학교 2학년 때지. 대흥중학교 다녔어요.

그때는 제대로 된 교육이라는 게 없었어요. 음악 시간에도 노래만 불렀지, 4분의 4박자 뭐 이런 개념 자체가 그렇게 없었어요. 중학교 때 1학년 땐가 2학년 땐가, 방학 숙제로 작곡을 해오라 그러더라고. 그래서 친구한테 물었지. “야, 작곡이 뭐냐?” 걔 아버지가 천안에서 악기전문점 했거든. 걔가 그냥 콩나물 대가리 그려 오면 된다고 그래서 오선지에다가 그냥 개념 없이 아무렇게나 막 그려 갔지. 근데 방학 끝나고 사달이 난 거지. 쭉 서서 매를 맞는데 마지막 내 앞에 와서 그러는 거야. “너는 100대.” 교생선생님이었는데 “나하고 장난치냐?” 그러더니 야, 진짜 100대를 맞는데, 한 60대쯤 가서 허리를 맞은 거야. 그래서 쓰러지니까 자기도 무서운지 그만 때리더라고.

 

Q : 교생선생님이 너무 심했어요.

A : 야.. 그거 맞는데, 그때는 진짜 서럽더라고.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거야. 알아야 잘못했다 그러는데, 선생님 놀릴 의도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진짜 눈물이 나더라고. 선생님 그림자도 안 밟아야 된다는데. 우리 어렸을 때 그렇게 배웠잖아요. 선생님은 아유, 진짜 하늘이지, 난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 내가 선생을 가지고 논다고 하니 억울했죠.

 

Q : 선생님은 서울에서 태어나서 계속 서울에서 사셨어요?

A : 네, 아버지는 충청도 어디 깡촌 출신이에요. 중학교 때 할머니 집을 처음 가봤어요. 이런 기억이 있어요. 한 5시쯤 됐나.. 비가 오니까 할머니가 부엌에서 조그만 솥뚜껑에다가 김치부침개를 하시는데 그 냄새가 기가 막힌 거예요. 그리고 할머니랑 같이 올라와서 상암동에 며칠 있다가 시골 내려가실 때 모셔다드린 기억이 나요.

 

Q : 선생님, 몇 째세요?

A : 셋째지. 누나랑 형이 있고 나 여동생, 남동생. 중간이 무지하게 서러운 자리예요. 집안 힘든 일을 내가 다 해야지, 심부름 내가 다 해야지. 쌀 사러 갈 때도 콩나물 사러 갈 때도 집안일도 맨날 나만 시켜.

 

Q : 상암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졸업하시고는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드신 거예요?

A : 그렇죠. 우리가 5형제인데 다 3년 터울이야.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가 다 걸리는 거야. 내가 대학교 갈 나이에 여동생이 고등학교. 그 아래 동생은 중학교. 동생들 학비 벌어야지.

 

Q : 그래서 대학을 포기하셨어요?

A : 원래 제가 공부도 잘 못했어요. 동생들 때문에 그만뒀다는 건, 그냥 말만 그렇지. 공부도 못했어.

 

Q : 그럼 20살 때부터 35년을 계속 일만 하신 거네요?

A : 그냥 일만 했어. 이제 와서 무슨 취미 가지라는데 뭘 할지 모르겠어. 할 줄 아는 게 당구 치고 술 한잔하면서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거밖에 없으니까. 세운상가에서 일할 때도 천안에서 일할 때도, 대리점 문 닫으면 안 되니까 한 달에 2번 쉬면서 계속 일만 하는 거야. 가본 데도 없고.

 

Q : 어떤 일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A : 세운상가에서 전기자재 대리점에서 일했어요. 물건 떼러 가면 거기 일하는 사람 고생하니까 같이 일해주고 했는데, 그런 걸 좋게 봤는지 담보 하나 없이 7곳에서 물건을 선점해서 가져왔지. 그렇게 돈도 많이 벌었는데 생각이 짧았던 거지. 관리를 잘해야 되는데, 평생 그렇게 벌 줄 알고.

