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工夫(공부)하러 公·扶(공·부)를 다녀오다"
-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16기/17기 졸업여행 후기
17기 수료생 돌 하나 박석일
지난 2년 동안 코로나라는 감옥 창살에 묶여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역시 야외 수업은커녕, 실내 대면 수업마저 끊기고, 온라인 비대면 수업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어 졸업여행 역시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행히 사회적 거리두기 코로나 대책이 일부 해제되면서
성프란시스 대학 인문학 역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는 작업의 일환으로 16기 및 17기 인문학 수료생들의 통합 졸업여행을 공주/부여 1박 2일 코스로 다녀왔다.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우리를 여행 목적지로 데려다 줄 버스를 타고, 내 자리에 앉는다.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둘 내 눈에 들어온다. 낯선 16기 선배 선생님들 얼굴도 들어오고. 그런데 바로 조금 아쉬움이 소록 소록 솟아오른다. 우리 17기 선생님들 가운데 이 자리 오시지 못한 선생님들도 계시고, 16기 선배님들은 세 분만 오셨다. 다들 바쁘신가 보다. 그 선생님들의 몫까지 함께하는 이번 여행 학습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공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상념에 잠긴다.
돌 하나가 롤 모델로 생각하는 이는 사생아로 태어나 정규 교육 제대로 못 받고, 손재주 하나로 자연을 관찰하면서 자신을 키워 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이다. ‘음 그래 자연을, 자연을’.
우리 동양에서는 工夫(공부)를 ‘지아비가 되어 내 가족의 삶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부, 학습, 강학이란 삶에 필요한 지혜로운 노동을 추구하는 과정일 것이고, 사람과 사람의 생각마저 자연의 일부로 보고 ‘자연과 의식’이 상호 침투/상호작용하는 생명 현상의 하나로 생각이 든다.
책상 앞에서 꽉 막혔던 나의 생각들이 이번 학습 여행을 통해 ‘아하 그거, 그렇구나, 그럼 그럼 그렇지 그래 이렇게, 음 …” 하는 발걸음을 만들었으면 한다.
아래 글에서는 우리의 졸업여행 일정과 관련하여 몇 가지 내 기억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정리한다.
의자왕에 핀잔 주다
공주에 도착하여 공산성을 들른다. 박한용 교수님은 의자왕이 나당 연합군에 항복하는 모습을 이야기해 주신다. 공주 공산성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의자왕은 그의 신하 예석진의 배반으로 공산성에서 내려와 나당 연합군에 항복한다. 예석진에 대한 ‘저 개놈의 새끼’ 하는 욕설보다는 의자왕에 연민을 느낀다.
“해동증자라 불리던 이 친구야! 당대 첨예한 국제 정세에 대해, 잠시 자네 정치 중심축을 놓친 결과가 자넬 한 나라의 말왕이 되게 하고, 더 크게는 북방 우리 영역을 중국의 아류 혹은 중국 속국으로 가는 출발점이 되게 한 것은 아닌가? 그래, 포로로 중국에 잡혀 가서 그해 바로 죽었다지? 그게 자네 회한인가? 명복 비네.”
우금치에서 비적들을 만나다
3차(2차) 동학 농민 혁명군은 공주 감영을 치기 위해 우금치를 넘어야 하는 전투에서 일본군-관군 연합 세력에 패배한다. 지금은 평온한 이 우금치 지형이, 당대에는 우금치 주변 여기 저기가 패전한 동학군이 집단 학살 매몰된 곳이었다. 그들의 명복을 빈다. 저항 능력을 상실한 이들을 집단 학살 매몰한 일본군 눈에는 그들은 짐승쯤으로 보였을 것인가? 기억하자.
