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혜진
인터뷰어: 김혜진
인터뷰이: 박한용 교수님: 성프란시스대학 한국사 교수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 1기부터 지금의 20기까지 한국사를 가르치고 계신 박한용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교수님의 지나오신 길과 성프란시스대학 노숙인 인문학에서의 20년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Q: 안녕하세요. 교수님.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시간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에 성프란시스대학 모임에서 교수님께서 시를 멋지게 암송하시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어릴 때 무척 가난 했기 때문에 책을 읽는 것 말고는 별로 할 것이 없었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교수님 어릴 적 이야기부터 듣고 싶어요.
A: 어릴 적에 책 읽는 것을 좋아했어요. 중학교 때 가난한 집 아들이 할 게 없잖아요.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밥 먹고 학교에 가면 도서관밖에 열린 곳이 없었어요. 그럼 아침 수업하기전에 책 한권 읽곤 했죠. 옛날에는 중3 방학때쯤 되면 한국 전집 다 읽고 고 3이면 세계 문학 전집 다 읽었다고 잘난 척하고 그런 게 있었어요. (웃음) 나도 그런 세대이고 그 때는 책 이외에는 놀게 없었어요.
Q: 어릴 때에도 역사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A: 독서를 참 좋아했어요. 만물박사라는 별명도 있었고 문학을 참 좋아했거든. 진로에 대해서는 뭘 해야 할 지 몰랐는데 역사를 공부하면 여러가지를 다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동네도 고려대학교가 가까우니까. 차비도 안 들겠다.
Q: 가까워서 그냥 선택한 학교가 고려대였네요. (웃음)
A: 거기 살았으니까요. 근데 대학에서 술만 배워가지고. 공부는 술집에서 했어요. (웃음)
Q: 대학 때 동아리 활동도 많이 하셨나요?
A: 그 때는 서클시대였죠. 유신시대라 중고등학교 때는 자율성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중고등학교 자치회라는 것은 없고 학도호국단이 있었단 말이야. 군사조직 같은 거였죠. 비유하자면 반장이 교련시간에는 소대장이 되는 거야. 일주일에 두 번인가 교련이 있었어요. 수류탄 던지기도 해보고.
Q: 아 그래요? 그 때는 고등학교때 그런 걸 다 배웠군요. 예전에 웹진에 쓰신 글 중에 야학활동이야기가 있었는데 대학에 가서 서클 활동하시면서 야학도 시작하시게 된 건가요?
A: 일종의 도피라고 할까.. 우리 집이 매우 가난했어요. 도시 빈민으로 살았죠. 고등학교때 아버지가 빈민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새마을 취로 사업에 나가셨어요. 가난한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까 이주 동안 일을 하면 이주 동안은 쉬어야 해요. 이주동안 일 해서 받는 돈을 일본말로 간조라고 하는데 그걸로 온 식구가 연명했어요. 나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의 세계를 떠나고 싶었을 꺼 아니에요. 그 시대만 해도 가난 속에는 가정폭력이 횡횡하고 아이들은 학교도 못 가고 제대로 된 보호도 교육도 받지 못하고... 그런 것을 보면서 성장을 했죠. 그러니까 그 가난한 세계가 너무 떠나고 싶었는데 유일하게 가난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은 교육이었어요. 요즘은 교육도 세습되지만 그 때는 교육이 신분상승의 도구였고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도 있었던 거죠. 그렇게 해서 고려대학을 들어온 거에요. 우리 친인척을 통들어 대학을 다닌 사람이 나 빼고는 한 명도 없었죠.
Q: 어렸을 때 공부를 잘 하셨으니 부모님께서는 교수님이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하셨겠네요. 대학에 붙어서 부모님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셨을까요.
A: 그렇지만도 않았어요. 그 때는 대학 가는 인구도 많지 않았고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고 대학가는 시대였죠. 그리고 고려대학에 들어간 건 자랑스럽지만 들어간다고 해도 등록금이 고민되는 시대니까. 나도 우리 고모님이 등록금을 대줬지. 그러니까 대학에 입학하고 신분상승의 욕구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대학생활 중에도 열등감이 있는 거야. 그래서 뭔가 많이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서클을 많이 들었어요. 그때는 누가 술을 많이 먹이는지에 따라서 서클을 정했어요. (웃음)
Q: 술 잘 마시기로 유명한 고려대라 더 이해가 가네요. (웃음)
A: 그래서 봉사서클을 갔더니 너무 환영을 해주는 거야. 고등학교때는 선배들을 보면 선도부 같은 데서 지적당하니까 피해 다녔거든. 근데 여기는 너무 친절하고 밥도 사주고 술도 거하게 사주는 거야. 그래서 가입을 한거야. (웃음) 근데 맨날 술만 먹으니까 나중에는 허전해지더라고. 집 가는 길에 마음이 뻥 뚫린거야. 내가 대학 다니는 이유를 모르겠고... 그 때 야학을 하게 된거에요. 야학이 중계동이였는데 난 지금도 거기 가면 눈물이 좀 나려고 해요. 암산이라는 곳에 넓은 개인 집인데 거기서 야학을 했어요. 이름이 상록수의 집이에요.
