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웹진/제14호

[길벗 광장] 홈리스 – 접속의 단절, 새로운 접속, 재접속을 향한 갈망

by vie 2022. 9. 10.

안성찬 (성프란시스대학 철학 교수)

성프란시스대 웹진 <길벗> 편집팀으로부터 칼럼 글 기고를 요청받고, 검색창에 ‘노숙인’을 입력해 최근의 관련 이슈들을 검색하는 일로 원고작업을 시작했다. 검색 사이트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종류의 뉴스가 상단을 차지하고 있다 - 이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한 기관의 홍보뉴스와 ‘노숙인’이 저지른 범죄에 관한 기사. 거의 이 두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노숙인 관련 기사는 우리 사회의 ‘일반인’들이 ‘노숙인’에 대해 느끼는 이중적 감정을 반영한다. 우리 사회가 노숙인을 바라보는 시선의 한편에는 이들이 자력으로는 일어설 수 없으므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시혜적 선의가,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이들이 자신들의 처지로 인해 범죄의 유혹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가 교차적으로 나타난다.

노숙인을 향한 이러한 양가적 감정과 시선은 우리가 서울역을 찾을 때 눈에 들어오는 풍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현대 생활의 중요한 일상인 일과 휴가를 위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과 일상적 사회생활에서 내몰려 역광장을 배회하거나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의 뚜렷한 대조는 IMF 사태 이래로 서울역의 일상적 풍경이 되었다. 서울역 광장을 찾는 여행객의 눈길과 발길에 부딪는 노숙인의 행색, 그리고 이를 통해 드러나는 이들의 비참한 상황은 일순간 혐오와 동정이 교차하는 강렬한 이중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대다수의 여행객은 즉시 이를 외면하고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겨 곧 일상적 감정 상태로 되돌아간다. 짧지만 강렬한 이런 체험에서 각인된 인상이 노숙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과 고정관념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다.

검색을 계속하다가 이러한 추정의 적실성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를 발견했다. <수치심은 정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제하에 강신주가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인데, 이하의 인용은 이 글에서 강신주가 노숙인에 관해 언급한 부분 전문이다.

