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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8호

[역전칼럼] 와카레노 타비 (別れの旅)

by vie 2021. 9. 1.

박경장 (글쓰기 교수, 문학평론가)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2학기 글쓰기수업은 시 읽기와 시 쓰기다. 매주 시 한 편씩을 암송하는데, 이건 숙제로 내준다. 수십 년 만에 펼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눈이 빠질듯한데 시까지 외우라니 얼마나 머리가 지끈거렸을까. 그런데도 201511기 선생님 중 유일하게 10여 편 시를 다 외운 분이 개구리 왕눈이최인호 선생님이었다. 다소곳한 자세로 큰 눈을 지그시 감고 바르르 떨리는 입술로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를 암송하던 초겨울 후암동 교사. 턱 그늘 괴고 한줌의 눈물을 백열전구 불빛에 던져주며 우리는 개구리 왕눈이11기 대표시인으로 호명했다.

개구리 왕눈이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별명 지어주기 조별활동에서 붙여져 11기 카페에서 활동한 선생님의 아이디이다. 첫눈에도 개구리처럼 큰 눈이 인상적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선생님은 우리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꽁지머리에 갸름한 턱선과 단아한 자세에서 나온 반갑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제 외모를 보고 눈치 채셨겠지만...” 가냘픈 목소리에 예쁜 말씨까지. 선생님은 성소수자셨다. 하지만 선생님의 성정체성으로 인해 학교생활과 교우관계에서 그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학우들 사이에 다정하고 온유하며 부드러운 친구, , 동생, 오빠였으며, 인문학 일 년과 졸업 후 일정 기간 동안 문화공간 길 카페에서 성실한 자세로 자활근로를 하셨다.

선생님에겐 성소수자보다 더욱 소수자로 살아오신 삶의 내력이 있다. 주민등록증 없이 대한민국 국민으로 30여 년의 세월을 살아오신 것이다. 고향인 파주에서 기차통학을 하던 학창시절, 어느 날

추위가 가시지 않은 안개 뿌연 새벽, 조그만 지붕 아래 의자 두 개, 역무원 아저씨 한 명뿐인 파주역, 난 첫차를 타고 학교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집 떠나면 개고생 한다더니 진짜 개고생이었다. 인생이 뭔지 사는 건 또 무언지 알지도 못하면서 겁도 없이 저지르고 말았다. 그렇게 허무하게 삼십년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파주역은 없어지고 금촌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들어갔다. 앞이 꽤 넓은 논과 밭은 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돼버렸다. 물론 내가 살던 집도 없었고 동네 형아들도 볼 수가 없었다. 정말 엄마 생각에 한참을 울었다.

 -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11기 카페에 선생님이 쓴 글에서.

도망치듯 고향과 부모님을 떠난 것이 죽을죄도 아닌데 왜 연락까지 끊었을까. 주민등록증이 발급되기도 전 사춘기 시절, 일시적인 충동으로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일이었을 텐데. 6년이 지난 지금, 이젠 물을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문답을 들고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나는 11기 카페에 들어가 1년간 선생님이 올린 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나 (최인호)

내가 온전히 나일 때가 있었나?
나는 나를 미워했고,
나를 원망했으며,
나 자신을 괴롭혀왔다.
스스로 슬퍼했으며
나를 내가 아닌 나로 밀어내려했다.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망가트려가며
보잘것없다고 나 스스로를 손가락질하며...
참으로 참으로 바보처럼 살았다 싶다...
아직도 남은 생이 격렬히 주어진다면
나를, 오직 나만을 위해 살아보고 싶다.
나를 아끼고 내 몸을 조심하며 나를 순수히 사랑하고 싶다.
거울을 하나 사야겠다.
이젠 오직 나만을 위해서.


무엇이 선생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을까. 보잘것없다고 스스로를 손가락질하며 그렇게 철저히 자신을 부정하도록 했을까. 30여 년 동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박탈하면서까지. 하지만 스스로 물은 이 질문에 선생님은 답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이제부터라도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며, 스스로 손가락질하던 자신의 몸을 조심하며 사랑하겠다고 했다. 거울을 하나 사서.

그렇다. 선생님은 바보같이 살아온 30년 자기부정의 세월에 대한 이유를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대신 거울을 하나 사야겠다는 문장에 가슴속 말들을 다 묻은 것이다. 거울. 고백하고,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며 바라본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어땠을까.


물 한 바가지 (최인호)

몸을 씻다 말고 무심코
벽에 붙은 거울에다 물 한 바가지 촤~
거울은 깨끗해지고 나는 흐릿해지고
다시 물 두 바가지 촤~
거울은 더 깨끗해지는데 난 삐뚤어지고
또 한 번 물 세 바가지 촤~
거울은 반들반들 나는 보이지도 않고
실없이 물 한 바가지 내 머리 위로 촤~
정신이 버~언쩍


거울 속 흐릿해지는 내 모습에 물 한 바가지 촤~. 삐뚤어지는 내 모습에 물 두 바가지 촤~. 보이지 않는 내 모습에 물 세 바가지 촤~. 정신 차리라고 머리에 물 네 바가지 촤~.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려는 개구리 왕눈이의 고투가 눈물겨운 시다.

