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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9호

[인물 인터뷰] "성프란시스대학의 독자적인 운영이 제 꿈입니다"

by vie 2021. 11. 2.

글 / 김연아
인터뷰어 / 강민수, 김연아
인터뷰이 / 안재금
(다시서기센터 행정실장)


성프란시스대학 강의실에 계시진 않지만 입학식, 졸업식과 같은 행사, 봄, 가을소풍이면 어김없이 개량한복을 입고 나타나시던 분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날카로운 눈빛에 괜히 겁먹어서 시선을 피했던 것 같은데, 어떤 분이신지, 어떤 역할을 하고 계신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다시서기센터에서 이제 10년 차, 안재금 실장님을 만나보았습니다.

왼쪽 마명철 학무국장님, 오른쪽 안재금 실장님


Q: 다시서기센터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어요?

A: 얘기하자면 조금 긴데요, 전임 다시서기센터장이셨던 여재훈 신부님이 전도사로 처음 부임한 곳이 성공회 광명교회였거든요. 그때 저는 광명교회 교인이었고 헌금 관리하는 재정을 맡고 있었어요. 여재훈 신부님하고 저 둘 다 집이 가까워서 굉장히 친했어요. 여 신부님이 발령받아 다른 곳으로 근무지를 옮기셨어도 계속 관계를 이어왔죠. 그 후 제가 은행과 증권회사 등 금융기관을 다니다가 20년 만에 명예퇴직을 했는데, 신부님이 성공회 관련 사회복지시설이 많으니 사회복지 공부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강권하셨어요. 15년 전이라 사회복지 쪽 급여가 워낙 적어서 고민이 됐지만 우선 자격증은 따 놓았죠. 퇴직하고 다른 일 좀 하다가 동탄에 있는 복지관에 지원해보라고 하셔서 거기에 좀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 여신부님께서 다시서기센터에 회계 업무를 담당할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전화를 주셨죠.

 

Q: 15년 전부터 사회복지에 몸담게 되신 거네요?

A: 네. 정확히는 2010년부터 시작해서 다시서기센터에 오게 된 건 2012년이었어요.

 

Q: 다시서기센터에 처음 오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A: 사실 노숙인 시설로는 영등포 문래동에 있었던 ‘자유의 집’에서부터 봉사를 계속 하고 있었어요. IMF 직후 생긴 최대 수용인원이 약 1천 명 정도인 대규모 시설인데, 성공회에서 노숙인 관련으로는 처음으로 맡아서 하게 됐거든요.

 

Q: 자유의 집이 현재도 운영되고 있나요?

A: IMF 때 실직한 사람들이 대거 노숙인이 되면서 자유의 집도 최대수용을 하며 운영이 되다가 사회가 정상화가 되고 노숙인이 줄어들면서 알코올 중독과 정신과 질환이 있는 분들만 남게 되었어요. 그러자 2004년에 장안동으로 옮겨 ‘비전 트레이닝 센터’로 이름을 바꿨어요. ‘비전 트레이닝 센터’도 성공회가 계속 운영하다가 반납한 게 불과 4~5년밖에 안됩니다.

 

Q: 자유의 집에서는 어떤 봉사를 하셨어요?

A: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정도로 각 교회가 돌아가면서 이것저것 다 했어요. 배식봉사, 간식 제공, 빨래봉사, 청소 같은 봉사들이요. ‘자유의 집’에서는 한 3년 정도 봉사하고 ‘비전 트레이닝 센터’에서는 사회복지사 자격증 딸 때 사회복지 실습을 했어요.

 

Q: 실습까지 하시게 되면서 노숙인 시설과는 계속 접점이 있으셨던 거군요.

A: 그렇죠. 그래서 다시서기센터에 왔을 때도 거리낌 같은 건 전혀 없었어요.

 

Q: 행정실장의 역할을 소개해 주세요.

