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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24호

[길벗 광장] 가난과 깃들임에 대하여 (3)

by 성프란시스 2024. 9. 25.

 

가난과 깃들임에 대하여(3)                                                                             

- 행복의 조건으로서의 깃들임과 이웃

김동훈/성프란시스대학 예술사 교수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에 따르면 짓다는 뜻을 지닌 동사 바우엔’(bauen)의 어원이 된 옛 독일어 단어 부안’(buan)머물다, 거주하다, 깃들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짓는다는 것은 단순히 거주하기 위한 수단과 방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깃들이는 행위다. 무언가를 짓는다는 것은 물리적 공간을 구획하고 막아 그 안에 누군가가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행위만이 아니라 그렇게 지어진 장소 안에 깃들여 살아가는 모든 행위를 포함한다.

그런데 짓다는 뜻을 지닌 옛 독일어 동사 부안, , 베오’(buan, bhu, beo)의 흔적이 오늘날 존재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의 현재 일인칭, 이인칭 형태인 이히 빈, 두 비스트’(ich bin, du bist) 안에 남아 있다. 그러니까 원래 의미대로 해석하면 이 표현들은 내가 거주한다, 네가 거주한다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짓는다는 말과 존재한다는 말은 밀접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거주 행위와도 직접적인 관계를 지닌다.

그런데 바우엔가슴에 품다, 보살피다라는 뜻도 지닌다. ‘밭을 경작하다(아커 바우엔; Acker bauen)’라는 말이나 포도원을 경작하다(레벤 바우엔; Reben bauen)’라는 표현 속에서 이 단어는 땅을 잘 일구어 식물이 자연스럽게 생장하도록 보살피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선박 건조(쉬프스바우; Schiffsbau)나 신전 건축(템펠바우; Tempelbau) 같은 경우에는 이 말이 무언가를 제작한다는 뜻을 지니기도 한다. 이것이 거주하다라는 원래의 의미를 밀어내고 이 단어의 주된 의미로 자리 잡았다.

 

물론 누군가는 이러한 해석이 독일어에서만 가능하다 반박할 수 있으리라. 영어에서는 건물을 짓다는 뜻을 가진 build라는 동사와 농사를 짓다는 뜻을 지닌 farm, cultivate라는 동사들이 전혀 다른 어원을 지니고 있고 따로따로 분리되어 사용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말에도 짓다라는 동사가 두 경우 모두에 사용되고 있다. 집을 짓고, 농사를 짓는다. 오늘날 특히 대도시의 삶에 근거해 생각해 보면 전혀 다르게 여겨지는 두 행위를 우리 조상들은 왜 같은 말로 지칭했던 것일까?

수렵과 채집을 주로 하던 인류는 아마도 한군데 정착하지 않고 방랑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들이 추위를 피하고 쉴 수 있는 곳은 굴처럼 인간의 손이 닿지 않고도 저절로 만들어진 장소였을 것이고. 하지만 인류가 농경 생활을 하게 되어 한군데 정착하게 되면서 삶의 방식 자체가 전적으로 바뀌게 되었으리라. 한곳에 정착하여 식물을 기르고 동물을 길들여 가축으로 삼게 되자 땅을 개간하고 구획하여 울타리를 치는 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농사는 무언가를 짓는 일이었으리라. 이렇듯 이제는 더는 방랑하지 않고 한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살겠다는 의지가 마침내 자신들의 집을 짓는 행위로 나타났을 것이고. 농사를 짓는 일과 집을 짓는 일은 따라서 동일한 삶의 결단과 실천을 그 근원으로 갖는다. 즉 한곳에 정착하여 그곳에 깃들이며 살아가겠다는 결단과 실천이 농사를 짓고 집을 짓게 한 것이다. 그러니까 깃들임의 결단이 가장 근원적인 결단이라면 이를 통해 작물과 가축을 품고 보듬어 기르는 일이 그다음이었고 마지막으로 집을 짓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도시에서 물리적 공간으로서만 집을 건조하는 행위는 이러한 근원으로부터 아주 멀리 파생되어 나온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건물을 짓고 농사를 짓는다고 말하면서도 둘 사이의 밀접한 연관관계에 대해서는 더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원래 짓는다는 말은 인간이 어디엔가 정착하여 깃들임을 뜻하고,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대도시의 삭막한 공간에서도 그 의미를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내 집을 마련한다, 장만한다고 말하고 그 집을 보금자리라고 부르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비록 자신이 직접 짓지도 않았고 그 공간이 매우 삭막한데도 우리는 집을 장만하여 거기에 깃들여 살고 그곳을 보금자리라고 부른다. 우리가 그 안에 존재하고 깃들이며 삶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독일어와 우리말에 이렇듯 이 말의 본래 의미가 잃어버려지지 않고 남아 있기에 우리가 깃들임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깃들임의 행위는 혼자가 아니라 이웃들과의 공동의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이웃들과 함께 이루는 공동의 삶은 도시든 농촌이든 이웃과 함께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움직이게 되는 공간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와 함께 어딘가에 깃들여 살아가는 이웃도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짓는 사람들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웃을 뜻하는 독일어 나흐바’(Nachbar)의 어원은 나흐게부어, 나흐 게바우어’(Nachgebur, Nachgebauer). 그런데 이 옛 명사들에 들어 있는 부리, 뷔엔, 보이렌, 보이론’(buri, büen, beuren, beuron)과 같은 옛 동사들이 모두 깃들임, 거주함을 뜻한다.

