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연아
인터뷰어 / 강민수, 김연아
인터뷰이 / 한국남자999 님
(성프란시스대학 17기)
이분으로 말씀드리자면 동료 선생님, 활동가, 교수님 들께서 “결석 한 번 하지 않은 개근생”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가득한 분” “알면 알수록 아이같이 웃는 모습이 예쁜 분” “다른 동료들을 잘 챙기는 따스한 분”으로 인정하신 분입니다. “일 년 내내 수업시간에 가장 눈에 빛이 반짝이셨던 분”, “별빛”과도 같은 눈빛으로 매 수업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니, 얼른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어려운 부탁일 수 있는데도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일요일 오후, 숙대 다시서기센터 근처 카페에서 만나 뵈었습니다.
Q: 선생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개근으로 졸업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시고 축하드려요. 오늘 인터뷰는 선생님께서 쓰신 글을 함께 보면서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A: 안녕하세요. 제가 글 쓴 것이 별로 없는데…. 아무튼 알겠습니다.
<자화상> - 한국남자999 예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세상의 모든 것은 자기들 모습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들 모습을 그린다 둥굴고 네모낳고 세모지고 길이가 짧으면 길고 크기도 가지가지 이 모든 자연 속의 모든 것들은 저마다 나 잘났다고 서로에게 시샘을 한다 |
Q: ‘한국남자999’라는 말이 독특해요. 어떤 뜻이 담겨 있나요?
A: 이게 원래 제 게임 아이디예요. 아들이 지어줬어요.
Q: 아들이요?
A: 예. 제가 결혼하고 1년 만에 이혼했어요. 아니, 이혼은 나중에 했는데 그냥 집 나와갖고 산거죠. 아들 하나 있는데, 애는 계속 꼬마였을 때부터 찾아가서 보고 하다가 같이 만날 시간이 없으니까 아들이 “아빠, 그럼 게임하자” 하더라고요. 그렇게 온라인 게임상으로 만났는데 그때 아들이 아이디를 그걸로 만들어줘서 지금도 쓰고 있는 거예요.
Q: 신기해요. 아버지하고 게임한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봐요.
A: 저희 애가 유료 게임은 안하고, 그때 무료 게임으로 ‘붉은 보석’이라는 게 있었어요. 처조카 애들까지 한 네다섯 명이 몰려 다니면서 게임을 했죠. 칼싸움도 하고. (웃음)
Q: 그러시구나. 그럼 <자화상> 이 글은 어떻게 쓰게 되셨어요?
A: 그때 고흐의 자화상 그림을 보면서 공부를 하다가 글짓기를 하라 그래서 했는데, 다들 자기 모습을 그리려고 하고 언뜻 생각한 것이 산 위의 돌멩이도 동그란 게 있고 네모난 게 있고 세모난 게 있고 사람도 마찬가지고 작은 사람, 큰 사람이 있고, 그런 걸 그냥 쓴 거예요. 제 자화상은 아니고, 모든 것은 자기만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요.
Q: 마지막 연에 “이 모든 자연 속의 모든 것들은 저마다 나 잘났다고 서로에게 시샘을 한다” ‘시샘을 한다’는 표현이 재밌어요.
A: 우리도 그래요. 시샘이라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거든요? 시샘을 내야지 자기가 발전도 하려고 하고. 저도 세수하고 나왔지만 세수하면은 화장품 발라야지, 로션 발라야지, 자기 모습을 서로 나타내려고 한다는 거죠.
Q: 아, 저는 ‘시샘’이라고 하면 꼭 부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했어요.
A: 그러면서 발전도 할 수 있잖아요. 선생님이 좋은 안경 쓴 걸 보고 ‘아, 나도 저거 갖고 싶다.’ 생각이 든다면 노력해서 가질 거 아니겠어요?
<별을 보며> 나에게 버릇 하나 있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을 쳐다보네요 반짝반짝 빛을 내는 작은 무리를 보아요 마음이 따뜻하고 편안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면 위로해주고 기쁜 일 두 손 모아 쓰다듬어주시는 반짝이는 불빛은 저만치 바라보이는 고향집 마음 같아라 |
Q: 이 시는 생각나세요?
A: 그럼요. 이 시의 제목이 이번 17기 졸업문집 이름으로까지 선정됐어요. 김담비 선생님(자원활동가)이 다른 걸 냈는데, 투표해서 ‘별을 보며’로 하자고 뽑혔어요. 그래서 이번 문집 제목이 ‘별을 보며 나누는 우리들의 작은 이야기’가 되었네요.