A: 행정실장은 센터장을 보좌하면서 다시서기센터의 모든 행정업무를 총괄합니다. 다시서기센터는 현장실장과 행정실장, 이렇게 2실장 체제로 업무가 분담이 되어 있고요. 현장실장은 서울역 희망지원센터와 무료진료소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고, 행정실장은 숙대입구 종합지원센터와 일시보호시설을 담당하여 모든 사업의 예산과 지출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제가 관리하는 파트는 일시보호시설 운영지원팀, 임시주거 지원사업 파트, 일자리 지원사업 파트, 길 카페와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등이 있네요. 성프란시스대학의 경우 학무국장은 진행을 담당하고, 행정실장인 저는 전체 학사일정과 예산 편성, 지출과 관련하여 센터와 교수진 사이에서 의사결정하는 데에 브릿지 역할을 담당합니다.

 

Q: 10년 동안 쭉 일을 해오시면서 어떨 때 보람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A: 다시서기센터에서 근무하기 시작하고 첫 5년은 거의 매일 야근하면서 갖추어져 있지 않던 행정체계를 세웠습니다. 센터가 세워진 지 이미 10년 정도 지났었지만 회계, 총무 쪽 전문인력 없이 현장 위주로 운영이 돼서 행정력이 굉장히 약했거든요. 현장은 강했지만 행정이 약해서 여러 문제가 발생했었는데, 제가 5년 동안 행정적인 업무를 체계화하는 데 주력을 한 거죠. 처음 센터에 왔을 때 전체 예산이 약 20억이었는데, 지금은 4배가 늘었고 종사자 인원도 3배 정도 늘었어요. 그렇게 되면서 거리 선생님들께 제공해드릴 수 있는 서비스가 세밀해졌다고 봐야죠. 1:1 사례관리도 예전엔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됐거든요. 성프란시스대학도 수료하신 선생님들에 대한 사례관리가 쉽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보건복지부와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 운영비는 인건비로 쓸 수 없다 보니 학무국장 자리를 다시서기센터 정식TO로 하지 못했거든요. 인건비를 기업 후원금으로 대신 하다가 후원금이 끊기면서 그 대안으로 학무국장을 정식TO로 인사발령 낼 수 있는 방안을 찾게 됐어요. 2017년부터 정규직 직원이 학무국장이 되면서 안정적이고 세밀하게 사례관리를 할 수 있게 됐죠. 그렇게 어느 정도 시스템이 자리 잡고 나니 저도 2017년부터는 풍물패 두드림을 이끌기 시작한 거고요.

 

Q: 두드림 공연은 성프란시스대학 졸업식마다 매년 볼 수 있었죠! 실무자와 지역주민, 성프란시스대학 졸업생이 참여할 수 있는 소모임이라고 항상 성프란시스대학 선생님들께 홍보하시곤 하셨는데요, 2017년부터 시작된 건가요?

A: 두드림은 2011년부터 이미 시작된 모임이긴 했어요. 수많은 선생님들께서 거쳐 가셨는데, 지금 4기 박수백 선생님이 제일 오래되셨고. 아마 2기인가 수료는 못하셨지만 정유철 선생님이 계시고, 11기 최중겸 선생님, 14기 윤영옥 선생님, 그리고 15기 김영훈 선생님이 계시네요. 초기에 박경장 교수님께서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주셨고 지금은 풍물패 단원으로 참여는 안 하시지만 워크샵이나 엠티에는 꼭 참여하세요. 현재는 앞서 말씀드린 인문학 출신 선생님 다섯 분, 강사님, 지역 주민 세 분 그리고 저까지 총 10명이 매주 목요일마다 만나서 연습하고 있는데, 실무자는 저 혼자예요. 4년째 매주 목요일 저녁이 없는 삶을 살고 있어요. (웃음) 다시서기센터 프로그램 사업비로 진행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실무자가 없으면 금방 와해되거든요.

 

Q: 그렇게 오랫동안 꾸준하게 무언가를 한다는 게 쉽지 않은데 대단하세요.

