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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21호

[길벗 광장] 새로운 시작을 향하여

by 성프란시스 2024. 3. 20.

김동훈 / 성프란시스대학 예술사 교수

 

독일어로 시작한다는 뜻을 가진 동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anfangen, beginnen이다. 어원을 찾아보니 앞의 말은 원래 무엇을 붙잡아 가진다는 뜻을, 뒤의 말은 무언가를 자른다는 뜻을 지녔다. 전자에서는 이제 무언가를 붙잡으려 막 손을 가져가는 모습을, 후자에서는 그 이전의 것을 잘라서 쳐내어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니까 먼 옛날 독일인들에게 시작은 예전부터 있던 무언가를 잘라내고 새로운 것을 잡으려고 손을 뻗는 행위였다. 영어에서는 startbegin을 주로 쓰는데, 뒤의 말은 독일어와 어원이 같다. 앞의 말은 원래 뛰어오른다는 뜻을 지녔는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정반대로 떨어진다는 뜻을 지녔었다. 왜 이렇게 정반대의 뜻으로 바뀌었는지 짐작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아무래도 어딘가로 떨어진 다음에 거기서 벗어나려면 온 힘을 다해 뛰어올라야 했기 때문이리라.

사실 맨 처음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아기가 자신이 태어났을 때를 기억하지 못하고 지구상의 어떤 생물도 태곳적 지구의 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언제나 무언가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도 의식을 가지고 나와 세상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부터는 언제나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으로 이 세상에 이미 던져져 있음(Geworfensein)을 들었다. 우리는 우리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던져진 채로 존재한다. 부모님께서 서로 사랑을 나눈 결과든, 조물주 창조행위의 결과든 우리는 타자의 감정이나 의지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도 언제나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한다. 이전의 것을 잘라내고 그것과는 다른 무언가를 붙잡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한 번 이렇게 새로 시작하면 무엇이든 그것은 다시 헌 것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새롭게 시작해야만 한다.

올해로 성프란시스대학은 20기 신입생을 맞이해서 새로운 1년을 시작한다. 20059월에 1기 신입생들과 함께 숙대입구역 근처의 다시서기센터에서 처음으로 수업을 시작한 지 벌써 18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철학 아카데미 등과 같은 교양 대중을 위한 인문학 강좌가 아니라 사회의 소외계층을 위한 인문학 강좌로는 최초였고 그 이후 탈성매매 여성, 중증 장애인, 교정시설 재소자 등을 위한 인문학 과정이 뒤를 이었다. 희망의 인문학200611월 번역 출간되어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고 이 책의 저자인 얼 쇼리스 교수가 20061월 직접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국제 세미나에서 기조 발제를 하고 성프란시스대학도 방문했다. 이후 수많은 대중매체에서 성프란시스대학의 입학식과 졸업식 취재를 했고, 수업 시간을 영상에 담아 방송하기도 하고 EBS에서는 성프란시스대학을 대상으로 여러 번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송하기도 했다. 삼성코닝, 나중에는 코닝 정밀소재에서는 오랫동안 인문학 과정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었다. 한국연구재단의 시민 인문학 지원 프로그램의 도움도 받아 한동안 성프란시스대학은 이른바 잘 나가는(?) 인문학 교육기관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여기저기서 어려움이 닥쳐왔다.