Q: ‘고향집 마음 같아라’라고 표현하셨는데, 혹시 고향이?
A: 고향은 충주인데, 아버지가 서울에서 직장 다니시면서 어릴 때 올라왔어요. 창신동 꼭대기, 거기 낙산이라고 있죠? 천막으로 친 집들 있는 달동네였는데 거기서 살면서 초등학교 입학도 했어요.
Q: 아, 아주 어릴 때 올라오셨군요.
A: 예. 거의 서울 사람이죠.
Q: 이 시는 어떤 생각하면서 쓰셨어요?
A: 저는 삼형제의 가운데인데, 어릴 때부터 장난도 짖궂고 해서 많이 혼나면서 컸어요. 집에서 그렇게 밤이고 낮이고 혼나면 갈 데가 어딨겠어요? 그냥 집 마당 장독대에 올라가 하늘 봤던 기억을 떠올렸어요. 낮에 올려다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높은 건물이 없으니까 막히는 게 없어서 넓은 하늘에서 막 뛰어다니고 싶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고 그랬죠. 밤에는 별을 보고 ‘내가 뭘 할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감수성이 예민할 때.
근데 제가 ‘고향집 마음 같아라’ 라고 쓴 거는 충주에 살던 집 생각하면서 썼어요. 전기도 안 들어갈 정도의 산골짜기에 집이 있었거든요. 집 뒤로는 다 산이고 길도 없던 곳이었어요. 큰집, 할아버지, 할머니 다 계셨어요. 어디 갔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 차에서 내려서 한참 걸어가다 보면 그 등잔불 있죠? 유리관 속에 조그마한 심지 들어있는 거요. 그 불이 멀리서 쬐그맣게 보여요. 그 불 보고 ‘아, 아직 안 주무시는구나’하고 생각했던 그 기억으로 ‘반짝이는 불빛은 저만치 바라보이는 고향집 마음 같아라’라고 쓴 거예요.
<어부바> 둥근달이 밝은 어느 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으며 화기애애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그중에서 어머님의 고달픈 서울살이 중 떠올리신 꽃 하나 한 광주리 떡을 머리에 이고 동네골목 장충단공원 이곳저곳 다니실 적 간난 둘째 아들 등에 매달고 다니셨다 그 사이 둘째 아들은 잠이 들고 머리는 좌우로 흔들리며 가뜩이나 힘드신 어머니를 더욱 힘들게 한 옛이야기에 둘째 아들은 아무런 말을 못 하였습니다 고생하신 어머님 그 자리에서 업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 말 못 하고 낯만 붉히고 너무 어려 기억이 안 난다고 도리질만 하였으니 돌아오는 생신날은 등에 모시고 동네 한 바퀴 해야겠다 |
Q: 이 시에 나오는 ‘간난 둘째 아들’이 선생님이신 거죠?
A: 맞아요. 명절 때면 집에 가족들이 정말 많이 모였어요. 쭉 모여 앉아서 떡을 해도 이만큼을 해서 손님들 맞이하고 그랬어요. 그러면 어머니가 떡 만드시면서 “내가 이거 팔러 다니느라고 너 업고 다니는데 애기 목이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했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이 시에 시계추라는 단어를 쓰진 않고 ‘머리는 좌우로 흔들리며’라고만 했지만요. 이거 쓰고 나서 박경장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읽어 보라고 하셨는데, 괜히 울컥하더라고요. 울뻔했어요.
Q: ‘돌아오는 생신날은 등에 모시고 동네 한 바퀴 해야겠다’ 실천하셨나요?
A: 그게 바람인데, 잘 될지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33년생으로 구십이 다 되셨고 어머니는 38년생이신데 두 분 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세요. 가끔 연락드리기는 하는데….
Q: 어렸을 때 사셨던 창신동 집에선 언제까지 사셨어요?
A: 그 집은 재개발로 없어지고 부모님 두 분은 지금 의정부에 살고 계시는데 2018년도에 서울역 나오기 전까지 일주일에 서너 번은 집에서 자고 왔다갔다했어요. 동네 사람 창피하고, 친척들한테 창피하고…. 제가 아무리 돈을 많이 날렸어도 부모님 사시는 집까진 날릴 수 없어서, 내가 있으면 부모님께 민폐라는 생각에 나오게 됐죠.
Q: 혹시 왜 집을 나가게 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A: 특별한 건 없는데, 이런 얘기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저는 젊었을 때부터 도박으로 살았어요. 2018년에 서울역 나오기 전날까지도 했다면 말 다 했죠. 이상하게 내가 손 벌리면 다들 돈을 줘가지고, 이 사람한테 손 벌리고 저 사람한테 손 벌리고 하면서 도박만 한 40년을 한 거 같아요.
