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이여, 이제 우리도 헤어질 결심을 하자"
- 나의 연인에 대한 애끓는 고백과 성프란시스대학에서의 1년
최경식 (인문학과정 18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난 술 때문에 많은 걸 못한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무렵부터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극심한 반발심으로 마시기 시작한 술이 평생을 이어져 왔으니.
나이 60 넘으면서 노가다도 힘들고 해서 경비직으로 돌았는데 경비직도 1년이 멀다 하고 짤렸다. 언제나 술이 문제였다. 앞뒤 안맞는 말 같지만 아직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술이라도 마시는거라고 자위해 가며 마셨다. 취하면 소주병을 상대로 얘기를 나누기도 했고, 전봇대 앞에서 전봇대와 얘기를 나누다가 신발을 가지런이 벗어 앞에 놓고 전봇대에 기대 잠이 들기도 했다.
‘넌 정말 내 평생의 반려다. 너 없었으면 내 인생이 얼마나 힘들었겠냐. 니가 그래도 내 외로움 달래주고, 스트레스 받아주고, 너야말로 나의 애인이다. 그런 너를 내가 어떻게 버리겠냐.’고 주절대며.
한밤중 온 아파트가 적막에 빠져있을 때 혼자 경비실에 앉아 소주를 홀짝거리며 술과 나누는 대화는 시간도 잘 가고 맛도 좋았다. 너마저 포기한다면 그땐 내 인생을 포기하는 거라고 몽롱하게 주절대며.
그런 와중에 관리소장의 은밀한 부름을 받고 혹시 연말 보너스라도 몇푼 주려나 해서 갔더니 올해 계약 끝나면 재계약 안되니 다른 일자리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시냐고, 주민대표도 최씨 아저씨가 경비실에서 술 먹는거 다 알고 있으니 그만둬야겠다는 것이었다. 얼굴이 벌개졌다.
이럴 수가... 내가 그동안 아파트 일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잡초도 틈틈이 뽑고, 재활용품 분리수거도 땀 뻘뻘 흘리면서 하고, 주민들에게도 얼마나 친절하게 대했는데, 아주머니들도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저씬 일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겼다고. 그런데 나 같은 인재를 그만 두라고?
난 얼굴이 벌개진채 앞으로 술 조심하겠다고 했지만 소장은 고개를 저으며 안된단다. 그나마 실업급여는 받게 해주겠다고 선심 쓰듯 말했다. 사지가 떨렸다. 당장 방세 밀린 것, 식당 외상값, 고스톱판에서 빚진 돈, 그리고 헤어진 아내에게 그래도 얼마씩 보내주던 용돈마저 못보내준다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졌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진채 퇴근하면서 슈퍼에서 막걸리 두 통을 사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방안은 그날따라 더 너저분해 보였다. 전에 고스톱판에서 만난 한 아줌마가 한잔 더하겠다고 내방에 쫓아왔다가 방을 둘러보면서 하는 말이 “자긴 생긴거 하곤 딴판이네.”해서 그때 난 그 말을 나 잘생겼다는 말로만 알아들었었다.
막걸리 두 통을 비우고도 잠이 안와 고스톱 하우스로 갔다. 말이 하우스지 동네 미장원 하다 만 곳에서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 모여 점백짜리 고스톱 치는 곳이다. 그곳에 가면 일단 냉장고에 술과 먹다 남은 안주라도 항상 있고, 고만고만한 아줌마 아저씨들이 모여 있으니 만만하게 놀 수 있고, 점백짜리 판이다 보니 별 부담 없는 곳이라 한번씩 기웃거리는 곳이다. 그래도 매달 월급날을 한 열흘쯤 남겨 놓고는 몇십만원씩 노름빚을 지곤 했는데 그것도 다 내가 후덕해서 지는 것이라고 속으로 자위하곤 했다. 그땐 내가 그들에게 호구짓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들이 “호구는 우후죽순이야.”하면서 낄낄거려도 나한테 하는 소리인지도 모르고 덩달아 낄낄댔으니까.
