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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10호

[성프란시스 글밭] 살고픔학 개론

by vie 2022. 1. 3.

 

글: 전원조 (9기 졸업동문)

 

생은 어느 시기에 내게로 찾아와 이 땅 위에서 잠시 살다 가라고 하였다.
때문에 나는 생의 이치를 깨닫게 된 다음부터는 삶의 길고 짧음에 대해서만큼은 늘 의연하리라 다짐하게 되였다.
바로 "살고픔학 개론"이 생명이 끝날 때까지 배움은 스스로 멈추지 않고 늘 같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충무아트홀 대극장이다.
나는 지금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를 관람하고 있다.
너무 유명세를 탄 작품이라서 누구나 잘 알고 있겠지만 나는 지난 4월 9일에 처음 본다.

맨 앞쪽에서부터 세 번째 줄(앞 두 줄은 비웠음).
오른쪽은 가운데 통로를 끼고 있고 왼쪽은 코로나19 예방 차원에서 두 좌석 비웠으니 이 넓은 공연장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공연에만 집중할 수 있는 그야말로 명당자리이다.

"자기가 임의로 내세운 마을 이장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은 돈키호테가 한 창녀의 아름다운 미모에 홀딱 반해서 장황하게 그려 쓴 편지를 전하려고 무대 앞쪽 샘터에서 물방울을 튀기며 빨래하는 그녀의 손을 마주 잡고 애원하는" 그 리얼한 표정 연기까지도 단 5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보며 짜릿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런 좋은 공연, 좋은 명당자리 티켓을 나의 딸이 멀리 전라도 광주에서 세심한 배려와 센스까지 듬뿍 담아서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예전에 극작가로, 연극배우로, 연기자로 살았던 나의 젊은 날을 헤아리는 딸의 씀씀이가 아련하게 느껴진다.

눈으로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연기와 변화무쌍한 무대장치의 움직임, 조명 불빛의 황홀함, 그리고 장중한 음악에 흠뻑 취해있으면서도 머리속으로는 딸에 대한 감사함에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공연 관람을 하면서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거짓말이 아니다.

이 딸과 나의 만남, 그리고 끈질긴 인연이 바로 장편소설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두 딸과는 북한이 말하는 그 엄혹한 "고난의 행군" 시기인 1990년대 중반에 헤어진 후 나는 탈북자로 남한 땅에 혼자서 살고 있고 북한의 가족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여부조차 모르기에, 이렇게 현실적인 딸이 내게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의아해할 것이다.

"고픔"이란 말은 욕구와 갈망을 뜻하는 말이다.

인간은 자기 살붙이들과 함께 있을 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살고 싶음의 욕구가 생겨나고 삶의 의욕과 욕망이 분출된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어느 날이었다.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 다니는 한 학생이 당시 인문학과 연극을 병행하면서 조금은 바쁘게 살고 있던 나에게 자기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됐다면서 찾아왔다.

그 무슨 과제물을 수행하고 싶었는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 학생은 나에게 많은 것을 물어봤고 또 연극 연습장에도 드나들면서 무척이나 친한 척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압구정 CGV에서 자기가 제작한 영상물 시연회가 열리는데 나를 정식으로 초청한다면서 함께 가보자고 했다.

영상물이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데 배경음악이 다름 아닌 내가 기타로 연주한 북한의 영화음악이었다.

어느 때인가 인문학 강의 휴식시간에 내가 심심풀이로 퉁긴 북한영화음악을 바로 옆에 서서 들어 본 그가 언제 슬쩍 녹음해두었다가 자기 영상물의 자막 배경음악으로 쓴 것이다.

그는 자기 영상물에 대해서도 비평을 해달라면서 어느 호프집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렇게 얘기가 깊어져 갈 때쯤 이 학생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도 선생님의 큰 따님인 은하와 같은 연도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제가 선생님의 딸이 될게요."

아직 세태를 겪어 보지 못한 철없는 어린 여대생이 하는 이 말에 나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힘주어 대답했다.

"네에. 그렇게 하세요! 하하하"

... ...

돌이켜보면 나는 딸들의 복이 참 많은 사람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연극할 때도 그렇고 또 이런 저런 인연으로 만났던 나의 딸 은하, 은별이 또래 여자애들 중에 자기들도 딸이 된다고 자처하던 친구들이 꽤 있었고, 실제로 그들 중에는 자기들의 일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좋은 계기가 있을 때마다 어떻게 하든지 나와 연관시켜 내세우려고 애쓰는 일들이 많았다.