Q: 도박이라고 하시면 경마나 포커?
A: 네, 포커나 고스톱. 남들이 하는 토토, 경마는 안 하고 나머진 다 해요. 처음에는 제가 벌어서 했는데 그 돈 다 날려버리고. 근데 또 일은 꾸준히 했어요. 한달에 4~5백만 원 정도 꽤 벌었죠. 마지막으로 했던 게 택배 일이었거든요.
Q: 그럼 도박할 시간이 없지 않나요?
A: 잠을 못 자죠. 일주일에 두 번은 날밤 새고. 공장도 다녀보고 일은 별거 다 했는데, 진짜 벌어서 도박, 벌어서 도박, 이렇게 40년을 살았네요.
Q: 예전엔 어떤 일을 하셨어요?
A: 요즘엔 정보고등학교라고 하죠. 제가 상고를 졸업했는데 공부를 좀 했나봐요. 당시 최고의 상고를 나와서 외국계 에이전트 회사에 취직이 됐어요. 무역회사였는데, 그게 잘못된 거였는지, 그때 중요한 자리에 있었는지 월급 외적인 수입이 정말 많았어요. 기업에서 자금부가 돈이 많잖아요? 근데 나는 자금부에 자금 계획표를 넘겨주는 사람이었어요. 그때 당시 제가 과장으로 있을 때 월급이 60만 원이 채 안 됐는데, 월급 외적인 수입이 봉급의 4배 정도였어요.
Q: 인센티브 같은 건가요?
A: 뇌물이라고 봐야죠. 명절이면 구두 상품권 몇백 장이 제 주머니 안에 있고. 근데 그것도 그냥 주는 게 아니라 술 한 잔 먹고 접대 고스톱을 하거든요.
Q: 접대 고스톱이요?
A: 그런 게 있어요. 그냥 주기 뭐하니까. 제가 그러면서 도박을 배웠어요. 예를 들어, 볼링을 치러 가도 편 먹고 내기를 하는데 내가 있는 팀이 다 이기게 되는 거죠. 그게 잘못됐던 것 같아요. 그냥 평범하게 직장생활 했으면 지금 이 자리까지는 안 왔을 텐데….
Q: 혹시 그런 게 회사에서 걸려서 그만 다니시게 된 건가요?
A: 아, 그건 아니에요. 돈이 그냥 막 들어오니까 그걸 또 다 쓰게 되잖아요. 너무 흥청망청 쓰는 걸 배운거죠. 그리고 일 자체가 너무 힘들었어요. 선적 관리하는 일을 했거든요. 매주 토요일 컨테이너를 이양해야 되는데, 컨테이너 긴 거 보셨는지 몰라. 버스만 한 거. 버스만 한 컨테이너들 서너 개를 매주 내보내야 해요. 물건을 꽉 채워서. 그러면 토요일에 거의 날밤 새고 일요일엔 자금계획 짜야 되고, 우리 제품이 매일 공장에서 만들어지면 그게 몇 개, 얼마, 이게 수입이 될 거다, 이런 계획 세우는 일을 한 7년 정도 하다 보니 몸이 굉장히 망가졌어요. 그래서 관두고 돈은 많겠다, 시간도 많겠다 해서 본격적으로 도박을 또 한거죠.
Q: 그때부터 정말로 도박을 시작하신 거군요.
A: 예. 근데 그때 맞보증을 섰는데, 그게 잘못돼서…. 그때 당시만 해도 그게 다 사기죄로 쳤거든요. 신용카드 금액을 1원이라도 안 갚으면 사기죄로 감옥에 넣었어요. 보증 하나가 잘못되니까 여러 군데서 다 치고 나와서 죄목이 한 열몇 가지가 된거죠. ○○사기, ●●사기, ☆☆사기, 이런 식으로요. 그때 감옥생활도 좀 했어요.
Q: 감옥생활까지요?
A: 그때가 90년대 초였는데, 요즘은 그런 걸로 감옥 안 가잖아요. 요즘 신용카드 금액 연체했다고 감옥 가는 사람이 어딨어요. 근데 그땐 그랬어요. 아무튼 감옥 나와서 이제는 도박도 끊고 열심히 살자 해서 공장에 취직했거든요. 그런데 거기가 또 도박 공화국인거죠.
Q: 공장에 일하시는 분들 사이에서요?
