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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10호

[인물 인터뷰] 모두가 동일한 또 다른 세상, 성프란시스대학

by vie 2022. 1. 3.

글 / 김연아
인터뷰어 / 강민수, 김연아
인터뷰이 / 김담비, 김영채
(성프란시스대학 17기 자원활동가)

 

글쓰기 수업을 담당하고 계시는 박경장 교수님께서 새로운 자원활동가에 대한 제보를 해주셨습니다. 친구 두 분이 함께 들어와 아주 열심히 해주신다는 말씀에, ‘친구가 함께 자원 활동을?’ 하고 두 분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커졌지요.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어느새 17기 수업이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 김담비 선생님과 김영채 선생님을 줌(zoom)으로 만나 뵈었습니다.

김영채 선생님(왼쪽)과 김담비 선생님(오른쪽)

 

Q: 안녕하세요. 이번 17기 자원활동가로 글쓰기 수업에 참여하신다고 들었어요.

담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글쓰기 수업은 마 국장님께서 저희가 처음에 보낸 자원활동가 지원서를 보시고 글쓰기 쪽으로 도움을 주시면 좋겠다고 말씀해주셨어요.

 

Q: 글쓰기 수업을 듣기 이전에 글을 썼던 경험이 있으셨나요?

담비: 저는 고등학생들과 영화 관련된 수업을 하는데요, 영화에 관련된 이론들도 공부하고, 비평 혹은 논술 쓰는 걸 같이 해요. 그런데 사실 시는 읽어본 적만 있지 써본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선생님들과 마찬가지로 함께 시작하는 사람이었죠. 박경장 교수님께서 “이거에 관한 시를 써오세요.” 하시면 어떻게 써야 하나 막막하기도 하고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나도 너희처럼 과제가 있다.”라면서 얘기하곤 했어요. 이 글쓰기 수업 통해 안 하던 생각을 하게 돼서 신기해요. 영채 선생님은 시를 계속 써 오셨어요.

영채: 개인 메모장에 취미로 써 왔어요. 그런데 시를 쓰는 행위를 글 쓰는 행위로 인지하기보다는 제 감정과 생각을 기록하는 행위로 생각하는데 그 표현 수단이 시였던 거죠.

 

Q: 성프란시스대학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담비: <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 책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안 그래도 교수님들께 이 질문 정말 많이 받았었는데 (웃음). 이 책과는 관련 없는 다른 책을 검색하다가 ‘비를 맞으며 우리는 시를 썼습니다’라는 헤드라인의 기사가 눈에 띈 거죠. (오마이뉴스 기사: 빗물 섞인 '바아압'을 먹으며, 우리는 시를 썼습니다)

기사를 보고 ‘아, 이거 되게 재밌겠다.’ 생각했고 예스24에서 목차, 후기를 읽고선 바로 시켜서 읽었어요. 책이 정말 좋아서 제가 영채 선생님께도 추천해서 함께 읽고요. 근데 ‘읽기만 하지 말고 이분들이 글을 쓰는 현장에 가보고 싶다.’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르고요. 그렇게 인터넷에 검색했는데 올해는 자원활동가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안 보이더라고요. 그러다가 인스타그램 계정을 발견하고 메시지를 보냈고 마 국장님 핸드폰 번호를 알게 되었어요.

 

Q: , 민수 선생님이 쓰신 기사 글인데요. 그리고 인스타그램 제가 답장했을 텐데! 뿌듯하네요. (웃음) 그렇게 지원서를 보내게 되셨군요?

담비: 네. 처음에 전화했을 때, 마 국장님이 지금은 자리가 다 차 있긴 한데 우선 지원서를 보내달라고 하셨어요.

 

Q: 담비 선생님께서 먼저 아시고 영채 선생님과 함께 하자고 하신 건가요?

영채: 네. 담비 선생님이 문의했는데, “지원서를 보내달라고 회신이 왔다. 나는 지원해볼 건데, 같이 지원해보겠냐.”해서 “같이 지원하겠다!”한 거죠.

 

Q: 지원서 내용이 궁금한데요?

