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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9호

[역전 칼럼] 내가 누군지 말해주세요

by vie 2021. 11. 2.

박경장 (글쓰기 교수, 문학평론가)


누구나 한 번쯤 서울역 지하도나 광장을 지나치며 술에 취해 길바닥에 누워버린 노숙인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 허나 보았다지만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해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를테면 어쩌다 거리까지 나앉았을까,’ ‘사랑하는 아내, 자식, 부모, 친구가 있()지 않()을까,’ ‘삶의 계획이나 미래 꿈은 있을까,’ ‘저러다 죽을 수도 있는데 죽음이 두렵지 않을까,’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할까,’ ‘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도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돕는다면 누가 도와야 하나, 내가, 시민단체가, 지자체가, 국가가,’ ‘어떻게 도와야 하나등등.

하지만 분명한 점은 저들도 당신이나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그들은 가정을 잃어버린 홈리스라는 사실뿐. ‘다 큰 성인인데 가정을 잃었다고 길바닥에 나앉기까지 할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이가 부모를 잃거나 부모로부터 버려질 때처럼 성인도 가정을 잃었을 때 겪는 충격과 영향은 엄청나다. 인간은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에서 성장하며 가정을 이루고 가정의 품에서 죽는다. 그리하여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정은 인간 존재의 반석이다. 그 반석이 무너지면 그 위에 쌓아올린 인간실존의 몸체와 정신 또한 절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일상의 희노애락을 나눌 식구가 없다는 건 살아갈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거세당한 것이다.

성프란시스대학은 인문학과정이지만 저녁 한 끼라도 함께 밥을 지어 나누는 밥상공동체를 중요한 학사과정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1년 인문학과정 참여자들은 동학이자 식구이다. 졸업 후엔 동문으로 인생길을 함께 가는 도반이다. 하지만 하루해가 저물어 돌아가는 고시원과 쪽방엔 언제나 그렇듯 기다리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한겨울 모로 누운 어깨의 시림을 아느냐며 나를 앞에 두고 허공에 물음을 던지셨던 선생님. 애초부터 그 지독한 외로움에 대한 물음은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순간 망연했던 나는 한참이 지난 뒤 유쾌하게 헹궈진 외로움을 선생님의 글속에서 엿보았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 저녁
/문틈에 놓인 회색봉투/. . . 000 귀하/반가운 마음에 덥석 잡았다/자세히 보니 00세무서/. . . 상반기 주민세 고지서이다/. . .겨우 6천원 받으려고 이런 우편물을 보내다니/고지서 만들고 보내는 비용이 3천원은 들겠네/초겨울 어느 날 또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00세무서/이번엔 독촉장이다/과태료 붙여서 6,120/. . .원가도 안 되는 돈을 받으려고/이걸 왜 보냈을까?/. . .“그대, 덕분에 아직 나도 대한민국 사람인 걸 알겠구나 허허허!/내일은 꼭 내야지/막걸리가 살짝 달달해졌다.”

- 이경로 <편지> 중에서

 

오랫동안 불리지 않아 스스로도 낯설어진 이름 000. 그 이름 뒤에 귀하까지 붙여 고시원 문틈에서 000을 맞이하는 편지. 무언가 당신을 기다린다는, 누군가 당신을 찾는다는 반가운 마음에 덥석잡았다는 대목에서 난 비로소 선생님의 시린 어깨에 손을 얹었다. 비록 과태료 붙여 6,120원짜리 주민세 고지서지만 선생님이 대한민국 사람인 걸 알려준 고마운 편지. 덕분에 막걸리가 살짝 달달해졌다 하니.

인문학 6기 전태선 선생님은 <내 이야기 들어볼래요>에서 성프란시스대학에 온 것은 무엇을 배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리워서 왔다고 했다. 졸업장을 들고 헤어진 아내와 딸 앞에 당당하게 나타나고 싶었는데, 그만 졸업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술김에 아내에게 연락해 만났단다. 할 이야기가 참 많았는데 정작 만나선 아무 말도 못 하고 헤어졌다는 선생님. 6기 자원활동가로 영화를 전공한 남경순 선생님은 6기 선생님들의 1년 인문학과정을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세요>란 제목으로 다큐를 찍어 이듬해 인권영화제에 입선했는데, 직접 나레이터를 맡아 전태선 선생님이 사시는 지하 쪽방에 찾아가 인터뷰를 했다. 은막 위에 몽글몽글 피어오른 담배연기를 바라보며 말을 잊어버릴까 봐 가끔 허공에 대고 말을 해라고 운을 뗀 전 선생님. 정말 말을 잊어버렸던 걸까. 안타깝게도 4년 전 선생님은 쪽방에서 고독사하셨다.

 

 

<내가 누군지 말해주세요>

카메라에 잡힌 인문학선생님들이 삶을 연기하고 있다
연기 같은 삶

며칠 방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가끔 혼자 허공에 대고 말을 해
말하는 걸 잊어버릴까봐

햇빛도 몇 번
땅 밑으로 꺾어진 계단에 막혀 들어올 엄두를 못내는 지하 쪽방
전태선 선생님 방 한켠엔 무가지가 가지런히 쌓여있었다

벽지 벗겨진 바람벽엔
강하게 살아야 돼 강하게휘갈긴 글씨가
담배연기에 쿨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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