A: 예. 하루에 열몇 시간 근무하고 쪽잠 자고. 근데 사람들 모이는 곳에는 꼭 도박판이 벌어지더라고요.
Q: 어떤 공장이었나요?
A: 참, 진짜 그때 그 일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거기가 가죽을 다루는 공장이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이런 원단이 아니고, 소에서 직접 벗긴 거, 돼지에서 직접 벗긴 거 있잖아요. 그러면 그 가죽 한 장 무게가 보통 30kg이에요. 그 미끄덩미끄덩한 게. 기름도 묻고. 그걸 이제 집어 던지고, 집게로 이렇게 던지고 야구하듯이 던지고. 그걸 제련해서 우리가 쓰는 가죽을 만드는 거예요.
Q: 와, 이런 얘기 처음 들어요. 선생님은 그때 어떤 일을 하셨어요?
A: 잡부죠. 염색을 좀 배워보려고 했다가 너무 힘들어서…. 일이 너무 고되니까 술을 진짜 많이 먹었어요. 근데 다 기름투성이니까 면장갑 끼고 그 위에 고무장갑을 끼고, 또 그 위에 면장갑을 껴서 일을 했거든요. 그러면 속에 기름이 다 묻어갖고 어떻게 하질 못하는 거예요. 술은 어떻게 종이컵에 따라 먹는다지만 안주를 못 집어먹잖아요. 그러면 왕소금을 바닥에 조금 떨어뜨려놓고 혓바닥으로 왕소금 안주 해서 깡소주로 먹는 걸 배웠어요. 거기 있는 분들이 다 그렇게 먹으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거죠. 몸음 몸대로 다 망가져서… 지금 몸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그런 몸이 돼버려서…, 근데 서울역 와서 딱 한 가지 좋아진 게 도박을 안 한다는 거예요.
Q: 여기 서울역도 도박하는 데 있지 않아요?
A: 아예 쳐다도 안 봐요. 술도 끊었어요.
Q: 엄청난 변화인데요?
A: 술 끊은 건 자의는 아니에요. 여기 보면 상처 있죠? 이게 식도가 잘못돼서, 큰 건 아닌데 더 이상은 먹으면 안 된다고 해서 끊어야 했죠. 일단은 열심히 살아보려고는 하는데, 되어 가고는 있어요. 제가 여기 올 때만 해도 이렇게 다른 사람과 얘기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는데, 지금은 그래도 얼굴이 밝아진 거예요.
Q: 지금 엄청 밝아 보이세요.
A: 여기서 사람들이 돈이 없다 그러는데, 돈이 없는 게 아니에요, 그냥 한 달 벌어 한 달 쓰는 것이긴 하지만, 나 이런 동네가 있는지 처음 알았어. 여기 오자마자 상담 받고 바로 첫날 안경, 틀니, 고시원, 자활근로 하루 만에 그게 다 신청이 되더라고요. 근데 자활 75만 원 받는데 돈이 남아요.
Q: 어떻게 돈이 남아요? 술 안 드시고 담배 안 펴서 그러신 거 아니에요?
A: 아니요. 담배는 펴요. 담배는 피는데, 술 안 먹고 일단 우리가 먹는 데 쓰는 비용이 크잖아요. 근데 여기저기서 다 밥을 주니까 굶지 않고, 옷도 다 주니까요. 그래서 돈이 남아요.
Q: 주무시는 건요? 숙대 다시서기센터에서 주무셨어요?
A: 센터 생활은 안 했어요. 한 이틀 잤나? 도저히 못 자겠더라고요. 제 성격이 옆에 누가 있으면 못 자는 성격이라, 그래서 바로 고시원 들어갔고 지금까지 살고 있는 거예요.
Q: 다시서기센터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셨어요?
A: 집 나온 날, 한강을 갔어요. 동작대교 밑에서 노숙인들이 술을 먹고 있더라고요. 한 잔을 얻어먹다 보니까, 왜 여기 오냐고. 여기 오지 말라고. 여기 잘 데도 없는데 뭘 오냐고. 그럼 어떡하냐 하니까, 서울역으로 가라고. 그래서 서울역 온 거예요. 여름이었고 밤 9시 정도에 서울역 계단에 앉아서 밤을 새려고 하니, 못 있겠더라고요. 그때 서울역 희망지원센터 가서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거기서 숙대 다시서기센터를 알려줘서 그다음날 상담받게 된 거예요.[*편집자 주: 서울역 희망지원센터는 다시서기센터의 현장대응센터이다. 잠을 자는 일시보호시설은 숙대입구역 1번 출구 다시서기센터 안에 있다.] 근데 딱 이틀 잠을 자고, 더 이상 거기서 못 자겠어서 집에 살짝 들어가 센터나 관련된 제도에 관해 공부를 하고 계획을 세워서 나왔어요.
