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장 (글쓰기 교수, 문학평론가)
해마다 2월에 하는 성프란시스 인문학과정 수료식 날, 참관한 기자로부터 예외 없이 받는 질문이 있다. 노숙인이 인문학 일 년 과정을 마치면 “정말 변하나요?” 이는 비단 기자뿐 아니라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비슷한 취지로 받는 질문이다. 그 질문의 기저에는 ‘노숙인은 변해야 한다’는 당위와 ‘나는 됐고’라는 자기 확신이 깔려있다. 지난 십수 년 동안 되풀이 되는 이 질문에 나는 만족스런 답변을 한 기억이 한 번도 없다. 우선은 한마디로 답하기가 너무 어렵고 질문이 담고 있는 어조나 뉘앙스도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문, 사, 철을 공부하는 것은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신을 깊고 넓게 성찰하기 위함이다. “정말 변하나요?” 묻는 당신도 답해야 하는 나도 성찰하기 위해, 당신 말처럼 변하기 위해 평생교육으로 공부해야 하는 학문인 것이다.
그렇다고 기자 탓만을 하는 건 아니다. 그는 단지 우리 사회가 의아해하는 ‘노숙인이 인문학을 한다고! 왜?’ 물음을 대신 물었을 뿐이다. 실은 우리 학교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기업이나 정부기관의 지원사업 공모에 응모할 때 신청서에 경력과 실적사항을 쓰도록 되어 있다. ‘선정되지 않으면 새 학기를 개설할 수 없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한눈으로 볼 수 있게 ‘인문학 과정 후 변화’를 수치로 환산해 계량화된 도표로 만들어 첨부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도표에는 인문학 이후 ‘내가 얼마나 행복해졌는지,’ ‘내 사고의 지평이 얼마나 넓어졌는지,’ ‘내 눈빛과 말투와 옷차림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내(내 삶이)가 얼마나 소중한지,’ ‘나와 그 누군가를 얼마나 용서하게 됐는지,’ ‘새로운 친구가 몇 명이나 늘었는지,’ ‘어떤 취미를 새로 갖게 됐는지,’ ‘내 꿈이 뭔지’ 같은 것들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해서 “정말 변하나요?” 물음에 왜 답을 할 수 없었는지, 이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는 나의 답을 말해보려 한다.
박 선생님은 2014년 9기로 입학했다. 30을 갓 넘긴 동기 중 막내로 중키에 100키로가 훌쩍 넘는 체격에다 장난기 가득한 귀여운 얼굴이었다. 우리학교 신입생 선발기준은 딱 하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졸업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 면접을 통과한 분들은 선언하듯 모두 자신의 간절함을 표한 분들이다. 박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학기 시작하고 한 달여 지나서부터 글쓰기 수업에 조퇴와 결석을 번갈아 하더니 중반 이후로는 아예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가끔 학교 가는 후암동 시장 골목길에서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조금씩 다른 결석의 변을 늘어놓았다. 붙잡는다고 책상에 앉아있을 마음이 아님을 알기에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그래도 동기들과 함께 지어 먹는 저녁자리는 꾸준히 함께해 다행이라 여겼다. 그렇게 1학기가 지나갔다.
2학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일이 벌어졌다. 사십 대 중반의 고성원 선생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고 선생님은 그야말로 팔방미인이었는데, 운동이라면 뭐든지 잘했고 9기 학생회 자치활동에 열심이었으며, 무엇보다 인문학 졸업생이 중심이 되어 사회적기업 형태로 운영되던 ‘두 바퀴 희망자전거’ 사업에 실질 경영자로 참여하기로 되어있었다. 젊어서 한때 조폭생활을 하기도 했던 선생님은 학기 초 어떤 술자리 모임에서도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엎어놓으셨다. 그렇게 건강하고 자활의지가 굳었던 그가 다시 든 술에 쓰러지더니 그만 영영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돌아가신 후에야 선생님은 알콜중독자였고 지병으로 심장병까지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선생님 장례는 9기 동기들이 상주가 되어 성프란시스 학교장으로 치렀다. 선생님이 서울역에서 맺은 연과 뿌린 덕이 많아선지 마지막 가는 길은 외롭지 않았다. 그중에서 삼일을 꼬박 새우며 마르지 않는 눈물로 고 선생님 곁을 지킨 이가 바로 박 선생님이었다. 그동안 내가 보았던 장난기 가득하고 뺀질한 얼굴에서 어떻게 그리 맑고 슬픈 눈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내릴 수 있는지, 나는 그저 놀라고 또 놀랐다. 박 선생님은 고 선생님의 영정사진을 들고 장례행렬 맨 앞에 서서 화장장으로 들어가 놓아준 후, 오열했다.
그 후로 박 선생님은 마치 고 선생님 자리를 지키려는 듯 졸업 때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수업에 참석했다. 흐르는 물에 방망이로 두드려 빨기라도 한 듯 얼굴과 행동도 전과는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고 선생님과 박 선생님 사이에 내가 모르는 어떤 특별한 관계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로부터 6년이 지나고 15주년 기념 문집책 『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를 발간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 특별함 하나를 알게 됐다. 문집을 책으로 발간한다는 소식을 듣고 박 선생님이 찾아와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성원이 형이 내게 건넨 거예요. 6년 동안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젠 교수님 드려도 될 것 같아서요.” 200자 원고지에 연필로 쓴 편지였다. 오래되다 보니 접힌 부분이 헐고 연필 글씨가 흐려져 알아보기조차 어려웠다. 다만 뚜렷하게 보이는 “0 0아 사랑한다.”
