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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19호

[인물 인터뷰] 프란치스코 성인을 생각하며 김용극 목사님과 함께

by 성프란시스 2023. 11. 13.

글/ 이현아

인터뷰어/ 이현아/박석일

인터뷰이/ 김용극 목사(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아웃리치 상담워,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자원활동가)

 

오늘 인터뷰에서 이야기를 나눌 분은 김용극 목사님이십니다. 김목사님은 지난 6년 동안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에서 아웃리치 상담원 역할을 해주셨고,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에서 16기부터 19기까지 자원활동가로 활동해 주셨습니다. 금년 목사 안수를 받으시고 목회직을 준비하시는 김목사님으로부터, 이러한 활동을 중심으로 한 인터뷰를 통해 김목사님의 경험을 우리 독자 분들과 공유해 보았으면 합니다.

Q: 김용극 목사님, 어서 오세요! 오늘 목사님 모시고 목사님이 경험하신 다시서기 아웃리치 경험과 인문학 자원활동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습니다. 먼저 목사님의 짧은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예 반갑습니다. 저는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에서는 16, 17, 18, 19 4년간 자원활동가로 활동하고 있고요,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에서는 아웃리치 상담원으로 6년 정도 활동을 했습니다. 원래 저의 직업은 목사고요.

 

Q: 먼저 목사님의 아웃리치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은데요. 활동을 오랫동안 하셨는데, 아웃리치 활동을 하시게 된 계기나 동기를 좀 이야기 해 주십시오.

A: 제가 아웃리치를 시작한 것은 사실 종교적인 이유가 컸어요. 제가 기독교 신자인데 한 10년간 교회를 안 다니다가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했거든요. 목사가 되기 전에는 생명공학 분야의 연구원으로 일했는데, 거기에서 제 삶의 목적과 뜻을 못 찾겠더라고요. 또 그때 신앙을 찾은 지 얼마 안 됐던 상태였고, 신앙인으로서 이 사회에서 과연 어떠한 선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던 찰나였습니다. 그때 다시서기센터에서 아웃리치 상담원으로 일하고 있는 친구가 있었어요. 당시에는 그 친구가 노숙인 대상으로 아웃리치 상담원으로 일한다는 것에 신경도 안 쓰고 관심도 없었는데, 문득 갑자기 그 친구가 떠오르더라고요. 그리고 그 당시 성남에서 노숙하시는 분들이나 독거 노인분들께 식사를 제공하는 등의 사회복지 사업을 하고 계시는 외국인 신부님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는데 엄청나게 많은 도전을 받게 됐어요. 이역만리 타국에서 온 분도 한국 땅에 있는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저렇게 자기의 삶을 헌신하시는데 똑같이 하나님 믿는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저 자신에게 던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고민한 끝에 이 분야를 좀 알아보자고 사회복지 공부를 시작하면서 노숙인 세계에 좀 더 접근하게 됐었습니다. 마침 그때가 제가 직장을 관두려고 딱 마음을 먹을 때였거든요.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면서 내 주변의 사람들과 뭔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의미 있는 삶을 살아보자 마음을 먹었죠. 그 뜻을 본격적으로 실천하고자 직장을 그만 두고 앞에서 이야기했던 친구의 소개로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에서 아웃리치 활동을 시작하게 된 거죠. 그 날이 정확하게 2018년도 4 26일이네요.

Q: 아웃리치 상담을 시작하셨을 때, 노숙인들의 삶을 한번 체험해보고 그들과 같이 어울리고 싶다고 생각했던 당초 마음이 현장 활동을 하면서도 유지가 되었나요? 그리고 목사님이 수용하기 힘든 상황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대처하셨는지요?

A: 당연히 당혹스러웠죠. 그때까지 저는 그분들을 말로만 듣던 노숙인 집단으로서만 바라보았지 1 1, 개인 대 개인으로서 만난 적은 없었잖아요. 아웃리치 상담 활동을 시작하고서야, 저는 그분들과 일대일로 대면하게 된 거예요

야간 아웃리치 활동을 나갔을 때 노숙인 선생님에게 들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나요.