우금치 아래 자락에 ‘의병에게 서훈 주면서 왜 동학에는 서훈이 없느냐?’는 항의 포스터가 나부낀다. 동학 혁명군 지도자 김개남과 의병장 임병찬 이름이 떠오른다. 동학 전쟁에서 패전하여 피신 중이던 김개남은 지인이었던 임병찬의 밀고로 체포되고 처형된다. 의병장 임병찬 눈에는 수명 다한 조선 왕조 세상을 뒤엎자는 동학 혁명이 비적(도둑)들의 역적 행위로 보였을까? 그들에겐 유교적 세계관이 제국주의를 우리 땅에서 몰아내고, 조선을 근대 공화정으로 이행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했을까?
의병장 임병찬은 1962년 건국포장을 서훈받은 반면,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에 대한 서훈은 아직 없다. 참조하시라. 동학농민혁명자에 대한 2021년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회’ ‘2심 위원회’에서 9명의 심사위원 중 절반 이상이 서훈에 반대했다 한다. 120년 전 신분 간의 갈등이 아직 남았는가? 아니면 우리 사회가 아직 120년 전의 세력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일까?
처형장으로 끌러가는 김개남을 따르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만 군사 어데에 두고 짚동우리가 웬 말이냐”
갑사 가는 길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 교과서에 ‘갑사 가는 길’이란 수필이 있었다. 12년 전 갑사와 같은 계룡면 경천리에서 내가 잠시 거주할 때 갑사 가는 길을 찾아 여기에 온 적이 있는데, 갑사 입구에서 막걸리 한 잔 하고 절에 들르지 않고 돌아갔다. 같은 길이라도, 혼자 길도 좋지만 함께 걷는 맛이 또 다른 모양이다. 여러 선생님들과 가는 길이라 갑사 사찰 안으로 들어가 갑사라는 절을 공부하다.
신영복 선생 말을 은근슬쩍 베껴보자. “혼자 갑사 가다가 절 입구에서 막걸리 한 잔 하고 돌아오는 것도 좋지만, 둘이 가서 사찰을 工夫(공부)하는 것도 막걸리 마시는 것보다 좋을 수도 있겠다.”
돌 하나의 참사
돌 하나 어린 시절, 메이저리그나 분데스리가에 진출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노래를 해야 하거나 시를 암송해야 하면 심장이 멈추고, 온몸이 굳어진다. 그래서 포기했다. 내가 만약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시속 150킬로의 강속구 투수 다음으로 마운드에 올라, 시속 30~40킬로로 투구해서 메이저리그의 날고 기는 타자들을 삼진으로 잡아야 할 때, 타자가 “어이 돌 하나, 노래해” 하면 내 몸이 굳어질 것이고, 분데스리가에서 당대 최고 공격수가 골키퍼까지 제치고 골키퍼와 놀던 나에게 공을 패스하여 내 발끝만 닿으면 골을 넣을 수 있는 상황에서 상대 선수가 “어이 한돌 '초혼' 낭송해 봐”하면 내 심장은 멈출 것이기 때문이다.
여행 첫날 밤 친교 시간에 이런 저런 이야기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마침내 노래 자랑 시간이 들어서자, 돌 하나의 신경세포 전령은 경계 경보를 보고하고, 심장은 비상 계엄 선포로 세차게 움직인다. 화장실에 자주 가고 싶어지고, 계시지도 않는 처삼촌 부고 소식을 기다리면서 핸드폰을 마구 본다. 마침내 내 차례가 온다. 휴 하면서 도살장에 끌려 가는 선한 한우의 체념한 눈동자를 한 채, 돌 하나가 개발한 오케스트라 지휘에 나선다. ”Amazing Arirang”을 주제로 삼았다. 허나 이미 물에 젖은 솜덩이가 된 내 감성은 살아나지 않는다. 지휘란 낚시처럼 감을 잡아 순간적으로 끌어당겨야 하는 것인데, 감성은 저 바닥에 떨어졌으니, 음마 음마 참사다. 2022년 5월 19일 밤은 돌 하나의 참사 날이다.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생각한다.