이웃들은 단순히 우리를 통하여 어떤 장소를 마련 받는 가구나 도구와 같은 존재자들이 아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신들의 장소와 자신들을 둘러싼 존재자들의 장소를 마련할 줄 아는 존재자들이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가 깃들여 살아가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들에게 의존해 살아간다. 날이 맑은 어느 여름날 오후 거실에서 독서를 하는데 필요한 찻잔이나 접시, 찬장, 차의 재료가 되는 나무나 풀의 잎사귀, 탁자나 소파, 읽는 책 모두를 스스로 제작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함께 이 땅 위에 깃들이며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르거나 만들어준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웃들과 함께 이루게 되는 공동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까?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은 폴리스(πόλις)라는 개념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통하여 얻어질 수 있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 형태를 일컫는 말로, 오늘날 인도 게르만 계통의 언어에서 정치를 뜻하는 단어들의 어원이 되었다. 따라서 정치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려면 이 단어의 의미가 먼저 해명되어야 한다. 도시가 무엇인가 알고자 할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이 말은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자리 그 자체를, 따라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의 삶 전체를 말한다. 따라서 폴리스는 정치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 폴리스는 절대로 정치적인개념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폴리스는 폴로스(πόλος). 폴로스는 모든 것이 그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움직이는 하나의 극()이다. 따라서 폴리스는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무엇이다.

그러므로 폴리스란 단순히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 그것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무엇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폴리스와 폴로스를 다시 움직이다, 생기다, 나타나다, 자신이 있을 곳을 발견하고 거기 머물다는 여러 가지 뜻을 지닌 동사 펠레인(πέλειν)과 연결한다. 변화과정 가운데서 자신이 있을 곳을 발견하고 거기 깃드는 이런 존재 방식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곁에 존재하는 이웃에게도 해당한다. 고대 그리스어로 이웃은 호 펠라스’(ὁ πέλας). 그러므로 폴리스는 인간이 이웃들과 함께 존재하며 살아가는 삶의 중심이다.

 

이렇게 파악한다면 폴리스는 가능하면 많은 사람과 집기, 가구들이 그 안에 존재할 수 있게 기획되어야 하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삶과 그 삶과의 의미연관 속에서 존재하게 되는 모든 존재자가 만들어내는 의미연관의 총체이며 그러한 삶의 중심이다. 바로 이 안에서 인간의 삶이 펼쳐진다. 따라서 이 공간이 제대로 마련되고 그 안에서 인간의 삶이 제대로 펼쳐져야만 비로소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웃과 함께 도시 공간에 깃들이는 인간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 행복이 그동안 우리가 살펴본 가난과 노숙과는 어떤 관계를 맺을까? 다음 호 지면을 빌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모색해 보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글을 맺도록 하겠다.

 

편집자주:  이글은 김동훈 교수님께서 웹진 22호부터 '가난과 깃들임"이란 제목으로 계속 집필하고 계신 글입니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로도  몇 차례 이 시리즈가 계속될 것 같습니다. 설립된지 올해로 20년이 되는 성프란시스대학 공동체의 핵심 화두가 '가난'이고 가난한 이들의 '행복'이며, 그 가난한 이들이 행복 가운데 그려나갈 '관계' 혹은 '의미 연관'일 것이기에 구독자 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지난 글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접속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난과 깃들임 1

가난과 깃들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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