서울역 13번 출구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길목 중간에서 노숙인 이모 선생님을 만났어요. 제가 아웃리치 활동을 하면서 처음으로 만난 노숙인 선생님이었어요. 그분 저를 보고 대뜸 개 삥땡아(*편집자 주: '개 삥땡이"는 논숙인 사회에서 쓰이는 '개 자식', '개 병신'이라는 은어이다)라며 마구 욕을 하시는 거에요. 엄청 당황스러웠죠. 그러니까 뭐랄까 저는 어떤 환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신앙인으로서 이렇게 아웃리치 상담을 하는 것이 뭔가 로맨틱하고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자신감 있잖아요. 그러니까 나만의 환상에 휩싸였을 때였는데, 그때 그 환상이 그냥 깨졌던 거죠. ‘이게 진짜 노숙하시는 분들의 참된 모습 중에 하나였구나라는 충격을 많이 받았었죠. 다행히 이 충격에서 벗어나는 데는 얼마 안 걸렸어요. ‘뭐 그럴 수 있지 사람 사는데 뭐 욕할 수도 있고 욕 먹을 수도 있고 이렇게 좀 생각을 좀 바꾸어 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마음이 편해 지더라고요. 아웃리치 상담을 하다 보니 여기도 똑같이 사람 사는 세상이고 특히나 이분들은 거의 밑바닥을 찍었던 분들이라 무서울 게 없던 분들이고 그런 분들의 삶의 환경과 애환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 분들과 대화가 불가능하고, 나의 아웃리치 활동도 불가능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적응력이 생기더라고요.

노숙인들을 만나면서 수용하기 힘든 상황을 정말 수 없이 많이 봤어요. 그러데 사실 수용하기 힘들다라는 그런 인식 자체도 나의 인식이잖아요? 여기 노숙인 문화하고 다른 내가 갖고 있는 선입견부터 벗겨 내자. 물론 나의 상식 안에서는 노숙인 선생님의 어떤 행동이 말도 안 되는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도 사실 그 분들한테는 일상일 수도 있거든요. 저는 그걸 그분들의 하나의 일상으로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어떻게 그분들과 의사소통 할지에 대해서 고민을 해봐야 된다고 봐요. 저거 잘못됐어 저거 하지 못하게 해야 돼 이렇게 막는다고 해서 솔직히 안 할 분들도 아니거든요. 일단 한번 지켜보고 수용하고 그분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저렇게도 사시는구나 하는 점을 인지를 하면서 그 안에서 한번 의사 소통할 방법을 생각을 해봐야 되는 거지 또 그게 잘못됐다고 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인식과 사고의 틀 안에서 또 그분들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 사실 이분들한테는 씨알도 안 먹힐 뿐더러 사실 그것은 또 하나의 폭력이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닥치더라도 덤덤하게 그분들의 그 상황을 그 삶을 받아들이고 지켜봐야 되는 게 우리의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Q: 5 6년 노숙인 선생님들과 어울리다 보면, 말 못할 여러 이야기가 있었을 것인데, 가장 가슴 아팠던 이야기 하나하고 또 뭐랄까 가장 기뻤다 할까 아니면 보람찼던 사례 하나씩을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일단 먼저 좀 가슴 아팠던 경험을 헤아려 보죠. 제가 아웃리치하는 도중에 어떤 고령의 할아버지 한 명을 만나게 됐는데 그 할아버지가 노숙을 하신 지 좀 오래되셨어요. 치매도 좀 있으시고 해서 그분을 연계를 해서 신원을 알아보니까 예전에 선생님이셨던 거예요. 오랫동안 교직생활 하시다 이제 정년 퇴임하시고 상도 받으시고, 교육 연금도 받으시면서 정말 남부럽지 않게 사셨던 분인데 어느 날 무슨 이유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분이 가족들과 딱 연락이 끊기고 노숙을 하시게 된 거예요. 그 분 연고를 조사해 보니, 그 분 가족 분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내심 놀라운 점은 그분 자제 분들이 소위 엘리트 계층이셨다는 점이었어요. 어느 대학교 교수, 어느 대학교 교수 그렇더라고요. 첫 째 자제분들에게 연락해서 아버님께서 노숙을 오래 하셔서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시다. 그러니 모시고 가라고 이야기하니, 자제분은 자기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둘째는 따님이셨는데 따님도 똑같이 말씀해 주시면서 아버지를 댁으로 모시고 가고 싶지 않다고 하는 거예요. 그 때 저에게는 분노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감정이 솟아오르더라고요. ‘예전에 잘 나갔더라도 가족들로 부터 한 순간에 이런 식으로 버림을 받을 수 있구나.’ 80살을 넘은 고령이신데 남은 인생 동안 따뜻한 방 안에서 부족함 없이 사시다가 가시지 못하고 가족에게 이렇게 버림받으시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죠. 사실 서울역 노숙인 선생님들 세계를 들여다보면 노숙인이 되신 경위가 정말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 분의 이야기도 그런 다양한 사례 중 하나였던 것이었죠. 저에게 여러 케이스가 있긴 한데 이분이 저에게 가장 가슴 아픈 케이스예요. 제가 알기로 지금은 다행히 가족 분들이 설득이 되셔서 이 분을 일단 잘 모셔 갔는데 그 뒤로 양로원 같은 곳에 가셨다고 거기까지 소식을 들은 것 같아요. 그 뒤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이는 아웃리치 상담원이 갖추어야 할 제1덕목이죠. 날이 바뀌면 또 다른 사연의 노숙인 선생님을 만나게 되고, 그 선생님의 사정과 사연과 씨름해야 되니까요.