Q: 계획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걸까요?
A: 일단 가서 임시주거를 받고 자활근로 하면서 살자. 무료급식소 어디 있고, 뭐 어디 있고 이런 것들을 다 공부해서 나온거죠. 그렇게 지낸 것이 4년이 되었네요. 제 나름대로의 철학도 갖게 되고 남들한테 피해 안 주니까 밥 얻어먹는다는 게 굳이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나 같은 사람들도 많은데 몇 년 뒤에 잘 돼서 나가면 우리는 사회에 고마운 것이고. 이런 데가 어딨어요. 언제 독립해서 나갈지는 모르지만 지금 정말 잘 살고 있습니다. 빚도 갚아 나가고 있고요.
Q: 빚이 좀 있으세요?
A: 예. 예전에 맞보증 섰을 때 안 갚은 게 서울보증에 있어서요. 거의 탕감 받았는데, 남은 것은 앞으로 8년 간 한 달에 28만 원씩 갚기로 했어요. 만약에 몸 아프고 일 못 하면 파산 신청하는 방법밖에 없긴 한데, 지금은 파산하기 싫어서 갚아나가자고 생각했습니다.
Q: 성프란시스대학은 어떻게 신청하게 되셨나요?
A: 아까 제가 자활을 해도 돈이 모인다고 했잖아요? 2018년도 지나고 2020년도 즈음 되니까 돈이 몇백이라도 모이면서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주머니에 돈이 생기니까 마음이 풀어지고 뭔가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거 있죠. 예전 같으면 쳐다도 안 볼 금액에 감동을 하고요. ‘안 쓰면 이렇게 좋아지는구나’를 배웠고, ‘내 통장을 가져야겠다’ 생각해서 신용회복위원회에 신청을 했고 주위 정리를 조금씩 해나가다 보니까 성프란시스대학 공고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Q: 인문학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어요?
A: 그냥 나는 처음에 ‘입문학’이라고 들어서, 학문에 들어가는 단계로 입(入)자를 쓴 줄 알았어요. 근데 찾아보니까 사람 인(人)자를 쓰더라고요. 근데 어쨌든 1년을 하고 나니 내가 대면 수업이든 온라인 수업이든 안 빠지고 하는 걸 봤는지 세 사람이나 제 추천을 받아서 18기를 하겠다고 지원을 했어요. 제가 또 나쁜 짓을 안 하잖아요. 술도 안 먹고 남한테 피해도 안 주고….
Q: 숙대 센터 가서 뵙는 분들께 추천하시는 거예요?
A: 예, 센터에서 만나는 분들께 나쁜 거 아니니까 그냥 재미로 하라고. 공부하는 게 아니라 재밌게 하다 보면 된다고. 그리고 서울역에서 무의미하게 여기 왔다갔다해봐야 남는 게 없잖아요. 시간도 줄이면은 돈도 줄고, 아니, 돈이 남고, 제일 중요한 게 밥도 준다, 저녁밥. 하면서 이렇게 얘기를 하다 보니까 공감들을 또 해요. 그리고 제가 ‘졸업을 맞이하며’라는 글에 썼는데, 소속감, 연대감을 가지면은 마음이 편해져요. 내가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스스로도 조심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길 가다가도 자랑스럽게 “응, 나 인문학 가,” 말 할 수도 있고요. 저는 인문학을 갈 때 진짜 재미를 느끼면서 갔어요. 우리가 7시에 시작을 하는 데 저는 한 3, 4시쯤 갔거든요.
Q: 일찍 가서 뭐 하셨어요?
A: 커피 한 잔 하고 있다가 마 국장님하고 둘이 도시락 가지러 갔어요. 와서 펼쳐놓는 거 도와드리고, 그런 게 재미더라고요. 그러면 사람들이 와서 또 먹고, 6시 되고, 그러면서 버텼나봐요.
Q: 배우는 건 어떠셨나요?
