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웹진/제8호

[인물 인터뷰] 무채색 삶을 끝내자

by vie 2021. 9. 2.

/ 김연아
인터뷰어 / 강민수, 김연아
인터뷰이 / 이용은
(성프란시스대학 16기 졸업동문)



항상 칠판 바로 옆에 앉아 신비로움을 자아내셨던 선생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 영화 보셨나요?” 교수님 물음에 항상 . 봤습니다.” 하시던 분. 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북 콘서트 때 제가 할 일 없을까요?” 여쭤보시며 계속 일거리를 찾아다니셨던 분. 회장을 시켜야 한다는 16기 선생님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도 한사코 손사래 치시던 분. ‘무채색 삶을 끝내자. 힘들어도 꿈을 꾸는 인간이 되기로 했다.’며 성프란시스대학 161년 동안 자신과 용서와 화해의 시간을 보냈다는 분. 이용은 선생님은 어떤 삶을 살아오신 걸까요.

16기 이용은 선생님(흰색 티셔츠)과 강민수 자원활동가


Q: 16기 졸업하고 처음 봬요. 어떻게 지내세요?

A: 지금은 서울역 희망지원센터에서 9월까지 서울시 공공근로로 일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번 년도 말까지 제가 생각하고 있는 걸 준비해서 내년 초부터 하려고 계속 신경 쓰고 있고요. 그 일이 다른 사람들하고 함께 하는 작업이다 보니까 좀 급하게 준비해야 해서 원래는 1년 동안 성프란시스대학 17기 자원활동가로 활동하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중간에 그만두게 됐어요.

 

Q: 그 일은 어떤 일인가요?

A: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음악 편곡하는 거고요, 두 번째는 취미로 하던 사진을 상업적인 쪽으로 조금 활용하려고 해요. 컴퓨터 관련된 건 아직 확정적인 건 아니고요.

 

Q: 컴퓨터 관련이라면?

A: 예전에 프로그래머였거든요. 고등학생 때부터 IT업체에 소속이 되거나 프리랜서로 계속 일을 해왔어요.

 

Q: 용은샘 실력이 좋으셨나 봐요. 고등학생을 그냥 그렇게 쓰진 않잖아요.

A: 적성에 맞았다고 해야죠. 어릴 땐 많이 내성적이어서 혼자 무언가 집중해서 하는 걸 좋아했어요. 남들하고 어울리면 에너지가 빠지는 느낌이었죠. 이 성격이 학생 땐 문제가 없었는데,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려면 굉장히 답답한 성격이잖아요. 그 성격 바꾸려고 스무 살 땐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어간 적도 있어요.

 

Q: 부산에서 서울까지 어떻게요?

A: 성격 때문에 고민을 했죠. 이래가지고는 먹고살기 힘들겠다. 또 여행을 좋아했거든요. 전국일주는 시간상으로 불가능할 것 같아서 부산에서 동해안 쪽을 따라서 쭉 걸어 올라올 계획을 세웠어요. 혹시 모르니 아플 때 서울로 빨리 돌아올 수 있을 만큼의 비상금만 가지고 부산에 도착했어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3일을 굶었어요. 비상금은 쓰면 안 되니까요. 3일을 굶으면서 걸었는데, 3일을 굶고 나니까 세상이 노래진다는 말을 그때 알게 된 거죠. 용기라고 해야 할까요. 이러다 죽겠다 싶었는지, 어떤 식당에 들어가서 배고파요.” 소리가 나오더라고요. “제가 지금 걸어 올라가고 있는데 3일째 굶었어요. 밥 좀 주세요.” 3일 굶으니까 그 소리가 나와요. 다행히도 그분이 아이고, 젊은 총각이 고생한다.” 하면서 밥을 주셨어요. 이래선 안 되겠어서 그다음부터는 공사현장 같은 것 보이면 사정 설명하고 하루만 알바를 한다거나 농촌 지역을 걸어갈 때 일 도와드리고 새참을 얻어먹는다거나 해서 걸었어요. 침낭을 갖고 있어서 잠은 야외에서 다 해결하고요.