영채: 대학교 다닐 때 친구가 한 명 있었어요. 그 친구가 학교를 자퇴하고 잠수를 타서 한동안 연락이 끊겼는데, 2018년 겨울인가, 저한테 갑자기 연락해서 만나게 됐어요. 반가워서 만나자마자 포옹을 했는데, 악취 같은 게 나는 거예요. 자세한 상황은 잘 몰랐고 함께 밥도 먹고 집에 와서 씻고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알고 보니 친구가 자살 기도도 많이 하고 노숙 생활도 했었다고 하더라고요. 야산에 들어가서 그냥 자유롭게 살까 하는 고민도 했다가 문득 제가 생각나서 연락하게 됐대요. 친구가 우선 오갈 데가 없어서 저희 집에 한 일주일 정도 묵었거든요.

근데 그 일주일 동안 갑자기, 내가 회사에 출근한 동안 뭐가 없어지면 어떡하지? 이 친구가 무슨 일을 일으키면 어떡하지? 나한테 뭔가를 빌려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들이 제 마음속 깊이 느껴지는 거예요. 결국 일주일 뒤에 이제 나가줬으면 좋겠다.” 말을 해서 그 친구를 보냈거든요. <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 책을 읽는데 그때 기억이 떠오르더라고요. 특히 <지하철에서>라는 시를 읽고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어요. 친구가 다시 연락했을 때는 정말 친구로 온전히 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그러려면 먼저 제가 가진 편견을 깨고 같은 사람으로서 대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겠더라고요. 그 준비를 성프란시스대학에서 하고 싶다고 적었어요.



<지하철에서……> 故 이덕형

그러니까 아무개를 안다고 할 때
우리는 그의 나타난 일부밖에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데서 우리는
불쑥
그와 마주칠 때가 있다.

길가에 무심히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이
때로는 우리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듯이

-법정 스님 『무소유』 「상면」중에서

도봉산에서 소주 한 잔에 칼국수를 뚝딱 비웠다.
오는 전철 안에서 옆자리에 장애인 여자아이가 앉는다.
쌍문역이 어디냐고 물어온다.
본인이 쌍문역에서 타는 걸 봐온 터이다.
대꾸를 안 했다.
힐끗 옆을 쳐다보니 시무룩한 표정이다.
안 되겠다 싶어 어디까지 가냐고 물어봤다.
길음까지 간단다.
내릴 때쯤 알려주겠노라고 하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나를 툭 친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묻는다.
일요일이라고 하니깐 토요일이란다.
일요일이 확실하다니깐
그제야 수긍한다.
토요일이라고 우길 거면서 왜 물어봤냐고 하니까
그녀, 차분하게 대답한다.
아저씨 술 드신 거 같아서 과음했는지 확인하려고 그랬단다.
아, 이런,
술에서 두 발짝 물러서야겠다.

 

Q: 담비 선생님도 어떤 계기가 있으셨어요?

담비: 저는 영채 선생님과 같은 사연은 없어요. 사실 노숙인에 대한 생각이 아예 없었어요. 평상시에 그분들을 대면할 일도 없었는데, 책을 통해서 내가 모르는 어떤 세상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 세계를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책에서 인상 깊었던 에세이나 시를 읽고 어떻게 느꼈는지를 주로 지원서에 썼던 것 같아요.

 

Q: 인상 깊었던 에세이나 시가 뭐였을까요?

담비: 아, 여러 개가 있는데, <빗물 그 바아압>도 기억에 남지만, 리어카를 끌고 부산까지 가신 분의 글이 떠오르네요. “나는 다음날에도 당신과”,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분과 “행복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리어카를 끌고 간다.” (리어카를 끌고 여름 바다로!, 박진홍 p122) 그리고 <손톱>이라는 글에서도 “다친 손에도 손톱이 자라난다.”라는 문장이 되게 인상 깊었어요. (손톱, 유○기 p54)

 

Q: 이전에 다른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으신가요?

영채: 고등학생 때 대학교 가려면 필수적으로 채워야 하는 봉사활동 시간이 있어서 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성프란시스대학처럼 제가 따로 한 적은 없어요. 그 당시 했던 봉사는 은빛마을이라는 양로원에서 했는데, 어르신들 몸 일으켜서 식사하시는 거나 다른 일거리를 도와드렸어요.

담비: 저는 제가 봉사활동을 하진 않고 저희 언니가 봉사 동아리 회장이어서 언니가 하는 걸 자주 봤어요. 주말에 김치 배달하러 가고, 장애아동 친구들과 시간 보내는 일을 가장 많이 했거든요. 언니가 하는 일이 굉장히 좋은 일이라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인식했던 것 같아요.