내가 단편영화 "은아"의 시나리오 작업과 배역으로 참가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시절에 함께 연극에 출연했던 여배우가 나의 역할이 필요하겠다며 소개시켜 준 덕분이다.

또 언젠가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동문들이 자기들의 동아리 활동에 한번 참가해 달라고 부탁해왔다.

그들 동아리는 이름하여 "세계요리정복기"(세요정)라고 세계일주를 한번 하고 싶은데 비용이 문제니까 그럼 한국에서 각 나라의 대표요리들을 직접 만들어 보자, 왜냐면 그 나라들의 음식문화를 익히고 따라가다 보면 그 나라의 역사와 민족성을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취지에서였다고 한다.

이들이 바로 북한의 오리지널 평양냉면 만들기에 도전했었고 나에게 시식요원의 자격으로 참여를 부탁해왔던 것이다.

한 5년도 더 지나갔지만 지금도 유트뷰에서 "세계요리정복기"(평양냉면)을 검색하면 내가 시식요원으로 참가한 5~6분 분량의 짧은 동영상이 나온다. [*편집자 주: 보고 싶으시면 요기를 누르세요.]

이렇게 그들은 자기가 나의 큰딸 은하와 출생연도가 같으면 "나는 전은하", 또 작은딸 은별이와 같다면 "나는 전은별" 하면서 만날 때마다 너스레를 떨며 즐거워했다.

여자애들의 너스레와 장난질은 남자애들에게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

우리들의 인연은 그저 잠깐 만났다가 쉽게 잊혀지는 그런 인연이 아니었다.

그들은 진실했고 순수했으며 나 또한 그들에게서 긍정적인 영감을 받으며 삶의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시; "딸, 시집 가는 딸"은 함께 연극을 하면서 자기는 은하라던 여배우가 결혼을 할 때 써 준 시였고, 이화여대 동아리 친구들 중에서 자기는 은별이라던 친구가 카카오톡 메인으로 올린 '그녀의 어린 조카가 그린 이모의 얼굴그림 사진'을 보고 영감을 얻어 시; "얼굴 그림"을 쓸 수 있었다.[*편집자 주: 전원조님의 시 "얼굴 그림"은 <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에 수록되었다.]

그리고 나의 딸이 첫아들을 낳았을 때는 시; "엄마가 크는 소리"를 썼고, 또 연년생으로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는 시; "아기 졸업"을 써서 선물했다.

나의 인생의 푸르른 시절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아픈 상처가 만들어진 시기였기에, 그 시절에 미처 만들 수 없었던 푸르른 추억들을 지금 여기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들, 딸이 되기를 자처하는 이들 덕분에 나는 지금 손주 4명, 손녀 4명을 거느린 남부럽지 않은 부자 할아버지가 됐으며 나의 손주, 손녀들의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되기에 할아버지의 인격과 인품도 풍성해졌다.

젊은 친구들이 스스로 한 자기 말들이 잘 지켜지든, 안 지켜지든 그것이 내게는 중요하지 않고 그냥 순수하고 진솔한 그 마음들에 감사하기만 하다.

카톡! ... ... 카톡! 카톡!

어느 날 저녁,

퇴근해서 막 샤워를 하고 마실 커피를 준비하고 있는데 카톡이 울렸다.

"아빠, ... 흐하하하
저 임신했어요! 진짜 신기하죠. 안 그래요? 으하하하"

그리곤 아래에 임신을 증명하는 초음파 사진이 함께 날아왔다.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어느 해 초가을, 서강대학교 메리홀에서 연극 공연을 할 때인데 딸이 공연 보러 오겠다며 연락이 왔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깜짝 놀라실 일이 있으니 마음 준비도 해놓으라나 뭐라나 ... ...

공연이 끝나고 극장 앞 공원에 딸은 건장한 녀석을 대동하고 짠, 내 앞에 나타났다.

자기 남자친구라고 소개하기에 내가 대뜸 너희들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만나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사실 딸의 임신 소식에 깜짝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결혼하고 2~3년이 지나도록 얘네들은 아이를 낳을 생각이라곤 전혀 없는지 늘 보내오는 사진마다 애완견을 품에 안고 돌아다니는 모습들뿐이니 나는 어지간히 안달이 났었다.