 

Q : 관리를 못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A : 사람을 너무 믿은 거야. 돈을 여기저기 빌려주다 보니 IMF 때 부도를 맞았어요.

그중 김포 땅 부자 친구도 있었는데 내가 걔를 어느 정도 믿었냐면, 돈을 빌려 달라 하면 그냥 통장, 도장 주고 비밀번호까지 알려주고, “야, 네가 알아서 꺼내 가.” 할 정도였어. 결국은 4천 5백인가를 못 받았는데, 걔는 용산 전자상가에다 가게를 내더라고.

 

Q : 아...

A : 얼마 지나 천안에 스팀 세차장 자리가 났다 해서 천안으로 갔어요.

내가 가진 돈의 30% 이상은 안 빌려준다 결심하고 천안으로 갔죠. 천안 가게에 직원으로 있던 사람을 내가 참 잘해줬는데 손님이 맡긴 물건이 자꾸 없어지는 일이 생기더라고 내가 책임자로서 얼마나 마음이 졸이고 창피한지. 그 사람이 가게 근처 단골식당 아주머니한테 내 이름을 대고 돈을 빌려 간 일을 나중에 알았어요.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니까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더라고.. 얘기를 하면 그 사람 언변을 내가 당할 길이 없어.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거 같고 머리가 이상해져. 그 좋은 머리를 왜 사기 치는 데 쓰는지.. 그래서 가게 문을 딱 닫아버리고 몸만 나왔지. 오죽하면 내 가게를 버리고 나왔을까?

 

Q : 선생님은 여전히 사람이 좋으세요? 그렇게 배신당하시고도요?

A : 아니, ‘내가 조금씩 변해가는구나!’라는 게 느껴져. 이보다 더한 일들도 잘 넘겼는데 요즘 자꾸 마음이 좁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왜 내가 이렇게 작아질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인생 마지막에 이러면 안 될 거 같아 ‘분별심’을 화두로 삼았어요. ‘이 마음을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며칠 전 수덕사에서…

 

Q : 여름수련회 때 갔던 수덕사 절이요?

A : 네. 수덕사 대웅전 계단을 내려오면서, 다른 건 몰라도 ‘분별심 갖지 말자!’를 화두로 삼자 생각했어요. 진짜 그거는 내가 노력해 보려구요.

 

Q : 아까 천안에서 운영하던 세차장을 두고 몸만 나오셨다고 하셨는데, 바로 서울역으로 오신 건가요?

A : 아니지, 나는 여기 오기 전에 자살하려고 그랬어요. 가게 버리고 나와서 천안 어디 여관에 있는데 돈이 떨어져 주머니에 든 게 딱 100원짜리 10개더라고. 배가 고파서 식당에 가서 그랬지. “아줌마, 나 밥 한 그릇만 주세요. 돈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랬는데 한 2인분 되는 거를 밥을 반찬하고 다 해서 주는 거야. 아씨. 그걸 들고 오면서 계속 울었어요. 울면서 며칠 동안 밥을 먹으면서도 자꾸 죽을 자리만 찾게 되더라고…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공중전화로 친구 놈한테 전화를 했어. “야, 30만 원만 부쳐라. 지금 내 통장 안 되니까 식당 아줌마 계좌번호로 부쳐라.” 그 30만 원 갖고 부산행 표를 끊고 앉아서 보니까 대전으로 끊겨 있는 거야, 이게. ‘어? 나 분명히 부산으로 끊었는데 왜 대전으로 돼 있지?’ 그때 부산으로 내려왔으면 나는 없었겠지, 나는.

 

Q : 바다에서 자살하려고 했는데 대전으로 가시게 된 거군요. 신기하고 다행한 일이에요.