A: 사적인 일들을 다 뒤로 해야지만 이게 가능한 건데, 하다 보니까 또 이렇게 해왔네요, 두드림에 대한 책임감도 생겨서요. 덩달아서 성프란시스대학에 애정이 없을 수가 없고요. 그 전부터 성프란시스대학 후원금이나 재정상태와 관련한 살림을 해오다 보니 어쨌든 성프란시스대학이나 두드림 둘 다 제 관심 영역에 늘 들어와 있죠.

 

Q: 4년 정도 참여하시고 나니 어떠세요?

A: 사실 처음에는 이분들이 와해될 것 같아 제가 참여해서 중간 다리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했어요. 두드림이 매주 연습을 하는 가장 큰 목적은 성프란시스대학 입학식과 수료식 때 공연하기 위해서거든요. 그렇게 정기공연을 계속 하다 보니 여기저기 소문도 나고 공연 요청이 제법 와요. 다른 단체나 시설에서도 공연을 할 때도 많고요. 제일 오래되신 박수백 선생님이나 최중겸 선생님께는 두드림이 삶의 전부예요. 박수백 선생님은 지금 암 투병 중이신 데도 계속 연습을 나오세요. 이분들이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건 이 두드림 덕인 거예요. 그래서 제가 빠지기 쉽지 않아요. (웃음) 개개인의 에피소드는 엄청 많은데 정돈된 언어로 표현하는 게 쉽지 않네요. 어쨌든 현재 17기하고 계신 배OO 선생님께도 졸업하면 두드림 함께 하자고 꼬시고 있어요. 코로나 터지고 나서는 제대로 연습을 못하다가 작년 비대면으로 진행한 달팽이 음악제에 참여했어요. 그 이후로도 코로나 때문에 못 만나다가 추석 이후 백신 접종 완료자 위주로 연습을 진행하고 있어요.

https://youtu.be/CiEmga85nXw (달팽이음악제 유튜브 영상, 두드림의 실력 감상해보세요!)

 

Q: 11년씩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두드림만의 매력이 무엇일까요?

A: 첫째는 4기 박수백 선생님이 동네 어귀 정자나무처럼 한결같이 참여하고 계신 점, 둘째는 전임 강사이신 유은하 선생님과 현재 강사로 수고하시는 백수영 선생님께서 참여자들의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리더십, 셋째는 가족처럼 끈끈한 단원들의 관계와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사례관리를 한 점, 넷째는 공동체 의식을 갖도록 서너 명의 지역주민을 단원으로 참여시켜 함께 어울리도록 개방한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왼쪽에서 첫 번째 안재금 실장님
실무자와 지역주민, 인문학 졸업생이 함께하는 풍물패 두드림

 

Q: 아까 다시서기센터의 규모가 커졌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오히려 센터 이용하시는 노숙인분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나요?

A: 10년 전보다는 분명히 감소 추세에 있어요. 전수 조사한 결과도 그렇고요. 코로나 때문에 거리에 계신 분들은 조금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서울시 전체 한 40개 시설 이용자 수를 보면 많이 줄었습니다. 그 이유로는 첫 번째 노숙 쪽도 고령화돼서 사망하시는 분들이 늘어나면서 자연감소한 부분이 있고요. 두 번째로는 주거정책으로 인해 감소한 게 있죠. LH 매입임대주택 지원을 받아서 서울시에서 누적으로 830~40명 정도가 지역사회에서 정착해서 살고 계세요. 그중 다시서기센터는 80세대 정도를 관리하고 있고요. 그리고 세 번째로는 서울시에서 우리 숙대 센터와 같은 일시보호시설이나 희망지원센터 응급대피소, 서대문 구세군브릿지센터와 영등포 보현지원센터 등 종합지원센터 등을 이용하는 분들께 쪽방, 고시원 등을 임시주거 지원을 하고 있거든요. 다시서기센터의 경우 연간 약 540명, 최대 6개월까지요. 임시긴 하지만 초기 노숙하는 분들껜 큰 도움이 되죠. 거리노숙에서 벗어나 서울역 근처 고시원, 쪽방, 여인숙에서 사시게 되니 센터 이용하는 분들이 줄어든 거죠. 마지막으로는 일자리 지원인데요. 공공일자리 지원 예산이 좀 늘어나서 여기에 참여하시면서 월급을 받아 스스로 고시원이든 아니면 임대주택이든 주거를 얻어서 나가신 분들이 다시서기센터에만 45명 정도 계세요. 사실 성프란시스대학도 그 역할을 한 거예요. 1년 동안 일자리와 주거 문제로 학교를 빠지시는 일이 없도록 우선적으로 지원해드리고 있거든요.

