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연아
인터뷰어 / 강민수, 김연아
인터뷰이 / 성지후 선생님
(성프란시스대학 18기 자원활동가)
“성장하고 싶으시다구요?
지금 그대로...
후퇴하지만 않아도 충분합니다.”
이번 인터뷰에 응해주신 자원활동가 선생님께서 글쓰기 수업 첫날 쓰셨던 이름 삼행시입니다. 이 삼행시만 봐도 느낌이 오지 않나요? 마음이 따뜻한 분이란 걸요.
16기, 17기 2년 동안 성지후 선생님과 함께했던 마명철 전 국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성지후 선생님은 우리 선생님들을 한 분 한 분 보고 계세요. 17기 졸업 소회 글을 보고 감동받았습니다.” 16기부터 현재까지 우리 선생님들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계신 성지후 선생님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선생님들과 지내면서 든 생각은 무엇이었을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Q: 성지후 선생님, 반갑습니다.
A: 안녕하세요. 성프란시스대학에서 3년째 자원활동가를 하고 있는 성지후라고 합니다.
Q: 선생님은 다시서기센터에서 아웃리치 일도 하셨다고 들었어요. 혹시 사회복지사이신가요?
A: 아니에요. 저는 엑스레이 찍는 기사예요.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고요.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은 있는데, 사회복지 일은 다시서기센터의 아웃리치 활동으로 처음 경험하게 됐어요. 아웃리치 활동에 꼭 사회복지사 자격이 필요한 건 아니거든요. (*편집자 주: ‘아웃리치(outreach)’란 상담원들이 직접 거리나 지하철 역사 등으로 나가 홈리스분들을 만나는 활동이다.)
Q: 아웃리치는 언제부터 하신 건가요?
A: 2019년 5월에 시작해서 2년 반 정도 했습니다. 작년부턴 쉬고 있어요.
Q: 성프란시스대학에는 2020년 16기 때 들어오셨죠. 그때 다른 활동가 선생님께서 인문학에 엄청나게 관심많은 분이 계시다며 모셔 왔던 기억이 나요.
A: 맞아요. 처음 성프란시스대학 얘기를 언뜻 들었을 땐,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는데, 지나간 역사 속에 그런 일이 있었고 지금은 하지 않는 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아웃리치를 함께 하는 활동가 선생님께서 인문학 봉사를 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진짜 그게 실재하는 대학인가요? 저도 가보고 싶어요.” 했더니, 마 국장님과 이야기가 돼서 가게 되었죠. 사실 진짜 그냥 한번 가보고 싶었던 건데, 인사를 간 첫날, 마국장님께서 갑자기 “새로운 활동가입니다. 인사하세요.” 이렇게 해서 인사를 하고 그 뒤로 계속 나가게 됐어요. 원래 인문학도 좋아했고 공부하는 학생처럼 간 건데, 가다 보니까 올해까지 하게 됐네요.
Q: 직업이 엑스레이 기사면 그쪽으로 학위가 있는 건가요?
A: 맞아요. 방사선과를 전공하면 국가고시인 자격 시험을 쳐야 해요.
Q: 그 전공은 어떻게 택하게 되셨어요?
A: 제가 98년도 IMF였을 때 고3이었어요. 사회 분위기나 주변 선생님들이 계속 전문대에 확실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얘기하던 때였어요. 근데 그 시대에 ‘나는 이런 걸 전공하고 이렇게 살아야지’ 생각하는 고3은 아마 없었을 거예요. 저는 당시 막연하게 국문과나 철학과를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당시 사회 분위기상 전문대를 가야 직업이 안정된다고 하니 일단 지원을 한 거죠. 근데 사실 대학교에 다니는 내내 싫었어요. 너무 생소하고,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재미도 없고요. 근데 뭔가를 바꿀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없으니까 그냥 졸업하고 취직하고 산 거죠.
Q: 고향이 어딘가요?
A: 울산이에요.
Q: 울산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신 거예요?