A : 그렇게 대전에 갔는데, 서울 사는 친구가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만 보자, 남대문시장에서 밥이나 먹자”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갈치조림 먹고 싶다.” 그랬죠. 그때는 목소리가 이렇게 나오지도 않았어요. 한 1년 이상 말을 안 하니까, 목에서 쇳소리가 나오는 거야. 내 목소리 듣고 나도 놀랐으니까.

 

월요일에 만나기로 하고는 돈 아낀다고 밤차를 타고 토요일 저녁에 와서 서울역에 있는데… 서울역이 이런 데인 줄도 몰랐어요.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오더니 탁 치더라고. 내가 쳐다보니까 ‘지금 바로 일할 수 있는데 갈 거냐’고 해. 내 한 몸 배낭 하나 들고 다니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일이야. 내가 너무 피폐했던 거지. 하룻밤을 거기서 새우고 월요일에 그놈 만났는데 내 꼴이 말이 아니니까 친구가 여길 알려 주더라고.

 

Q : 숙대입구역 다시서기센터(이하 '센터') 말씀하시는 거죠?

A : 네. 그래서 왔더니 사회복지사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일단 병원부터 가야 된다고 그러는 거야. 병원에 갔더니 당뇨약을 2년 이상 안 먹어서 측정이 안 돼. 일단 입원해야 된다고 하더라고. 배에다 인슐린 주사 맞고 치료받아서 정상이 됐어요.

 

Q : 퇴원 후 다시 숙대 센터로 오셨고요?

A : 네. 병원에 있을 때 친구놈이 준 7만 원 갖고는 생활이 안 되니까. 퇴원하고 다시 센터로 왔죠. 센터에서 자고 먹고 하면서 있다 보니 일자리도 얻고 전세 임대도 들어가고.

 

Q : 일자리는 어떻게 구하신 거예요?

A : 처음에는 센터에서 번호표를 주고 이걸로 밥 먹으라는데 어떻게 먹는지도 모르겠더라고. 그냥 눈치껏 사람들 하는 거 따라했지, 그러다 한 달쯤 지나니 자활근로를 하는 누가 안 나왔는지, “안 나왔으면 다시 뽑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 얘기가 들려. 그래서 “나도 일 시켜줘요?” 그랬지 “아, 그럼요” 그래. “그럼 나도 합시다.” 그러고는 센터에서 일을 하게 됐어요.

 

Q : 다시 일하시니 어떠셨어요?

A : 좋았지. 일하고 한 달 지나 월급 칠십몇만 원을 받았는데 그게 그렇게 큰 줄 몰랐어. 그 돈을 통장에 딱 받았을 때, 와, 진짜 모든 사람이 다 고마운 거야. 그래서 박카스 6박스를 사서 주방하고 사무실에 돌렸는데 사 오지 말라는 거야. 사람이 고마움을 표현하는데 왜 그러지? 나중에 물어봤더니 여기서는 그런 걸 사 오는 게 아니라고 그러더라고. 그러면서 나한테는 음료수 같은 걸 자꾸 주는 거야. 그래서 나도 한번 시작한 건 끝을 봐야지 싶어서 계속 사다 줬지. (웃음) 그게 내가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는 거니까.

 

Q : 그럼 서울역에 오신 지는 얼마나 된 건가요?

A : 지금 내가 육십이고 쉰여섯에 왔으니까 4년째네요.

 

Q : 임대주택에 들어가셨다고 하셨는데 LH 전세임대주택인 거죠?

A : 네. 그게 사실 그거 미안해서 한 거예요. 문민수 선생님이 LH 임대주택 이런 좋은 제도가 있는데 왜 안 하시냐고 회의 때마다 얘기하는 거예요. 처음엔 ‘이게, 진짜로 될까’라는 의심도 많았어요. 왜냐면 나는 지금껏 살면서 공짜로 뭘 받아본 적이 없거든. 다 내 힘으로 살았지, 근데 나라에서 집을 구해준다? 이건 더 안 믿지.

 

Q : 나라에서 전세금을 대주는 거죠? 100퍼센트인가요?