Q: 이름도 참 맑고 예쁘네요.
A: 낮에는 술 먹고 수업을 대충 하더라도 거기 가면 뭔가 의미 있고 보람찬 하루 같았어요. 버스로도 두 번 갈아타고 20분을 걸어가야 돼요. 거기가 마들 평야인데 비가 오면 무릎까지 황토에 빠지는 곳이야. 야학을 할 때 내 또래나 나보다 어린 청소년들이 수업을 들으러 오는데 주로 가정주택 지하에 조그만 편물 기계 놓고 어린 소녀들이 일하는 가내 영세 수공업 방직공장 같은 곳에서 일하는 친구들이었어요. 그러면서 나는 그렇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빈민의 세계에 다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거야. 그 바닥 삶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친숙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야학에는 두 갈래가 있었어요. 하나는 검정고시를 치르고 진학을 목표로 하는 그야말로 순수 야학이고 또 하나는 노동 야학, 운동권이 하는 거였죠. 단순하게 의식화라고 말할 수만은 없지만 노동자로서 자기 삶에 대한 자각을 하게 하는 거였죠. 그 때 노원구 쪽에는 열 두개의 야학이 있었는데 그만큼 도시 빈민들이 많았다는 얘기죠. 나는 검정고시 야학을 했는데 이 친구들이 열심히 해서 고등학교 검정고시는 합격을 해요 근데 실제로 대학을 가는 사람은 없어. 밤에 공부하러 야학을 오면 다 졸아요. 고된 노동에 치져서. 그리고 대학이라는 곳에 붙어도 등록금을 낼 수도 없고. 그 때 내가 크게 배웠던 것은 검정고시 야학은 한계가 있다는 거에요. 실제로는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한계가 있었던 거에요. 그리고 또 하나는 대학생 선생님들을 보면서 어느새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는 거야. 자기 자각과 긍지가 아니라 자기 계급에 대한 부끄러움이 생기는 거죠. 상승 욕구는 생기는데 실현시킬 수가 없쟎아요. 그 때 검정고시 야학이라는 것이 그런 욕구. 욕망만을 만들어 놓고 정작 우리는 해결책 없이 무책임하게 사라진다는 점이 많이 힘들었어요. 우리가 같이 버스를 타러 나갈 때 거기를 지나는 교복입은 여학생들을 만나면 이 친구들이 고개를 숙여요.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아니까 참 괴롭고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가끔 신문기자들이 와서 취재하면서 이런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희망과 꿈을 잃지 않는 어린 근로자들. 그리고 이들을 챙겨주는 대학생들이 아낌없이 봉사를 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살만하다 라는 기사를 써요. 이 노동자 아이들이 주체가 아니라 살만한 우리 사회가 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이런 왜곡된 기사를 보면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죠. 한번은 졸업식때 중등과 고등 과정을 다 마친 친구가 이런 얘기를 해줬어요. 그 당시 유리벽이라는 노래가 유행이었는데 ‘선생님도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도 선생님을 사랑했습니다. 분명히 사랑했지만 우리 사이에는 유리벽이 있었습니다. 손을 잡으려고 해도 손을 잡을 수가 없었고 가까운 듯하지만 멀게만 느껴지는 유리벽이 있었습니다’. 그 얘기에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그 마음이 정확히 느껴지면서 이 유리벽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화두가 저에게 생긴거에요. 그 모든 것들이 혼란스러웠죠. 그 때 읽은 책 중에 이청춘의 <당신들의 천국>이 있어요. 소록도 나환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거죠.
Q: 저도 대학 때 읽었던 기억이 나요.