 

Q: 그러한 활동들과 성프란시스대학 자원 활동이 어떻게 다른 것 같나요? 아니면 비슷한가요?

영채: 음, 봉사활동이라는 것이 활동 내용보다는 그 봉사활동을 했을 때의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 같아요. 고등학생 때 했던 봉사활동은 정말 봉사 시간 채우려고 했던 봉사여서 더 쉬운 일을 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성프란시스대학은 제가 자원해서 선생님들 만나고 싶어서 하는 활동이라는 점이 가장 다르죠.

담비: 그리고 수업 끝나고 가끔 걸으면서 저희 둘 다 공감했던 얘기가 있어요. “우리는 이게 봉사활동이라는 느낌이 안 든다.” 그런 얘기를 진짜 많이 했거든요. 저희가 선생님들을 도와드린다는 개념이 아니라 함께 만나서 이야기 나누며 인문학을 같이 공부하는 느낌? 인문학이라는 게 원래 사람을 만나서 배우고 얘기하고 그런 거잖아요.

영채: 한번은 철학 수업을 청강하러 갔어요. 그때 교수님께서 알고 있는 철학자 이름을 다 말해보라고 하셨거든요. 제 머릿속에 떠오른 세 명은 이미 선생님들께서 다 말씀하셨고 저는 이제 생각나는 철학자가 없는데, 선생님들께서는 제가 처음 들어보는 철학자까지도 계속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 걸 보면, 노숙인과 비노숙인 사이에 지식의 위아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둘 사이의 경계가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희도 수업 듣는 게 너무 재밌어서 항상 기대하면서 가요.

 

Q: 담비 선생님께서는 영화 관련이지만 어쨌든 글을 쓰는 걸 가르치는 직업이신데, 성프란시스대학 글쓰기 수업과 다른가요?

담비: 마 국장님께서도 가끔 제가 하는 일 때문에 글쓰기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데요, 사실 거기에선 입시에 적합한 글의 형식을 고민하기 때문에 아주 다르거든요. 시 쓰는 건 제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저도 쉽지 않은 일을 선생님들께 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좀 어려웠어요. 그런데 그냥 제가 쓰는 것을 보여드려야 이분들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창피하지만, 시를 계속 쓰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더라고요.

 

Q: 자원활동가의 역할이 무엇일까요?

담비: 지원서 쓸 때 앞으로의 포부 쓰는 칸이 있었어요. 제가 다른 건 모르겠지만 함께 꾸준히 하는 게 제 목적이라고 썼어요. 선생님들을 어떻게 바꾸겠다, 아니면 내가 수업을 어떻게 듣겠다, 이런 것보다 1년 동안 선생님들께서 수업을 듣는데 옆에서 같이 함께 꾸준히 하겠다는 게 제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1학기 때와 2학기 때 선생님들께서 저희를 대하시는 게 정말 거리감이 많이 좁혀진 것도 같고요. 얼마 전 소풍 갔을 땐 제가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선생님 몇 분이 오셔서 우리 점프할 건데 사진 찍어달라고 말씀하시는 거 있죠. 저희 이름도 먼저 불러주시고, 꾸준히 옆에 있었으니까 생길 수 있는 친밀감이지 않았을까, 굉장히 감사해요.

김담비 선생님이 가을 소풍에서 찍은 사진

 

영채: 저는 자원활동가의 역할이 선생님들께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여름방학 때 자원활동가들이 함께 글쓰기 심화특강을 준비했는데, 그때도 선생님들이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제일 쉬운 게 뭘까를 생각했어요.

 

Q: 심화특강 과제가 굉장히 흥미로워요. 17기 카페에 올리신 글을 보니 <얼굴 없는 자화상>, <감정 사진>이라는 주제로 사진을 찍는 거더라고요.

담비: 개인적으로 선생님들께서 성프란시스대학에 오시는 목적으로 공부하는 것도 있지만 나라는 사람을 표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한 학기 동안 글을 쓰셨으니 사진 찍는 작업도 괜찮겠다 싶어서 자화상을 찍자고 했죠. 그런데 얼굴이 드러나지 않고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보고 나를 느꼈던 이미지가 있다면 그거를 찍어서 함께 공유하자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어요. 이렇게 해보면 비유하는 것도 쉬워지지 않을까 생각했죠.