A : 그렇죠, 거의. [*편집자 주: 주거취약계층 LH 전세임대주택은 전세 보증금 중 50만 원만 자부담하면 된다.]

2번 떨어지고 3번째 됐어요. 용산주거복지센터 오라 그래서 갔더니 서류를 주더라고. 서류 받고 방 얻어야 해서 복덕방에 가서 “LH 전세임대주택 있어요?” 그러면은, “아유 없어요” 하는 사람도 있고 말도 없이 [저리 가라는 손짓] 그냥 딱 이러니까…

 

Q : LH 전세임대주택은 안 받는다고요?

A : 네, 거기서 빈정이 딱 상하는데… 집이고 뭐고… 에이 XX. 신경질이 나서 용산주거복지센터에 전화를 했지. 나 안 한다고. 그랬더니 “아유, 그래도 해야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선생님” 그래요. 그러고는 이틀 후 전화해서 “방 하나 있는데 보실래요?” 그래서 그렇게 두 달 만에 집을 구했어요.

 

Q : 아, 용산주거복지센터에서 알아봐 주신 거군요

A : 네. 성ㅇㅇ 선생이라고. 정말 잘해주셨어요. 그날 같이 복덕방 가서 사인했죠.

 

Q : 집은 괜찮아요? 마음에 드세요?

A : 괜찮죠, 그 정도는. 언덕을 한참 올라가고 마지막 계단이 좀 힘들지만요.

 

Q : 몇 년 사시는 건가요?

A : 보통 4년은 그냥 사는 거고. 그 후에 별문제 없으면 재계약을 해요.

 

Q : 인생의 여정에 고생 많았네요.

A : 나는 진짜 생각이 없던 사람이에요. 시기나 질투도 없고 그렇게 살던 사람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고생 많았죠. 가끔 가만히 누워서 ‘나 참 멍청하게 살았구나.’ 이런 생각을 해요. 그런데 이만큼 살았으면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왜? 멍청한데 이만큼 살았으니까…

나는 여기(성프란시스대학) 온 것도 신의 한 수라고 봐요. 신은 안 믿지만, 자연이 보낸 건지 몰라도 여기 와서 많은 걸 느껴, 진짜. 뭐라 그럴까? 사람과의 관계?

우리 연극 관람하고 뒤풀이 때, 자원활동가분들 하고 교수님들과 얘기하면서 ‘배운 사람들은 생각하는 게 높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옛날에는 내가 대장이었거든. 오너였으니까. 그분들 보면서 반성도 하고. ‘아, 이럴 때 그분들은 어떻게 했을까?’ 이런 생각도 하죠.

내가 요즘에 기특한 생각도 한다니까. 1년이 365일이잖아요. 10년이면, 3,650일이고,

100년이면 36,500일. 그거밖에 못 사는 거예요, 우리가 3만 며칠밖에 못 사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성프란시스대학 18기 입학식에서 인사말을 하는 이승복 선생님.


Q : 성프란시스대학에 오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A : 임대주택 들어가고 문민수 선생님한테 얘기했더니, 서울역 다시서기센터로 일자리를 옮겨 주더라고. 돈 많이 벌 수 있다고 해서 한 몇백 주는 줄 알았어. (웃음) 그러면서 인문학 얘기를 하더라고. 처음엔 그랬지. ‘아, 내가 예배 보는 데 가서 30분만 앉아 있어도 아주 사람 돌아버리겠는데, 책상 앞에 또 앉으라는 건가?’ 근데 하라니까. 대체 뭘 가르쳐 주 는 건가 싶어 한번 신청해보자, 그러고는 면접을 보는데 “일주일에 술 몇 번 드세요?” 그래. “조금 속여서 6일이요.” 너무 많이 먹는대. “하실 수 있겠어요?” “뭐, 해야죠” 그랬어. 나는 안 될 줄 알았어요. 지금은 최고로 좋아요.

 

Q : 성프란시스 18기 회장님이 되셨어요.