 

Q: 얼마나 걸렸어요?

A: 그렇게 서두르지 않고 이런 경험, 저런 경험 다 해보면서 천천히 올라와서 경포대까지 찍고 방향을 틀어서 서울까지 오는 데 3개월 걸렸어요. 경포대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 들려드릴게요. 경포대 도착했을 때가 밤이었는데, 그땐 군인들이 해변에 접근을 못 하게 했어요. 해변까지는 못 들어가고 그 근처 안쪽 벤치에서 침낭을 펴고 자다가 커피 파는 아주머니가 내는 달그락 소리에 일어났는데 약간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기 전이었거든요. 근데 옆 벤치에 저랑 비슷한 또래의 남자가 자고 있는 거예요. 추운지 발을 이렇게 웅크리고. (웃음) 커피 두 잔을 사서 얘기를 했는데 저하곤 반대로 서울에서 밑으로 걸어 내려가는 분이었어요.

 

Q: 용은샘 같은 분이 또 계셨어요? (웃음)

A: 그러게요. 하하. 그분이 저에게 <갈매기의 꿈>이라는 소설을 선물로 줬어요. 책 여백에다가 자기 생각들을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쓴 거 있죠. 꽤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했는데 미안하게도 지금은 없어졌네요. 아무튼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 세상에 무서운 게 없구나. 내가 해보자고 덤벼들면 누가 나를 해치려고 하지도 않는구나. 나는 왜 이렇게 그동안 답답하게 살았을까.’ 하고 성격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어요.

 

Q: 음악 편곡은 원래 공부하셨던 건가요?

A: 어렸을 때 음악에 정말 심취한 적이 있어요. 하나를 하면 깊게 파고드는 성격이거든요. ‘음이 왜 이렇게 연결이 돼야 하지?’라는 궁금증이 생겨 이론 공부까지 혼자 해버렸어요. 그렇게 편곡 공부를 했는데, 현재 하고 싶은 일이 됐어요. 물론 지금 업으로 삼으려면 공부를 좀 더 해야겠지만요. 음악 쪽은 일하는 것과 제가 좋아서 하는 것의 경계선 없이 하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아요. ‘이게 일이다라는 생각이 안 들고 이걸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좋거든요.

 

Q: 대학을 졸업하셨다고 들었어요. 전공이 앞서 말씀하신 음악이나 컴퓨터 관련이었나요?

A: 아니요. 전공은 토목공학이에요. 전혀 뜬금없지만요.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중학생 때부터 쭉 하긴 했지만, 이상하게 전공으로는 토목공학을 선택했어요. 컴퓨터가 다 좋은데 사람 에너지를 많이 갉아먹어요. 34일 밤새는 건 우습게 알 정도죠. 잠을 안 자려고 항상 커피를 입에 달고 살았고, 위도, 장도 안 좋아지면서 지치더라고요. 그래서 컴퓨터를 전공으로 선택하진 않았어요. 제가 수학을 꽤 했고 여행도 좋아했잖아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벌어먹고 살 게 뭐가 있을까생각했죠. 그래서 토목공학을 선택했고 경상북도 상주에 있는 직장을 다니게 됐어요.

 

Q: 토목공학이라면 어떤 일을 하셨나요?

A: 회사는 대흥종합건설이었는데 주로 교량, 고속도로, 도로 쪽 관련 일을 했었죠. 상주에 하흘면이라는 곳이 있어요. 해마다 수해를 자주 입어서 한번은 회사에서 제방공사를 맡아서 했어요. 그때 소장이 있고 제가 기사, 업무 처리할 수 있는 직원 한 분, 이렇게 해서 세 명이 투입됐어요. 나중에 공사인원이 더 늘어나긴 했지만 처음 투입된 인원은 그랬죠. 저는 측량을 했어요. 일은 거의 장비가 다 해요. 5km의 제방구간이 있다고 한다면 저는 측량을 해서 어디에 얼마큼 파나가고 얼마큼 쌓고 그걸 점으로 찍는 거죠. 그다음은 장비 기사 분들이 알아서 해 주시는 거예요. 그 외에 제방 공사하는데 포함된 논이나 밭의 보상 업무를 맡아 했고 인건비, 장비 관련한 서류 업무가 있었죠.