 

Q: 기억에 남는 사진이 있을까요?

담비: 지금 거주하시는 집의 자기 책상. 정돈되지 않은 그 책상을 찍은 분이 계셨어요.

 

Q: 선생님들이 과제를 다 해오셨나요?

담비: 다들 핸드폰을 가지고 계시니 사진 찍는 건 어렵지 않으시겠다 생각했는데, 그걸 업로드하는 과정이 또 쉽지 않으신 분들도 있더라고요. 과제를 이행하지 못하신 분들도 몇 분 계셔서, 그분들과 같이 얘기할 수 있는 질문거리도 몇 개 만들어 놓았어요. 수업 시간에 즉흥으로 질문했는데, 재밌었던 답들이 의외로 많이 있었어요.

 

Q: 어떤 질문이었나요?

담비: '단 하루 내가 신이 된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요? 내일 종말이 온다면 무엇이 하고 싶은가요? 6살 때 살았던 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당신에게 벌어진 최고의 1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은 무엇인가요? 가장 잊을 수 없는 거짓말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가장 먼 우주의 끝에 도달했을 때 지구로 보내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들이었어요.

 

Q: 인상깊었던 답이 있을까요?

담비: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1분이 뭐였냐는 질문에, 한 선생님께서 불이 나서 어떤 학생을 구하게 된 순간을 말씀해주셨어요. 6살 때 자기가 살던 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뭐냐는 질문에는 좀 슬프게도 6살 때 좋은 기억이 없어서 말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씀해주신 분도 기억에 남고요. 그때 사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하게 되어서 서로 친근감이 생기는 기회가 되었어요.

자원활동가들이 준비하여 진행한 여름방학 심화특강

 

Q: 이번 17기 선생님들이 몇 분 계시죠?

영채: 열네 분 정도?

담비: 열네 분에서 열다섯 분 정도 계셨는데, 지금 주기적으로 계속 오시는 분은 여섯, 일곱 분 정도예요. 글쓰기 수업에만 안 들어오시는 분이 한 분 계시고요.

 

Q: 선생님들과의 에피소드도 있을까요?

영채: 입학식 때, 제 마음에 훅 들어온 한 선생님이 계세요. 각자 나가서 자기 이름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어떤 선생님께서 호명이 되고 자리에서 일어나셨어요. 겨울이라 점퍼를 입고 계셨는데, 일어날 때 몸을 앞으로 기울여서 일어나잖아요? 근데 그 점퍼와 안에 입은 옷 사이의 공간이 너무 넓은 거예요. 그러니까 굉장히 야위신 거죠. 근데 그 모습을 보자마자 갑자기 눈물이 나서, 그분의 소개도 잘 못 듣고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있어요.

그러고 나서 첫 수업 때 옆자리에 앉게 됐어요. 매번 들고 다니시는 수첩을 보여주셨는데, 중학교 정도 수준의 수학 공식들, 삼각함수나 그래프들이 그려져 있는 거예요. 왜 그런 것들을 적으셔요? 하고 여쭤보니 교사인 친구가 이런 것들을 자주 기억하지 않아 치매에 걸린다면서 배웠던 것 중에 기억에 남는 데까지 계속 써보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열심히 쓰신대요.

‘정말 재밌는 분이시다’ 하고 생각했죠. 그다음 수업에선 엄청나게 신기한 나선형의 그래프들을 보여주시기에, 나선형의 의미는 뭐냐고 여쭤봤더니, '이 나선형은 일종의 데이터를 담는 그릇이고, 우주의 은하수, 태풍의 눈의 모양과 닮았다'고 선생님이 생각하고 계신 걸 말씀해주셨어요. 근데 그 지식수준이 굉장히 높은 거 있죠. 알고 보니 2008년에 IOT, 사물인터넷이라는 기술을 이용해서 창업하고 큰 성공을 이루셨다가 회사가 무너져 순식간에 빚더미에 앉고 서울역에 나오신 분인 거예요.

저도 지금 작은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는데요. 그러고 보면 저도 어느 순간 노숙인이 될 수 있고, 성프란시스대학에 와서 수업을 들을 수도 있는 거고, 또 저를 만나는 어떤 스타트업에 다니는 자원활동가가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진짜 그 선생님과 제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인 게 딱 느껴지더라고요.

 

Q: 선생님께서 영채 선생님께 마음을 열어 주셨군요.