A : 그 이유가 아직도 미스터리예요.

 

Q : 저는 그냥 회장님이 되신 것 같지는 않거든요.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이 선생님보다 더 낫다고 하시지만, 그분들이 선생님 뽑았을 때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A : 처음에는 18기 홍일점인 임ㅇㅇ 선생한테 힘을 실어드리고 싶어서 회장으로 세우고 싶었는데 워낙 강경하게 거부하더라구요. 다른 사람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거부하고. 나도 무슨 핑계를 댈까 생각하다가 유재진 학무국장 얼굴을 딱 봤는데, 너무 당황하고 있더라고요. 국장님도 올해가 처음이라는데 다 안 한다고 그러면 어떻게 할 거예요, 이거를…

그래서 내가 하게 됐는데 나는 빵점이지 빵점. 왜냐, 늘 뒤에서만 있는 거야. 뒤에서 사람들한테 필요한 것만 이렇게 할 뿐이지. 그냥 늘 술 먹을 때나 뭐할 때 그냥 옆에 있을 뿐이지.

 

Q : 그게 최고의 회장님 역할이시죠.

A : 뭐가 최고야, 아무것도 안 하는데.

 

Q : 며칠 전 뒤풀이 자리에서, 회장님이 선생님 한 분 한 분의 주량과 특성을 다 알고 챙기시는 모습을 보고, 회장님으로서 ‘우리 선생님들을 세심하게 다 보고 계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A : 그거는 아니고, 각자의 사정을 내가 다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임대주택이라도 들어가 있고, 내 생활이 어느 정도 되지만 이 사람들은 더 힘들잖아요. 내가 뭐든 조금 더 해서 다른 사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해주는 거뿐이지. 뭐 내가 회장이라서, 나는 그런 거 없어요. 미력하나마 내가 조금이라도 뒤에서 도울 수 있다면. 왜, 올라갈 때 좀 힘들 때 누가 뒤에서 손가락 하나라도 밀어주면 편하잖아요. 그거뿐이죠. 다들 똑똑하고 한때 한 가닥씩 했던 분들인데 내가 더 잘나서 이러는 게 아니고 같이 있을 때 좀 편안하게 해주고 싶을 뿐이지, 다른 건 없어요.

 

Q : 서울역 다시서기센터에서는 어떤 일을 하세요?

A : 아웃리치(거리상담) 일을 해요. 근데 마음이 아파서 이제 못 하겠어요.

 

Q : 노숙인 분들 보는 게 마음 아프세요?

A : 얼마 전 두 분이 돌아가셨어요. 한 분은 나와 같은 62년생, 한 분은 61년생이었어요. 62년생분이 언젠가부터 밥도 술도 안 먹고 그러더라고, “야, 너 어디 아프니? 병원 한번 가자.” 몇 번을 얘기했어. 안 가더라고. 그러다 금요일인가 비가 왔는데 그분이 비를 맞으며 벤치에 누워 있더라고. 배를 눌러봤는데 일반 사람 배 만지는 거하고 느낌이 달라. 복수 찬 것 같으니 신경 좀 써야 될 것 같다고 센터에 얘기했지.

그러고는 월요일에 출근하니까 안상협 대리가 “아유, 안 좋은 일 있습니다.” 그러더라고. 일요일인지 토요일 저녁인지 쓰러지니까 다른 사람들이 신고했는데도, 그분이 “병원 안 간다” 그러니까 앰뷸런스가 두 번이나 그냥 가버린 거야. 그러고는 의식을 잃으니까 앰뷸런스가 와서 그냥 싣고 가버린 거지.

중환자실에 있는데 의사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살 확률 50, 죽을 확률이 50이래 그래도 ‘복수 빼면 살겠지’ 했는데. 며칠 있다가 돌아가셨다고. 나는 면회를 갈라 그랬는데…

그래서 장례식장에 갔는데 와이프랑 딸 둘하고 사위가 왔더라고. 잠깐 있다 마음만 안 좋아서 와버렸어요. 아, 이거 진짜 마음이 좀 아파. 진짜 아무리 사람이 뭐 삶과 죽음이 뭐 한 장 차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쉽게 갈 줄은 몰랐지. 노숙하는 분 중에 마음을 닫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아요.