우선 코닝 정밀소재 사회복지 담당 직원들이 정말 미안해하며 미국 본사의 사회공헌 지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다는 말을 전해 왔다. 당장 지원을 끊는 건 너무 매정하니 유예기간을 두어야 한다고 미국 본사를 설득해서 1년여의 유예기간을 벌었다고 했다. 결국 유예기간이 지난 뒤 성프란시스대학 운영의 매우 큰 버팀목이었던 기업 후원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 전에 이미 한국연구재단에서도 시민 인문학 프로그램 지원 대상을 대학 부설 기관으로 한정하는 바람에 예산을 줄여야 했던 터에 이제는 갑자기 학교의 존립을 걱정하게 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보건복지부와 서울시가 함께 지원해주던 예산도 복지부에서 지원을 중단하면서 서울시 예산 말고는 어디서도 운영자금을 얻을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정들었던 후암동 길카페와 강의공간을 포기하고 지금의 서울역 앞 우체국 건물에 개설된 다시서기 진료소 교육실을 빌려 쓰는 더부살이 신세가 되었다. 게다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유행으로 인해 한동안 대면 교육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물론 거의 모든 교육 프로그램(야외학습, 소풍, 수련회 등)을 아예 진행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부터 아, 성프란시스대학이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가장 눈에 밟혔던 게 우리 선생님들이었다. 그때 선생님들의 글만을 오롯이 모아 책으로 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글을 글쓰기 시간을 통해서 성프란시스대학 학생들의 내면에서 끌어내신 박경장 교수님, 자원활동가였던 강민수, 김연아 선생님과 함께 우리 선생님들의 글을 함께 고르고 골라 편집하면서 그 안에 담긴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가지게 되었던 수많은 생각들을 곱씹으면서 많은 이들에게 노숙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고, 그리운 고향과 가족이 있으며 인간답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알리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다행히 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가 발간되자 전혀 예상도 못 했던 분들이 서평을 써주시고 텀블벅 사이트를 통한 기금 모금에 많은 분이 후원해 주셔서 목표액을 두 배 가까이 초과 달성했으며 이어진 북 콘서트도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다. 이때 우리의 뜻에 공감해주시는 많은 분이 정기 후원회원이 되어주셔서 지금까지도 정말 너무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이 지면을 빌려 우리와 함께해주시는 모든 후원회원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게다가 전혀 예상치도 못했는데 서울시 문화상 문학 부문 후보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놀랐지만, 실제로 수상까지 하게 되었을 때는 정말 너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성프란시스대학 살림은 팍팍하기만 하다. 계속 지원 액수와 조건이 달라지는 서울시 지원금에 목매달 수밖에 없는 현실도 그렇지만, 우리 선생님들에게 우리만의 공간을 제공해 드리지 못하고 다른 기관의 더부살이를 하기에 선생님들이 우리 교실에도 마음대로 드나드실 수 없는 환경이 정말 가슴 아프고 죄송하기만 하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여전히 꿈을 꾼다. 제일 좋은 일은 노숙인이 아예 없어져서 성프란시스대학이 더는 존립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언제나 노숙인들 곁에서 인생에 대해, 세상에 대해,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삶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함께하거나 적어도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노숙인 교육기관으로 남고 싶다. 당장 이루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우리만의 독립 공간에서 선생님들과 마음껏 편하게 공부하고 식사도 같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올해 나는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그리고 내년에도 그러고 싶다. 매년 새롭게 시작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향해 손을 뻗고 영어 start의 어원에서 보았던 것처럼 좌절이 있었다면, 힘들어서 가라앉아 있던 적이 있었다면 새 힘을 내서 다시 뛰어오르고 싶다. 그래서 20주년이 되는 내년 9월까지 성프란시스대학의 어제를 돌아보면서 어떻게 미래로 나아갈지를 열심히 찾아보려 한다. <성프란시스대학 20년 회고와 전망>이라는 제목으로 성프란시스대학의 주인이었던 졸업생 선생님들, 센터장님을 비롯한 실무진, 교수진, 자원활동가들이 그동안 보고 느꼈던 성프란시스대학의 이야기를 나눴던 작년 2학기 심화 강좌를 통해 이미 불씨는 당겨졌다. 이제는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구체적으로 함께 고민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볼 시간이다. 그래서 지난 심화 강좌에 참여했던 분들이 모여 미래의 대안을 모색해 보는 집담회를 개최하고 그 논의 결과를 다양하게 실천하는 몸짓을 함께 해나가고 싶다. 나는 오늘도 새로운 출발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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