아침부터 막걸리 두 통을 비우고 찾아간 미장원에선 주인 여자가 내가 아파트에서 짤린 걸 전해 들었는지 그날따라 유난히 쌀쌀맞게 대했다. 이 도시에서의 내 시절도 끝났구나 생각하고 떠날 궁리를 했다. 언제나 내 뒤통수나 치던 인간들도 지겨워졌다. 무언가 새롭게 시작한다는 기분으로 짐을 쌌다. 난 언제나 그런 기분으로 짐을 싸고 떠나곤 했다. 그러니까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고 할까.
뒤통수가 보일락 말락 하는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덜커덩거리는 캐리어를 끌고 역전으로 갔으나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서울역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겁이 났다. 역 주변을 배회하다가 찾아든 곳이 역전 사창가 골목 입구의 허름한 고시원이었다. 자연히 역전 노숙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붐비는 인파 속에서 맨땅에 퍼질러앉아 술을 먹는다는 게 못할 짓 같았는데 몇 번 해보니 몸에 익어 오히려 행인들을 구경할 정도로 뻔뻔해졌다.
나는 원래부터 사람들한테 호기심이 많고 사람들에게 잘 대해주는 편이라 그들과 그냥 어울려 나갔다. 사실은 그들한테도 여전히 호구 짓을 하고 있는 것이긴 했다. 그나마 통장에 실업급여라도 들어오니 담배 한 갑에 새우깡, 막걸리 몇 통 사들고 그들에게 가면 대환영이었다. “선생님, 선생님”하며 자기들 자리를 좁혀 날 앉히곤 했다. 난 노가다할 때도 별명이 ‘교수님’이어서 ‘선생님’이란 호칭이 낯설지 않았다. 사실은 ‘선생님’이 아니라“호구님, 호구님”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런데 하루는 그날도 여전히 역전 노숙자들과 둘러앉아 술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오더니 갑자기 내 옆자리 사람의 뒷통수를 퍽, 소리가 나게 갈기는 것이었다. 곧이어 바로 옆에 앉아있는 내 뒤통수를 갈기고 옆으로 돌아가면서 한 대씩 갈기면서 “아유, 이 거지 새끼들”하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 인간과 우리 일행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인간 옆에는 양복 입은 젊은 애 둘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히죽이 웃고 서 있었는데 우리 일행들은 고개를 푹 떨군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아무 이유없이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고도 찍소리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내 모습이 되게 비참하게 느껴졌다. 나중에 들었는데 그 인간이 평택 건달인데 역전 사창가를 재개발한다고 자주 들린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실업급여도 거의 떨어져갈 무렵이었고 이 도시에서는 노숙자 구호 급식이 일주일에 기껏 서너 차례 어느 절에서 주는 것 뿐이어서 이젠 밥 먹기도 수월치 않았다. 고시원 방세도 내야 하는데 다시 경비로 들어갈려니 서류 준비며 뭐며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노가다 현장에 나가려니 이 나이에 할 수 있을까 겁도 났다. 며칠간 머리를 굴리다가 어쩌든 서울로 가자! 그래도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 아니냐! 서울에서 새롭게! 다시 한번! 하고 용기를 냈다.
기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가다가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와서 용산역에서 후다닥 내렸다. 용산역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친구애들 공수부대 지원 입대할 때 배웅 나와서 술 먹고 깽판도 쳐본 적이 있는 곳이라 웬지 만만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용산역에 내려보니 엄청나게 바뀌어서 어디 가서 비집고 앉을 엄두도 안났다.