A: 옛날에는 다 주입식이었는데, 이건 다르죠. 철학만 해도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 배웠잖아요. 근데 지금은 그 한 사람을 주제로 1교시, 2교시 얘기할 정도로 이 사람이 왜 나중에 벌을 받았냐 하면 너무 귀찮게 해서 벌을 받은 거라는 것까지 알게 된 거죠. 몰랐던 것을 아는 기쁨이 있었어요. 한국사 시간에도 불교 석가모니만 배운 것이 아니라, 지금은 다 잊어버렸는데 (웃음) 상식이 늘었다고 봐야죠. 잊어버린다고는 해도 머릿속에 들어온 게 있거든요. 근데 아쉬운 건 피카소를 못 봤다는 거죠. 예술의 전당 전시회를 가기로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못 갔거든요. 다음에 기회되면 꼭 가보고 싶어요.
Q: 기억에 남는 수업이 있을까요?
A: 우리 김응교 교수님 어느 날 문학 한다고 오셨는데 갑자기 BTS 얘기를 하시는 거 있죠. 방탄소년단을 우리는 모르잖아요. 그런 노래는 들어보지도 못했죠. 근데 이 노래가 좋고, 저 노래가 어떻고. 그래서 짜증을 냈던 기억이 있어요. 그 노래 하나 하나에 숨은 뜻이 있다는 것을 계속 듣다 보니 나중에 조금은 귀에 들어오더라고요. 우리는 아무래도 트로트에 젖어 있다 보니까. 18기 들어오는 선생님들 고생 조금 하실 것 같아요. (웃음) 그런데 김 교수님이 나중에 저희 다 불러서 삼겹살 사주셨어요. 그래도 언젠가는 말씀드릴 거예요. 너무 BTS 틀지 말라고. (웃음)
Q: 글쓰기 수업은 어떠셨어요?
A: 어려웠습니다. 말을 만들질 못하겠어요. 어떤 분은 다음카페에 엄청나게 많이 올리는데, 나는 올릴 게 없고, 댓글도 잘 못 달고요.
Q: 그래도 많이 올리셨던데요?
A: 한번 뭔가 이렇게 적어볼까 하면은 교수님께서 육하원칙으로 써야 한다 이런 거를 많이 말씀하시니까 글을 잘 못 쓰겠더라고요. 머릿속에서 생각이 날래다가 안 나다가.
Q: 박경장 교수님이 ‘마구쓰기’ 하라고 하시잖아요.
A: 마구쓰기도 너무 ‘마구’ 쓰면 안 되고 어느 정도 맞춰줘야 해요. (웃음) 글쓰기를 그동안 안 했잖아요. 몇십 년 동안 볼펜도 안 잡아봤는데. 자꾸 써보라고 하시니까 쓰기는 썼죠. 머릿속에서는 맴도는데 글이 안 돼요. 그래서 일상 속에서 다니다가 생각날 때마다 적어보려고 하는데, 제대로 실행은 잘 안 되고 있어요. 지금도 쓰고 싶은데, 지금 을지로 가면은 그 아랫길 있죠? 그 지하상가. 동대문까지 연결된 지하도로. 그걸 아랫길이라 그러거든요. 그걸로 뭘 만들고 싶은데 잘 안 돼요. 책은 담을 쌓고 지냈어서 그냥 그때 그때 마음속에 생각 나는 것만 썼는데, 박경장 교수님이 맨날 혼내셨어요. 시조 쓸 때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니고 이게 뭐냐면서요.
Q: 근데 박경장 교수님이 선생님에 대해서 좋은 말씀만 해주셨는데요?
A: 아, 졸지는 않고 이렇게 쳐다는 보고 있으니까요. 근데 손은 딴짓하고 있었죠. (웃음) 그래도 시 <하루>는 하루를 솔직하게 잘 적었다고, 나쁘다고 안 하셨어요.
<하루> 오전6시40분 무거운몸을이끌고 동굴같은방을나선다 힘차게 서울역광장을향하여걸으면서 뭉게구름 한조각을 내뿜는다 광장에는 어제와똑같은모습과 새로운 인파들사이에서 광장자동판매기커피를마신다 따뜻함이 내속을진정시킨다 저멀리 광장에서자주보았던 반가운얼굴이 밤새안녕하냐고 미소를띄운다 한시간여뒤 서울역에서몇년사귄반가운 친구와 아침식사를 채움터옆해장국집에서 순대국하나와보쌈정식을시켜맛있게먹었다 그뒤얼마간 서울역광장을공원삼아왔다갔다 다리운동을하였다 그런뒤 다시서기센터를가서 몸을깨끗이하고 남영동 아름다운가게에가서 눈쇼핑을 하고 이것저것만지며시간을보냈다 오후3시 나의일과중제일중요한 다시서기식당청소와 설거지를한다 우리다시서기센터식구들 지녁배식준비를하며 저녁식사때 즐거워할센터식구들 개개인의마음을들여다본다; 고기좀더주세요; ;김치좀더주세요; 항상웃는얼굴의그들이반갑다 오후7시 일과를마치고 고시원동굴로들어간다 나는 걸어온오늘하루를돌아보며동굴속에묻힌다 [*편집자 주: 나름의 리듬에 따라 띄어쓰기가 되어 있다고 보아, 그 효과를 살리기 위해 띄어쓰기 교정을 보지 않았다. 아래 나오는 시(<하늘>)도 마찬가지다.] |
Q: 이번에 졸업을 하셨는데, 동기 선생님들과도 가깝게 지내시나요?