 

Q: 선생님들이 인문학을 통해서 변화하신 모습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A: 인문학의 필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울역 거리의 인문학은 이미 고유명사가 된지 오래고 그 용어에 대한 책임감도 막중하게 느끼고 있어요. 거리의 노숙인 선생님들이 성프란시스대학을 통해 변화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오랜 시간 지켜보았고 거리의 선생님들께도 소문이 나서 인문학의 존재를 모르시는 분들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인문학의 필요성은 졸업생들의 설문조사 결과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응답자 167명 중 현재 거리에 계신 분은 2명에 불과하거든요. 인문학을 쭉 끌고 오면서 한 번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바로 이 졸업생들에 대한 설문조사였어요. 졸업하신 선생님들이 어느 위치에 가 있고 어떻게 살고 계신지에 관한 데이터를 좀 모아보자. 서울역 주변에 얼마나 계시고 지역사회 주민이 되신 분들이 얼마나 계신지. 제가 먼저 얘기를 꺼내서 학무국장에게 비용은 아낌없이 쓸 테니 한번 해보라고 한 거예요. 259명의 졸업생 모두와 연락이 닿진 않아서 데이터가 충분하진 않지만 우선은 졸업한 분들의 현황을 한 번 파악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토대로 앞으로 인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고 논의해보고 있고요.

 

Q: 어떻게 논의가 되고 있나요?

A: 교수님들과 실무자들이 다 함께 고민하고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지금 커리큘럼에 변화를 줘야 하지 않나. 개인적으로 17년 동안 진행된 인문학 콘텐츠를 바꿀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선생님들께서 지역주민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와 관련된 것들과 금전관리와 같이 실생활에 필요한 과목을 넣으면 어떨까 해요.

 

Q: 근데 그런 것들은 인문학의 영역은 아니지 않나요?

A: 인문학의 영역인 현재의 과목은 그대로 유지하고 제가 얘기한 것들은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서 하나의 과목으로 추가했으면 좋겠다는 얘기예요. 예를 들어 금요일에 한다고 하면 한 과목으로 묶어서 전반기에는 주택관리 혹은 의복관리, 후반기 때는 요리와 금전관리 이런 식으로 말이죠. 물론 거기에는 다양한 강사 분들의 섭외가 있어야겠고 필요하다면 외부로 나가는 강의가 있을 수도 있겠죠. 요리학원에 3개월 과정을 들을 수도 있는 거고요. 아직 구체화된 것은 없고 여러 방향으로 논의만 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고민으로는 교육 장소에 대한 문제예요. 인문학이 지속성을 담보하려면 독립적인 장소를 확보하는 게 급선무거든요. 사실 그 부분을 기업후원과 연계해서 뭔가 해보려는 노력은 계속하고 있어요.

 

Q: 현재 성프란시스대학만의 공간이 없는 걸 말씀하시는 거죠?