지방 강연 때문에 서울역을 자주 찾는다. 어느 사이엔가 서울역은 노숙자들의 든든한 안식처가 된 지 오래다. 겨울에는 추위를 막아 주고 여름에는 비를 막아 주니, 어쩌면 그들에게 서울역은 마지막 남은 은신처라고 할 만하다. 이 노숙자들은 서울역을 지나다니는 일반 시민들의 시선은 아랑곳없다. 이뿐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의식하는 일도 별로 없다. 그래서 간혹 노숙자는 강시 혹은 좀비처럼 보인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노숙자는 자신이나 세상에 대해 마비되어 있는 존재다. 자존심을 느낀다면 어떻게 노숙자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마비’가 편한 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노숙자를 하나의 인격자로 깨울 수 있을까? 아니, 어느 순간 노숙자는 자존심을 가진 인간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2년에 발표한 글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번에 이 글을 처음으로 읽었다. 강신주라는 이름을 이런저런 경로로 들어본 적은 있지만, 특별히 관심을 기울일만한 계기가 없었기에 이것이 내가 읽은 그의 첫 번째 글이기도 하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 강신주는 노숙인들이 “일반 시민들의 시선뿐만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의식하는 일도 별로 없”으며, “강시 혹은 좀비처럼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어 있다”고 단정하고, “한마디로 노숙자는 자신이나 세상에 대해 마비되어 있는 존재”로서 이들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찾아볼 수 없다고 확언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강신주는 이 글을 쓰기 전은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노숙인과 대화를 나누어 본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이는 그가 글의 서두에서 노숙인에 대한 그의 인식이 “지방 강연 때문에 자주 찾는” 서울역에서 조우한 노숙인들에게서 느낀 인상에 의존하고 있음을 자인하고 있는 것에서 확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들의 내면 상태를 단정하고, 이들에게서 생명과 자존심의 권리를 박탈한다. 이는 분명 그가 서울역에서 목격한 노숙인의 비참한 행색 그리고 이들에게서 나는 냄새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에서 사회적 신분 차별의 표지로 제시한 바로 그 냄새)에서 느낀 혐오감과 불쾌감에서 나온 반작용일 것이다. 한마디로 노숙인에 대한 그의 견해는 심층적 조사와 통찰의 결과가 아니라 피상적 인상에 의거한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나온 것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모든 편견은 사태를 오인케 하여 문제의 해결에 대한 접근을 오도하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글의 말미에서 “노숙자를 하나의 인격자로 일깨워 자존심을 가진 인간으로 부활”하게 하는 방법을 찾자고 주창하는데, 내가 보기에 이는 다른 인간에게 과도하게 드러낸 혐오감을 휴머니스트 코스프레로 눙치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장담하건대 강신주는 이 글을 발표한 이후로 “노숙자를 하나의 인격자로 일깨워 자존심을 가진 인간으로 부활”하게 하려고 시도해본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오래전 발표된 강신주의 글을 지금 여기에 다시 불러낸 의도는 발표 직후부터 비판과 반론의 집중포화를 맞아온 그의 글에 반론을 하나 더 덧붙이기 위함이 아니다. 강신주의 글은 오히려 우리 사회가 노숙인을 바라보는 편향된 시각의 기원과 구체적 양상을 매우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와 효용을 지닌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의 글 그리고 이것이 불러일으킨 논란을 뒤늦게 살펴보면서 내가 주목한 것은 노숙인을 바라보는 강신주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진영과 찬반을 넘어 논쟁자들에게서 보편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강신주의 글에 대한 비판과 반론의 주된 요지는 그가 수치심을 모르는 대표적인 무리로 자신의 글에 소환한 사례가 파렴치한 정치가나 기업가들이 아니라 ‘가엾은’ 노숙인이라는 것, 사회적 소외의 근본적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아니라 그 희생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는 데 있었다. 노숙인에 대한 그의 견해가 편향된 고정관념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마디로 강신주의 글이 불러일으킨 논란의 과정을 추적하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그를 매섭게 비판한 논객들도 노숙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한 대부분 고정관념에 묶여 있으며 이들이 처한 사회적, 실존적 상황에 무지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성프란시스대 강의를 시작할 때 나 또한 노숙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강신주와 마찬가지로 서울역 광장의 일상적 풍경이 남긴 인상이 전부였다. 돌아보면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 인상 위에 세워진 편견과 고정관념의 벽을 사이에 두고 강의실에서 수강생들과 만났고, 이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요즘은 내가 성프란시스대에서 강의하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이곳 강의에 관한 질문을 해올 때마다 그 벽에 부딪힌다. 대화는 대개 “좋은 일 하신다고 들었어요, 강의하기 힘들지 않으세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에서부터 고정관념의 벽을 마주하고 있음을 느낀다. 내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시혜적 선의를 베풀고 있다는 전제가 그 질문의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서울역에서 그 옆을 지나다 보면 냄새가 많이 나던데 강의할 때 냄새 때문에 힘들지 않으세요?” 정보기관의 고위직에 있던 한 친구는 그가 일하는 기관에서는 노숙인들을 전쟁이나 내란 등 국가 위기 상황에서 폭동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적 위험군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강의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대체로 여리고 선량하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대학 강의보다 이곳 강의에서 더 많은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지만 화제가 길게 이어지는 적은 거의 없다. 대화의 상대방은 서울역 풍경의 인상에 바탕을 둔 고정관념으로 인해 혼란을 느끼고, 나는 고정관념의 벽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일상적 만남의 자리에 적합한 화제가 아닌 것이다. 이들에게 못 한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하고 싶다.

우리 사회에서 ‘노숙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는 다름 아닌 노숙인이다. 성프란시스대 인문강좌를 수료한 조 선생님은 만날 때마다 이 단어가 잘못되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노숙인은 길에서 자는 사람이라는 뜻이잖아요. 길에서 자지 않는 우리를 왜 노숙인이라고 부르냐구요?!” 실제로 서울역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의 지원을 받는 노숙인의 범주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서울역 광장이나 길에서 자는 ‘노숙인’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노숙인들은 한때 서울역을 거치기는 하지만 이제는 쪽방, 고시원, 서울시와 LH에서 제공하는 임대주택, 다시서기센터에서 제공하는 숙소 등에서 생활한다. 일정한 거처가 있는 것이다. 이들은 다시서기센터에서 제공하는 반일제나 전일제 일자리, 코레일 서울역에서 제공하는 일자리, 식당이나 공사판 등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벌고 저축도 한다. 이들은 서울역 주변을 주 활동무대로 삼고 있고, 때로 친구들을 찾아 서울역 광장에 오기도 하지만 이들의 외양은 일반 시민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조 선생님 말이 옳다. 노숙인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너무 협소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서기센터와 유관기관에서는 그 대신에 홈리스라는 단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한다. UN의 기준에 따르면 홈리스는 1. 집이 없는 사람과 옥외나 단기 보호 시설 또는 여인숙 등에서 잠을 자는 사람. 2. 집이 있으나 UN의 기준에 충족되지 않는 집에서 사는 사람 3. 안정된 거주권과 직업과 교육, 건강관리가 충족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기준을 준용하여 노숙인을 정의하고 있다.