딸아이의 기적 같은 임신 소식에 나는 또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아무래도 "꼰대 가치관"의 소유자인 것 같다.

딸들은 반드시 시집을 가야만 하고 또 시집을 갔으면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그 질긴 "고정관념" 말이다.

그렇게도 은근히 속을 끓이고 있던 중에 딸이 임신 소식을 전해왔으니 한껏 기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때까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고민이 생겼다.

(그럼, 이제부터 딸의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지?)

... ...

참 애매하다.

부모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기에 앞서서 자기들의 10대 때에 겪은 그 사춘기가 다시 찾아온다.

애지중지 키운 아들, 딸들이 어른이 되고 그들도 어김없이 아빠, 엄마가 될 때쯤, 부모는 어쩔 수가 없이 가슴이 먹먹해지고 이제부터 이 아이들도 우리네 부모와 같이 '누구의 아빠, 누구의 엄마'로 불려지게 된다는 현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바로 이때에 다시 한번 사춘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라고 어떻게 본인들이 하루아침에 할아버지로, 할머니로 호칭이 바뀌는데 그것을 선뜻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아마 자식들은 모른다.

세월이 흘러 그때가 되면 저들도 "할아버지, 할머니 사춘기"를 겪으면서 서서히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 과정을 "살고픔학 개론" 제1학년 1학기에서 배운다.

9살, 7살인 나의 딸들 은하별과 헤어진 후, 나는 딸들의 성장과정을 보지 못하였음에 눈물을 머금고 안타까워했다.

나에게는 지금까지도, 내가 퇴근해서 집에 가면 문밖의 발자국소리만 듣고도 "아버지!"하고 청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달려 나와 내 품에 안기던 어린 딸들에 대한 얼어붙은 "얼음 추억"밖에 없다.

아빠랑 엄마랑 함께 이 딸들이 자랄 수 있었다면, 처음 여자가 될 때 아빠인 나 몰래 저들끼리 엄마와 귓속말을 하면서 얼마나 어설프게 행동하였을까?

또 사춘기와 성장기 들어서서는 이 딸들의 눈에 남자애들이 어떻게 비쳐졌을까?

그런 아쉬운 딸들이 성장해서 시집도 가고 엄마가 됐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다,라고

이 모든 커다란 아픔과 행복을 현실 속에서 내가 몸소 체험하며 느낄 수 있게, 이 딸아이가 아니, 이젠 두 아들내미를 낳아 키우는 엄마가 된 딸이 한껏 보여주고 있다.

저만치 앞에서 첫째 아들 임신으로 만삭이 된 몸을 뒤뚱거리면서 남편 손 잡고 다정히 걸어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뭉클해 눈물 고이던 그 순간이 바로 나의 생의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었다.

나의 딸은 결코 평범하지가 않다.

요즘은 하나 낳아 키우기도 벅차다고 아우성인데 나의 딸은 연년생 두 아들을 낳아 키우면서도 그 힘들다는 육아의 짬짬이 시간에 네이버 문학작품 공모전에 장편소설을 써서 출품하여 당당히 입상하였고 매일같이 세상에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장편소설들 중에 한 점의 자기 별로 당당히 자리를 잡고 빛을 내고 있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감명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과정이 늘 그렇게 즐겁고 재미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쁜 일엔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엔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때론 티격태격 윽박지르고 잔소리도 하면서 함께 살아간다.

한 번은 내가 꽤 큰 수술을 받고 혼자서 병원 입원치료를 다 마친 다음에야 이 사실을 알렸더니 딸은 한달음에 달려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많이 속상해하더니,

또 언젠가는 교회를 다니는 딸에게 "성경도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와 다를 바 없는 그냥 이스라엘의 민족신화"라고 말했다가 우리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발짝의 물러섬도 없이 다툼과 논쟁을 이어갔다.

내가 생각해볼 때 딸은 철도 덜 들었는 데다가 아주 차갑고 냉정하기만 그저 그런 학생에 불과했다.

나는 사실 자식들의 투정질과 부모를 향해 어줍게 내뱉는 핀잔 같은 잔소리도 그립다.