A: 네. 장소가 협소하기도 하고, 현재 강의실로 쓰고 있는 다시서기 무료진료소는 병원이다 보니 거리두기가 끝나도 밥을 해 먹기가 쉽지 않잖아요. 여섯 시 끝나기 이전부터 밥을 해야 하는데 냄새 때문에 진료소에서 말이 나올 수도 있고, 야간진료가 있을 수도 있고 1층에 있는 우체국도 신경 쓰이고요. 개인적으로는 서울시에서 노숙인 교육센터를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각 지역의 광역자활센터들은 자체적인 교육센터를 가지고 있거든요. 그런 것처럼 노숙인 시설 종사자 혹은 당사자 교육을 위한 교육센터를 하나 만들어서 평상시에는 교육용으로 활용하고, 야간에 성프란시스대학이 사용할 수 있게끔 개방해줬으면 하는데, 서울역 주변 임대료가 너무 비싸서 엄두를 못 내고 있다고 하네요. 또 다른 방법으로는 근처 교회 교육관을 빌리는 방법도 있어서 여러 목사님들께 문의를 해보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성공회대성당에 장소가 있긴 한데 시청역 근처라서요. 서울역에서 한 정거장이긴 하지만 서울역 근처가 아니면 선생님들께서 오시기 어려울 것 같아요.

 

Q: 기업 후원이 끊기고 나서 봄소풍도 12일로 갔던 걸 지금은 당일치기로 가고 있죠?

A: 그렇죠. 기업 후원도 끊기고 코로나 상황이 맞물려서 작년과 올해는 당일로 진행했어요. 그래서 이제 세 번째 고민이 예산 관련된 것이에요. 커리큘럼의 문제, 교육장소의 문제, 그 다음이 운영 예산의 문제인거죠. 현재 보건복지부와 서울시 매칭 프로그램 사업으로 받은 보조금을 정규과정에 투입하고 나머지는 CMS 후원금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사실 곽노현 학장님 취임하시고 나서 한 달에 20만 원이던 후원금이 200만 원이 되긴 했어요. 박한용 교수님을 비롯한 성프란시스대학 교수님들께서 많이 애써주셨고요. 제가 바라기로는 월 500만 원 정도가 모이면 다른 곳에 손 벌리지 않고도 자체적으로 운영은 가능할 것 같거든요. 게다가 이번엔 정부 사업비가 6월에 나왔어요. 3월부터 6월에 들어간 비용은 저희 자체 후원금으로 감당했어야 해서, 올해는 이 부분이 정말 힘들었어요.

 

Q: 비용 대비 인문학의 효과성이 낮다, 또는 좀 더 구체적인 결과물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A: 그분들의 관점이 오로지 물질적인 탈노숙에만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 결과물이라는 것이 숫자로 보이는 실적을 말하잖아요? 성프란시스대학의 학생 인원수로 교육비를 n분의 1해서 1인당 들어간 교육비 대비 어떤 결과가 나왔느냐를 따지고, 탈노숙을 얼마나 했느냐를 보는 건데, 그건 말이 안 되죠. 저는 현재 그 점에 있어선 우리 인문학이 방향을 잘 잡아 나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선생님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게 하고 낮아져있는 자존감을 높여준다는 측면에서요. 솔직히 인문학이라는 학문이 실제 살아가는 데에는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게 아니니까요. 종교가 영적인 양식 역할을 하듯이 인문학이 정신적인 양식으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는데, 성프란시스대학은 그 정신적인 부분에서의 역할을 잘 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희만의 결과물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지난번 설문조사보다 더 심층적인 조사 과정이 필요할 것 같아요.

 

Q: 마지막으로 꿈이 있으신가요?

A: 제가 정년퇴직이 2년 남았는데, 2년 안에 성프란시스대학이 독자적으로 독립을 해서 보조금을 받지 않고도 운영이 가능한 상황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어쨌든 관(官)의 지원과 간섭을 받는 상황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커리큘럼 운영에 유연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거든요. 지원이 끊기는 것에 대한 불안감도 있고요. 그리고 사실 교수님들 강사료의 현실화를 위해서 제 나름대로의 노력을 많이 했는데, 아직도 많이 부족해요. 기업후원이 8천만 원만 딱 연결이 되면 저도 큰소리치면서 인문학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웃음) 아무튼 성프란시스대학의 독자적인 운영이 제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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