 

Q : 상처가 많아서 그런 걸까요?

A : 그럴 수도 있고요. 또 워낙 자기 고집대로 살아온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타협이라는 게 별로 없지. 그 사람들도 나만큼 상처를 많이 받았겠지. 여기 와서 그게 더 공고해지니까 남을 안 믿고 자기 안으로 더 들어가는 거지. 근데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하라 그랬잖아. 그게 진짜 진리인 거야. 그렇지 않으면 절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아.

 

Q : 18기 카페에 올리신 글 중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글이 많아요. 치매로 요양병원에 계시다 돌아가신 거죠?

A : 어머니는 부천에 사시고 나는 천안에서 일할 때라 한 달에 두 번 정도 올라갔어요.

한번은 친구랑 술을 마시다 이상하게 빨리 집에 가고 싶더라고. 그래서 집에 가서 문을 열었더니 집이 한증막인 거야. 가스 불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잊어버리고 밖에 나가신 거지. 다리가 쫙 풀리더라고. 그게 치매의 시작인지도 모르고 어머니한테 막 뭐라 그랬어요. 어머니도 멋쩍으신가, 깜빡했다 그러더라고요. 그때부터는 어딜 나가 있으면 불안한 거야. 새벽 2시에 불러서 “밥 먹어야지” 그러시면서 밥을 차리시고.

 

Q : 식사하신 걸 기억 못 하시는 거죠?

A : 네. 약도 숨겨놓고 드려야 했어요. 약 드신 걸 잊어버리고 또 드시니까. 처음엔 몰랐는데 2달 치 약이 10일 만에 몇 개 안 남은 거야. 그래서 숨겨놓고 드렸어요. 그럼 이 새끼가 나 약 안 준다고 또 화를 내시고… 다른 병보다 치매는 감당이 안 돼. 현명한 자식들 같으면 어떻게 할 텐데, 나같이 멍청한 놈은 하루하루 견디기가 힘들다는 생각만 해, 어디 나가 있어도 불안하고 신경이 쓰여. 사이렌 소리만 들으면 불안하고.

 

Q : 그래도 효자셨어요.

A : 아유, 효자는 아니야. 난 내가 경험하지 않은 걸 몰라요.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분간이 안 가는 거야. 그래서 항상 늦지. 그게 후회가 돼. 아버님은 알든 모르든 내가 끝까지 케어를 했으니 괜찮은데, 어머니는 내가 감당이 안 돼서 요양병원에 모셨어요. 처음 두 곳을 좋다는 곳으로 믿고 모셨는데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던 거지. 마지막 세 번째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늦었어요. 이전 두 곳에서 어머니가 이미 망가졌던 거지.

 

Q : 어떻게 상태가 안 좋아지셨나요?

A : 두 번째 요양병원에 계실 때 일주일에 한 번 면회를 갔는데 갈 때마다 주무시고 계시더라고. 그날도 식사하고 잠드셨다 길래 의사 선생님을 한번 만나겠다고 그랬어요. 만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죠. “의사 선생님 같으면 내 부모 여기다 모시겠습니까?” 하니까, 그 선생님이 그러더라고. “저는 여기에 안 모시죠.” 그날로 친구한테 전화해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부천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옮겼어요. 대기자가 1년 넘게 있다 해서 중환자실로 모셨죠. 나중에 알고 보니 병원에서 약을 먹여서 재운 거였더라고.

 

Q : 속상하셨겠어요.

A : 어머니 돌아가시고 자괴감이 들고 너무 화가 나는 거야. 내가 몰라서 어머니를 잘못 모셨구나, 그래서 휘발유 한 통을 사서 택시를 탔어요.