성프란시스대에서 강의하면서 나는 인문학의 관점에서 홈리스를 정의해보려 했지만 한동안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영화 <노매드랜드 Nomadland>를 보면서 영감을 주는 단서를 찾아냈다. 2020년 세계영화제를 휩쓴 이 화제작에서 주인공 펀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인해 직장과 주거와 남편까지 잃은 후 낡은 캠핑카로 미국 전역을 떠돌면서 생활한다. 생활비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아마존에서 일을 해 충당한다. 따라서 UN 기준에 따르면 그녀는 홈리스에 해당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I’m not homeless. I’m houseless.” 대사의 묘미를 살리기는 어렵지만 이를 번역하면 “나는 홈리스가 아니야. 집이 없을 뿐.” 정도가 될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과거 가정과 직장을 가졌을 때 사용하던 식기, 가재도구, 추억의 물품 등을 캠핑카에 싣고 다니며 아직도 사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녀는 또한 캠핑카를 몰고 가족이나 친구를 방문하여 예전처럼 즐거운 교류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한마디로 그녀의 캠핑카가 집은 아닐지라도 그녀의 홈이 되어 주고 있기에 그녀는 홈리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대사를 실마리로 홈리스의 의미를 생각하는 중에 들뢰즈의 ‘접속’ 개념이 떠올랐고, 이 개념을 매개로 홈리스를 인문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홈리스는 지나온 삶과의 접속이 단절되는 뼈아픈 경험을 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개인의 차원에서는 실직, 파산, 질병, 가정의 해체 등의 이유로 홈리스가 생겨나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IMF사태, 세계금융위기 등 자본주의 체제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대량으로 홈리스가 생겨난다. 개인적 혹은 사회적 불운이 닥친 사람들이 최악의 상황에 내몰리고,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노력과 시도조차 실패로 돌아가, 주변에 더이상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게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곳이 서울역이다. 노매드랜드의 펀과 달리 서울역의 홈리스는 가족, 친척, 친구들과의 접속, 과거의 삶과의 접속이 현실적으로 단절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서울역을 찾는 이유는 “든든한 안식처”이자 “은신처” 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접속의 단절로 인한 낭패감과 외로움 때문이다. 새로운 접속을 찾아 서울역으로 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들은 새로 친구를 만들고, 거처를 마련하고, 기관의 지원과 자활 노력을 통해 일자리를 구한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접속망을 구축한 후에도 이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은 가족, 친지, 친구와의 재회, 한마디로 재접속이다. 그러나 재접속을 이루어내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예전의 삶의 기반, 과거의 접속망이 이미 완전히 해체되어 버린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접속에 성공하여 임대아파트를 구해 일정한 거처를 마련해도 노매드랜드의 대사와 반대로 ‘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홈리스’(I’m not houseless, but I’m homeless)인 것이다.

성프란시스대 수강생들은 이런 과정을 거친 분들이다. 이분들이 글쓰기 수업에서 써낸 글들을 묶어 펴낸 <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에는 접속의 단절로 인해 이들이 겪은 애절한 사연,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려는 노력과 인간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는 굳은 의지를 통해 새로운 접속을 이루어낸 과정, 그러나 여전히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재접속을 갈망하는 절절한 모습이 담겨 있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참된 의미에서의 휴머니즘의 승리를 오롯이 보여준다. 금년 문학 부문 서울시 문화상이 이 책의 저자들인 서울역 사람들에게 돌아간 것은 심사위원들이 인문학 시장에 나와 있는 그 어떤 책보다 탁월하고 순수하게 휴머니즘의 정신을 구현한 무명의 작가들을 여기에서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9월 말에는 이분들의 글이 박재동 화백을 비롯한 민예총 화가들이 그린 삽화와 함께 국회 공간에 전시된다. 서울시 문화상이 수여된 이 책과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에서 열리는 전시회가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휴머니즘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