두 번째 이야기로 좋은 일은 제가 아웃리치를 시작하고 한 석 달인가 넉 달쯤 됐을 때였던 것 같아요. 2018년 안용우 선생님이 서울역센터에 근무하실 때, 안선생님이 맡은 할머니 사례였습니다. 한국말이 전혀 안 되는 재일교포이신 70대 할머님이 다시서기센터 안용우 선생님을 찾아오셨는데 그 할머니와 상담을 해야 했던 다시서기센터는 급히 일본어 통역 인력을 찾게 되었고, 일본어를 조금 하던 제가 통역을 자원해서 하게 되었죠.

그 할머니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일본에서 사시면서 거기서 직장 생활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한국에 오고 싶어서 한국을 방문하셨는데, 공항에 도착하니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기 싫으셔서, 자신이 지닌 모든 신분증을 찢어 버리신 것입니다. 다시서기센터는 난리가 났죠. 그러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이분을 다시 일본으로 되돌려 보내든가 아니면 이곳에서 살게 하든가 해야 했어요. 그런데 이분은 죽어도 한국에서 살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 분은 한국말도 모르고, 자신을 증명할 신분증도 없으니 다시서기센터에서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죠. 다시서기센터 실무자들은 여기저기에 연락해서 신분증이 없는 재외 국민의 영구 귀국 절차를 알아보았어요. 이렇게 해서 모은 여러 정보를 토대로 알아 낸 영구 귀국 절차를 위해 저는 할머니 옆에서 근 한달 가량 근무를 해야 했습니다.

여권 재발급, 영구 귀국을 위한 복잡한 절차를 처리하기 위해 할머니를 모시고 다녀야 했고, 우여곡절 끝에 영구 귀국 절차를 마친 다음에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실 수 있느도록  중림동 주민 센터에 함께 가서 할머니의 말씀을 통역하는 일과 더불어 필요한 서류등을 준비하는 실무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어요. 그 알량한 일본어 실력 하나 가지고 노숙하실 뻔한 분을 한국에 정착하시도록 모든 절차를 밟아드리고 기초생활수급 절차까지 밟게끔 도와드릴 수 있었을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Q: 제가 서울역을 왔다 갔다 하면서 느끼는 노숙인 문제 중 하나는 여성 노숙인 문제와 지적장애인 노숙인 문제인데 이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지더라고요. 목사님으로서 그리고 아웃리치 경험으로 이들 문제에 대해 목사님 견해는 어떤지요?

