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문학 입문. 희랍어 시간
박경장/성프란시스대학 글쓰기 교수
지난 해 10월 10일 스웨덴 한림원은 소설가 한강을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선정 이유를,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면서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밝혔다. 국내 평론에서는 좀처럼 보지 못한 간단명료하면서도 적확한 한강문학세계에 대한 평가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다는 말엔 곧장 5.18 광주를 다룬 『소년이 온다』와 제주 4.3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가 떠오르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한다는 말엔 한강 소설작품 전편에 배어있는 주제의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강렬한 시적 산문’이란 당연히 이 주제들을 실어나르는 형식으로서 문체, 곧 작가 한강의 고유한 스타일일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기자가 물었다. “한강 문학에 입문하려는 독자에게 제일 먼저 읽으면 좋겠다고 추천하는 소설이 있습니까?” 한강의 답변은 그녀를 단번에 국제적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2016년 맨부커상 수장작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최신작 『작별하지 않는다』였다. 추천 의도를 밝히진 않았지만, 내용과 형식면에서 그녀의 다른 소설들과 비교해 진입장벽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고 생각한 이유가 아닐까 추측한다. 다루는 주제의 무게뿐만 아니라 형식면에서도 그녀의 소설은 일반 독자에겐 낯설 뿐만 아니라 불친절하기까지 하다. 그녀의 어떤 소설이든 한 번 읽어서는 숭숭한 그물코마냥 섬세하고 미세한 의미어들은 죄다 빠져나가기 일쑤다. 그런 연유로 나는 한강문학세계 입문작으로 『희랍어 시간』을 적극 추천한다.
『희랍어 시간』을 입문작으로 추천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한강의 ‘강렬한 시적 산문’의 정수를 온전히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의 ‘이야기 시’ 같은 이 소설에서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본격적으로 맞서기 전 ‘언어적 트라우마’에 맞닥뜨린 작가 한강의 언어의식과 조우하게 된다.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에서 한강은 소설을 쓸 때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이에게 전달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한다. 작가란 모름지기 타인과 시대의 아픔을 누구보다 섬세하고 여리게 앓는 걸 천직으로 받아드린 사람이다. 남의 아픔을 대신 또는 함께 앓는다는 점에선 언뜻 ‘무병(巫病)’과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병 없이 흰 원고지를 마주할 수 있을 만큼 무감하고 무모한 작가가 얼마나 될까.
그런데 원고지를 마주한 작가에겐 앓아야 할 또 다른 무병이 기다리고 있다. “셀 수 없는 혀와 펜들로 수천 년 동안 너덜너덜해진 언어. 그녀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덜너덜하게 만든 언어. 하나의 문장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늙은 심장이 느껴”지고 “누덕누덕 기워진, 바싹 마른, 무표정한 심장. 그럴수록 더 힘껏 단어들을 움켜쥐”(『희랍어 시간』에서 발췌)어야 만 하는 ‘언어적 트라우마’라는 무병. 