A: 예, 대학은 대구에서 다니고 울산에 다시 돌아가서 일하던 중에 서른한 살인가 서른두 살 쯤이었을 거예요. 서울에서 살아보고 싶었어요. 어릴 때부터 늘 서울에 대한 로망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서울의 한 병원에 취직해서 캐리어 하나 끌고 무작정 올라왔어요. 불편할 거란 생각을 못 하고 눈치 없이 서울 이모 집에 살다가 방을 구했죠.
Q: 서울에서의 삶은 어땠나요? 로망이 충족되었나요?
A: 달랐죠. 압구정에 있는 성형외과에서 엑스레이 찍는 기사로 취직됐는데, 그때는 저도 어리기도 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그리고 이모 집이 강동구였는데, 압구정까지 출퇴근 거리가 너무 먼 거예요. 근무시간도 길고, 친구도 없고. 마음 터놓을 데가 없고요. 처음에는 어리바리하게 아무것도 모르고 ‘와, 사람 많다’, ‘와, 지하철이다’ 이러고 다니다가, 어느 순간 버스 타고 혼자 집에 가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거죠. 그렇게 2년 가까이 있다 보니 모든 것이 허무해졌어요. ‘왜 살지? 나 뭐 하고 있는 거지?’ 싶었죠.
Q: 그러다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신 거예요?
A: 제가 코이카(*편집자 주: 한국국제협력단/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KOICA, 정부 차원의 대외무상협력사업을 전담 및 실시하는 외교부 산하기관. 해외봉사단 파견, 해외재난긴급구호, 민관협력사업, 국제기구를 통한 지원사업을 담당한다.) 봉사단원으로 2년 동안 아프리카를 다녀왔어요. 방사선 전공으로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우간다라는 나라에 있었죠. 거기서 지내면서 ‘이제 한국에 가면 엑스레이 찍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사실 그전부터도 생계수단이었지, 그 일로 보람을 느끼진 못했거든요. ‘아, 이제 이걸 살려서 사회복지 쪽으로 나가자, NGO나 국제기구에 가면 너무 좋겠다’라며 혼자 꿈을 가졌죠. 그래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면서 실습도 나가고 2주 정도 다른 기관에서 일해보기도 했어요. 근데 사실 현실적으로 좀 힘들더라고요. 제가 전공했던 걸 아예 버리고 새로 시작을 하는 건데, 막상 가서 일해보니 제가 생각했던 것과 좀 달랐어요. 그래서 우선은 파트타임으로 한번 겪어보자 했는데, 그때 ‘복지넷’이란 사이트에 아웃리치 상담원 모집 공고가 떠서 면접을 보고 들어가게 된 거죠.
Q: 왜 아웃리치를 선택하셨나요?
A: 저녁 시간이라 하고 있던 일과 병행할 수 있어서 좋았고 예전부터 노숙인분들과 대화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갈망이 강했어요. 서울에 처음 왔을 때, 우연히 서울역 앞을 지나간 적이 있었어요. 그때 한 여자분을 봤는데, 정말 망설이다가 다가가서 가방 안에 있던 샌드위치를 드시겠냐고 여쭤봤거든요. 그랬는데 그분이 “아, 이런 거 안 먹는다고!” 하고 소리치셨어요. 그래서 ‘아, 이분들이 외롭다고 아무에게나 마음을 여는 게 아니구나’라고 처음 알게 됐어요. 근데 아웃리치 일을 하면 그분들과 본격적으로 대화할 수 있겠다, 의미도 있고 좋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하다가 인연이 여기까지 왔네요. 인터뷰 오기 전에 ‘내가 어떻게 성프란시스대학까지 왔지?’ 하고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Q: 코이카 봉사는 어떻게 우간다로 가게 되셨어요?
A: 제가 하고 싶어서 마음먹고 공지를 살펴봤을 때, 방사선과는 딱 한 명을 뽑았는데 그게 우간다였어요. 만약에 우간다라는 나라가 싫으면 제가 지원을 안 하면 되는 건데, 사실 제가 극단적인 성격이 있는 것 같아요. ‘이왕 갈 거면 아프리카로 가자. 고생을 할 거면 진짜 죽도록 해보자’ 생각했죠. 가깝고 살기 좋은 동남아 국가들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근데 봉사인데 이왕이면 동남아보다는 아프리카가 더 낫지 않나 막연히 생각했어요.
