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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21호

[인물인터뷰] 우리 성프란시스대학 총장님, 김성수 주교님

by 성프란시스 2024. 3. 20.

글 / 이현아

인터뷰어/ 이현아/김동훈/박석일

인터뷰이 / 김성수 (성프란시스대학 총장, 제2대 성공회 서울교구장,  초대 성공회 관구장)

 

 

오늘 소개할 인터뷰이는 성프란시스대학 총장이신 김성수 주교님이십니다. 주교님은 성프란시스대학의 큰 어른이시기도 하지만 제2대 성공회 서울교구장, 초대 성공회 한국관구장, 성공회대학교 제3,4대 총장이시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기부하여 세우신 발달장애인 직업재활시설 우리마을의 촌장으로 계십니다. 콩나물 판매를 주 사업으로 하는 우리마을이 위치한 강화도 온수리는 김성수 주교님이 과거에 폐결핵 진단을 받고 10년 동안 외로운 투병 생활을 하시던 곳이기도 합니다. 저희 웹진 팀은 주교님을 찾아 뵙고자 강화도 우리마을을 방문했습니다.

 

Q1. 주교님, 안녕하세요. 이곳 온수리는 총장님께 어떤 곳인지 소개해주실 수 있으세요?

A. 온수리는 내가 어렸을 때 병으로 고생한 곳인데 내가 여길 위해서 뭘 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사실 못 했고, 하다 보니까 여기 들어앉게 됐지. 여기서 제일 기뻤던 건 온수리의 자랑스러운 사람이라고 길상면에서 상패를 하나 줬는데 그걸 받을 때가 제일 좋았어. 서울서 무언가 하는 것보다 내가 태어난 고향에서 좋은 사람이라고 상패 하나 받고서 아주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잘 낳아 주셨구나 했지. 그리고 콩나물 공장에 불 났을 적에 면민들이, 강화도 전체가 참 많이 도와줬어. 아주 고마웠어.

 

Q2. 그때 저희도 너무 안타까웠었는데. 주교님께서 두루두루 잘 하셔서 주변에서도 도움을 주셨을 것 같아요.

A.    그것도 글쎄, 내가 돈을 벌어서 뭘 이렇게 저렇게 했으면 자랑할 만하지. 근데 아버지한테 받은 거 준 건데 뭘.

 

Q2. 우리마을 옆에 있는 공설 운동장도 강화군에 기증하신 거죠?

A.    일제 시대 때 일본 놈들이 가난하게 전쟁을 하니까 뭐가 나올까 하고 논도 파고 산도 파고 했거든. 여기가 원래 동산이었어. 일제 시대 때 동산에서 나무도 잘라 가고 하다가 운동장 아닌 운동장 비슷한 게 생겼지. 그래서 온수리 소학교 국민학교 운동장 조그만 것 보다는 이게 축구하기에는 알맞고 그때부턴 여기서 축구들 하고. 난 그냥 아버지가 쓰라 그래서 쓴 거지.

 

Q2. 우리마을 들어올 때 보니까 이게 정말 넓은 땅인데 저 같았으면 안 내놨을 것 같거든요.

A.    그런 생각을 가끔 해. 영화 같은 데 보면 집에 들어갈 때 현관까지 이렇~게 해서 돌아가잖아? 우리나라는 이렇게 쭉 들어가는 집이 아주 부자 말고는 별로 없어. 여기는 차 타고 들어오면 봄 되면 벚꽃 터널이 되고 눈 내리면 눈 터널이 되고. 그럴 때 가끔 내가 아버지 어머니 덕에 참 고맙구나 생각하고. 근데 내가 아버지 어머니한테 해 드린 게 없어. 오히려 내가 신부 된다고 했을 적에 반대 안 하신 것 만도 고마운 거지.

 

Q2. 부모님께서도 그럼 원래 성공회 교인이셨나 봐요?