A: 이 문제들은 정말 많이 겪는 케이스이고, 저는 여성 노숙인과 발달장애 노숙인의 사례를 모두 겪어봤어요. 그리고 여성 노숙인이면서 발달장애인일 때, 이 두 가지가 겹칠 때가 가장 문제가 돼요. 노숙 생활에서 성범죄를 당하면서도 가장 원초적인 거 말고는 자기 상황에 대처하거나 자기 의사를 표현할 방법이 없을 때, 아웃리치 요원도 정말 답을 찾을 수 없는 진짜 문제가 되죠. 바로 이런 부분에서 노숙인 서비스 개념의 확대가 필요한 것 같아요. 여성 노숙인과 발달장애 노숙인을 위한 시설을 더 늘린다든지 아니면 여성 활동가들을 증원하여 뭔가 여성만이 다룰 수 있는 서비스를 찾아 간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발달장애인의 경우는 이게 장애인 복지와도 연결이 되더라고요. 발달장애 노숙인 문제와 일반 발달장애인 복지 문제가 영역이 다른 것 같으면서도 겹치기도 하기에 이 두 그룹의 복지 지원 서비스의 유기적으로 통합이 필요한데, 현장에서는 이 두 문제가 서로 부딪치기도 하고, 서로 영역을 미루기도 하는 행정 난맥상이 자주 보이죠. 우리 영역이 아니라면서 책임을 피하거나, 열악한 환경을 미봉책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모든 복지 정책들이 유기적으로 수립되고 실행되어야 돼요. 안 그러면 뭐가 하나라도 무너지는 순간 다 무너져요

Q: 알겠습니다. 이제 주제를 인문학으로 넘어가 보죠.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에서 자원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어떤 계기가 있었죠?

A: 그러지 않아도 선생님이 인터뷰 요청을 하셨을 때 제가 한번 생각을 해봤어요.

내가 성프란시스대학 자원활동을 왜 시작했을까 생각해 보니, 아웃리치 상담하면서 선생님 한 분을 만났던 것이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아웃리치 상담원을 하면서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교육으로 사람을 바꾼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어요. 차라리 노숙인 선생님한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정책적인 무엇인가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던 시기였죠. 그러던 중 한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하는데, 자신이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출신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박경장 교수님, 안성찬 교수님, 김동훈 교수님 이야기를 하면서, 박남희 교수님한테 레비나스를 배웠다고요. 나와 타인에 대한 타자성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그때 진짜 입이 떡 벌어졌어요. 저도 그때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던 때라 철학에 관해서 조금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내가 서울역에 계시는 선생님한테서 이런 철학 이야기를 다 듣네하며 깜짝 놀랐어요. 특히 레비나스 철학을 자기 삶에 결부하면서 이야기를 풀어 가시는데 진짜 대박이다 싶었어요. 그 선생님과 인연으로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을 진짜로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해가 넘어가고, 마명철 선생님이 인문학과정 16기 학무국장님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나랑 같이 인문학을 해 볼 의사가 없느냐?”고 인문학과정 자원활동가를 제의하시더라고요. 전년도의 충격도 있고 해서 선뜻 제의를 받아들였어요.

(*편집자 주: 레비나스는 20세기에 활동한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은 나 또는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자기성의 철학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성 속의 타자성의 철학을 추구한다.)

 

Q: 작년에 국회에서 시화전이 있지 않았습니까? 시화전에서 여러 선생님들 작품을 쭉 보다 보니, 작품 속에 거울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인문학과정 김동훈 교수님의 예술사 수업에서 나오는 자화상이란 단어와 거울이라는 단어가 겹쳐 연상되더라고요. 우리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선생님들에게 거울은 기존에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하고, 포기했던 자기의 모습을 돌아 보게 하는 자기를 재정립하는 의식으로 생각됩니다. 목사님께서 자원활동가로 활동하시면서 한 선생님이 성프란시스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하면서 자의식이 성장하는 것을 느껴 보셨나요?