Q: 막상 해보니 어떠셨나요?
A: 결론적으로는, 지금까지 제 인생에서 제일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그때 서른네 살이었는데요, 그때가 아니었다면 저는 못 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가지 않았다면 현재 제게 주어진 기회나 인연이 없었겠죠. 그리고 있는 동안에도 저는 되게 좋았어요. 물론 백 프로 다 좋았다는 건 아니지만,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었고, 좋은 사람들도 정말 많이 만났거든요.
Q: 물질적인 지원이 있었나요?
A: 네. 안전한 집을 구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줘요. 가기 전엔 당연히 흙집에 살고, 물도 못 끓일 거로 생각했는데, 생각 외로 살기에 괜찮았어요. 코이카가 국가기관이고 저희는 국가에서 파견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안전을 되게 신경 써요. 생활비도 주고, ‘정착 지원금’이라는 명목으로 한 달에 50만 원씩 적립해줬어요. 한국에서 공백기가 생기니, 그 돈은 2년을 모두 채우고 돌아올 때 주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무료로 가느냐”고 물어보면 “돈을 다 받고 간다”고 얘기하면서, 그런 의미에선 진정한 봉사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Q: 지후 선생님, 도전정신이 있으시네요.
A: 음... 조금요? (웃음) 근데 아프리카에서 봉사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제가 굉장히 용감하고 도전적이고 너무 좋아서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보이지 않는 엄청난 고민의 시간이 있었거든요. 굉장히 무섭고 두려웠지만, 이걸 안 하고 포기했을 때 후회가 더 클 거라는 걸 알았어요.
Q: 그래도 내가 현재 있는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걸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것 자체가 그냥 같은 곳에서 매일매일 반복적인 일상을 사는 사람들과는 다른 어떤 성격, 혹은 기질이 있는 게 아닐까요?
A: 맞아요. 그런 기질이 있는 것 같아요.
Q: 압구정동 성형외과와 아프리카 우간다. 극과 극인 것 같아요. 하신 일은 같았던 거죠?
A: 그렇죠. 우간다에서는 결핵 환자들을 만났죠. 저희는 국영병원으로 파견돼요. 우간다에서는 국영병원이 국민들에게 무료거든요. 결핵 환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증상을 가진 지역 주민들을 만났어요.
Q: 돌아와서는 서울에서 계속 사신 건가요?
A: 네. 저는 서울이 좋아요. 어릴 때부터 제 고향을 벗어나고 싶었어요. 울산에 있으나 여기 있으나 오라는 사람은 없지만, 서울에 갈 수 있는 곳이 훨씬 많아요. 아웃리치 같은 봉사활동도 서울이니까 가능한 거거든요.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많은 게 정말 좋아요.
Q: 아웃리치는 해보니까 어떠셨어요?
A: 처음에는 배고프시지 않을까, 춥지 않을까, 덥지 않을까 이런 부분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다니면서 외로움을 견딘다는 게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어요. 하루 종일 혼자 있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처음엔 ‘이렇게 추운데 어떻게 견디지? 대단하다.’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엔 ‘어떻게 저 외로움을 견디지? 정말 대단한데.’ 그 외로움을 견딘다는 게 너무 대단한 사람들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많은 생각이 들죠. ‘어떤 마음일까. 어떤 마음이면 저 외로움을 견딜 수 있을까. 우리가 과연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일까? 어쩌면 이분들이 원하는 건 밥이나 침낭이 아니라 외로움에 대한 해결 아닐까?’
Q: 옆에 누군가 함께 있어주는 것이 방법이 될까요?
A: 근데 그분들께서 마음을 열고, 저희가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 싶어요. 어디까지 하는 게 맞을까? 감정을 어떻게 분리해야 할까?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야간에 아웃리치를 하다 보니, 정말 도움이 필요한 분이 계셔도 정보를 안내해드리고 “선생님, 낮에 꼭 센터로 오세요” 하는 것까지 저희의 역할이에요. 그렇게 안내를 해서 실제로 그분이 갔는데, 예를 들어 담당자에게 전달이 제대로 안 됐다거나 제도적으로 지원이 어렵다고 하면 되게 상처를 받으시는 거죠. 제가 그분을 오롯이 책임질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 점에 있어서 한계를 많이 느꼈어요. 그래서 어느 순간 무력감에 빠져서 잠깐 쉬게 되었어요.
