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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8호

[길벗 광장] 형제복지원, 동부시립병원 무의탁환자 병동, 그리고 성 프란시스 대학

by vie 2021. 9. 1.

김동훈 (성프란시스대학 예술사 교수)


1987년 어느 날 언론에 보도되자마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형제복지원 사건은 자신을 방어할 수단이 없는 소위 ‘부랑자’들에게 국가 권력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굳이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주 옛날부터 집이 없어 길거리에서 유랑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권력자들에게는 몹시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한데 잠을 자면서 악취를 풍기고 구걸하는 사람들을 가능하면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고픈 것이 자신의 훌륭한 치세를 과시하고픈 모든 왕이나 황제들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한자어로 유랑(流浪)은 파도처럼 이리저리 흘러 다닌다는 뜻을 지닌다. 그러니까 유랑민은 사실은 멀리 완전하게 다른 곳으로 가지도 못하고 그저 하루라도 눈비를 피할 곳을 찾아, 한 끼 밥 동냥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가난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으리라. 나중에 여기에 낭만적 의미를 덧입혀 유랑극단이니, 유랑화가니 하는 말을 사용했겠지만, 그들마저도 제대로 끼니를 잇기 어려운 가난함을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 순화된 뜻을 지닌 우리말로는 나그네를 들 수 있다. 이 말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한군데 거처를 정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여기저기 떠도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니까 말이다. 지나가는 손님이라는 뜻의 과객(過客)도,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도는 사람을 가리키는 방랑자(放浪者)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부랑(浮浪)이라는 말에 이르면 뭔가 부정적인 의미가 그 안에 담겨 있음을 대부분의 사람이 눈치채게 된다. 일정하게 사는 곳과 하는 일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님을 뜻하고, 따라서 게으르기에 실패한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엿보게 해준다. 형제복지원은 바로 이 부랑인들을 수용하던 시설이었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부랑인을 가둬놓고 그들의 인권을 무참하게 짓밟았던 곳이다. 그 사건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을 때 나도 다른 많은 사람처럼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도 끔찍했던 소위 부랑인 인권현장의 한 자락을 경험했던 적이 있다. 1991년부터 1994년 독일 유학을 나서기 전까지 당시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나이였던 나는 20대 초반의 대학생들과 함께 서울특별시 용두동에 있는 동부시립병원 무의탁환자 병동에서 매월 1회씩 자원봉사활동을 했었다. 처음에는 나 혼자, 몇 달 뒤부터는 같이 가도 되겠냐고 물어왔던 당시 의대생이었던 교회 후배, 그다음에는 청소라도 돕겠다며 나를 따라나섰던 봉사활동 단체 후배들 여럿이 그곳에 계신 환자분들을 만나러 갔었다.

한 번 따라가서 환자들에게 기도라도 해드리고 싶다고 하셨던 교회 집사님들과 함께 그곳을 방문했을 때 병동을 지키던 수간호사라는 분에게 무엇이 이분들에게 가장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때 그 수간호사의 대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정확하게 한 자 한 자 기억나지는 않지만, 요지는 이랬다. “저 사람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들이다. 도와줄 필요가 없다. 왜 여기 와서 시간 낭비하려고 하느냐?”

그날 병원을 나서면서 어떻게 백의의 천사라는 분이 저런 식으로 말을 할까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도 환자분들을 만나야겠기에 계속 물었더니 링거용 주삿바늘이 부족하니 일정 분량을 사다주면 요긴하게 쓸 수 있다는 거였다. 당시에는 절대 빈곤층에게 의료 혜택을 주는 의료보호 예산이 많지 않아 무의탁환자 병동에 지급되는 의료기기, 특히 소모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한 환자에게 썼던 링거용 바늘을 불로 소독해 다시 쓴다는 말을 듣고 매달 방문할 때마다 종로 6가에 있던 의료기기 상회에서 그 바늘을 다량으로 구매해서 병원에 전달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다 합쳐 10명 정도를 수용하면 충분할 것 같은 병실 세 개에 30명 정도의 환자를 몰아넣고 있었고 의사나 간호사 인력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심지어 봉사활동 하러 간 날 누구의 배웅도 받지 못하고 혼자 눈을 감으신 환자분을 봉사활동 단체 후배가 발견했던 적도 있었다.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간호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증상이 덜한 환자에게 중증환자 간호를 맡겼고 자신도 힘들었던 경증환자가 중증환자를 고의로 돌보지 않거나 심지어 때려죽였다는 말까지 다른 환자의 입을 통해 내게 전해질 정도였다. 복지원처럼 멀쩡한 사람을 잡아 가두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국가에서 무료로 치료해준다는 그곳에서도 소위 ‘부랑인’들은 전혀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게 내가 유학 전에 경험했던 대한민국 노숙인 복지의 실상이었다.

유학 중 IMF 사태를 경험했다. 그 파장이 피부에 와닿았던 건 유학생 중 일부가 본국에서의 지원이 끊기거나 줄면서 어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사실이었다. 이듬해 한국에 들르러 왔을 때 그 엄청난 후폭풍을 서울역 앞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리에 나앉은 이들을 이전처럼 다시 수용시설에 가둘 것인가?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 다시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 텐데... 다행히 이들을 잡아 가두는 방식 대신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고 직업을 알선하는 등의 복지 서비스가 제공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놓였던 기억이 새롭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전공인 철학, 예술철학 강의를 몇몇 대학에서 해가며 소위 보따리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대 미학과의 한 교수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역 일대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인문학을 강의하는 곳이 있는데 강의를 해보겠냐는 말씀이었다. 신의 섭리가 있다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믿는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정작 성프란시스대학에서는 연락이 오질 않았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당시 중앙대학교 한독문화연구소에서 함께 독일통일연구를 하던 안성찬 교수님께서 전화하시더니 똑같은 제안을 하시는 거였다. 그때 나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격과 감사를 느꼈다. 그리고 이 길이 앞으로 내가 계속 걸어가야 할 길이 될 거라 확신하게 되었다. 처음 성프란시스대학에 와 설립자 임영인 신부님과 다른 교수님들, 실무자분들 앞에서 황당하게도(?) 쫓아내기 전에는 제 발로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또 세월이 흘러 이제 성프란시스대학에서 노숙인 선생님들과 만난지 햇수로 15년이 되었다. 40대 중반이었던 나이도 이제 60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참 숱한 일들이 있었지만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이 세월 동안 내 삶의 중심은 서울역, 동자동, 후암동, 다시서기센터,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기서 우리 선생님들과 가졌던 만남, 거기서 함께 공부한 인문학이었다는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 힘이 다해 인문학을 통해 선생님들을 만나지 못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이곳이 내 마음의 고향이고 내 삶의 터전이라 믿고 우리 선생님들과 인문학을 함께 공부하며 살고 싶다.

요즘은 한 가지 생각이 더 늘었다. 1990년대 초까지도 정말 열악했던 노숙인 인권 상황이 2000년대 이후 많이 개선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노숙인에게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게 만들 여러 가지 사회 여건이 제대로 갖춰졌느냐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숙인 문제 해결을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학자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그 구체적 대안을 고민해 보고 싶다. 아직은 대한민국 학계에서 노숙인을 둘러싼 여러 문제에 대해 어떤 연구성과가 나왔고 어떤 정책대안이 제시되었는지를 엿보는 수준이지만 조금씩 문제영역을 확장해 나가면 노숙인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학자들의 연구공동체를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꾸고 있다. 분명 같은 문제를 고민하는 연구자들이 있으리라 믿고 언젠가는 그들과 함께 열띠게 토론하고 대안을 함께 모색하고 있을 미래의 나를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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