이 무병은 비록 대신 앓는 의사(疑似, pseudo)고통이지만 세상의 ‘유일한 아픔’으로 전달되도록 찾아 헤매야 하는 싱싱한 언어와, 어느 누구에게서도 시도되지 않은 생경한 문장들과, 이를 차곡차곡 쌓되 어느 것과도 닮지 않아야 하는 언어구조물, 게다가 세월의 더께로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언어라는 등짐을 게고동처럼 이고 가야하는 언어 무병이다. 이는 작가에겐 천형(天刑)이요, 업(業)이다. 한강은 이 업의 생리를 누구보다 섬세하게 의식하고, 그 수난(passion)에 생의 열정(passion)을 온전히 바쳐온 작가이다. 『희랍어 시간』은 타인의 고통과 그 고통을 유일무이한 고통으로 실감되도록 언어의 시원(始原)을 향해 거슬러오르는 작가의 고투가 가장 깊고 또렷이 새겨진 한강의 ‘지문’ 같은 소설이다. 그리니까 『희랍어 시간』이라는 입구를 통해 한강 문학세계로 진입해야 이후 그녀가 어떻게 역사적 트라우마에 본격적으로 맞서는지, 인간 삶의 연약함을 작품에 따라 어떻게 고유하게 폭로하는지, 한강 특유의 그 강렬함과 섬세함을 온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산문으로서 『희랍어 시간』 의 서사구조는 단순해도 너무 단순하다. “말語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眼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라는 출판사 설명에 덧붙일 것이 딱히 없다. 이 단일 서사구조에 얽힌 어떤 복잡한 서브플롯이란 없다. 하지만 한강 특유의 강렬한 시적인 관점에서 산문의 서사구조를 다시 살핀다면, 『희랍어 시간』의 플롯은 복잡해도 너무 복잡해진다. 기-승-결 앞으로 나아가려는 산문(prose)적 운동과 수직으로 파고 들어가려는, 또는 원주를 돌며 팽팽한 구심력의 긴장을 유지하려는 운문(verse)적 운동 사이의 상호작용(interaction)으로 얼기설기 다층위로 짜인 플롯이다. 이 다층위의 플롯 속에서 이야기와 시, 보르헤스의 불과 칼, 사유와 감각, 평면과 입체, 소리와 빛, 과거와 현재, 이상과 실재, 관념과 실제, 철자와 음운, 플라톤과 원효, 고대희랍어의 중간태와 잠재태 등등의 주요 모티브들이 역동적으로 교호하며 독특하고 강렬한 시적 산문 『희랍어 시간』의 유기적 텍스트를 짜나가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칼과 불
『희랍어 시간』의 첫 문장은 20세기 대표 지성이자 남미문학의 거목인 루이스 보르헤스의 묘비명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남자주인공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달되는데,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구성을 암시하는 일종의 제사(題詞, epigraph) 역할을 한다. 구성적 측면에서 보면, 이 문장은 고대 북구 서사시에서 인용한 것으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침상에서 보낸 첫 밤이자 마지막 밤, 새벽이 올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 장검이 놓여있다는 내용에서 따온 것이다. 『희랍어 시간』 마지막에서도 두 남녀 주인공이 한 침상에서 보낸 첫 밤이자 (아마도) 마지막 밤이 될 새벽 즈음에, 남자는 꿈속에서 “칼집 속에 빛나는 칼”을 떠올린다.
주제적 측면에서 보면, 이 문장은 보다 깊고 넓게 의미심장한 함의를 지닌다. 소설 속에서 어느 연구자가 밝혔듯이, 그 짧은 묘비명은 ‘서슬 퍼런 상징’으로 보르헤스 문학으로 들어가는 의미심장한 열쇠--기존의 문학적 리얼리티와 보르헤스 식 글쓰기 사이에 가로놓인 칼--인 동시에, 한강 문학으로 들어가는 고유한 지문이기도 하다. 우선 물리적 측면에서, 칼은 눈眼을 잃어가는 남자주인공에겐 빛으로부터 차단을, 말語을 잃어가는 여자주인공에겐 소리로부터 차단을 상징한다. 하지만 칼의 이런 상징적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는 두 주인공 사이에 차이가 있다. 보르헤스의 실명이 부계 유전 때문이듯, 남자주인공 또한 마찬가지로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여자주인공의 경우는 훨씬 복잡하다.