Q: 그러다가 성프란시스대학을 다니게 되신 거죠? 제 기억에 16기 때는 글쓰기 수업에 함께 참여하셨어요.
A : 네, 일주일에 한 번이었죠. 성프란시스대학에 대해선 제 마음가짐이 조금 달랐던 것 같아요. 만약에 다른 일이 생기면, 물론 죄송하지만 아웃리치는 빠질 때도 있었거든요. 근데 성프란시스는 빠진다고 생각하면 너무 죄송하고 마음이 불편한 거예요. 오히려 돈을 받고 하는 일은 돈을 안 받으면 되는데, 이건 제가 나오겠다고 약속을 한 거잖아요. 더군다나 자원활동가가 아무도 안 나오는 날이 있어요. 그러면 ‘오늘 아무도 안 나오는데 나까지 안 나가면…’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사실 너무 피곤한 날엔 마음의 짐처럼 꾸역꾸역 가는 날도 있었어요.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익숙해져서 이제는 정말 주인 된 마음으로 나가요. 의무감이 아니라 제 생활 속 하나의 스케쥴로 자리 잡아서 지금은 즐거워요.
Q: 지금까지 어떤 수업을 들으셨어요?
A: 16기 때는 박경장 교수님의 글쓰기 수업을 들었고, 17기 때는 김동훈 교수님의 예술사, 김응교 교수님의 문학 수업, 그리고 지금은 안성찬 교수님의 철학 수업을 듣고 있어요. 제가 철학을 좋아하거든요.
Q: 기억에 남는 수업이 있을까요?
A: 지금 철학 수업에서 조별 토론을 하고 있어요. 교수님께서 주제를 주시면 활동가 한 명, 선생님들 네다섯 분 이렇게 한 조가 되어 토론을 하거든요. 정말 너무 좋은 점이 모든 선생님의 말씀을 한 분 한 분 다 들어볼 수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무엇이 나를 자유롭게 하는가? 나의 버킷리스트는?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이런 철학적인 주제를 던지고 이야기를 나눠요. 제가 사회자가 돼서 “선생님, 스스로 본인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돌아가면서 얘기해볼까요?” 하면, 딱 첫 마디가, “아, 나 이런 거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하세요. 그런데, 바로 “나는…” 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유까지 얘기를 엄청 잘하시는 거예요. 그때 느꼈어요. 그런 질문을 처음 받았을 뿐이지, 그런 걸 모르거나 얘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아니었던 거예요. 누군가가 물어보면 자기에 관해서 얘기하고 싶었던 거잖아요.
Q: 조별 토론은 저희도 처음 들어보는데, 모두 적극 참여하시는군요.
A: 이번에 교수님께서 야심차게 준비하신 거예요. (웃음) 그런데 가끔 토론하면서도 선생님들 께서 얘기를 좀 장황하게 하실 때가 있어요. 시간은 제한되어있고, 다른 분도 얘기하고 싶을 거라는 생각에 ‘아, 저분이 너무 길게 얘기하는데 다른 분들이 화내시진 않을까?’ 이렇게 약간 긴장하거든요. 그런데 너무 놀라웠던 건 다른 선생님들께서 그분의 말을 굉장히 경청하시고, “선생님 너무 힘들게 사셨구나,” 하면서 오히려 공감을 표현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힘들게 사셨는데, 지금 정말 잘하고 계세요.” 칭찬까지 하시고요.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기에, 쑥스럽지만 본인 얘기를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고 서로에 대해 알게 되고. 진짜 감동이었어요. 또 어떤 분은 처음 오셨을 때 활동가들에 대해서 안 좋은 생각을 하셨대요. 남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도와주는 척 봉사활동 점수 쌓으려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조별 토론을 하면서 활동가에 대한 인식이 확 바뀌었다는 거예요.
Q: 어떻게요?