나에게는 그런 것조차도 사치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인가 매우 친하게 지내는 사회복지사와 상담할 때였는데 내가 좀 짖궂은 말투로 농담을 자주 던지면서 살짝살짝 괴롭혔더니,

"제가 볼 때 지성도, 감성도 참 남다르시다고 생각되거든요. 근데 지금 하시는 그런 말투는 선생님과 어울리지도 않고 오히려 품격을 스스로 떨어뜨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왜 자꾸 그러세요? 하하하"

"내가 우리 딸들 나이 또래인 사람을 만나면 자꾸 나도 모르게 장난질이 나가는데 ... 음 ... 나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 ... 내가 그 또래 애들한테 야단맞아 본 적 없잖니? 애들이 쏟아내는 야단질을 나도 한번 맛보고 싶어서 그러는 것 같다."

나에게는 또한 별난 친구들도 많다.

"왜 맨날 나만 먼저 너에게 전화를 해야 돼? 너도 한번 나에게 먼저 전화해 봐!"라며 호통을 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자기는 한밤중에도 제 맘대로 전화를 하면서도 나보고는 시간을 가려 전화를 하라는 참 얄궂게도 엄격한 친구도 있다.

또 가게를 이사해 새단장하고 이제 막 오픈했으니 한번 와 보라고 호들갑을 떨기에 갔더니 아니 글쎄 내가 들어서자마자 주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깝깝이에 발바닥이 딱 달라붙어 오도 가도 못하고 입만 뻐꿈 뻐꿈하며 애절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쥐'를 치워 달라고 발을 동동 구르던 친구도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 또 친구들 사이의 이런저런 아름다운 생활 이야기와 다툼 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살고픔학 개론"에서는 이렇게 가르쳐준다.

"사랑은 곧 직업이다."

미운 놈 떡 한 개 더 준다는 우리네 조상님들의 지혜를 풀어보면 사랑이 왜 직업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일방으로 생겨나지 않으며 반드시 쌍방으로 작용하여 탄생한다.

때문에 사랑은 책임감을 요구하는 직업인 것이다.

무책임함으로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없듯이 무직업관적인 사랑은 일방에만 속하는 것이어서 그것은 애당초 사랑이 아니다.

좋으면 좋아서 사랑을 하고, 싫으면 싫어서 더 사랑을 해야 하며, 미우면 또 미운 대로 사랑을 해야 한다.

연인 사이, 친구 사이, 부부 사이, 부모와 자식들 사이가 늘 즐겁고 좋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사랑의 직업관"을 가져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이 누구에게나 삶이고 인생이기 때문이다.

사랑 때문에 슬퍼지는 것도, 사랑 때문에 죽고 싶은 것도 우리가 이 사랑을 죽을 때까지 떨 수 없는 일처럼, 직업처럼 책임져야 하는 "사랑의 직업관"이 없기 때문일지 모른다고 "살고픔학 개론"은 설명한다.

부모들은 "내가 키웠다!"라는 자기 수고의 크기보다는 "자식들이 스스로 잘 성장했다!"라는 고마움을 먼저 이해할 수는 없을까,

또한 자식들의 호칭을 선뜻 바꿔 불러주지 못하고 빠질빠질 속 태우는 것도 부모라는 권위적 지위를 내려놓기가 힘들어서인 것은 아닐까.

부부가 인생의 동반자라고 말하듯이 부모와 자식들도 삶의 동반자이다.

이를 온전히 다 배운 다음에야 "살고픔학개론" 제2학년에 올라갈 수 있다.

길 위에 나섰다.
그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
또 그 길을 따라 멀리 가야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길이다.

38살 젊은 나이에 무모한 결투로 생을 마감한 러시아의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이 그의 나이 25살인 1825년에 쓴 시가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

세상 사람들 중에 자신의 삶이 한 점 부끄럼도 없이 당당하다고 자부하며 자랑스러워할 사람은 몇 명이나 있을까.

나는 내 삶이 당당하다고 자부하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가.

내가 청소 일을 하는 곳은 약수동에 있는 교회와 남영동에 있는 빌딩, 이렇게 두 곳이다.

매일 아침마다 지하철 첫차를 타고 약수동에 있는 교회로 가서 청소를 하고 다시 지하철 타고 오전 9시까지 남영동 빌딩으로 돌아와서 빌딩 청소 및 관리 일을 시작한다.

남영동 빌딩은 지하 1층, 지상 5층으로 그리 크지 않은 빌딩인데 주민 주거지가 아니고 개인 사무실들이 입주해 있다.

어느 날 새로 입주하는 사무실이 있었는데 청소 일을 하는 나를 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저기... 청소아저씨, 여기 이 박스들을 좀 치워주시고 사무실 청소를 해주시면 5만 원을 드릴게요. 우리가 지금 막 입주해서 일을 하다 보니 좀 바빠서요. 하하하"

참 능글맞다.