여자주인공은 언어에 대한 남다른 감각과 의식을 태생적으로 타고난다. 여섯 살 어린 나이에 모국어 자음 ‘ㄴ’과 ‘ㅅ’이 각기 다른 모음과 결합할 때 미묘하게 소리가 다르게 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조합할 수 있는 모든 이중모음을 머릿속에서 만들어보았으며, 작대기로 흙바닥에 적어간 문장들의 결합으로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음운들의 경이로움에 흥분과 충격에 휩싸인 기억을 아직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초등학교 들어가서는 인상 깊다고 느낀 단어들을 일기장 뒤쪽에 적기 시작했었는데, 그녀가 가장 아꼈던 단어는 ‘숲’으로, 이 글자에서 옛 탑의 조형적 이미지를 떠올린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그러다 중학교 들어서는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입을 열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소름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문장도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얼음처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워 토하고 싶었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며 지나치게 예민한 언어의식으로부터의 고통을 호소한다. 마침내 열일곱 살이 되던 겨울, 그녀로부터 언어가 갑자기 사라진다. 그녀와 세상 사이에 말을 단절시킨 ‘칼’이 놓인 것이다.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말과 단절하게 된 원인을 유추할만한 단서는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이를 가진 줄도 모르고 장티푸스에 걸려 약을 과다 복용해 그녀를 지울 뻔했다. 친지와 이웃들은 가까스로 태어난 그녀를 두고 “하마터면 넌 못 태어날 뻔했”다는 말을 생각 없이 내뱉곤 했다. 이혼소송에 실패하고 아이 양육권도 빼앗긴 그녀는 자살을 하려고 손목을 그었는데, 의식을 차렸을 때 이런 말이 들려왔다. “미친 여자한테 그동안 아이를 맡기고 있었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심경을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세 치 혀와 목구멍에서 나오는 말들, 헐거운 말들, 미끄러지며 긋고 찌르는 말들, 쇳냄새가 나는 말들이(. . .)조각난 면돗날처럼 우수수 뱉어지기 전에, 막 뱉으려 하는 자신을 먼저 찔렀다.” 그녀에게 말과 언어는 단순한 소리나 문장이 아니다.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얼음처럼 선명하게 드러내며, 여린 마음을 긋고 찌르고 배는 못이나 면돗날 같은 날카로운 무기이다. 누구보다 그것의 위험성을 알기에 그녀는 말語을 닫은 것일 거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사실 이 소설의 반은 열일곱 살 그녀에게 처음 찾아온 침묵이 삼십칠 세에 다시 찾아올 때까지, ‘철자와 음운’ 사이의 ‘성립 불가능한 오류’에 대한 그녀의 시적 메타포 탐구라 할 수 있다. 낱낱이 들리고 읽히는데 입술을 열어 소리(음운)를 낼 수 없는 언어(철자)란 “육체를 잃은 그림자처럼,” “죽은 나무의 텅 빈 속처럼,” “운석과 운석 사이의 어두운 공간처럼,”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 혈관의 내부처럼,” “작동을 멈춘 승강기의 통로처럼,” “오래 침수돼 접착력이 떨어진 타일들처럼,” “자각 없이 썩어간 살의 일부처럼,” “몸이 없는 헛것처럼,” 입술을 잃은 단어요. 이뿌리와 혀를 잃은 단어요. 목구멍과 숨을 잃은 단어이다.
눈眼을 잃어가는 고대 희랍어 강사와 말語을 잃어가는 수강자가 만나는 찰나의 수평적 이야기(prose) 사이에 수없이 파고드는 ‘~처럼’들의 시적(poetic) 단절이 파편처럼 흩어졌다 단층처럼 겹겹이 이어진 소설이 『희랍어 시간』이다. 소멸돼가는 감각으로 인해 오히려 감각 자체에 대한 의미심장한 철학적 성찰과 섬세한 시적 은유로 발전되며 실존의 의미를 묻는 소설이 『희랍어 시간』이다.