A.    그럼 그럼.

 

Q2. 이렇게 한국 성공회의 가장 큰 별이 되셨는데 부모님께서도 너무 좋아하셨을 것 같습니다. 성공회의 특징에 대해서도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A.    성공회가 천주교하고 다른 게 뭐냐면, 예를 들어 천주교는 로마교황청에서 오늘은 아침에 김치를 먹지 말어라하면 한국 천주교에서 김치를 안 먹어. 근데 영국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 김치를 먹지 말어라아무리 백 번 얘기를 해도 한국 교회에서 우리는 깍두기만 먹는 나라가 돼서 깍두기 먹겠소하면 깍두기를 먹어도 돼. 영국 사람들의 지혜가, 1억 가까이 되는 교인들을 데리고 있는데 지방자치제도를 해. 영국 성공회에서 한국에 선교를 온 게 100년이 넘었고 한국은 이제 독립한지 30여년밖에 안됐지만 영국은 다 그 지역을 독립시켜. 독립해서 운영을 하게 하고 독립한 나라의 장이 된 사람을 관구장이라고 해. 나도 독립되기 전에 주교가 된 사람이야. 그러니까 나를 영국 사람들이 임명을 했지. 근데 요즘은 우리들이 뽑아. 독립됐어. 독립하기 전에는 내가 신부님을 안수한다 그러면 캔터베리 대주교의 윤허를 꼭 받아야 돼. 근데 이제는 독립을 했으니까 캔터베리 윤허가 필요 없어. 대한성공회에서 주교 임명을 할 수 있는 거야.

 

Q2. 예전에 인터뷰하신 내용을 보니까 성공회에서는 교인들이 집에 가까운 교회에 다니면 된다고 하더라구요.

A.    그럼 그럼. 가령 서울 교회에 온 사람이 의정부에 산다. 그럼 의정부 교회에 가야지. 그걸 지켜줬으면 좋겠는데 교인들은 그걸 잘 안 지켜. 교인이 만 명이다 이만 명이다 하다 보면 뒤쳐지는 사람, 손이 안 가는 사람 있기 마련이거든.

 

Q2. 성프란시스대학 졸업생들이 성공회대에서 졸업식을 하게 된 것도 주교님 덕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A.    누가 해라고 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여기서 졸업식을 하면 어떻습니까하고 발제한 발제자가 중요하지. 명예는 다 신부님들한테 돌려야 돼. 신부님이 와서 이런 좋은 일을 합시다, 하는데 아니라고 하는 바보가 어딨어? 나는 주교님이 다 하신 일이라는 소리를 참 듣기 싫어.

Q2. 주교님께서 영국에서도 공부를 하고 오셨다고 알고 있는데 그 시간은 어떠셨나요?

A.    영국 유학은 정식으로 공부하러 간 것이 아니라 산업 선교를 위한 공부를 하러 간 거니까 엄격히 말해서는 유학이 아니고 쉬고 놀러 간 거지. 1년 다녀온 건데 뭘. 우리는 그때 즘이면 산업 선교라는 말을 겨우 꺼냈을 때인데 영국은 그때 이미 직접 신부들이 공장에 들어가서 노동자들을 대표해서 일을 했지. 그리고 아내가 영국 사람인데 일본으로 가서 선교사로 일을 하면서 영국 선교회에 얼굴이 좀 알려졌어. 그 덕에 간 거지 뭐. 그런데 아무리 공부를 하고 와도 그때 당시 우리는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노동조합도 못 했어. 광산에 가서 일을 할 적에 노동조합 자만 나오면 노동자들이 오히려 그런 소리를 못 하게 해. 그런 소리를 못 하게 사주들이 나쁜 짓을 한 거지. 그래도 그런 뿌리가 자라서 지금 한국에 노동조합이 세워졌는데 어떻게 보면 노동조합이 정상으로 가는 것 같지 않아. 그게 뭐냐면 정규직 비정규직의 구분이 생겨가지고. 정규직은 혜택을 받으려면 다 받고. 비정규직은 또 못 받잖아.

 

Q2. 비정규직 노동자들 계속 분신 자살하고 그럴 때 저도 속이 너무 상하더라구요.

A.    성프란시스대학에도 비정규 노동직 하다가 오는 사람들이 있을 거고.

 

Q2. 그러면 사모님 하고 결혼을 하신 다음에 영국에 다녀오신 건가요?

A.    그럼. 그때 한국하고 일본하고 그렇게 사이가 나쁜데 일본 성공회가 한국 성공회 사람들을 불러다가 구경도 시켜주고 그랬거든. 그래서 가서 처를 만났는데 처가 아주 청년 선교를 잘 해. 우린 그때 청년 선교를 잘 해야 될 때니까 한국으로 오라고 그랬더니 금방 또 오잖아. 와 가지고 고생만 하고 있지.

 

Q2. 사모님이 전혀 모르는 나라에 와서 살겠다고 생각하시려면 주교님에 대한 사랑이 엄청나셨을 것 같은데요?