 

Q : 설마 병원에 불 지르러 가신 거예요?

A : 네. 기사가 “어디 가세요?” 그래. “좋은 데 갑니다.” 그랬어요. 휘발유라 냄새가 나서 눈치를 챈 건지 “누가 될진 몰라도 여기서 차 돌리겠습니다. 이해하십시오” 그러더니 차를 돌리더라고. 그렇게 하지 마시고 그냥 가시라 그러면서.

 

Q : 다행이에요.

A : 그러니까 자식이 똑똑해야 돼. 그래야 부모도 잘 모실 수가 있어요. 세상을 똑똑하게 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죠. 그 결과로 서울역까지 왔지만 여기 사는 것에 대한 불만은 없어요. 다만 세금을 축내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은 늘 들지,

 

Q : 예전에 세금 많이 내셨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A : 물론, 나도 사업을 했으니까. 그때는 짜증을 냈지. 뒤만 돌면 세금이 나오니까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세금 내면서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해요. 세금 내신 분들 덕에 이렇게 혜택을 보니 고맙구요.

 

Q : 선생님 쓰신 글 중에 ‘그리움’이라는 글이 정말 좋았거든요.

“어제 보았던 꿈 이야기/ 산을 보았는데 그림자가 없다.” 산에 그림자가 없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A : 꼭 무슨 뜻이라기보다는 산은 한결같잖아요? ‘그림자가 없다’는 건 분별심이 없다. 가식이 없다. 그런…

 

Q : 간결하면서 긴 여운이 남는 글이에요.

A : 안성찬 교수님(철학 교수님) 말씀을 이렇게 듣고 있으면 ‘아, 가식 없이 사람을 대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 여기 같이 와 준 순철샘도 마찬가지고요. 순철샘 볼 때마다 저 사람이 좀 배움의 기회가 있었으면 얼마나 높은 사람이 되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진짜 아까운 사람이에요.

 

Q : 아까운 사람이에요, 맞아요.

A : 나는 오를 수 없는 높은 자리에 가 있을 수 있었겠구나. 그런 거 보면 인생이라는 게 공평한 것 같지만 공평하지 않으면서도, 또 공평해요.

 

Q : 선생님, 인문학에서 특히 좋아하는 수업이나 인상에 남는 순간이 있으신가요?

A : 1학기 때 배운 철학, 글쓰기, 역사 다 좋았어요.

근데 그것보다는 안성찬 교수님 그분이 얘기하실 때, 옛날 기억을 끄집어내는 능력이 탁월하시더라고요. 자꾸 사람을 말하고 싶게 만들어요.

 

Q : 아, 그거 너무 좋아요.

A : 네. 계속 말하고 싶게 만드는 능력과 누구와 대화할 때도 정말 가식 없이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와, 저런 모습은 좀 배워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글쓰기 시간에 배웠던 시가 생각나요. 친구 집에 눈 오는 날 갔는데, 친구가 없어서 눈에다 자기 이름을 써놓고 가니까 “바람아, 친구가 올 때까지 지우지 말아다오.” 하는 한시를 배웠는데 야, 그거 보고 시를 쓴 사람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까? 그런 걸 생각하게 되고 참 좋더라고. 근데 내가 쓰는 건 재미있지만 답이 안 나와.

 

눈 속에 벗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이규보
(雪中訪友人不遇)

눈 빛깔이 종이보다 더 하얗기에
채찍을 들어 성과 이름을 썼네.
바람아, 땅을 쓸어버리지 말고
주인이 올 때까지 잘 기다려다오.

 

Q : 글쓰기는 저도 어렵습니다.

A : 글 쓸 때가 되면 자꾸 헤매는 거야. 근데 다른 선생님들 보면 다들 글을 잘 써요.

 

Q : 선생님도 잘 쓰세요.

A : 난 그냥 내 느낌대로 쓰는 거고.

 

Q : 정말 잘 쓰세요.

A : 내가 쓴 것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거는 ‘물 한 바가지’.