작가 한강처럼 여자주인공 또한 시집을 묶어 내고, 서평지에 칼럼도 쓴 작가였으며, 출판사에서 편집일을 했고, 대학과 예술 고등학교에서 문학 강의를 했다. 8년 전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울 무렵, 그녀는 인간의 모든 언어가 압축된 하나의 단어를 꿈꾼 적이 있었다. “어마어마한 밀도와 중력으로 단단히 뭉쳐진 단 한 단어. 누군가 입을 열어 그것을 발음하는 순간, 태초의 물질처럼 폭발하여 팽창할 언어.” 이는 언어의 시원(始原)을 찾아 수많은 언어의 갈래 길을 배외하는 모든 시인의 꿈일 것이며, 바로 작가 한강의 꿈이기도 할 것이다. 그녀는 아이를 재우다 설핏 잠들 때마다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그 언어의 결정(結晶)이 그녀의 더운 심장에, 꿈틀거리는 심실들 가운데 차디찬 폭약처럼 장전되는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그건 보르헤스가 자신을 태우는 ‘불’이기도 했다.
보르헤스 불의 상징적 의미는 남자주인공과 그가 독일에 있을 때 사귄 벗으로 이른 나이에 병사한 요아힘 그룬델에 대한 회상에서 발전된다. 그룬델은 이십 년간의 투병으로 언제 어느 곳에서든 죽음과 맞닥뜨릴 준비가 돼 있는 사람으로, 다독가에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오랜 투병 끝에 병원 밖으로 나와 처음 사귄 사람이 바로 남자주인공인데, 그에게 그룬델은 지독히 까다로운 동갑내기 스승이었다. 둘은 밤늦도록 여러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곤 했는데, 특별히 그 무렵 남자주인공이 붙들고 있던 주제-‘어둠의 이데아, 죽음의 이데아, 소멸의 이데아’-에 대해 그룬델과 나눈 토론을 회상한다. 남자는 보이는 빛의 세계를 잃을 것이기에 한칼에 감각적 실재를 베어내버리는 불교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유로 불교에 관한 보르헤스의 대중강연 번역문고판과 불교에 관한 다른 책들을 사서 독일로 가져가 시간 날 때마다 읽곤 했다. 독일 유학과정에서 전공한 플라톤 철학의 핵심인 이데아와 원효 불학의 핵심인 화엄 사이에서 어떤 연관성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룬델을 사로잡은 건 이데아나 화엄이 아니었다. ‘물리적 실재와 시간, 무에서 뜨겁게 폭발하며 태어난 세계, 전진하기 전에 영원히 서성이고 있었던 시간의 씨앗. 불붙은 채 소멸에 맞서는 생명’을 그룬델은 맨손으로 만지고 싶었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오직 강렬한 것, 생생한 힘,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이데아나 관념의 세계로 화엄 같은)를 꿈꾸는 건 죄악이고, 아름다운 건 붐비는 거리이며, 햇빛이 넘치는 트램 정류장이여, 세차게 뛰는 심장이며, 부풀어 오르는 허파이며, 아직 따뜻한 입술이며, 그 입술을 누군가의 입술에 세차게 문지르는 거’였다. 이데아, 화엄, 진리 같은 브라만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느낄 수 있는 구체적 감각의 세계 아트만인 것이다. 그것은 ‘보르헤스가 자신을 태우는 불’이라 불렀던 것이며, 브룬델이 평생 동안 처절하게 싸웠으나 결국 패배해버리고 만 생명의 불꽃이었다.
언어 없이 움직이고, 언어 없이 이해하던 여자주인공의 침묵의 세계를 건드린 것은 ‘비블리오떼끄’라는 평범한 불어단어였다.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말년의 보르헤스에게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 자리가 부여돼, 책과 밤을 동시에 준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비블리오떼끄.’ 이 낯선 단어 철자를 방심한 두 입술이 어린아이처럼 달싹이던 순간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갔다’는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 건,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침묵이 다시 찾아온 삼십칠 세 때였다. 학창시절 ‘비블리오떼끄’가 되찾아준 철자(단어)와 음운(소리)의 헐거운 만남이 일으킨 ‘희열과 죄’를 이번에는 문명 이기와 인간 오욕의 때가 아직 타지 않은 고대 희랍어를 통해서 찾아보려는 것이다. 그 희열과 죄가 폭약의 심지처럼 타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그녀에게 ‘보르헤스가 자신을 태우는 불’이라고 불렸던 생명의 불꽃일 것이다.