영채: 그 선생님께서는 매일 어딘가에서 일하고 오셔서 땀을 뻘뻘 흘리는데도 항상 해맑게 웃으면서 수업에 들어오시거든요. 과거에 엄청나게 큰 성공을 했었고, 엄청나게 큰 고통도 겪은 사람인데 어떻게 매일 매일 저렇게 행복하게 웃으면서 다닐 수 있을까 존경하고 싶은 모습이 많은 분이에요.

담비: 또 엄청 거침없고 터프하신 선생님 한 분이 계세요. 목소리도 엄청나게 크셔서 시 낭송하실 때도 쩌렁쩌렁하게 하시거든요. (웃음) 한 번은 잊지 못할 추억에 관해서 쓰는 시간이 있었는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물려받은 것에 대해 써 보자고 하셨어요. 저희는 물려받는다 하면 물건 혹은 가르침을 떠올리잖아요? 근데 이 선생님께서는 어떤 글을 쓰셨냐 하면 친구가 죽어서 그 유골을 소주에 타서 나눠 마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되게 놀랐죠.

 

Q: 어디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장면이네요. 박경장 교수님도 놀라셨을 것 같은데.

담비: 네. 교수님께서 그거를 글로 써야 한다. 글쓰기 좋은 소재라면서 엄청 좋아하셨어요. (웃음)

 

Q: 소풍은 어디로 가셨어요? 코로나 때문에 어렵지 않았나요?

담비: 단풍 든 거 보러 곤지암, 화담공원에 갔었어요. 거의 못 갈 뻔했는데 다행히 코로나가 조금 풀릴 때여서 검사 다 받고 음성 다 나온 거 확인하고 갔었어요. 아침부터 가서 도자기 박물관에도 가고 저는 되게 좋았어요. 교수님들도 무척 신나셨더라고요. (웃음) 제가 박경장 교수님 팀이었는데, 교수님께서 꽃이나 식물 관련해서 아는 게 정말 많으셔서 알차게 한 바퀴 돌았죠.

영채: 저는 이번엔 못 갔지만 봄 소풍으로 상암 쪽에 있는 노을공원에 갔었어요. 선생님들께서 유독 좋아하셨던 게 낮은 지상에서 산까지 맹꽁이 전기차라고 시속 한 20km 정도로 움직이는 전기차에 10명이 옹기종기 탔거든요. (웃음) 그 순간 갑자기 다들 핸드폰을 꺼내시면서, “야, 한번 봐봐라.” 하면서 서로 사진도 찍으시고, 다 같이 셀카도 찍는 거예요. 사실 그전까지는 친해질 자리가 없어서 다들 그냥 말 한 번 거는 정도였는데, 이 순간이 전기차에서 처음 딱 일어난 거죠.

봄 소풍에서 김영채 선생님(왼쪽에서 두 번째)

 

Q: 자원활동가 하시면서 아쉬웠던 점이 있을까요? 선생님들께 이런 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담비: 저번에 한 번 16기 선생님들께서 피자를 사서 들고 오셨던 적이 있어요. 기타도 가지고 오셔서 다 함께 피자 먹으면서 선생님들 노래 한 곡씩 하고, 선생님들께서 그날 되게 행복해하셨거든요. 그때 한 선생님께서 저한테 그러시더라고요. “담비 선생님, 피자 많이 드셔요?” “저 피자 되게 오랜만에 먹습니다.” 하니까 “저도 이 피자 되게 오랜만에 먹어요. 피자, 혼자 잘 못 먹잖아요.”라고 하시는 거예요. 피자는 다 같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게 그 선생님께서 한 말 때문에 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리고 16기 선생님들께서도 내가 이 수업을 듣고 이렇게 달라졌고 이러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씀해주시고 그런 상황 자체가 너무 좋았는데, 이후에 그런 걸 많이 하지 못한 게 아쉽죠. 다른 기수 선생님들께서도 방문하고 싶으셨는데 코로나 때문에 오시지 못했거든요. 아쉬운 점은 그것밖에 없어요.

16기 선배님들이 수박과 피자를 사서 17기를 격려하러 온 날

 

Q: 수업 끝나고 피드백도 함께 하시나요?