A: 예. 앞으로도 인문학 사람들을 계속 만나려고 해요. 성프란시스대학도 학교라 졸업생과 동기가 있고 동문이 있잖아요? 지금도 밖에 다니다 인문학했던 사람들 만나면 그래요. “몇 기야? 내 후배네.” 아무도 없는 사람은 그런 관심조차도 없잖아요. 동문들 서로 조금씩 알아가면서 심화과정에 들어오시는 분들도 얼굴 기억하려고 해요. 우리 김봉은 선생님 아시죠?
Q: 사실 김봉은 선생님께서 인터뷰했으면 좋겠는 분으로 선생님을 추천해주셨어요.
A: 그분은 무조건 나를 추천하더라. 나는 싫은데. (웃음) 김봉은 선생님하고 나하고 티격대격하면서도 친구처럼 지내요. 나보다 연상인데, 재밌어요.
Q: 1학기 회장이었던 선생님께서 병원에 입원하시면서 빈 자리가 생겼었는데, 선생님께서 되게 잘 다독여주시고 선생님들 잘 챙겨주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A: 챙겨준 거는 없고요. 아, 도시락 챙겨줬죠.
Q: 활동가 김담비 선생님께서 1년 간 자원활동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로 빼빼로데이 때 선생님께서 빼빼로 나눠주셨던 것도 얘기해주셨거든요.
A: 참, 별게 다. 난 아무 생각 없이 주머니에 한 곽 있어서 한 개씩 준 건데. 몇 사람이 그래도 입에는 넣었죠.
<하늘> 내마음날아가본다 넓고 끝도없는 푸른창공을달려가본다 숨이차고힘들땐 구름에누워보니 엄마품에안겨잠든 갓난아이처럼편안하다 내마음꿈을꾼다 하늘을앞마당으로옮겨온다 그하늘 그공간에서 걱정 근심없이 맘껏뛰놀며살고싶다 천국같은하늘에서… 아 천국이하늘인가 하늘이천국인가 |
Q: 다른 활동가 성지후 선생님께서 인문학 하시다가 가족들과 다시 연락되어 무척 기뻐하셨다고 전해주셨어요.
A: 집 나와서 연락 끊고 지내다가 부모님께 연락드렸어요. 사실 자살 시도도 하고 나쁜 짓 많이 했었거든요. 부모님과의 골이 깊어져 있었는데, 연락해서 이제 잘 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죠.
Q: 선생님 둘째라고 하셨는데, 다른 형제 분들과는 연락하세요?
A: 연락을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연락할 수 있어요. 근데 부모님이 아직 계시니까, 건너 건너 소식만 듣죠. 제가 도박할 때 형 집도 하나 팔아먹고 동생 집도 하나 팔아먹었거든요. 제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어버렸으니…. 그래도 그 사람들은 성실하게 잘 살고 있으니 다행이에요.
Q: 선생님 이렇게 인문학 하시면서 도박 안 하는 모습 보시면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A: 기뻐하시죠. 목소리만 들어도 기뻐하시는데. 나 서울역에 있다. 노숙자 생활한다. 그랬더니 다른 걱정하지 말고 맘 편안히만 있으라고 하네요.
Q: 선생님께 성프란시스대학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A: 그동안 한 40년 살아오면서 마무리 지은 게 없었어요. 조금 하다 말고, 조금 하다 말고 그랬는데, 성프란시스대학은 짧은 기간이지만 내가 입학할 때 분명히, 면담하면서 개근은 꼭 하겠습니다, 약속을 했거든요. 근데 그걸 지켰다는 것을 최고로 치죠.
Q: 초심을 잃지 않고.