"아... 네... 돈은 됐구요, 청소는 제가 해드릴게요!"

"그러지 말고 받으세요. 그래야 저희도 마음이 편하죠. 히히 허허허..."

5만 원권 한 장을 내 손에 쥐여 준다.

보이지 않는 내 자존심이 엉망진창이 된다.

나는 본건물의 공용시설물과 장소, 그리고 빌딩 내외부의 청소와 관리만 하면 되고 각 사무실들은 입주자들이 자체로 하는 그런 시스템이다.

또 한 번은 금요일인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지하층에 있는 집수탱크가 넘쳐나 난장판이 되었다.

주 5일 근무라서 토요일과 일요일은 휴일인데 나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음 날 토요일에도 나와서 펌프 교체작업도 거들고 뒷마무리 청소도 해야겠다고 혼자서 생각하고 있던 찰라에 건물관리 사무실 직원이 내게로 와서 하는 말이,

"저 청소아저씨! 내일 좀 나와서 일할 수 있으세요?그러면 내일 일당을 따로 드리신다고 사장님께서 한번 물어보라던데요?... "

"아... 네. 저... 일당은 됐구요, 그러지 않아도 나와야겠다고...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가 새로 입주한 사무실의 입주청소를 안 해줘도 무방하지만 앞으로 날마다 마주쳐야 하는 그 체면 때문에 모멸감을 감수해야 했다.

이런 내가 당당한가.
이런 내 삶이 자랑스러운가.

운명은 늘 삶을 속인다.
그런 까닭에 나는 지독하게 완벽주의를 고집하며 살아 온 것 같다.

월급쟁이로, 일용직 건설현장 노동자로 전전긍긍하면서 사는 터라서 그렇게 됐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비록 찬란하지는 않더라도 주변에선 소소하게 내 이름이 잘 불려지고 잘 뽑혀서 나름 일감이 끊기질 않아서 좋았다.

이런 내게도 그 앞에만 서면 항상 겸손해야 하는 상대가 있으니 바로 나의 집 싱크대이다.

싱크대 앞에 서서 시험지를 받아들 때마다 늘 긴장하며 떨고 있으니 그 차갑고 냉정한 싱크대는 십수 년 동안 단 한 번도 나에게 너그럽지가 않았고 "참 잘했어요!" 칭찬 한 번 해주지 않았다.

이 싱크대와 가사노동에서만큼은 나의 그 안락한 완벽주의가 통하지 않는다.

북한 인민군에는 취사병 병제가 따로 없다.

누구나 군복을 입고 군대에 가면 순번에 따라 분대별, 소대별로 식당근무 당번을 서야 한다.

그래서 식당근무라는 노동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는데 인민군 내무규정에도 제일 가벼운 처벌 조항으로 "순번 외 식당근무!" 라고 명시돼 있다.

때문에 군대에 갔다 온 남자라면 누구나 다 기본적으로 야전 취사요령이나 방법 같은 것들을 터득했다고 볼 수 있고 나도 TV에 나오는 남성 셰프 정도는 아니지만 솔직히 크게 걱정을 안 했었다.

운명의 장난질에 말려들어 삶이 꼬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싱크대 앞에서 하루 삼시세끼 시험지를 받아 보니 나는 완벽하지 못하면서 그런 척, 하고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온통 구멍투성이인 허접한 자신을 발견했다.

별수가 없다.
난 그저 그런 사람이었다.

제아무리 발버둥질 쳐봤자 아무 소용도 없음을 깨닫고 이제는 이런 자신을 받아들이고 이런저런 수다도 떨어보고 또 그런 자신과 실랑이를 벌이는 것이 한 가닥 낙이 됐다.

"겸손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
그래도 될까 말까 하다."

뒤돌아보면 또 보이는 설거지감, 집안 청소 일, 빨래하기, 또 정리정돈 등 모든 것들이 늘 부지런히 노력하라고 요구한다.

어머니와 아내와 딸들의 빛나는 수고와 은혜가 우주의 크기와 무게로 느껴지게 하는 가사노동을 매일 매일 반복하면서 나는 인생을 공부하며 배우고 있다.

옷 한 벌 사고, 주방의 그릇들과 조리도구를 사면서 수없이 반복했던 그 많은 시행착오들.