A: ‘아, 저 사람들이 자기 본업을 갖고 힘든 와중에 그 시간을 내서 여기 와준 게 너무 고맙다’라는 생각이 드셨대요. 조별 토론을 하며 1대1로 얘기하는 시간이 많아지니 서로를 이해하게 된 거죠.
Q: 선생님들 말씀하신 것 중에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을까요?
A: 사실 선생님들께서 어떤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하시든 결론은 항상 같아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에요. 예를 들면, 나는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저는 생각해보니까 이성적인 사람인 것 같아요”라고 말씀을 시작해도 “이성적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왔고, 그래서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는데, 가족이 그립다.”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거죠. 아니면, “나의 버킷리스트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서 일하고 싶다. 그래서 가족들한테 돌아가서 자랑스럽게 내 모습을 보이고 싶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항상 마음 한편에 남아있는 거예요. 한번은 17기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팔에 종양이 생겨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보호자가 없다, 사인해 줄 사람이 없다.’ 평소에 선생님들과 함께 수업을 들을 땐 자각을 못 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실 때 선생님들 마음속엔 항상 마지막 숙제처럼, 가족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다는 걸 느끼죠.
Q: 활동하면서 공감이 어려운 부분도 있었을까요?
A: 사실 아웃리치 할 때 가끔 보면 되게 건강하고 젊은 분들이 계세요. 제 마음가짐이 초심에서 멀어졌을 때, 가끔은 속으로 ‘왜 저 사람은 일을 안 하지? 나보다 건강해 보이는 젊은 남잔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제가 싫었어요. 왜 거리에서 자는지, 일을 구하지 않는지 그분들 책임으로만 돌리는 건 일차원적인 단순한 생각이잖아요. 왜 그분들이 살 집이 없는지 생각해보면 사실 사회 구조적인 문제거든요. 이분들은 주로 쪽방이나 고시원에서 생활하시는데, 건물주들은 재개발해서 돈이 더 많은 사람에게 팔고 싶어 하죠. 그러면 깨끗한 집이 새로 생기지만 그분들이 살 집은 없어지는 거죠. 우리가 계속 그런 상황을 만들고 있잖아요. 우리가 그분들을 거리에 있을 수밖에 없게 내모는 거예요.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돼요. 그냥 저는 성프란시스대학 선생님들과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제가 맡은 역할에 충실히 하려고 해요. 만약에 아웃리치를 다시 한다면 이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죠. 정답이 없어요. 항상 생각만 많아져요.
Q: 자원활동가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먼저 다가가는 거죠. 저는 사실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고 내성적이에요. 이렇게 말을 한번 하면 잘하지만, 굳이 제가 먼저 하진 않아요. 그런데 성프란시스대학에서는 제가 먼저 다가가요. 분위기메이커가 제 역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낮은 톤으로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것보다 “선생님! 식사하셨어요?” 이렇게 톤을 한 톤 높여요. 그게 제가 활발하고 기분이 좋아서 그러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가면을 쓰는 건 또 아니에요. 선생님들께서 일단 오시면 경직되어 있으세요. 상처가 많으시기도 하고, 자신을 보호하고 있단 말이죠. 제가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거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Q: 수업을 들으면서 아쉬웠던 부분은요?
A: 저는 다 만족스러웠어요. 선생님들께서 글쓰기에 대한 불만이 있긴 하시죠. 힘드니까요. 근데 글쓰기 수업인데 글을 안 쓸 수는 없잖아요. 선생님들은 이 나이에 숙제라니 너무 힘들다, 너무 강요한다는 의견이 많고 그러한 피드백이 교수님께도 간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글쓰기가 인문학의 정점이라고 생각해요. 인문학 수업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결국 내 것이 되기 위해선 내가 글로 써봐야 하는 거죠. 그래서 글쓰기를 하려면, 이건 저에게도 적용이 되는 건데, 조금의 강요와 데드라인이 있어야 해요. 그게 없으면 그냥 계속 생각만 한단 말이죠. 힘든 선생님들의 마음도 알지만, 저는 글쓰기가 굉장히 필요하고 강요를 해서라도 쓰게 만들어야 무언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하다 보면 다들 또 잘 쓰세요. 결국 해내세요.