A.    지금은 안 그렇지만 그때는 일본 사람들은 다 작어. 50, 60년 전에는 대체로 작았어. 그런데 한국에서 신부가 하나 왔다? 그런데 내가 멋있잖어. (웃음)

 

Q2. 젊으실 때 사진 보니까 아주 영화 배우시던데요.

A.    그래서 전철을 타도 내가 이만큼 더 크고. 내가 속으로는 야 임마 너희가 우리나라를 40년 동안 압제를 했지만 내가 전철 타면 너희가 다 눈 아래야생각했지. 선입관이라는 게 있어서 미국사람, 영국사람, 일본사람들이 다 코리아나그러는데 내가 허우대도 괜찮고 말 하는 것도 두 시간 세 시간 얘기하면 다 들통이 날 텐데 한 뭐 101520분 얘기하는 거야 좋은 말만 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다들 나한테 그냥 다 홀렸지. 바보들이지 바보. (웃음) 그래서 결혼도 하게 됐고. 그렇게 해서 내가 덕을 많이 봤지.

 

 

Q2. 주교님께서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에 대한 생각을 언제부터 갖고 계셨던 건가요?

A.    그냥 마지 못해서 한 거야.

 

Q1. 마지 못해서 하셨다는 게,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하셨다는 뜻일까요?

A.    어려운 사람을 생각한다기보다, 먼저 얘기한 대로 내가 폐결핵 진단받고 10년 동안 내가 여기 강화도에 혼자 있었거든. 바깥과 차단이 된다는 건 사람이 못할 노릇이야. 괜히 운동한다고 맨날 왔다 갔다 껄렁껄렁하던 놈이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밥 세끼 먹고 드러누워 있어야 되고. 아픈 주사를 하루에 몇 개씩 맞아야 되고. 그리고 사람이 이렇게 말을 하고 친구가 있어야 되는데 아무도 없었거든. 또 이 폐결핵은 각혈을 좀 하는데 나도 처음 춘천 가서 아이스하키 운동을 하다가 엄청 피가 나왔어. 시합이 끝나고 와서 우리 어머니가 날 데리고 병원을 갔는데 엑스레이를 보더니 이건 죽은 자식이라고 그러더라고. 그러고 6.25 사변이 났어. 의사가 사변 나기 전에도 너는 꼼짝 말고 드러누워 있어라. 그래야 살까 말까 하다고 했는데 6.25 사변 나고 석 달 동안을 꼼짝 못하고 드러누웠지. 그렇게 무서운 인민군도 폐병은 무서워 우리집엔 쳐들어오질 못 했어. 동네에서 김 가네 저 자식은 폐병쟁이라고 그러니까. 그런 경험을 해서 그런지 그저 덮어놓고 좀 가난하다 외롭다 뭐가 어렵다 그러면 괜히 눈이 그쪽으로 갔지. 사람은 다 똑같을 거야.

 

Q1. 주교님께서 이전에 다른 인터뷰에서 예수님도 세상에 체험을 하러 온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주교님께서도 어떤 체험을 하셨을 때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이 바뀌신 사례가 있을까요?

A.    그럼 이제 폐결핵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아프다가 신학교를 갔는데 그때 우리 신학교 원장 신부님이 미국 사람인데, 한국은 농사 짓는 나라인데 이렇게 신부님들이 농사를 안 지으면 어떡하냐고 하는 거야. 그 양반은 지렁이도 기르고 돼지도 기르고 해. 어느 날은 원장 신부님이 미국 신사 한 사람을 데리고 와. 007 가방 멋있는 걸 들고. 그러더니 이 사람이 옷을 착 벗고 돼지를 착 갈라서 소시지도 만들고 하는 거지. 그래서 그래, 이런 걸 해야 되는구나 해서 나는 광산에 가가지고 체험도 좀 했어. 농촌은 전라도 무안이라는 데 다녀왔지. 정말 가난하게 살았어. 나한테 밥을 가져다주는데 예전에 밥은 이만큼 고봉밥이었어. 밥 밖에 먹을 게 없으니까. 숟가락도 이 숟가락이 동그라잖아. 근데 얼마나 많이 먹었으면 숟가락이 녹아서 반달 같아. 어쨌든 이렇게 밥을 들고 들어와. 그런데 밥이 시커매. 파리야 파리. 파리가 앉아서. 그리고 쌀밥도 아니고 꽁보리밥이고. 농촌서 그렇게 가난했는데 그 가난한 게 원인이 뭐냐? 일본 놈들이 거기서 쌀 나면 저희들이 다 가져갔잖아. 그래서 우리 성공회에서는 나눔의 집도 하게 됐고. 성프란시스대학도 나오게 됐고. 그래서 하나님도 자꾸 주님 주님 그러는 사람이 천당 가는 게 아니라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저게 나였다는 그런 말씀이 성경에 있잖아. (*편집자 주: 마태복음 25 42-45 (새번역) -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예수도 하늘에서 쳐다보고 내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 어떤가하다가 보러 내려온 거지 뭐. 유치원생들 하고 얘기하는 것 같지만 아니야 정말 그래. 그래서 체험만큼 좋은 게 없다. 이렇게 공부들 하고 체험을 해서 사회에 영향을 준다는 게 그게 쉬운 일인가. 결코 쉬운 일 아니야. 우리가 체험을 하는 건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해서 하는 거고. 그래서 예수가 훌륭하지 뭐. 예수도 산 꼭대기 앉아가지고 요새 교주들 같이 돈 내야 천당 간다고 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그러면 안 되겠다는 거지. 하늘 나라에다가 보배를, 나는 못 쌓았지만, 여러분은 하늘나라에 돈을 많이 쌓아 놨을 거라고.