A: 그걸 맛보는 재미에 제가 지금도 성프란시스대학에서 벗어 나지 못하고 있죠. 처음에는 회의적이었어요. ‘아닌 말로 젊은 분들도 아니고 다 나이 드실 대로 드시고 삶에서 정말 겪어볼 걸 다 겪어 보신 분들이신데 이분들이 그냥 인문학 좀 배운다고 그렇게 사람이 쉽게 변할까?” 그러나 인문학과정 자원활동가로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선생님들이 우리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이라도 변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변하는구나.’ 옛날의 나와 지금 변하고자 하는 나와의 그런 내적인 싸움을 하시는 선생님들을 지켜 보면서, ‘진짜 대단하시다. 나 같으면 저분들처럼 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많이 놀라웠죠. 자신이 변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알아 가게 되고 그러다 서로 관계를 이루게 되는 어떤 순환 구조를 느끼게 되더라고요.

 

Q: 이제 성프란시스대학 공동체는 성프란시스대학의 지난 20년을 회고하면서, 앞으로의 20년을 전망하는 때입니다. 목사님께서 앞으로의 20년을 준비하는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에 대해 한마디 해 주시죠!

A: 지금 거리에 계신 분들 양상이 많이 바뀌고 있어요. 생각보다 진짜 많이 바뀌고 있거든요. 그거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서울역 노숙인 선생님들을 보면 보편적인 교육 과정을 밟지 못해, 수업 자체를 힘들어 하시는 분들도 있고, 외국인 노숙인 분들도 생기고 있어요. 그런 분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탄력적인 체계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물론 예산이나, 공간이나, 전문인력 등 환경 여건이 따라 주어져야 하겠죠. 앞으로 변해가는 노숙인 선생님들의 구성이나 노숙인 환경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리고 체계적인 사례 관리를 하기 위해서는 사실 학무국장 한 분으로는 절대 부족한 것 같아요. 자원활동가가 있긴 하지만 자원활동가들도 전문가는 아니고.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변해가는 노숙인 세계에 대비해 어떤 유형의 노숙인 선생님들이 오셔도 대비할 수 있는 그런 체계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실무자 양성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두 번째는 교육과정에서 선생님들이 졸업 후에도 지속 가능한 평생 교육 차원에서 인문학교육을 생각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그런 차원에서 인문학과정을 졸업하신 선생님들이 자기주도형 인문학으로 기수별 동문회 모임을 활성화하거나 자신이 배운 것을 후배 분들과 공유하는 차원에서 인문학 후배들을 대상으로 하는 졸업 동문들의 자원 활동 영역의 확대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조금 전에 이야기한 인문학 자체를 어렵게 생각하시거나 한글 묘사를 힘들어 하시거나 기초적인 사고에 어려움을 겪는 선생님들을 졸업생들이 도울 수 있다고 봅니다. 한글 익히기, 카페에 글쓰기나 댓글 달기, 인문학과정을 힘들어 하시거나, 여러 이유로 인문학 과정에서 벗어날 위기에 처하신 선생님들 상담 등 말입니다. 졸업생 선생님들의 이런 자원 활동은 초기에는 다소 서툴거나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나, 어느 단계에 이르게 되면, 어떤 폭발적인 발전을 이룰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런 과정을 인문학 정규 과정 이전에 방학기간 동안에 예비과정으로 생각해 볼 수 있죠. 그러기 위해서는 의사 표현 능력이 부족한 선생님들이 예비 과정을 거쳐서 본 과정으로 진입하는 흐름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졸업 후에는 지속 가능하며 자기 주도적인 인문학과정을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Q: 이제 마무리 단계로 목사님에 있어서 목회직과 인문학은 무엇인가? 또 이 두 영역의 관계에 대해 한마디 해 주시죠.