막걸리라도 한통 사려고 옆에 이마트에 들어가보니 후라이드 통닭이 한마리에 6,600원인가 하길래 그걸 사들고 나와 역전 계단에 앉아 막걸리하고 먹었다. 한잔 먹고 있는데 누가 불쑥 다가와 닭다리 하나만 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딱 보니 노숙자같이 보여 반가웠다. 옆에 앉으라 하니 딴 사람들이 있다며 몇 조각 더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어이가 없어 쳐다보다가 그럼 같이 가자고 따라 나섰다. 내가 술도 사겠다고 호기있게 말했다. 배낭을 울러매고 그사람 뒤를 따라가니 대합실을 지나 전자랜드 가는 통로 구석에 노숙자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용산역 뒤편으로 고가도로가 있고 그 아래쪽에 나무가 우거진 곳이 있는데 외부에선 눈에 잘 안띄는 곳이다. 그곳에 텐트 십여동이 쳐져 있는 공간이 있었다. 잘 됐다 싶어 입주민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도 한구석에 텐트를 쳤는데 며칠 못가 그곳을 빠져나왔다. 화장실이 없어 역까지 가야하는 것도 문제인데다가 소변을 주변에 봐버리니 찌린내와 모기떼가 극성을 피웠다. 거기다가 꽉 막힌 공간이 광장에 널널하게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도 하면서 술을 마시던 평택 역전하곤 달라 답답했다. 또 하나는 거기서 만난 한 인간이 술만 취하면 내 텐트에 들어와 내 꼬추를 만지려고 덤벼들어 이차저차 어느 새벽에 서울역으로 떴다.
내 나름의 현장 적응력이 있어 서울역에서도 무난하게 자리를 잡았다. 하루는 둘러앉아 술을 먹는데 한 친구가 “형님은 어떻게 여기 오셨어요?”하고 물었다. 그는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고 하는 사람인데 사실인지는 알수 없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 친구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미안해요, 미안해요”하며 내 손을 잡았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도 나 자신을 그렇게 바라본 적이 없었다. 말로만 듣던 서울역 노숙자가 되어 며칠씩 세수도 안 한 얼굴로 텁수룩한 수염을 하고 추위에 웅숭그리고 앉아 막걸리를 훌쩍거리고 있는 노숙자 한 사람을 보았다. 평생을 원수처럼 지내다가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어머니 아버지가 생각났고, 내가 돌보지 못한 자식들이 생각났고, 나에 대한 기대를 끝까지 버리지 못하다가 떠나간 아내가 생각났다.
역전의 다시서기센터에 들어가 상담을 하고 술을 끊고 싶다고 했다. 상담선생이 노숙자 재활시설인 비전트레이닝센터로 데리고 왔다.
한달쯤 술을 끊고 센터의 안락한 환경 속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지내니 내 건강은 몰라보게 좋아졌다. 정신도 맑아져 의욕이 넘쳐났다. 원래 책을 좋아했던 터라 센터 안에 있는 북카페에서 살다시피 했다. 공부를 다시 하고 싶었다.
어느날 센터 게시판에서 노숙자를 대상으로 인문학을 가르치는 성프란시스대학의 신입생모집 포스터를 보았다. 당장 학무국이 있는 서울역 다시서기 의원 3층으로 달려가 원서를 접수하고 1달쯤 후 면접을 보고 합격 통지를 받았다. 대학공부를 한다는 설레임에 개강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수업은 1학기에 글쓰기, 한국사, 철학을 배우고 2학기에 글쓰기, 문학, 예술을 배웠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막연하게 갖고 있던 나와 세상에 대한 의문들, 예를 들어 철학이 내 인생이나 세상에 대한 어떤 해답을 줄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라든가, 글이란 것이 우리가 먹고사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따위 1차적인 의문들에 대해 이제 진짜 한번 진지하게 알아보기로 했다.
20여명 남짓 되는 우리 동기들은 좁은 교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 보며 아기가 옹알이 하듯 글을 읽고, 철학 강의를 듣고,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새로이 배워나갔다.
글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진실한 글이 무엇인지 새삼 깨달았다. 나는 언제나 글을 꾸미는데 반해 동기들은 그들의 생각을 그대로 표출했다. 문법에 안맞고 맞춤법이 틀린 글들이 더 생생한 느낌을 주었다. 삶의 냄새가 푹푹 끼쳐왔다. 이빨 빠지고 비쩍 여윈 동기들의 모습이 눈물겹게 다가왔다. 그들의 빠진 이빨만큼이나 듬성듬성 빠진 토씨들, 비뚤어진 문장들, 잘못된 맞춤법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글들은 그들의 진짜 목소리였다. 반면 나의 글들은 가식된 수식어와 헛된 관념들이 끼어있어 마치 들꽃들 한가운데 놓인 조화처럼 흉물스러웠다. 내 인생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가식과 헛된 망상들로 채워진 내 인생.