 

Q1. 주교님, 이렇게 체험을 하시다가 예를 들어 광산이라든지 아니면 무안에 가셨을 때도 아 이건 못 버티겠다, 너무 불편하고 힘들다, 하는 생각은 안 드셨나요?

A.    내가 부끄러운 게 그거지. 지금에 와서 얘기지만. 그리고 지금 나한테 그런 얘길 물어보니까 하는 얘기지만, 나도 위선자지 뭐. 위선자야. 그렇게 어려운 걸 보면 주교 모자 벗어놓고 우리 두 양반같이 그 쪽에 가서 살아야지. 뭘 이렇게 좋은 책상에서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 먹고 잘 낫다고 지껄여? 이게 부끄러운 거야.

 

Q2. 주교님께서 더 큰 뜻을 가지고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해 주시니까 저희도 있는 거죠. 저는 2007년에 성프란시스대학에 왔으니까 이제 18년차인데요 총장님께서 계시고 저희한테 와서 정말 편하게 말씀해주시는 게 언제나 너무 큰 힘이 됐습니다. 저도 부족함이 너무 많으니까 우리 선생님들한테도 제가 잘 못 할 때도 있고 힘들고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도 총장님 생각하면서 버티고 그랬습니다. 정말 오래오래 같이 계셔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Q1. 제가 처음 성프란시스대학에 온 건 그저 좋은 일을 하려고 온 건데요, 와서 놀랐던 건 너무 훌륭한 교수님들이 계신 거에요. 어떻게 이렇게 하나같이 좋은 분들이 이토록 오랜 시간 이 곳에 계신 걸까 궁금했었는데 교수님들이 존경할 수 있는 총장님이라는 어른이 있어 주셨다는 게 그 비밀이었던 것 같습니다.

글쎄, 난 그게 부끄러워. 사실 나를 꿰뚫어보고 잘 보면 부끄러운 사람이야. 부끄럽다고. 신부 하다가 주교가 되는 건데 난 신부 자격도 없어.

 

 

Q2. 성프란시스대학이 내년에 20주년이거든요. 여러 가지 기념 행사를 준비하려고 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도 생각하려고 하는데 주교님께서 저희에게 제일 애정을 가지고 지켜봐 주시면서 느끼신 점이나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을까요?

A.    나는 비전문가야. 비전문가가 보는 거 하고 전문가들이 보는 거하고는 많이 다르다구. 그러니까 앞으로 이렇게 해라. 이건 좀 건방진 소리야. 내가 이렇게 하면 좋겠다고 하는 건 뻔하지 뭐. 모금 많이 해야 되겠고, 좋은 선생님이 많이 와야 되겠고, 또 좋은 학생들이 와야지. 뻔한 거 아냐? 그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지는 자꾸 우리 전문가들이 얘기를 해야 되는데 내가 볼 때는 활자로 남겨놓는 게 좋을 거 같애. 책 만들어 냈잖아(*편집자 주: 성프란시스대학 15주년 기념 문집, <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 그게 역사가 되거든. 그런 활자가 된 게 있으면 후임자들은 전임자가 한 게 무언지를 공부해서 들어가는 거고. 그런 게 없이 그냥 들어가서 뭘 또 만들려고 애쓰는 거 하곤 시간 차며 농도가 많이 다르지. 그러니까 아주 책을 만드는 거에 대해서 큰 박수를 쳐야지. 역사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거 아냐? 그런 방향으로 앞으로 가는 게 바람직한 건데 그렇게 되려면 우선 돈이 필요한데.