 

Q: 그 마을에서 지내신 거예요?

A: 산골 동네다 보니 모텔도 없고 마을회관을 내주셔서 거기서 숙식을 했어요. 돌아보면 그때가 가장 여유롭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크지 않았던 평화로운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인간적인 삶을 많이 봤거든요. 공사 기간 동안 마을 청년회에서 밤마다 어이, 이 기사. 오늘 한 잔 해야지.”하시고 어느 날은 학교 운동회에 초대도 받고요. 그래서 그날은 저희도 공사 다 접고 함께 가보니까 학교 운동장에 무쇠솥 걸어놓고 뭔가를 끓이고 있는 거죠. (웃음) 온 동네잔치였어요. 서울에선 보기 힘든 그런 모습을 많이 보고 자연에 거의 묻혀 살다시피 했던 게 정말 좋았어요.

 

Q: 상주에서 회사를 다니시다가 언제 서울로 올라오셨어요?

A: 제가 한 7년 차 됐을 때, 아버지가 암에 걸리셨어요. 저희 집이 다 서울이거든요. 저도 서울 태생이고. 부모님은 상주에 아무 연고가 없기 때문에 제가 있던 곳에 모시기는 그래서 퇴사를 하고 서울로 왔어요. 저희 형제가 셋인데, 제가 둘째예요. 문제는 형제 둘 다 외국에 나가 있었어요. 동생은 애니메이션 쪽으로 일본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고 일하고 있는 상황이었고요. 국내에 있는 건 저 밖에 없고 자식 된 도리로 어머님한테 모든 걸 일임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서울 집으로 올라온 후 아버지는 몇 개월 후에 돌아가셨어요.

 

Q: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A: 아버지는 조각을 하셨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았던 게, 억압보다는 자유였어요. 좀 지나치면 방종에 가까운. (웃음) “네가 하고 싶은 거 선택해서 하는 대신 책임은 네가 져야 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자유롭게 컸던 것 같아요. 고등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교육용 프로그램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데 먼저 대학에 진학한 선배 집에서 다 같이 모여서 팀으로 해야 했거든요. 1년 간 선배 집에 머물면서 작업하는 것도 뭐라고 안 하셨어요.

 

Q: 1년 동안이나요?

A: . 그때 집이 홍제동이었는데, 그 작업이 완전히 종료되고 나서 집에 갔더니 집이 이사 가고 없더라고요. (웃음) 그렇게 저는 생활을 자유롭게 한 편이예요. 내가 하고 싶은 것, 지금 당장에 할 수 있는 것. 그런 것에 집중을 많이 한 것 같아요.

 

Q: 그렇게 서울에서 일을 시작하신 건가요?

A: 토목공학 관련 직종을 수소문해봤는데, 당시 사회적으로 임금체불 문제나 부도 직전의 업체들이 많아서 찾기가 힘들었어요. 다행히 상주에서 회사 생활하기 전 IT 쪽에 알고 있던 지인들이 소개해주셔서 프리랜서 형태로 일을 하게 되었고, 또 조그마한 업체 운영하시는 아는 분을 통해 개인 공사현장 따라다니거나 설계도 외주작업 등의 일을 했죠.

 

Q: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셨네요.

A: . 컴퓨터 일은 컴퓨터 일대로 하고 공사현장 일 이외에 다른 일이 있으면 그것도 하고요. 제가 왜 그렇게 살기를 원했는지 이유는 명확하지 않은데, 어떤 직장에 적을 두기보다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프리랜서로 사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그렇게 살았던 것 같아요. 어쨌든 일은 계속 하는 거였고 저축도 하고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살면 문제는 없겠다 싶었는데, 문제가 그때 발생했죠.

 

Q: 어떤 문제요?