철학수업은 조별 토론으로 진행되기도 했는데 동기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이들이 살아온 열악한 환경에 비해 나는 엄살을 부리며 산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과 함께 여기까지 살아내 온 동기들이 대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봄소풍을 갔다오며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1년 동안 회장을 맡은 이승복 동기는 우리들의 구심점이 되어 꼬투리만 있으면 작당해서 술판을 벌이고 2차 3차를 거쳐 방 두 개짜리 그의 거처가 우리들의 막차 술집이 되었다. 그 방에서 벌인 우리들의 활극과 회극은 우리가 고단한 삶의 여정에서 쏘아올린 불꽃놀이 같은 것이었다고 할까. 우리들의 우정은 여름 수련회를 거쳐 2학기 때도 시종여일하게 이어졌다.
수업도 한층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학기 수업은 글쓰기에 이어 문학과 예술사가 추가되었다. 예술사를 통해, 비록 한 학기 동안 대충 훑어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미술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제 그림 앞에 서면 가만히 뜯어볼 수 있는 실력(?)을 갖게 되었다.
1주일에 3일씩 야간에 공부하러 다니는 게 힘들었지만 강의 듣고 동기들과 어울리고 하다 보니 자연히 술 마실 기회가 많아졌다. 외박을 하고 들어오면 센터의 담당선생님이 북카페에 앉아있는 나를 찾아와 한숨을 내쉬었다. “술을 끊으러 들어오셨잖아요. 그런데... (긴 한숨)”
나도 덩달아 한숨.
“그러게요. 죄송합니다.”“이제 곧 방학이니까요”“ 이제 곧 졸업이니까요”하면서 서로 어색한 낯빛으로 쳐다보기를 여러 차례, 올봄에 마침내 수료를 했다.
그런데도 또다시 술이 입에 붙어 걸핏하면 정문 안내실에서 음주 측정에 걸리고 외박이 잦아지자 나를 새로 담당한 선생님이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으시며 차라리 자활센터로 가시면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내 행동이 여기 계시는 다른 선생님들한테 폐를 끼칠 수도 있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 했다. 그렇다고 술을 끊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서울역 다시서기센터에 가서 내가 갈 수 있는 곳을 상담해 보았다. 센터에 있는 동료들과도 상의해 보았다. 술을 끊지 않는 한 다른 데 가봐야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이 무더위에 다시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끌고 거리에 나설 생각을 하니 그것도 막막했다. 내 나이가 적기를 하나.
평소엔 말을 잘 안하지만 말을 하면 선견지명이 좀 있는 것 같은 소리를 하는 센터 후배가 술 마시는 것도 습관이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소리 같아 술자리에서 무알콜 맥주를 마셔봤다. 의외로 술맛도 나고 술자리에도 어울릴 수 있었다. 세 번쯤 그렇게 하고 나니 술을 참을 수 있겠다 싶었다.
담배를 끊을 때가 생각났다. 담배가 못 견디게 피우고 싶을 때 한갑을 사서 한가치를 딱 피우고 나머지는 라이터와 함께 물속에 처넣는 것이었다. 처음엔 돈이 아까워 할까말까 망설이지만 한번 물속에 처넣고 나면 두 번째는 쉽다. 세 번 그렇게 하고 나서 나는 담배를 끊었다. 내가 담배를 끊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이 방법을 권하면 사람들은 에이... 하며 고개부터 젓는다. 해보지도 않고.
뜻밖에도 무알콜 맥주로 술자리에 몇 번 어울리고 나서 나는 술을 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안마신 맑은 정신의 내가 웬지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막걸리를 몇잔 마시고 난 뒤의 흐리멍텅한 정신과 무알콜 맥주로 지탱한 맑은 내 정신이 비교가 되었다. 맑은 정신 쪽이 훨씬 좋았다.
한동안 술을 안 마시니 정신이 맑아져서 하고 싶은 일도 더 많아졌다. 하루하루가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평생의 반려였던 나의 술에게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하고 싶다.
“평생 내 곁을 지켜주었던 나의 연인아, 이제 우리도 헤어질 결심을 하자. 정 보고 싶을 때 가끔씩 눈물겹게 만나기로 하자. 그게 너를 더 사랑하는 길인지도 모르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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