“음 정치할까? 말야. 다중석상에서 노래하거나 시 암송하는 것 금지법 만드는 것 말야. 노래시키는 것은 사주 선동죄로 아주 강하게 징역형을, 시킨다고 노래하는 것은 부화뇌동 죄로 조금 약하게 순화교육형으로 말야.”
신동엽을 30년 만에 만나다
내 나이 20대 30대였을 때, 나는 신동엽 시인을 좋아했다. 그동안 신동엽 시인의 시집을 대여섯 번 산 것 같다. 나의 지인의 손으로 가슴으로 시집 간 시집들 중 한 시집에 얽힌 일화가 하나 있다.
내 나이 30대 초반에 내 주변에 남자 여자 한 쌍이 있었다. 그 여자분이 그 남자를 좋아했는데, 그 남자는 시큰둥하니 그 여자분이 좀 달아올랐다. 어느 날 그 여자분이 나에게 어렵게 이야기한다. ‘저.. 석일씨. 내가 그 인간에게 좀 관심이 있는데, 그 자식은 전혀 나한테 관심을 보이지 않네요. 석일씨가 어찌 좀 해 볼 수 있나요?’ 당혹스런 순간이었다. ‘글쎄 글쎄…’ 말을 이어 가지 못하며, 속으로 ’니들 문제에 왜 날 끼워넣냐’며 투덜거렸다. 며칠 후 신동엽 시인의 전집을 뒤집다가 ‘여자의 삶’이라는 시를 발견했다. 그 페이지를 접어 두고, 그 남자를 만나러 가서 “동일씨, 신동엽 시인 알아? 내가 접어 둔 페이지 시를 동일씨가 한번 보면 좋겠어” 하고 시집을 전해주었다. 두서너 달 후 그 남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 자취방으로 놀러 오란다. 초대받은 그날 그 집에 도착하니 그 여자분도 와 있고, 이들 커플이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반겨준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 간 순간 머리가 어찔해진다. 그 남자가 신동엽의 ‘여자의 삶’을 손으로 적어 둔 메모지를 방 여기 저기에 붙여 둔 것이다. 자기들 결혼할 거란다. 그날 기분 좋게 술자리했다. 골수 예수쟁이로 술을 전혀 못하는 그 남자가 소주잔을 받고 소주 마시는 것을 홀짝홀짝 흉내 낸다. 그래도 쭈욱 마시라고 타박하지 않았다. 예수쟁이가 인간으로 육화해 가는 모습으로도 흐뭇한 자리였다.
‘동엽! 내가 말이야 젊은 시절 자넬 좀 좋아했었어’라는 의미의 방명록 인사를 남기고 신동엽 시인 생가를 나서다.
에필로그
이번 여행에서 일부러 여러 상념에 대한 메모를 남기지 않았다. 아니, 신동엽 생각에서 메모 좀 하려 했는데 글이 되지 않는다. 그래 이번 여행에서는 자유롭자. 그냥 보고 듣고 느끼고, 사람들 눈을 보기도 하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웅 그래 노래는 꼭 빼고, 그냥… 그렇게 돌 하나를 연필과 메모지에서 해방시켜 주자고.
우리가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일상 삶을 운영할 때, 인문학에서 배운 것들을 씨줄로 하고, 졸업여행에서 느끼고, 체감한 것을 날줄로 하여, 우리 몫의 성프란시스 길을 만들었으면 한다.
이 글 만들면서 혹시 이번 졸업에 참가하시지 못한 선생님과 자활 선생님들이 이 잡글을 보시어, 조금이라도 우리 야외 학습을 공유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들 저희 工夫(공부)하려 간 公·扶(공주·부여) 여행 잘 다녀왔어요!”
이제 말도 안되는 마구쓰기의 잡다하고 저급한 이 글을 매듭 하려 한다. 아 참 잊을 뻔 했다.
“우리 여행 중 우리를 공주와 부여 곳곳으로 데려다 주신 운전 기사님, 우리를 먹여준 식당 여러분들, 숙소 사장님 감사합니다. 우리 여행이 여러분들 가계에 조금이라도 도움되었나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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