평면과 입체
『희랍어 시간』의 구성은 독특하다. 모두 22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마지막 22장은 ‘0’장으로, 그것도 이탤릭체 ‘0’으로 표기돼 있다. 길이도 천차만별이어서 반 페이지에서 수십 페이지까지 다양하다. 각 장의 시점도 변화가 심해 3인칭 시점으로 그나 그녀에 대해 관찰하거나,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두 사람의 과거 기억을 떠올린다. 또는 일인칭 남자주인공 시점으로 직접 내면을 고백하기도 한다. 다만 일인칭 여자주인공 시점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데, 마지막 ‘0’장의 일인칭 ‘내가’가 남자주인공인지 여자주인공인지가 불분명하다. 글의 형식도 내적독백 또는 의식의 흐름 같은 것들이 독백이나 대화 또는 시의 형식으로 어떤 뚜렷한 인과적 맥락 없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다. 한 장 안에서도 ‘*’ 표식으로 가른 절들 사이의 어떤 인과관계를 유추하기란 쉽지 않다. “말語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眼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라는 평면적 구조에 다양한 형태의 조각난 기억들이 입체적으로 끼워져 있는 다층·다면구조이다. 한강의 다른 소설들도 『희랍어 시간』과 마찬가지로 이 둘을 짜 맞추어야 하는 창조적이고 지난한 독법을 요구한다. 이 열린 텍스트를 무한히 확장, 완성시켜나가는 공동 생산자로서 창조적 독자를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한강은 『희랍어 시간』에서 소설구조의 산문적 평면과 시적 입체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의미를 여자주인공이 초등학교 때 만들었던 만화경과의 비유 속에 짐짓 흘려놓는다. 말을 잃었을 때 조각나 파편이 된 풍경을 만화경 세 조각 평면거울에 붙어 있는 색종이들에 비유하고, 만화경을 흔들었을 때 이상하게 펼쳐지는 입체적 세계를, 그녀 안에서 “조각난 기억들은 움직이며 무늬를 만든다. 어떤 맥락도 없이, 어떤 전체적인 조망도 의미도 없이. 조각조각 흩어졌다가 한 순간 단호히 합쳐진다. 무수한 나비들이 일제히 날갯짓을 멈추는 것처럼” 비유한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괴기스런 기억-아홉 살 여름, 키우던 백구가 차에 치어 아스팔트 바닥에 종잇장처럼 달라붙었다. 그녀가 다가가 개의 상체를 끌어안으려하자, 개는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어깨를, 가슴을 물어뜯었다-은 조각난 파편처럼 그녀 (무)의식의 거울 표면에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그날, 그 뜨거운 아스팔트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던 백구는 왜 그녀를 물었던 걸까?” “왜 그토록 세게,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살을 물어뜯었을까?” 3인칭 시점에 물음형식으로 다시 떠올린 이 괴기스런 기억은 소설의 어떤 요소와 상호연관 속에서 튀어나온 파편일까? 이는 『희랍어 시간』을 비롯한 한강 소설의 대부분에서 변주되면서 독자에게 던져지는 질문이다. 조각난 파편 같은 평면적 산문과 입체적 시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독자의 가슴을 물어뜯는 에피파니(Epiphany)의 순간! 그 순간은 독자가 보르헤스 칼이 지닌 서슬 퍼런 상징을 냉철하게 발견한 순간이며, 보르헤스의 불에 온 몸이 덴 뜨거운 감각의 순간이다. 이것이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는 한강문학의 특징이며, 그 특징이 가장 예리하고 뜨겁게 등록된 지문 같은 소설이 『희랍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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