졸업을 하고서도 선생님은 문화공간 길 카페에서 몇 년 더 자활근무를 하셨다. 커피를 내리고 주스를 만들어 접시에 담아 공손히 손님 탁자에 내려놓는 선생님의 자태엔 어떤 기품이 느껴졌다. 그 어느 때보다 카페에서 선생님의 일상은 평안해보였다. 하지만 그건 보이는 겉모습일 뿐. 일과 후 홀로된 저녁엔 외로움과 쓸쓸함이 골목의 어둠처럼 선생님에게 더욱 어둡고 깊게 스며들었다. 그건 우리가 가 닿을 수 없는 고독. 후암동 시장 삼십 촉 흔들리는 백열등 밑 멍 빛 고독항아리에 선생님은 눈물 같은 소주를 매일저녁 털어넣으셨다.

그렇게 6년이 흐른 지난 618일 마 국장님으로부터 문자 한 통이 왔다. “11기 최인호 선생님께서 알코올성 케톤산증으로 사망하셨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이었다. 인문학을 계기로 선생님은 지나온 자기부정의 삶과 마주하셨고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아끼고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온전한 자기사랑이 6년 만에 멈추다니.

그런데 이상했다. 선생님은 자기 안의 또 다른 자신과의 사랑이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걸 운명적으로 예감한 것 같다.

후드득 후드득 빗방울이 플라스틱 창밭이를 때린다.../ 멀리서 들리는 한 같은 상여소리/ 딸랑딸랑: 넘자 넘자 어서 빨리 넘고넘자/ 상여 소리꾼의 앞소리에 뒤를 잇는 어께소리들/ 무에가 그리 좋은지 끝까지 듣고 있던 내 마음과 내 모습/ 망자의 가는 길이 어찌 그리 호사한지 꽂상여가 어여뻐라./ 상여소리 뒤에 듣고픈 진도 씻김굿 소리/ 지전춤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 소리 소리 소리/ 생각도 풍요롭고 귀도 즐거웠다 미치도록.../ 꽃과 같은 상여 속에 먼 길을 가는 가엾은 인생가루.

 - '한밤의 상여소리’ 11기 카페에 선생님이 올린 글에서

온전히 바라본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견딜 수 없도록 사랑스러웠을까.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워 품에 꼭 안은 거울 속 개구리 왕눈이는 모래를 쥔 것 같았을까. 손아귀에서 숭숭 빠져나가는 인생가루’. 그리하여도 이승의 마지막 길에서는 개구리 왕눈이에게 호사한 꽃상여를 태워주고 싶으셨나 보다.

11기 카페에 들어가 살펴본 선생님의 글들에는 유난히 기차역이 많이 나왔다. 10대 학창시절 고향 파주역을 떠나온 이후 마음만은 늘 파주역 언저리를 떠돈 듯. 그 언저리들이 선생님의 글 속에서 이런 저런 기차역으로 표현된 것은 아닐까 싶다. 초겨울 후암동 교사에서 바르르 떨리는 입술로 암송한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는 개구리 왕눈이에겐 파주역에서로 읽혔을 것이다. 카페 글을 읽다가 선생님이 집 생각 날 때마다 듣곤 했던 일본 대중가요 엔카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1972625일 발매된 후지 케이코(藤 圭子)와카레노 타비 (れの, 이별여행).’ 사랑하는 두 남녀의 이별여행을 주제로 한 노래로, 눈 내리는 간이역 기차의 발착을 알리는 기적소리인양 짙은 섹스폰 반주가 퍽 인상적인 곡이다. 선생님은 분명 호사한 꽃상여에 개구리 왕눈이를 태우고 자신이 떠나온 파주역으로 돌아가셨을 거다. 상여소리로 와카레노 타비를 들으며

1)
밤하늘도 어둡고 마음도 어두워요
외로운 손과 손을 포개고 기차를 타요
북녘은 맑을까요, 아니면 비가 올까요
마지막 사랑 여행을 떠나는 두 사람

2)
가리키는 당신, 바라보는 나
창에 흘러가는 마을은 사라져가는 추억
뭔가 이야기해주세요. 이야기해 주면 좋겠어요
함께한 사랑의 시간도 곧 끝나는데

3)
차디찬 바람에 가랑비가 섞이는
새벽 역 플랫폼에 서 있는 두 사람
지금도 사랑해요. 사랑이 있는 이별
그런 여로도 이제 곧 끝나겠지요

4)
종착역 개찰구를 빠져나오고
그 다음엔 타인이 된다고 하죠
2년 동안 고마웠어요. 행복했어요
뒤돌아보지 않고 살아가겠지요
살아가겠지요

 

11기 故 최인호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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