A: 이곳은 일제 때 생체실험이나 불임시술등 온갖 비인간적인 일들이 자행됐던 곳인데 새로 백원장이라는 사람이 부임하면서 열심히 일을 해요. 거기 있던 사람들도 처음엔 불신하다가 점차 신뢰를 쌓고. 그러면서 백원장은 소록도에서 낙원을 만들고자 하지만 결국 태풍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지면서 나환자들의 분노를 사고 이들이 백원장을 죽이러 와요. 그 때 백원장에게 화두가 생긴 거야. 나도 당신들을 사랑하고 당신들도 나를 사랑하는데 왜 나를 죽이러 왔는가? 그러다 임기가 끝나서 그 곳을 떠났다가 나중에 그 화두에 대한 숙제를 풀기 위해서 다시 소록도로 돌아와요. 그때 그 곳의 한 장로가 답을 줍니다. 당신은 소록도 나환자들의 꿈을 몰랐다. 그들의 꿈은 대한민국을 자유롭게 다니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그저 평범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이 꿈이다. 근데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당신은 소록도를 천국으로 만들어 그 안에 우리를 가두어 두려고 했다. 그것은 당신들만의 천국인 것이지 우리들의 천국이 아니다. 그 때 나도 나의 화두에 대한 답을 찾은 거에요. 나도 검정고시 야학에서 학생들을 도구화 시킨 것이구나. 거기서 나의 야학이 끝나요. 열심히 노력해도 대학 진학이 가로막히는 한계, 삶을 변화시킬 수 없는 한계, 이런 교육적 과정의 한계에서 야학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의 답은 사회를 봐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 때 경제학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게 됐지요.
Q: 그 말씀은 야학을 듣는 사람들이 변화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시스템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경제학을 공부하셨다는 거죠?
A: 그렇죠. 빈민은 사회경제적 모순의 산물이에요. 따라서 그런 문제들은 개인의 호의만으로 해결되지 않죠. 예를 들면 우리가 성프란시스대학에서 인문학을 한다고 노숙의 구조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아요. 이 안에서만 삶의 수준이 올라가고 내려오고 하지 어떤 삶의 한계선을 넘기는 어려운 일이죠.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사학과 대학원에서 마르크스 자본론에 기반한 부총양삼(도미즈카 료조)의 경제학론을 듣게 됐는데 내가 야학을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나오더라고요. 이 경제학원론은 단순한 경제학이 아니라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 자본가의 착취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 당시 불온서적이라는 하는 책들을 읽으면서 비로소 야학때의 혼란스러운 질문들에 대한 두통이 사라졌어요. 결국은 세상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죠.
Q: 교수님이 야학을 하시면서 가졌던 고민들에 대한 답을 그렇게 찾으신 후에 가난하고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의 삶에 더 다가서게 되신 건가요? 성프란시스대학 노숙인 인문학과정과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하네요.
A: 야학을 할 때 나보다 두세 살 어린 최준영이라고 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에 입학도 한 친군데 어느날 전화가 왔어요. 노숙인들 인문학 학교를 만들었는데 역사학 교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때 나는 민족문제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는데 연구소 일이 너무 바빠서 할 수 없다고 했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선생님이 옛날에 나를 가르쳐줄 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오게 되었죠 (웃음).
Q: 야학을 하실 때는 외면하고 싶었던 도시빈민의 삶을 다시 접하면서 교수님 마음속에 혼란과 질문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교수님이 가졌던 고민들에 대한 답과 삶의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다시 가난의 삶과 마주하신 거네요.
A: 좋아하는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 라는 구절 중에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라는 구절을 좋아하는데. 나에게는 숙명 같은 싯구절이구나 생각했죠. 가난이 지긋지긋 해서 내가 도망간다고 해도 도망가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죠.
Q: 아마도 교수님의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고 그 가난의 아픔을 이미 알고 같이 느끼셨기 때문이겠죠. 교수님께서 야학을 하면서 가졌던 고민을 이야기하셨을 때 저도 제가 가지고 있는 고민들을 생각했어요. 서울역에서 아웃리치를 하거나 성프란시스대학에서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열심히 하시면 삶이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선생님들께도 그렇게 말씀드리곤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과연 현실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 것인가, 그럼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A: 중요한 것은 nobody 에서 anybody 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닌 그 누군가로 가는 것이죠. 자기 존엄성의 문제에요. 인문학 2기 선생님께서 하신 말인데 ‘우리는 노숙인이 아닙니다. 쪽방에서도 살고 고시원, 사우나에서 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노숙은 아닙니다. 우리는 집이 없는 게 아니라 가족이 없습니다’. 하우스리스가 아니라 홈리스라는 거죠. 내가 죽거나 살거나 무슨 일을 해도 아무도 나를 위해서 슬퍼하거나 기뻐하지도 않는 그런 사회적 고립감과 상실감을 느끼는 거죠. 우리 인문학은 그 속에서 선생님들의 몸과 마음을 보듬을 수 있는 위생병원도 되어야 하고 친정집도 되어야 하고 상갓집도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인문학 1년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주고 든든한 공동체가 되어서 선생님들의 말라버린 마음을 적셔주고 가끔씩 세상이 흔들 때에도 혼자 든든히 설 수 있는 자립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Q: 네. 그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분들이 원하는 집이라는 것은 단순히 몸을 누이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가족과 같은 이웃이 있고 사회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서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을 해요.