 

물 한 바가지

물 한박아지 뿌린다 촥
잔디에 생기가 돈다
물 두박아지를 뿌린다 촥 촥
풍뎅이가 이사를 가네
물 세박아지 뿌린다 촥 촥 촥
지렁이가 고랑을 파네

 

Q : 네, 저도 그 글 좋아요.

A : 성프란시스대학 선배님 중 얼마 전에 돌아가신 故 최인호 선생님의 시 ‘물 한 바가지’를 보고 그 사람 마음이 느껴져서 마음에 떠오르는 걸 흉내 내서 쓴 거지. 사실 저 뒤에 마지막 구절이 있는데, 원작자가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몰라서 못 올렸어요. 그냥 나중에, 다른 기회 있다면 그분과 물 한 바가지 떠 놓고 같이 얘기나 나눠보고 싶어서. 그런 마음을 담아 쓴 거예요.

 

석양이 질 때 물 한 바가지
떠놓고 노을과 함께
놀아 보세.

 

Q : 그 시가 영향을 줘서 이렇게 또 좋은 작품이 나왔네요.

A : 글을 쓰면서 삭막한 마음이 좀 부드러워지는 그런 부분이 참 좋아요.

인문학 시작하고 한 달도 안 돼서 수업 마치고 걸어가는데 ‘와, 사람 몸이 이렇게 가벼울 수 있나.’ 너무 즐거운 거야. 아, 내가 여길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처음 드는 거야. 누가 보내서 온 건지 모르겠지만, 여길 온 게 너무 행복한 거야. 사람이 왜 깃털 같다 그러잖아요? 내 몸이 그렇게 가벼워지는 거야. 와, 기분 좋데.

 

Q : 그럼 인간 이승복은 복이 많은 사람입니까?

A : 많죠.

 

Q :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최근에 받은 가장 큰 복은 무엇입니까?

A : 글쎄요, 내가 볼 때 큰 복은 가는 데마다 도움을 많이 받고 사는 거야.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센터의 안상협 대리님. 그분한테서 따뜻한 말 한마디를 듣는데 ‘아~ 남자가 남자한테도 사랑에 빠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또 우리 교수님들, 자원활동가분들 만나면서 뭔가가 달라도 다른 걸 느껴. 15기 졸업생 유ㅇㅇ 선생이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교수님들 만나면 그렇게 반가워하면서 스스럼없이 얘기를 하더라고. 그걸 보고. ‘야, 저분들은 뭐를 심었길래. 몇 년이 지났는데도 서로 반가워하고 그럴까? 그런 게 힘이구나. 내가 감히 좇아가진 못하겠지만, 그런 삶을 좀 살아야겠구나’ 생각했어요. 다 멋있고 잘 살아오신 분들 같아요. 살면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내가 지금껏 살아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Q : 그 덕을 저희에게 돌리시네요.

A : 근데 나도 거기(성프란시스대학)에 포함이 되니까 그게 또 복이지.

 

 

월사금을 내지 못해 조롱받던 아이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말을 가슴에 새깁니다.
부산 바다에 몸을 던지려 결심한 청년의 손에 어찌 된 영문인지 대전행 표가 들려 있습니다.
어머니를 돌보지 않은 병원에 불을 내러 가던 남자를 택시 기사는 제자리에 돌려놓습니다.
그것이 분명 선생님의 복입니다.


“채우려고 하지 마세요.

고약한 놈이라 채우려고 하면 채워지지 않고

그냥 놔두면 무엇이든 채워질 겁니다

지후 선생님은 현명한 분이라 잘 알 겁니다.”


마음의 허전함을 토로하는 인터뷰어에게 이승복 선생님이 달아주신 댓글입니다.

눈물 가득한 눈으로 몇 번을 다시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은 성프란시스의 복이다.

인터뷰에 함께해주신 이승복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왼쪽부터 성지후 자원활동가, 이승복 선생님, 서한빛, 김용극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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