Q: 글쓰기에 딱 맞는 자원활동가 선생님이세요. 16기 졸업 문집 제목이 <나의 인생의 마중물> 이었어요. 제 기억으로는 지후 선생님께서 ‘마중물’이라는 단어를 제안하셨죠.
A: 맞아요. 16기 한 선생님께서 쓰신 마지막 소감에 ‘지난 1년은 내 인생의 마중물의 시간입니다’라는 문장이 있었어요. 미리 물을 한 번 넣어야지 우물 밑에서 물이 올라온다는 거잖아요? 마중 나가는 물이라는 뜻인데, 그게 바로 성프란시스 활동가의 역할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 거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 비밀서클을 엿보듯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만났습니다. 매 수업시간 놀라고 게시판의 글을 보고 놀라며 경이로운 반 해를 보냈습니다. 어떤 사건들은 우리를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하곤 합니다. 성프란시스를 지나온 우리는 이제 그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땅속 깊이 잠자고 있던 생명수를 끌어올리는 마중물처럼 인문학 수업은 우리 마음속 깊이 스며있던 진짜 목소리를 끌어올려 마주보게 해주었습니다."
- 성지후 선생님 16기 졸업 소회 글
Q: 이전의 삶과 성프란시스를 지나와서 마주하게 된 삶이 어떻게 다른 걸까요? 이전의 삶은 무엇이었고. 성프란시스를 지나온 다음의 삶은 또 어떤 것일까요?
A: 선생님들께서 성프란시스를 거치면서 뭔가 작은 변화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변화라는 게, 조심스러운 부분인데, 저는 같이 수업을 듣는 선생님들께 “선생님, 지금 수업 들어보니까 어때요?”라고 여쭤보지 않아요. 이 말이 왠지 수업 들었으니까 좀 변해야지? 이렇게 물어보는 것 같아서요. 변화라는 것이 인문학적으로 개선되고, 술도 안 먹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이런 게 아니라 제가 아프리카에 다녀와서 사회복지 공부도 하고 세상 보는 눈이 넓어진 것처럼 ‘아, 세상에는 내가 아는 세상만 있는 건 아니구나.’ 하는 그런 작은 느낌인 것 같아요. 어떤 대단한 변화나 특별한 개선을 말하는 게 아니고요. 그런 말들이 부담이 될까 봐 조심스러워요.
Q: 지후 선생님께 성프란시스대학이란?
A: 철학 수업 때 ‘도구로서의 존재’와 ‘존재만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주제를 토론한 적이 있었어요.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저는 종일 도구로써 이용되고 있는 거예요. 출근하면 고용주가, 가끔은 부모님이랑 있을 때도 그래요. 결혼 안 하는 것을 문제로 삼을 때, “너 지금 행복하니?”가 아니라 “너 결혼 언제 할거야?” 하고 물으면, 도구로서 이용당한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내가 어떤 타이틀을 갖고 어떤 집에 사는지, 어떤 차를 모느냐가 중요하지 그 누구도 저에게 “요즘 마음이 어때?”, “제일 힘든 게 뭐야?”라고 묻지 않아요. 그죠? 그럴 때 한 번씩 정말 큰 피로감과 허무감이 와요. 근데 수요일 저녁에 일을 마치고 성프란시스대학에 가면 저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선생님들께. 저의 존재만으로, 저의 등장만으로요. “왔어요?” “밥 먹었어요?” 물어봐 주실 때, ‘내가 여기서 존재로서 인정받고 있구나.’ 그런 느낌이 딱 들 때, 진짜로 힐링이 돼요. 요즘 일상에서 존재로서 유일하게 저를 맞아주는 곳이 바로 성프란시스대학입니다. 서로 윈윈하는 공간이에요.
“성지후 선생님은 여러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술을 나르고 다른 선생님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그냥 스치듯 보아도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자세가 진지해서 감사함이 느껴졌다. ‘우리마을’에서도 고마웠다. 배OO 선생님이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우리마을 측의 선물을 받지 못했는데 선뜻 자신의 것을 건네주고 게임 진행도 즐겁게 해주었다. 나도 주위에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지만 성지후 선생님처럼 행동하진 못한다.”