A: 5~6년 전 쯤, 아주 큰 사고였어요. 공사 현장에서 건물 외벽에 돌을 붙이는 작업하던 중이였죠. 건축물 외부에 파이프를 세우고 발판 설치하고 그 위에 돌을 받아놓은 후 붙이는 작업을 하는 것이 순서인데, 그 발판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한 장당 40kg씩 나가는 돌을 여러장 얹어놓고 사람이 다니면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요. 그 무거운 돌을 받아놓고 21조로 작업을 하는데 거기가 3층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투입되기전 작업하던 사람이 안전점검을 제대로 안 했던 거예요. 발판에 용접부위가 떨어지고 발판이 무너지면서 추락을 했어요. 3층에서.

 

Q: 돌판을 옮기다가 추락하신 거예요?

A: 아니요. 붙여나가는 작업 중이었는데, 받아 놓은 돌판들 무게를 견디지 못해 발판이 무너져 내린 거죠. 그래도 다행인 건 그 돌들이 다 제 주위로만 떨어지고 몸 위로 떨어지진 않았다는 거예요. 치아하고 무릎이 다 망가졌죠. 진짜 문제는 거기서부터였어요. 아는 사람 소개로 일하게 된 업체였는데, 이 업체가 명의를 바꾸고 폐업을 하더니 사라져버렸어요. 보상 받을 곳이 없는 거예요. 제 실수도 아니고 안전미비로 일어난 사고였는데 말이죠.

 

Q: 어떻게 그런 일이. 업체가 폐업을 했다고요?

A : ,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게 아니라, 제가 거기서 받아야 될 임금이 7백만 원이었고 다른 사람 것까지 하면 수천만 원 되는 돈을 현장에서 수금 후 잠적해버린 거예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가 모아뒀던 돈과 전세금이 온전히 치료비에 다 나가버린 거죠.

 

Q: 일용직이어서 산재 처리가 안 된 거예요?

A: 산재 처리 받는 거 굉장히 어렵고 힘들어요. 그래서 처음에 시도했다가 다 포기했어요. 병원에 있으면서, 아휴, 해볼 거 다 해 봤고, 살 만큼 다 살았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래도 사람이 살긴 사나 봐요. 치료비에 생활비까지 지출은 계속 있는데 생산 활동을 못 하니까 경제 문제에 봉착하게 돼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 봤어요. 치료하는 동안에 의탁할 만한 곳이 있을까 해서요. 어떤 교회가 나와서 전화를 했더니, “혹시 장애인이세요?” 그래서 , 장애 정도는 아니고요. 다리가 좀 불편합니다.” 했더니 , 저희는 장애인만 받아요.” 하면서 알려준 곳이 숙대 다시서기센터에요.

 

Q: 그렇게 다시서기센터와 인연을 맺게 되셨군요.

A: 만약에 여기저기 알아봐서 안 됐으면 저도 노숙을 할 수도 있었겠죠. 다행히 다시서기센터를 알게 돼서 여러 가지 지원을 해주시더라고요. 우선은 의식주가 해결이 되니까요.

 

Q: 센터에서 여럿이 자야해서 불편하지 않으셨어요?

A: 아무래도 붙어서 자니까 코 고는 소리, 이빨 가는 소리, 잠꼬대 다양하죠. 근데 저는 주위 환경에는 좀 강한가 봐요. 그걸로 스트레스 받진 않고 저는 제가 지금 처한 처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런 걸 생각해야 하는 게 더 힘들었어요.

 

Q: 센터로 오기 전엔 어디서 지내셨어요?

A: 고시원으로 갔어요. 원래는 병원에 쭉 있어야 하는데, 6개월 정도 있다가 통증이 심해져서 다시 들어갔다가, 그렇게 총 12개월 정도 병원 생활했던 것 같네요. 치료비가 없어서 병원에서 나오긴 했는데, 걷거나 제대로 움직이지를 못해서 하루 종일 갇혀 지냈어요. 그러다가 2019년도 2월 설 연휴 직전에 다시서기센터로 왔어요. 센터 올라가는 경사로 아시죠? 거기 난간 붙잡고 간신히 올라갈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어요.

 

Q: 일은 아예 못 하신 거죠? 컴퓨터 작업하시던 것도?