가끔 마트나 재래시장에 갔다가 생선 가판대 앞에서 두 다리를 어깨너비쯤 벌리고 서서 팔짱을 낀 채 생선들을 이리저리 노려보는 주부님들을 보곤 한다.

"어쭈, 오늘도 제법 물이 좋은데... 흠... 히히 헤헤"

여유롭게 미소를 띤 주부님들을 먼발치에 서서 바라보노라면 어느새 나는 그들을 경외하고 있다.

싱크대의 지배자는 오직 어머니와 아내와 딸들뿐이다.

세상에 백종원 같은 남자가 그리 많지 않듯이 싱크대가 배격하는 여자들도 세상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이런 내 삶이 자랑스러운가.

무대 위에서 공연의 마지막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주인공 세르반테스가 감옥에 갇혔을 때 자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직접 만들었던 연극 주인공 "기사 돈키호테"를 실존하는 자신으로 착각하는 악몽을 꾸다가 숨을 거두는 것으로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막을 내린다.

소설 "돈키호테"가 처음 세상에 나왔다는 17세기 중엽 스페인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욕망과 욕구,

그리고 1965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로 각색되어 초연의 막이 올랐던 그때와 2005년 우리 한국에서 첫 공연을 했던 16년 전에 비해 오늘 우리 삶의 욕구와 욕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우리가 사는 세계가 민주주의적인 진보와 발전을 거듭하면서 사람들의 문화생활, 경제생활, 지식생활 등 모든 삶의 영역에서 획기적인 발전과 변화를 이룩하였다는 데는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삶의 내면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본능적인 욕구와 본질적인 욕망까지도 충족시켜주는 그런 사람 중심의 세상으로 발전하고 변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주인공 세르반테스는 자기가 살던 도시의 세무관으로서 교회의 수도원에 세금을 매겼다는 죄로 감옥에 갇히게 되고 재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현재 우리 한국도 교회와 종교시설, 종교 관련 단체들에 대하여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

17세기 중반의 스페인처럼 지금 우리 한국에도 그런 법이 없다.

세르반테스가 죽는 순간까지 미련의 끈을 놓지 못한 "기사 돈키호테"라는 사회 주류층의 인간상은 도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지금 우리는 "기사 돈키호테"가 한번 돼보겠다고 그동안 자기에게 보내준 수많은 시민들의 믿음과 지지를 서슴없이 발로 차버린 사람도 보고 있으며,

자기도 "기사 돈키호테"가 되기만 하면 그동안의 자기 치부와 죄악을 다 덮을 수 있을 것이다는 "독재권력관"의 착각에 사로잡힌 사람을 비롯하여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보고 있다.

현재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기사 돈키호테"로 한번 살아보는 것이 자기 삶의 욕망과 욕구의 전부이고 끝일까?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25살의 뿌쉬낀도 지금 우리와 같은 것을 느꼈기에 이런 시를 썼을까?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발전한다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삶의 욕망과 욕구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도 든다.

세상의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자기의 삶을 자랑스러워하면서 "나는 당당하다!"고 외칠 수 있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코로나19라는 전례가 없는 팬데믹 세상이 2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어느 날 딸한테서 "괜찮냐"고 묻는 문자가 왔다.

내가 실제 처해 있는 주변 환경과 현실을 자초지종 알려줬더니 조금 지나서 통장으로 돈을 보내주면서 며칠 뒤면 또 여러 가지 가공식품들도 택배로 도착할 테니 꼭 잘 받아 챙기라는 당부였다.

그러면서 딸은 나의 체면과 자존심이 상할까 염려돼서인지 이렇게 변명했다.

"아빠, 저한테만큼은 아주, 아주 당당하셔도 돼요!"

그러고는 기약 없이 길어지는 이 팬데믹 시기에 딸은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태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새롭게 청소 일자리를 찾아서 일을 시작했다고 알려주자 딸이 또 하는 말이,

"난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자랑스러워요! 호호호"

그러면서 이번에는 15만 원짜리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티켓을 보내주었다.

그런 딸이 얼마 전에는 자기가 쓴 장편소설 "놈의 기억"이 네이버공모전에서 당선돼서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소정의 계약금을 받았다면서 코로나로 인해 교회에도 못 나가고 십일조를 못 하니 나에게 십일조 헌금을 한다는 변명과 구실을 붙여 또 돈을 보내왔다.