- 18기 '소중한시간'님이 쓰신 소풍 후기 글 <부러운 성지후 선생님> 中
Q: 이거 글 보셨을 때 어떠셨어요?
A: 아유, 저 깜짝 놀랐죠. 누군가 나를 지켜보다니, 전혀 의식하지 못했거든요. 기분이 되게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뭘 부러워하는 걸까 정말 놀랐어요. (웃음)
Q: 서로를 보고 배우는 거잖아요. 지식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저렇게 하는구나, 보고 배우죠.
A: 저는 실제로 누구 얘기 듣는 걸 되게 좋아해요. 거기 계신 선생님들 얘기를 조금씩은 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옮겨 다닌 거죠. 여기에만 있으면 여기밖에 못 들으니까,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고, 상대가 얘기하니까 그냥 듣기만 한 건데, 아마 그걸 좀 좋게 보셨나 봐요.
Q: 가장 생각나는 선생님이 계실까요?
A: 김☆☆ 선생님이 계세요. 회식자리에서 선생님이 테이블에 아무 말 없이 혼자 앉아 계셨어요. 그래서 그분께 갔죠. 알고보니 굉장한 알코올 중독이셨대요. 물론 지금도 술은 드세요. “선생님, 뭐 많이 드셨어요? 한 잔 같이 해요.” 이렇게 한마디 했을 뿐인데, 선생님 얘기를 해주시는 거죠. 알코올 의존이 너무 심해서 정신치료도 오래 받았고, 사회복지사도 집에 오곤 했는데, 성프란시스대학 다닌 이후에는 술을 조절하신다는 거예요. 왜냐면 주중에 드시면 수업에 못 나오시니까요. 철학수업 토론 시간에 어릴 때 이야기도 들었는데, 8살 때부터 실질적인 가장으로 어마어마한 고생을 하고 사셨대요.
Q: 8살 때부터요? 너무 어린 나이였네요.
A: 네. 이제까지는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원망만 하며 살았는데, 성프란시스대학 다닌 이후에는 본인 스스로 이름을 부르면서, “☆☆야 잘할 수 있어. 너무 잘하고 있어.” 이렇게 얘기를 해준다는 거예요.
Q: 아, 훌륭하네요.
A: 너무 감동적이지 않나요? 진짜 훌륭하죠. 그래서 여기 오기 너무 잘한 것 같다고, 주위 사람들이 다 놀란대요. 변한 모습을 보고요. 사회복지사들도 선생님 왜 이렇게 변했냐고 하신대요. 그리고 다음 카페에 글을 제일 많이 올리세요. 맞춤법이 다 틀려요. 근데 그게 너무 매력적이에요. 그래서 저도 그분께는 특별히 댓글도 더 많이 쓰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제가 국장님께도 이 1년 과정이 끝나서 다시 무너지면 어떡하냐고 대책을 세웠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하고 그랬는데, 제가 정말 이분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게 아니라, 진짜 그렇게 지금까지 못 느껴봤던 것을 느끼신다는 게 너무 좋은 거죠, 선생님께서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 응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꼭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Q: 지금도 사회복지 쪽을 직업으로 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A: 네. 성향에 맞는 것 같아요. 사실 사람이 늘 변하잖아요. 어느 날에는 ‘돈을 진짜 많이 벌고 싶다. 내 또래 다른 여자들처럼 좋은 차 타고, 가방도 좋은 것 메고. 왜 나는 이렇게 살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결국엔 돌아오더라구요. 제 마음이 편한 데로 돌아와요. 아마도 여기에 관련된 일을 아예 안 하고 살지는 않을 것 같아요. 본업이 됐든, 지금 하는 활동이 됐든.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또 어떤 기회가 올지 모르죠.
Q: 앞으로의 꿈이 있으세요?
