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웹진/제13호

[길벗 광장] 외톨이 (15기 故 박두영 선생님을 추모하며)

by vie 2022. 7. 5.

외톨이

- 15기 故 박두영 선생님을 추모하며

 

안상협 (전 성프란시스대학 학무국장)

 

안상협 전 학무국장님(왼쪽)과 15기 박두영 선생님(오른쪽).



2017년 처음 만났습니다. 더운 여름이었던 거 같아요. 거구의 인상도 무서운 한 분이 센터 식당에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보기엔 그닥 열심히 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또 꾸준히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사진처럼 기억에 남네요.

그로부터 2년 뒤 저희는 다시 만났습니다. 저는 성프란시스 인문학을 운영하는 사회복지사로, 그분은 인문학을 수강하는 학생으로 말이죠. 그런데 희한하게도 처음 봤을 때의 무서운 인상의 그분이 맞긴 한데 인상이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1년 내내 가장 빨리 학교에 왔고, 1년 내내 결석하지 않아 개근상도 받았으며 본인 이야기로는 본인 인생의 가장 바쁜 1년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출근을 하면 항상 저를 맞아주던 그분, 퇴근할 때 방향이 같다며 같이 가던 그분과 긴 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173cm에 160kg 누가 봐도 비만이었던 두영이 형이 인문학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특히 인문학 수업이 모두 끝나고 깊은 밤 집으로 가는 길에 혹은 집으로 가는 길 중간에 24시간 순대국집에서 “안 선생님 제가 몸이 이래가 변변한 직장을 다녀본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 100번도 넘게 면접을 봤는데 항상 떨어졌거든요.” 라고 하면서 취업도 하고 싶고, “옛날에 길을 가는데 카드를 만들어 준대서 만들었는데 쓰다 보니까 빚이 많이 들어서 힘드네요”라고 하시면서 신용회복도 하고 싶다고 하셨고, “여자친구는커녕 여자랑 단 둘이 이야기 한 번 해본 적 없는데 주변에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 좀 해줘요.” 등 본인의 고민을 이야기를 하길래 저는 항상 잔소리를 했던 거 같아요. “고민만 하면 뭐해요. 해결해야지. 이러면서 내일부터 할 일을 A부터 Z까지 쭉 나열합니다. 그러면 항상 에이 그만 하소, 그만하소, 내일 봐요. 하면서 집으로 가셨죠.

인문학 후에도 인연은 계속되어 서울역으로 왔네요. 저는 서울역 희망지원센터 상담원으로 두영이 형은 행정보조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영이 형은 우리 옷방이라는 곳에서 일을 했는데 노숙인분들에게 의류를 지급해주는 일이었습니다.

참 잘했습니다. 인문학을 하면서 점점 사람이 능글맞아지더니 나중에는 재미없는 농담도 곧잘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본인에게 호의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바뀐 것 같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자꾸 허리가 아프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의자에 앉아 있을 때도 삐딱하게 있고, 하루는 너무 아파서 일을 못 나올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서울시 일자리라 노숙인 무료진료가 안되니 정형외과를 가 보자 해서 가 보니 허리디스크라고 하네요. 어디는 수술 이야기도 하고 어디는 보호대를 만드는데 틀을 짜야 한다고도 하고... 그러면서 진통제 등의 응급처치만 하면서 계속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살이 빠지는 게 보이는 겁니다. 정말 급격히 빠지는 겁니다. 본인 이야기는 허리가 아파서 밥을 잘 못 먹어서 이런가 보다라고 했지만 그렇게 보기엔 너무 급격히 살이 빠졌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혈액검사를 했고 큰 병원으로 갔습니다.

간경화 말기라고 합니다. 의사 말로는 3개월이라고 합니다. 답은 이식이지만 이식을 당장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본인이 원하는 거 하면서 빨리 호스피스 병동을 알아보라고 합니다.

의사도 야속했습니다. 검사 후 당사자 앞에서 간경화 말기, 3개월 등등 이야기를 하니 화도 났습니다. 하지만 두영이 형은 오히려 덤덤히 발길을 돌렸습니다. 진료 후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집으로 왔고 서울시 일자리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인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며 호스피스병원에는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몸 상태가 그러지 못했습니다.

병원에 입퇴원도 했습니다. 코로나도 비켜가지 않더군요. 몸이 정말 안 좋아지는게 느껴졌습니다. 이쯤되면 솔직히 친구 입장에서 강제로라도 병원에 입원시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특유의 말투로 “내비 둬요. 아직 살 만해요.”라고 하면서 걱정 말라며 안심을 시켰습니다. 그렇게 간경화 때문에, 허리통증 때문에 병원을 다니다가 하루는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서울역 희망지원센터에 보호를 한 후 상황 봐서 119로 입원을 해야 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오후에 집에 있는 두영이 형을 희망지원센터로 데리고 와서 내일 병원 가야 하는데 형이 잘 못 걸으니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병원 가자고 했습니다. 두영이 형도 그러자 하여 희망지원센터에 보호를 하는데 인문학 15기 동료분들 몇 분이 오셔서 보고 가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누워 있는 두영이 형의 모습이 인문학 공부를 할 때 그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은 풀려 있고, 코에서는 코피가 간헐적으로 나오고 있으며, 살이 쭉 빠졌고, 힘이 없어 걷기가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 날 119로 병원에 이송을 했지만 별다른 큰 조치 없이 퇴원을 했고, 두영이 형은 집으로 갔습니다. 다음 날인 토요일 저녁에 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안 선생님, 내가 혈변이 나오는데 어떻게 해.” 저는 “무슨 일 있으면 119 바로 부르고 월요일에 나랑 병원 가자. 형이 엊그제 결심했던 것처럼 호스피스 병원도 알아놨어. 무슨 일 있으면 꼭 119 불러. 월요일 아침에 갈게”라고 하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두영이 형네 집에는 친구 한 분이 다른 방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분이 가끔 두영이 형 이야기도 들어주고 같이 술도 한 잔 하면서 힘든 시간에 도움을 준 분인데 일요일 저녁 7시쯤 친구분이 일 나갈 때 두영이 형이 잘 다녀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월요일 새벽에 들어와보니 인기척이 없었고 방문이 열려 있어서 가보니 이미....

119, 112 신고를 했고 사인은 병사로 동생분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월요일 아침 저는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충격으로 하루 종일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 자신에게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토요일에 두영이 형네 집을 가보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에 지금껏 두영이 형을 피해왔습니다. 미안했습니다. 후회했습니다.

두영이 형은 저에게 항상 이런 말을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뚱뚱해서 놀림을 많이 받았다고, 친구도 없었고, 본인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도 없었다고 항상 외톨이 같았다고. 그런데 지금은 인문학 하면서 아부지도 생기고 친구도 생기도 안 국장도 있고 하니까 참 좋다고.....

두영이 형, 형은 지금 외톨이가 아니라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형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모두 형을 기억하고 있고, 형의 행동, 형의 말투를 모두가 기억하고 있어요. 형도 거기에서 우리 모두를 기억하면 우린 서로 외톨이가 아니니까 형도 우리 꼭 기억해주고 형한테 미안했던 거 고마웠던 거 많이 이야기 하며 형 기억할게요.

아주 잠시만 우리도 힘들어할게요. 형은 여기서 많이 힘들었으니까 이제는 힘들지 않게 지내길 바라요....


15기 소풍에서, 안상협 전 학무국장님(중간)과 박두영 선생님(오른쪽).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