A: . 아무것도 못 했어요. 아무것도. 컴퓨터 작업도 앉아서 해야 하는데 앉으면 몸 전체가 다 아프니까요. 거의 누워만 있었어요. 그렇게 센터에서 지내다가 좀 나아졌더니 자활근로는 한번 해볼 수 있겠더라고요. 또 그 자활근로를 하니까 무료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어서 무릎치료도 받고요. 계속 움직이려고 해서 그런지 더 빨리 나아지더라고요. 무릎이 많이 나아졌을 때 공공근로로 옮겨서 일을 하고요. 어쨌든 아직 통증은 있지만 일상 생활하는 데 지장은 없으니까 운도 좋았고 감사하죠. 이게 계속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잖아요. 그걸로 열심히 저축을 하고 또 다음 단계를 고민하고 그랬죠.

 

Q: 우울증으로 힘들다거나 하진 않으셨나요?

A: 모르겠어요. 현대인은 누구나 약간의 우울증은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요. 저는 다시서기센터, 성프란시스대학에서 좋은 분들 정말 많이 만났어요. 센터 근무자 중엔 공무원 출신도 있고 사업하던 사람도 있고 다양한 사람이 많은데 그분들과 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내 문제도 얘기하고 그분들 문제도 듣고 하면서 저도 모르게 깊은 수렁에 빠지기 전에 잘 흘러간 것 같아요. 만약에 거의 모든 시간을 혼자서 고민해야 했으면 좀 더 심해지지 않았을까요?

 

Q: 성프란시스대학에는 어떻게 지원하게 되셨어요?

A: 공공근로 일자리로 옷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 당시 담당자가 현재 성프란시스대학 학무국장인 마명철 국장님이었어요. 마 국장님이 권유를 했고, 제 주위에 인문학 졸업생들이 많거든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많았어요. 예전과 같은 생활 패턴으로 살기에는 지쳐 있었죠.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방식과 당장 해야 하는 일 사이에 오는 괴리감이 컸거든요.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어요. 사고 이후 서울역으로 오게 되고 여기서 생활하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까 어떻게 살 것인가’, ‘저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사는가와 같은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자는 생각을 했죠.

 

Q: 용은샘이 쓰신 글 중에 나를 들추고 마주했다. 마음에서 쏟아내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록했다. <>를 여과없이 토해내는 과정. 타인을 보듯 냉정하게 뱉어놓고 보니 누구나 그렇듯 경제활동에 매몰되어 꿈 한 조각 남지 않은 메마른 존재. 균형을 잃고 쟁기를 끌던 마른 삶은 사고 한 번에 부러지고 남은 것은 사회적 허울, 각질 같은 껍데기뿐이었다. 무채색 삶을 끝내자. 힘들어도 꿈을 꾸는 인간이 되기로 했다.” 라는 구절이 정말 인상깊었어요.

A: 찰리 채플린 영화 <모던 타임즈>에 나오는 기계 부품처럼 살아온 거죠. 기계 부품과도 같은 삶을 살다가, 과연 이렇게만 살다가 나는 나중에 만족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성프란시스대학 다니면서 생각이 정리되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무장이 된 것 같아요. 인문학이라는 게 사실 이 나이에 무슨 그런 걸 하고,’ ‘밥 먹고 살기 바쁜데라는 생각을 하면 못 하는 거잖아요. 사람이 어떤 사물에 대해 불만을 가지면 모든 게 다 안 좋아 보이는 것처럼요. 이게 정말 나한테 기회고, 인문학을 나를 관찰하는 도구로 받아들여서 내 정신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내 정신적인 상태가 어느 정도인가를 파악하는 데 활용했어요. 독서도 더 많이 하고 철학적인 문제도 고민해 보고, 심리적인 문제도 들여다보고요.

 

Q: 어떤 수업이 제일 기억에 남으세요?