A: 성프란시스대학에서 첫 빈소를 차린 적이 있어요. 그 때 어떤 선생님께서 이제는 나도 죽어도 쓸쓸하진 않겠네라고 하시더라구요. 예전에는 돌아가시면 무연고로 시립병원에서 시신 기증을 많이 했대요. 아무도 슬퍼하는 사람 없이 아픈 삶을 살다가 쓸쓸하게 떠나셨지만 이제는 빈소를 차려드리고 많은 이들이 애도하고. 또 잘 보내드리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 성프란시스대학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봐요.
Q: 선생님들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것 같아요. 이전의 시간들이 내가 원하지 않는 수동적인 삶이었다면 인문학을 통해서 앞으로는 삶의 주체가 되어 능동적으로 살아가실 수 있다면 좋겠어요.
A: 1년 동안의 인문학 과정은 본과가 아니라. 관계를 가지기 위해 토대를 다지는 예과인 셈이죠. 그 시간을 함께 겪어야 마음을 열고 삶의 이야기를 하죠.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데 1년의 인문학 과정 이후에 후속 프로그램이 없다는 것이 아쉬운 부분이기도 해요. 예산이 문제니까요.
Q: 나에 대해 생각하고 나를 표현하면서 누군가와의 관계속에서 신뢰를 쌓아 나간다는 것 자체가 인문학 1년 과정의 큰 의미인 것 같아요. 그리고 후속 프로그램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간혹 1년을 끝내고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가시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교수님께서는 1기 때부터 지금의 20기까지 오랜 시간 인문학을 가르치셨는데 기억에 남는 분들도 많으시겠어요.
A: 정말 많은 분들이 계신데 주로 말썽 부렸던 분들이 기억에 많이 남네요. (웃음) 예전에 제주도 출신 선생님이 한 분 계셨어요. 평소에 술을 많이 드시는 분이었는데 어느 날 아들이 제주도에서 아버지 만나러 와있다는 거에요. 방에서 술만 드신다는 얘기가 들려서 가봤더니 방에 둘이 있더라고요. 아들한테 서울에 왔는데 방에만 있냐고 물으니까 그래도 아버지랑 있어서 좋아요 그러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니까 가슴에 탁 맺히는 거에요. 아버지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서울까지 왔겠어요. 마침 며칠 후에 졸업여행이 있어서 아들도 데리고 같이 강릉에 갔죠. 오대산 월정사를 갔는데 눈이 영화같이 쌓인거야. 그래서 아버지랑 아들 둘 사진도 찍어주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 후에 그 선생님은 돌아가셨어요. 그 졸업여행이 아들과의 마지막 여행이 된거죠. 그게 내 마음에 깊이 남아요.
Q: 그래도 그 여행이 아들에게는 아버지와의 좋은 추억이고 잊지 못할 선물이 되었겠네요. 마지막으로 성프란시스대학이 올해로 20주년이 되는데 앞으로의 인문학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어요.
A: 인문학은 너무 과목에 치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인간들의 건강한 상호관계들 그것에 대한 고민들을 풀어내는 것이 인문학이에요. 지금은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의 과목들이 글쓰기 외에 문학, 철학, 한국사, 예술사가 있지만 좀 더 다양한 분야들과 변화된 수업방식들을 적용하는 것도 좋고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교수진들이 함께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눈오고 추운 날 우리 선생님들은 어디서 무얼하고 계시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올해로 20주년이 되는데 그 간 선생님들의 지나온 삶에 대해서 토론도 하고 조사도 하고 경험적 사실들을 총화해서 정리를 해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Q: 오늘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프란시스대하에서 추구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고 또 지금 가지고 있는 많은 고민들에 대한 답을 찾아나갈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시고 좋은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 중에 말씀해주신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외면하고 도망가고 싶었던 고단하고 외로운 삶, 그러나 그 곳에 눈길이 멈추고 마음이 닿아 그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돌아옵니다. 우리가 연대해서 그 무게를 함께 나눌 때 다시금 살아갈 힘을 내어봅니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 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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