A: 매우 어려운 질문인데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인문학은 해방이다. 신학도 마찬가지로 해방이다라고 생각해요. 무슨 의미의 해방이냐고요? 신학에서 해방은 기존에 살았던 나의 옛 것을 벗고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해방이죠. 인문학 안에서의 해방은 조금 설명이 필요하네요. 인문학과정의 선생님들 가운데 자기와 싸움하시는 분들이 무척 많아요. 내가 갖고 있었던 좌절과 떠밀려 살아가던 어제의 삶의 모습과 인문학을 통해 내 삶을 재정립하려는 시도가 부딪치는 과정을 통해 점차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하나의 해방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목회직과 인문학은 변화하기 위한 자기와의 싸움 그리고 그런 자의식 위에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 그리고 또 변화해가는 새로운 삶에 대한 은혜와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것 같아요.

 

Q: 방금 주제와 겹치는 주제인데 이제 목사님께서 본격적으로 목회직을 하시게 되면 자연스럽게 아웃리치나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과 거리가 조금 생기실 건데 그동안의 아웃리치나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자원활동의 경험이 앞으로 목사님의 목회자 활동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제가 아웃리치도 하고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에 참여한 이유도 목회자로서 소양을 갖추기 위해서예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같은 피조물로서 그들과 삶을 더불어 영유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런 삶을 행할 수 있는 토대 중 하나가 인문학의 소양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개신교 목사님들이나 사역 조역자분들 그리고 신앙 생활 하시는 성도 분들이 삶의 모든 정답이 다 종교에만 있는 줄 아시는 경향이 있거든요. 저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장에서 우러나오는 인문학을 통해서도 삶의 정답을 끌어 올릴 수도 있고, 그를 통해 사람들의 영성이 발전 심화될 수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신학은 정말 편협한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학문이 될 수도 있었는데, 인문학을 공부하고 또 사람들과 체험하면서 그런 편협한 시각을 좀 더 넓힐 수 있었다고 봐요.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건 사람에 관해서 공부한다는 거고 신학은 신에 관해서 공부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목회자 입장에서 목회 대상은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사람에 대해서 모른다. 그들의 삶에 대해서 공부를 하지 않는다. 이거는 목회자가 직무 유기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과 다시서기센터에서 아웃리치 경험은 저의 목회직 삶에서 아주 소중한 자양분이 되리라 봅니다.

 

Q: 제가 고등학교 시절 때 어느 교회를 갔는데, 목사님이 그 교회 신자분들에게 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시더라고요. “새로운 신자 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한 누구입니다.” 서울역에 있는 노숙인들을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확대되어 나갔으면 합니다.

A: 중요합니다. 아까 레비나스 이야기를 했었는데 레비나스도 그런 얘기를 했죠.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모습을 보고 싶으면, 가장 소외받은 사람,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라. 그 사람들 안에 신의 모습이 있다고 말하거든요. 실제로 우리 기독교에서 믿고 있는 예수님도 신의 속성을 지니시고, 이 땅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고, 그것도 가장 낮은 사람, 가장 낮은 존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죠.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교회 안에서만 찾아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죠. 우리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그 사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거든요.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신의 모습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그리고 우리의 배려와 사랑이 필요하신 분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노숙하시는 분들 가운데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로서 작은 자를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이라고 하셨던 마태복음 2540절 말씀을 마음에 되새겨 봅니다.

  

Q: 오늘 인터뷰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장시간 시간을 내어 주시고 풍성한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께서 앞으로 목회 하시면서도 다시서기센터의 아웃리치와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에 대해 애정 어린 관심을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 목사님의 목회 활동에서 하나님과 사람들이 기뻐할 뚜렷한 족적을 남겨 주시기 바라며, 오늘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김용극 목사님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성프란시스대학의 멘토 프란치스코 성인이 생각났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을 생명의 존엄성으로 맞이하고, 가난한 자, 병든 자, 버림받은 자들의 하나님 형상을 경건함으로 대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발걸음에 김목사님이나 저나 우리 모두의 삶과 발걸음이 함께 하였으면 하는 바람을 간직하면서 서울역을 빠져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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