A: 네, 끝까지 갔어요. 아름다운 가게에서 ‘나에게 고맙다’라는 책을 봤어요. 우리가 그러잖아요. 같은 동료끼리 “어이, 수고했어”하고 툭툭 쳐주죠. 그거를 자기한테 하래요. 자기를 칭찬해주면 스스로가 좋아진대요.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요. 엊그제 졸업식 때 학장님께서도 고맙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Q: 다른 분들께도 좋은 영향을 주셨을 거예요. 근데 아무래도 사람인데 흔들릴 때도 있지 않으셨어요? 몸이 힘들 때도 있잖아요.
A: 힘들 때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난 항상 즐거웠어요. 그리고 제가 6개월 동안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뭘 할까 고민했는데, 숙대 다시서기센터에서 배식하는 봉사를 했어요. 주말에 인원이 모자라는 걸 내가 하자 생각해서 가서 반찬 나눠주고 그랬어요. 이 봉사도 하고 인문학도 계속 나가고 하니까 월화수목금토일을 다 여기서 보낸 거죠. 근데 즐거웠어요. 저는 시간을 풀어주면 안 돼요. 이제 날 좀 따뜻해지면 담배꽁초 줍는 것도 하려고요. 작년에 3개월 동안 했는데, 킬로에 2만 원씩, 구청에 가져가면 한 달에 3킬로까지 계산해서 줘요. 나도 좋고 길거리에도 좋고.
Q: 담배꽁초로 1kg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려울 것 같은데요.
A: (끄덕) 힘들긴 힘들어요. 무게도 안 나가는 담배꽁초로 그렇게 만들려면요. 근데 골목 살짝 들어간 데만 가도 담배꽁초 엄청 많아요. 저는 주로 새벽에 다니면서 주웠어요.
Q: 앞으로 또 계획이 있으실까요? 이미 많이 이루셨지만요.
A: 있죠. 이제 임대주택이라도 얻어서 나만의 공간을 꾸미고 싶어요. 여태까지는 공장의 기숙사니 보증금 없는 시골방이니 이런 곳에서 살다가 내 집이 생기는 거니까요. 거기가 이제 마지막 사는 곳이 될 것 같아요.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
A: 후원하시는 분들께 큰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닌데, 저희 17기에는 아무런 기업 후원이 없었어서 참 아쉬워요. 우리가 노숙인이지만 노숙인이 아니잖아요. 살기 위해 노숙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그러는데 단지 돈이 없을 뿐이지. 조금만 도움을 받으면은 일어서실 분들이 많아요. 제발 ‘신문지상에서 얘기하는 그런’ 노숙인으로 보지 말고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으로 그렇게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여기 술 먹고 쓰러져 있는 사람, 몇 사람 안 되잖아요. 근데 같이 뭉뚱그려갖고 취급을 하니까. 그것만 좀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예전처럼 봉투작업하는 작업장 같은 곳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작업장 생긴다 하면 그래도 한 2~30명은 매달릴걸요. 그만큼 이 사람들도 뭔가를 하려고 한다는거죠. 그러니까 인터뷰 하시는 선생님들께서 어떻게 잘 얘기해서 마련을 좀 해주세요. (웃음)
<졸업을 맞이하며> 인문학, 서울역 다시서기에서 공부하기 전 많이 생각하고 생각하여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은 노숙인이 그깐 것 배워 무엇하냐며, 반대 의견을 내고 있을 때 마음 한구석에는 한번 해볼까, 할 수 있을까 하는 갈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해보라 했을 때 나의 마음은 해보자 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그러면 결석하지 말고 끝까지 가보자, 지난날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지 말고 해보자 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건강은 안 좋고 마음속은 황폐해져 있을 때, 시작한 인문학이 즐거움으로 돌아와,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친구들을 사귀며, 하루 하루가 수업을 기다리는 착한 학생이 되어가는 나를 되돌아볼 때 뿌듯하였습니다. 철학이 무엇인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전유물 같았으나 나도 생각하면 철학을 이야기할 수 있고, 몰랐던 역사의 세부적인 것을 배우고, 볼펜을 잡고 글을 쓰고 읽으며 나눈 시간들이 참으로 아쉬워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때는 노숙인이었지만, 지금은 한치의 앞을 내다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를 위하신 여러 교수님 허물없이 토론의 강의 시간을 주셔서 자유스럽게 문답질의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제는 오지 않을 시간이 아쉽고 그립습니다. 어느 곳에 연대감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깨닫게 되고, 그것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행복한 것을 느끼며, 앞으로의 살아가는 길을 새로이 개척할 자신감을 키우겠습니다. 저희를 도와주신 모든 관계의 선생님 교수님 감사합니다. 앞뒤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적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장시간 인터뷰 함께 해주신 한국남자999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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