A: 제 소망은 늘 제 삶의 완전한 주인이 되는 거예요. 평생 가져가야 하는 건데, 어릴 적부터 갈망이 늘 있어왔어요. 서울로 오고, 아프리카를 갔다 온 그 모든 과정이 사실은 제가 훌륭한 인간이라서, 봉사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보다는, 저를 찾고 싶은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얼마 전 안재금 실장님께서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한 3년 정도 되었다고 하니 처음에 얼마나 갈지 지켜보셨다는 거예요. 오래 못 버틸 거라고 생각하셨대요. “버티는 힘이 뭐냐?”고 하시길래, 저는 버틴다고 생각은 안 했는데, 그렇게 물어보시니까 한번 생각을 해봤어요. 제가 요즘 온라인으로 정토회 불교대학 공부를 해요. 법륜 스님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불교에서 말하는 건 자유롭고 괴로움 없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려면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예전엔 그게 어떤 방법으로 되는지 몰랐어요. 주인이 뭔지부터 몰랐거든요. 근데 불교 공부를 하면서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을 조금씩 알아가고, 마음에 안정을 찾고 있는 것 같아요.
Q: 어떻게 하면 주인으로 살 수 있는 건가요? 저희에게도 비법을 좀...(웃음)
A: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아침 5시에 일어나서 108배를 해야 돼요. 불교대학과는 상관없이 하고 싶은 사람들끼리 줌으로 보면서 하는 건데, 5시에 일어나서 45분 정도 절하고 명상을 매일 매일 해요. 어릴 때는 5시에 알람이 울리면 끄고 자는 게 자유라고 생각했거든요. 내가 하기 싫을 땐 하지 않고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자유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게 아니래요. 나한테 도움이 된다면 하기 싫더라도 하는 게 자유래요. 나를 넘어서는 거죠. 일어나기 싫은 나를 일으켜서 40년 동안의 습관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 일어나기 싫음을 넘어서는 것. ‘아, 괴로워. 나 왜 5시에 일어나지?’가 아니라 그냥 일어나서 그냥 하는 거예요. 그게 내 고집, 아집, 습관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나중엔 나의 감정에 대해서도 이게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이 너무 밉더라도 ‘아, 미워하는구나,’ 그러면서 그 사람을 진짜 증오하진 않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 바르게 세상을 보는 것? 저도 여기까지만 정리가 됐네요. (웃음)
Q: 성프란시스대학하고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나요?
A: 저도 사실 어떤 사람을 볼 때 ‘아, 저 사람 너무 좋아. 저 사람 너무 싫어.’ 이렇게 호불호가 커요. 그런데 제가 본 그 순간만 나쁜 거지, 그 사람 전체가 나쁜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근데 불교 공부를 하면서 그 순간만 보고 ‘저 사람 나랑 안 맞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 많이 깨졌어요. 성프란시스대학에서도 어떤 선생님께서 했던 말을 또 하시거나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하셨을 때도 이분은 그 순간 그 말을 하고 싶으셨을 뿐이지, 저를 괴롭히려고 하신 말은 아니잖아요? 예전에는 ‘왜 했던 말을 또 하시지... 집에 가고 싶다.’ 생각했다면 지금은 ‘아, 저 사람은 지금 저 문제가 자기 마음 속에 굉장히 크구나.’ 관점을 자꾸 다르게 보면서 그 사람과의 관계를 망치지 않게 되는 거죠. 내 마음대로 누군가를 평가하고 판단하려고 할 때 그걸 딱 멈추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 같아요.
지후 선생님, 장시간 인터뷰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길벗이야기 14호부터는 웹진 제작 및 인터뷰 글 작성을 강민수 선생님과 함께 성지후 선생님께서 해주실 예정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웹진 > 제13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프란시스 글밭] 덩치 큰 머스메 (15기 故 박두영 선생님 추모 글) (0) | 2022.07.05 |
---|---|
[성프란시스 글밭] 그러는 거 아냐~ (15기 故 박두영 선생님 추모 글) (0) | 2022.07.05 |
[성프란시스 글밭] 추모시 (15기 故 박두영 선생님을 추모하며) (0) | 2022.07.05 |
[길벗 광장] 외톨이 (15기 故 박두영 선생님을 추모하며) (0) | 2022.07.05 |
[성프란시스 글밭] 工夫(공부)하러 公·扶(공·부)를 다녀오다 (0) | 2022.07.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