담비: 마 국장님께서 많이 여쭤보세요. 교수님이 바로 옆에 계신데, (웃음) 그런데 좋은 건 서로 되게 신랄하게 피드백해요. 그냥 좋았다 이렇게 끝나기보다는 어떤 선생님께서는 이 부분을 힘들어하셨는데, 어떻게 좀 도와드리면 좋겠다던가, 이 수업은 선생님들 난이도에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요.

영채: 맞아요. 수업 전반적인 흐름이나 주무신 분들이 계셨는지 이런 것에 대해서도 얘기하는데 가끔 수업 때 얘기한 한 주제에 대해서 특별하게 반응하는 선생님들이 눈에 띌 때마다 말씀을 드리죠. 이 주제에는 이런 선생님이 이런 글을 쓰셨다, 이런 행동을 하셨다 이렇게요.

 

Q: 선생님 한 분 한 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보시는군요.

담비: 거리에 계시는 분들 보면 예전에는 그냥 없는 사람 혹은 어떤 건축물의 일부로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한 분 한 분 제 눈에 보인다는 게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지금 갑자기 떠오르는 분이 있어요. 11월 빼빼로데이였을 때, 한 선생님께서 빼빼로 한 상자를 사 오셨어요. 제가 수업에 오니까, “담비 선생님, 빼빼로 한 개 드세요.” 하셔서 한 개를 집으려고 했는데, 두 개를 집는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죄송한데, 많이는 없어서 한 개밖에 못 드려요.”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한 개를 받아서 먹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다시 오셔서 “한 개가 남았어요. 드실래요, 선생님?” 하시는 거죠. 금전적인 여유가 없는데도 같이 즐기고 싶으셔서 한 상자를 사 오셨다는 그 마음 자체가 굉장히 따뜻하고 감사해서 기억에 남아요.

 

Q: 마지막으로, 나에게 성프란시스대학이란? 단어나 이미지로 표현해주신다면?

담비: 지금 딱 이미지로 떠오르는 건 그때 함께 피자 먹었던 순간이에요. 단어나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또 다른 세상’이요. 세상의 다른 어떤 이면이라는 게 아니라, 사람 한 명 한 명이 그 세상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내가 모르는 세상이 어딘가 있는 것 같다, 내가 알진 못하지만, 저 사람이 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되게 막연했다면 여기서 내가 몰랐던 세상을 진짜로 만나게 된 거죠. 그래서 그 세상에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된 거예요. 그러한 순간들이 수업을 들을 때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영채: 저는 노을공원으로 소풍 갔을 때, 거기에 약간 밧줄 같은 게 뱅글뱅글 쌓여서 하나의 큰 돗자리처럼 보이게 한 공간이 있었어요. 그거를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선생님께서 카메라로 뚫어져라 영상을 찍고 계신 거예요. 왜 찍고 계시냐고 여쭤봤더니, 집에서 철사로 만들고 있는 나선의 모양하고 같아서 이 밧줄 모양을 잘 기억해뒀다가 집에 가서 만들기 위해서 찍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모습이 제가 일할 때 하는 행위들, 제가 일할 때 갖는 그런 뭔가 열정적인 것들하고 되게 닮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성프란시스대학이 ‘모두가 다 동일한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아까 담비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저희는 수업 장소로 가는 동안, 내가 활동가고 저분들은 (노숙인) 선생님이야, 이렇게 구분해서 생각한 적이 없거든요. 저희도 그냥 그 선생님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러 가는 사람인 거죠.

 

Q: 영채 선생님, 혹시 그 선생님께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영채: 지금처럼 계속 웃고 다니시라고요. 사실 굉장히 큰 성공을 하시고, 굉장히 깊은 아픔을 겪으시고 그렇게 웃을 수 있게 되기까지 제가 생각할 수 없는 정도의 큰 고통이 있었을 거잖아요? 근데 지금 그 웃는 얼굴을 없앨 만큼의 더 큰 고통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선생님께서 지금처럼 계속 웃을 수 있는 상황이 됐으면 좋겠어요.

 

Q: 담비 선생님도 선생님들께 남기고 싶은 말 있을까요?

담비: 음, 건강하게 또 보자는 말 하고 싶어요, 다음에 어디서든, 또 만나 뵙고 싶어요. 서울역을 지나가는데 만나면 인사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거니까. 수업이 끝나서 우리 관계도 끝나는 게 아니라, 어디서든 다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흔쾌히 인터뷰 응해주신 김담비 선생님, 김영채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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