결국 나는 딸의 하나님이었다.

사실 이런 관계가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이 딸의 친정 부모님들과 시댁 부모님들은 이러는 딸이자 며느리인 본인과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반대로 나의 친딸들인 은하와 은별이가 살아서 곁에 있었다면 이 딸만큼이나 할까?

나는 진짜로, 진짜로 당당하다!

나의 삶 또한 그 어떤 부러움도, 부끄러움도 없는 자랑스러운 삶이다!

이런 영광스럽고 복 받은 삶을 또 어느 누가 누리고 있을까.

자식들을 키우는 부모들이 아들, 딸들이 철없다고 입버릇처럼 쉽게 말을 하는데 마냥 그렇게 걱정만 할 일이 아닌 듯싶다.

나도 솔직히 이 딸이 아직도 철이 덜 들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철이 늦게 든다, 혹은 철이 덜 들었다고 하는 것을 바꾸어 말하면 이는 혹시 또롯한 진취성과 감수성을 가지고 있어서 두려움을 모르고 열정적이며 강인하다는 또 다른 뜻은 아닐까.

나는 이 딸이 오래오래 철들지 않고 지금처럼 늘 용감하고 씩씩했으면 좋겠다.

자기 삶의 매 순간마다 어떤 이치나 도리적인 잣대를 놓고 고민에 빠진다거나 스스로 만들어 놓은 어려움 속에 갇혀 힘들어하는 일이 없길 바라기 때문이다.

철모르던 시절에 철없는 발상에서 출발한 우리들의 부녀관계가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아직도 다 모른 채 그렇게 아름다운 세계로 가고 가다가 그 끝에서 또 철이 미처 들지 않은 채 헤어진다고 한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연년생으로 태어난 두 아들을 키우면서 작년에 장편소설 "놈의 기억"을 창작해서 기어이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도,

올해도 쉼 없이 그 네이버 문학작품 공모전에 새로운 장편소설 "위키드 커피숍"을 창작하여 연재하고 있는 딸의 겁 없는 용감함에 대해서 나는 "너의 그 모든 것들이 네가 철이 없기에 가능한 거야," 라고 말해주고 싶다.

딸은 두 아들이 씩씩하게 자라나는 매일 반복되는 즐거움 속에서, 고단함과 힘듦이 있는 엄마이기도 하고 또 소설 작가이기도 하며 때로는 딸로, 며느리로, 아내로 하루에도 몇 번씩 능수능란하게 변신한다.

이런 딸이 "철없는 엄마"로 불린다 한들 그게 무슨 큰 대수이겠는가.

딸은 나에게 모든 것을 다 보여주고 있다.

그리움의 환상, 외로움의 고독,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오래 살수록 삶의 희열과 보람이 넘친다는 것까지 다 보여주고 있다.

"살고픔학 개론"의 배움은 정말 끝이 없다!




신비의  아이야

                                  전원조(은하별)

아이야,
엄마가 드디어
첫 생명을 잉태하고
그 놀라운 기적을 이렇게 말했지.

- 어머?!...나 임신했어! 신기하지.

얼마쯤 지나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때
발 빠른 첫 웃음소리에
할아버지는 너무 기뻐 이렇게 말했지.

- 이젠 소리 내서 웃네.

그렇게 
너의 탄생은 신비였단다
너의 목소리 또한 신비였었지
누구나 그렇게 태어나고 장성하지만
아이는 누구에겐
신비로운 기적이었다.

- 내가 이 아이 엄마라는 게 
   믿기지 않아요.
   정말 신기하죠!

신비로운 기적
아이야,
그래서 너는 이 세상의 모든 것
그 아픈 정일랑 탐하지 말고
무럭 무럭 너 맘껏 자라나거라
널 지켜주는 착한 맘들만 바라보면서

늦은 봄 실려오는 꽃내음에 겨워
나도 황홀한
큰 행복을 느끼며
아이야,
너에게 정성을 바친다 
너의 세상에 아름다운 노래를
너의 세상에 아름다운 축복을

                               2018.  4.   21.

 

답 시

박토에 난 씨앗은 탓이 없으니
볕 쬐고 바람 가르며
자라면 된다

바삭한 땅에서도 끌어모아
한방울
한방울
존재가 부셔져 갈라져 쪼개져도
흠이 없으니

이제,
꽃이 된 줄을 모르더냐

2018년 4월 21일

딸 윤이나가 아버지 은하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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