 

Q2. 저희도 돈 때문에 참 고민인데 후원자들을 늘리는 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A.    그럼 그럼. 그게 참 어려워. 그래서 그저 우리 성프란시스대학에 좋은 교수들이 오셔서 박사까지 받은 사람이 와서 일을 해 나간다든가, 우리가 다른 데와 다르다는 거를 얘기를 하려면 화젯거리를 만들어내서 신문사 몇 군데를 친구를 만들면 좋겠지. 기자들이 1년에 한 번이라도 꼭 좀 와서 볼 수 있게 초청을 한다든가. 그럼 나도 갈게.

 

인터뷰에서 나눈 말씀 외에도 주교님과 식사하며 나눈 이야기,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며 저희가 듣고 본 재밌는 이야기를 남기고 싶습니다. 주교님과의 대화에서 일제강점기, 해방, 6.25전쟁과 같은 이야기들은 3인칭 관점이 아니라 1인칭 관점에서 펼쳐졌습니다. 예를 들어, 일제시대에 학교를 다닌 총장님은 학교에서 한국말을 전혀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시절 일본어를 익히게 되셨고, 그 덕분에 일본에 선교사로 오신 사모님을 만나셨을 때 사모님과 일본어로 원활하게 대화가 가능하셨다고 합니다. 또 어린 시절 별명을 여쭈어 보았더니 아주 나쁜 뜻이라 공개하지는 않으시겠지만 처음엔 일본어였던 그 별명이 해방 후에는 배재학교 친구들에 의해 우리말로 번역되어 불렸고, 심지어 성공회 사제 서품식때도 배재학교 동문들이 오셔서 그 별명을 부르며 야 이제 성공회 망했다~!”외쳤다는 에피소드 등등을 들려주셨습니다.

우리마을 바로 앞에서 따님이 운영하고 계신 카페에서 총장님과 함께 차를 마실 때는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셔서 총장님께 인사를 하고 가셨습니다. 대부분 강화도 초지교회 교인 분들이셨지만 아주 특별한 만남도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주교님, 저 배OO입니다하며 주교님을 향해 걸어오셨는데, 주교님은 배 선생님을 보시고 아니 왜 이렇게 변했어~?” 하시고 배 선생님은 주교님은 그대로 십니다하시며 너무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셨습니다. 나중에 두 분이 얼마만에 뵌 것인지 여쭤 보았더니 배 선생님은 중학교 시절, 주교님은 30대 시절에 뵙고 무려 오늘 60년 만에 다시 재회하신 것이었습니다.

참 신기했던 건, 저는 분명 지난 60년 간 굵직한 일들을 해오신 한국 성공회의 대주교님을 뵈러 강화도에 다녀왔는데, 강화도에 다녀온 이후로 오히려 하루하루를 성실히 노동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주교님의 삶만큼이나 귀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인터뷰 이후에 주교님이 지난 20년 간 우리마을에서 일해온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고 계신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야기에서 20년간 콩나물 공장에서 일한 우리마을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바라보시던 주교님의 시선을 듬뿍 느낀 탓인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주교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해 주교님께서 책 한 권을 빌려주시며 대신하신 답변을 소개합니다. 주교님은 교회의 예전(禮典)과 의식에 관한 규정과 의식문을 수록한 책인 공도문을 주시며 주교 성직 서품 예식부분을 표시해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주교 서품식 때 대주교와 주교 후보자가 주고받는 긴 선서가 나오는데 그중 일부가 다음과 같습니다.

(대주교) 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하여 가난한 자와 빈궁한 자와 모든 도움이 없는 나그네들에게 인자로이 자비를 주겠느뇨?

() 내가 천주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렇게 하겠나이다.

(대주교) 전능하신 천주께서 이 모든 일할 마음을 네게 주셨으니, 원컨대, 이 모든 일을 행할 능력을 주사, 네게 시작하신 일을 이루게 하시고, 너를 마지막 날에 완전하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시기를 바라노라. 이는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노라. 아멘.

1984년 주교 서품식 때 주교 후보자로서 이 선서를 하시고 2024년인 지금도 여전히 가난한 자와 빈궁한 자와 모든 도움이 없는 나그네들에게 인자로이 자비를 나누어 주고 계신 주교님의 삶에는 정말 천주께서 일하고 계신 듯합니다. 우리 성프란시스대학의 든든한 총장님이신 김성수 주교님,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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