『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 책 발간을 위해 15권 졸업문집을 네 명 편집위원이 돌아가면서 읽었다. 9기 졸업문집에 실린 박 선생님 글 <리어카를 끌고 여름 바다로!>를 펼쳤는데, ‘그해에 읽었을 텐데 왜 이리 낯설지!’ 그 생경함에 놀랐다. 지난 일을 회고하는 수필인데 독특함을 넘어 ‘기이한’ 여행담이었다. 글에는 한 줄 가족사와 한 문단 가정사가 담담하게 기술돼 있었다.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20대 때 함께 그림을 그리다 만나 동거한 아내는 후배와 바람나 이혼했다. 그 후로 선생님은 방황했고 몸도 안 좋아 변변한 일자리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택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고물을 줍는 어린애를 보았다. ‘아! 고물이 돈이 되는구나.’ 그길로 선생님은 서울역으로 와 고물을 줍게 되었다. 고물을 주워 판 돈을 한 푼 두 푼 모아 선생님은 리어카 한 대를 샀다.
리어카로 고물을 모아 번 돈이 60만 원쯤 되던 날 선생님은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길로 단골 고물상 주인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침낭과 가위, 드라이버, 자석, 큰 마대자루 두 개를 준비해 리어카를 끌고 무작정 부산바다를 향해 떠났다. “피복을 벗기지 않아도 자석을 대보아서 붙지 않으면, 알지?” 가장 값이 나가는 고물, 구리다. 한쪽은 구리용 다른 쪽은 철붙이용으로 리어카 양쪽에 마대자루를 매달고 왕복 세 달 간의 기행이 시작됐다. 봄에서 여름으로 막 넘어가는 스물아홉의 부산행이었다. 리어카를 끌고서.
길은 무조건 큰길을 따라 조치원에서 청주로 그리고 대전으로 고물을 주워 팔면서 갔다. 잠은 기울어진 리어카 한쪽 균형을 주변 물건을 이용해 잡고, 바퀴는 돌이나 파지로 괴고, 안에는 박스를 쌓아 매트리스처럼 푹신하게 한 후 침낭을 덮고 잤다. 리어카를 끌고 가면서 선생님은 “내 지난날도 끌고 있었다.” 돌아가신 부모님, 이혼한 아내, 연이 모두 끊어져버린 사람들. 그렇게 끌고 온 지 한 달 반, 마침내 부산 해운대에 도착했다. 얼마나 보고 싶어 끌고 끌고 온 부산행인가. 헌데 막상 바다 앞에 서니
“난 여기 왜 왔나. 남들은 편하게 오는 길을 왜 이렇게 고생스럽게 왔는지. 허무했다. 놀러 온 가족들이 모래밭에서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나. 허무했다. 바다가 물었다. ‘너 왜 왔냐?’ ‘고물일을 하고 있는데, 너무 힘들고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바다는 말이 없었다.”
선생님은 온 길을 되짚어 서울역으로 돌아왔다. 다시 한 달 반 리어카를 끌고서. 이렇게 글 맺음 된 <리어카를 끌고 여름 바다로!>는 9기 졸업문집에 실린 단 한 편의 선생님 글이자, 일 년 인문학과정 중 선생님이 쓴 유일한 글이다. 어쩌면 태어나 처음 써본 글일지도 모르겠다.
졸업 후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학교 오가는 길에서 선생님과 마주쳤다. 굼뜬 큰 덩치는 그대로였지만 얼굴은 어찌나 해맑은지 멀리서 인사하며 달려오는 선생님이 무척 반가웠다. 그렇게 선생님은 서울역을 떠나지 않고 학교 주변을 오갔던 모양이다. 삼사 년이 지났을까. 새 학기가 되어 학교에 왔는데, 뒷모습이 낯익은 사람이 주방에서 뭔가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어! 박 선생님! 어떻게 된 거예요?” “네, 오늘부터 주방 봉사하기로 했어요.” 과거 식당일을 한 경험으로 선생님은 무려 2년 동안 한 끼도 빠짐없이 인문학 후배들을 위해 저녁을 지었다. 좁은 주방을 그 큰 덩치로 독차지하고선 뭉뚝한 손으로 차려내는 음식을 나는 식판에 담아 밥풀 하나, 깍두기 하나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웠다.
학교에서 박 선생님을 못 본 지 2년이 넘었다. 코로나로 밥을 짓지 못해 저녁이 도시락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진정된다 해도 이전한 교사가 좁아 음식을 만들고 식사를 할 공간이 없어 선생님이 다시 주방봉사할 기회는 없을 것이다. 교사가 서울역 진료소 3층으로 이전한 후로는 거리에서 선생님을 마주치지도 못 했다. 그래도 걱정하지는 않는다. 어디에선가 마주치면 고물 한 짐 얹은 리어카가 내리막길 구르듯 달려와 구릿빛 미소로 인사하리란 걸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작년과 올해 인문학 수료식은 코로나로 인해 불행하게도 방 많은 식당을 빌려 비대면 약식으로 치러졌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그 뻔한 기자의 물음에 답하지 않아도 됐다는 점이다. “정말 변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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