A: 모든 게 다 좋았어요. 특히 예술사.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아버지보고 자란 것도 있고 그런 부분에 대한 갈증이 있었나 봐요. 그리고 글쓰기. 글쓰기야말로 하이라이트였죠. 글로 쓰지 않고 생각만 하면 이거 조금 생각하고 저거 조금 생각하다 끝나는데, 글로 쓰면 어떤 생각의 꼬투리를 갖고 계속 써내려가야 되고, 계속 파내려갈 수 있게 되잖아요. 과제로는 올리지 않았지만, 정말 많은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Q: 글쓰기 수업에서 새롭게 배운 점이 있을까요?

A: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서 많이 배웠어요. 감정을 억지로 쥐어짜는 게 아니라 그 감정이 나오게끔 글을 구성하는 거죠. 눈물 난다고 감정만 쓰는 게 아니라 그런 것을 피해서, 정확히 그 상황을 펼쳐서 문장을 만들고 글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고 해야 할까요? 좀 더 디테일하게 제 삶을 글로 표현하는 방법을 다시 자각하게 되고, 그 와중에 몰랐던 것도 다시 배우게 되고요. 그래서 글쓰기 과정이 상당히 중요한 것 같아요. 우리는 망각을 해요.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죠. 특히 성프란시스대학의 선생님들 연령층이 높잖아요. 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도, 글을 쓰지 않으면 그건 그냥 지나가는 바람과도 같은 거죠. 글이 모임으로써 나라는 존재가 드러날 수 있는데, 그 글을 쓰지 않으면 모든 게 예전처럼 똑같이 그냥 잠깐 생각하는 걸로 지나갈 거예요.

 

Q: 글은 계속 쓰실 거예요?

A: 지금도 쓰고 있어요. 예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중요한 과정이라는 걸 인식했죠. 물론 그 전에도 수많은 고민을 했겠죠.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니까요. 그런데 내가 무슨 생각을 했지? 어떤 결론에 도달했지? 그 생각을 한 원인이 뭐였지? 허무하게 나중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잖아요. 글쓰기 과정이 나에게 얼마큼 절실한지, 얼마큼 도움이 됐는지 알기에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할 거예요.

 

Q: 성프란시스대학 16기 활동 중 아쉬웠던 점이 있을까요?

A: 역시 코로나죠. 활동을 많이 못 해서 사람들과 더 많이 어울리지 못한 게 가장 아쉬워요. 강의시간에 들어와서 강의만 듣고 바로 끝나고 가야 했던 부분이요.

 

Q: 용은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뭘까요?

A: 어려운 질문인데요. 글쎄. 뭐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 만한 게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자기 자신을 일단 많이 들여다봐야 할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치유가 좀 더 필요할 테고, 양분을 주는 과정도 필요할 테고. 그 과정이 중요할 거 같아요. 어떤 한마디보다는 치유와 양분을 주는 과정. 사람이 육체적으로 힘이 있더라도 정신적으로 지쳐있으면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 지금 내 정신이 어떻게 지쳐있고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가 계속 들여다보는 과정을 거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Q: 마지막 질문할까요? 꿈이 있으신지?

A: ? 있죠. ‘지금은있죠. 음악과 그림을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 하고 싶다는 것이요. 어느 지점까지 도달하고 말 거야, 이 정도 규모가 되고 말 거야, 그런 게 아니라 지속 가능한 것. 그게 꿈이에요. 거창하진 않아요. 현실적으로 어렵겠죠. 대다수가 많이 포기하고요. 지속 가능하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아요. 앞으로 또 그쪽으로 가는 게 결코 또 쉽지만은 않을 거예요. 우리가 계획한 대로 다 되는 게 아니잖아요. 하지만 거기에 만족을 하고, 큰 욕심 없이 천천히 그쪽으로 나가려고 해요.

혹시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처음에 이름 갖고 삼행시 지을 때, 제가 '자신과의 화해', 그런 걸 언급했을 거예요.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용서할 건 용서하고, 화해할 건 화해하고.' 인문학 과정 거치면서, 1년 사이에, 그런 과정이 다 일어났어요.

: 이런저런 어려운 일들이 있었지만
: 용서와 화해 과정을 자신과 해나가며
: 은혜로운 시간을 보낸다

(이용은 선생님이 글쓰기수업 첫 시간에 지은 삼행시)
 

이용은 선생님, 흔쾌히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응원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