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깃들임에 대하여 (1)
- 행복이란 무엇인가?
김동훈 (성프란시스대학 예술사 교수)
신약성서에는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황당한 주장이 하나 등장한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누가복음 6장 20절). 어떻게 먹고 마실 것을 구할 돈이 없고 편안하게 누워 잠을 청할 수 있는 집이 없거나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보다는 좀 더 완화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3절). 그러면 ‘가난한’ 자와 ‘심령이 가난한’ 자를 같은 뜻으로 해석해야 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고 성서를 읽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물질적으로 해석하든 전적으로 정신적이나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든 가난이 행복의 조건으로 거론되는 것 자체가 잘 이해가 안 된다는 사실이다. 보통의 경우 가난은 언제나 불행의 조건으로 거론되니까 말이다.
다른 한편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는 어디서도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주장한다(마태복음 8장 20절, 누가복음 9장 58절). 그것도 어떤 사람이 와서 어디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노라고 말하는 바로 그 시점에 말이다. 어쨌든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예수의 자기 이해는 노숙인이었다. 이렇듯 성서에 제시된 대로 말하자면 가난은 행복한 상태이고 노숙은 신의 경지에서 겪게 되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언제나 모순의 종교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은 가난을 실제로 추구했던 사람이 있었다. 우리 대학의 이름 성프란시스가 그의 영어식 이름에서 유래한 프란체스코 성인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온갖 짐승들과 대화할 줄 알았고 진실한 기도의 삶을 통해 중세 이후 수도자라면 누구나 받기를 염원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오상(五傷; 십자가에 달렸을 때 못이 박혀 생긴 두 팔과 두 다리의 상처와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로마 군병이 찌른 창 때문에 생긴 옆구리 상처를 이름)을 받은 위대한 성인이었다. 이런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꼭 가져야 한다고 믿는 성서마저도 소유하지 말고 그날그날 묵상할 말씀만을 돌에 새겨 지니고 다니라고 말할 정도로 사적 소유를 부정했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가난을 귀부인(Signora)이라고까지 불렀다.
하지만 오늘날 이른바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이런 삶을 추구할 리가 만무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돈을 벌고 싶어 하고 벌면 벌수록 더 많이 벌고 싶어 한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 대부분은 ―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 집을 사는 데 쓴다. 우리에겐 머리 누일 곳이 가장 중요한 셈이다. 사실 성서에도 앞에서와 같은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잠언에는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장 8-9절)라는 기도의 말이 나온다. 적어도 고통스러울 정도의 가난은 성서에서도 피해야 하는 무엇이다. 심지어 고난을 이겨낸 신실한 사람 욥에게 내린 여호와의 축복 내용은 모두 자손이 많아지고 재물이 풍성해지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욥기 42장 12-17절)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다고 해석되는 이사야서의 한 구절에 따르면 그가 세상에 오는 이유는 가난한 자들을 구하기 위해서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이사야서 61장 1절). 이 예언의 어조를 따르자면 가난한 자들은 마음이 상한, 포로로 갇힌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을 그런 상태에서 해방해 주는 구세주다.
많은 성서 해석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에 인용한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가난도 영적인 가난으로 해석하고 잠언이나 이사야서 등 다른 구절에 나오는 가난은 실제적 가난으로 해석하고는 야고보서의 저자처럼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야고보서 2장 5절)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물질적인 가난은 그 자체로 복이 아니라 그것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 축복이다. 오직 영적인 가난만이 참된 축복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영적인 가난은 무엇일까? 사실 우리는 오늘날 정신적으로 빈곤한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이때 이 말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영적인 가난이 행복한 상태일까?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드는 의문이 한 가지 있다. 행복이란 말 자체는 무슨 뜻을 가질까? 한자 사전을 찾아보니 복(福)의 어원을 제천행사와 관련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복은 음식과 술을 잘 차리고 제사 지내 하늘로부터 복을 받는다고 하여 복을 뜻함.” 음식과 술을 잘 차렸다는 뜻을 지녔다고 해석되는, 복(福) 자의 우측을 구성하는 가득할 복(畐) 자는 부유할 부(富)자에 쓰이기도 한다. 부유할 부자가 집안(宀)에 물건이 가득 차 있는 모양이라는 해석은 따라서 상당히 그럴듯해 보인다. 영문으로 된 중국어 어원 연구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복(畐) 자는 원래 내용물이 가득 차 있는 용기, 항아리나 꽃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 변천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앞서 본 것처럼 복(畐) 자에는 이 뜻만이 아니라 음식과 술을 잘 차렸다는 또 다른 뜻이 담겨 있다. 풍년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풍(豊) 자도 마찬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풍자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풍요롭다, 풍성하다는 뜻도 있지만 가득하다는 뜻도 있을뿐더러 이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예절이나 예도, 예물, 의식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그것은 예절, 예도를 가리키는 한자어 예(禮)가 보일 시(示) 자와 풍(豊) 자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는 고대 제의 행사에서 유래한 글자다. 우선 풍자는 豆(그릇) 위에 음식을 잔뜩 담아 올린 모양으로 풍부(豐富)하다는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콩 두(豆) 자라고 알고 있는 단어는 원래는 뚜껑(一)과 그릇(口)과 발(䒑)로 이루어진, 고기를 담는 식기의 모양을 본뜬 글자였다. 콩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은 후대에 같은 소리로 발음되었던 콩을 가리키는 데 이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일 시(示) 자도 원래는 제물(祭物)을 차려 놓은 제단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제물을 신에게 보여 준다는 뜻을 지녔었다고 한다.
이렇게 글자의 어원을 따져보니 복이라는 말은 제물을 차려 놓은 제단 모양을 가리키는 시(示) 자와 차고 넘친다는 뜻을 지닌 복(畐) 자가 합쳐져서 제사를 잘 지내서 차고 넘칠 정도로 생활이 윤택하고 풍성하게 된 것을 뜻한다. 어떤 이들은 아예 복(畐) 자를 풍(豊)자로 해석해서 제물을 잘 차려내어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낸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복(福)은 예(禮)와 같은 의미를 갖게 된다. 이 경우에는 결과로 얻게 되는 물질이나 명예, 권력 같은 것보다 하늘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할 것이다. 그렇게 엄격하게 복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는다면 복은 하늘에 제사를 잘 지내는 것을, 조상을 잘 섬기는 것을 전제로 하여 얻게 되는 물질적 풍요로움이나 정신적인 평안과 여유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고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대표적 예가 구약성서 시편 1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여기서 ‘복 있는’으로 번역된 영어 단어는 blessed다. 이 영어 단어의 원래 뜻은 ‘거룩하다, 인정을 받았다’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서양에서는 따로 구별을 받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신을 위해 따로 지정해 놓았다는 뜻이다. 라틴어로는 beatus(베아투스), 그리스어로는 μακάριος(마카리오스), 시편이 기록된 언어인 히브리어로는 אשׁר(아슈레이)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모두 거룩하게 따로 구별해 놓았다는 뜻을 지닌다. 그런데 이 단어들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마카리오스는 원래 신들에게만 적용되던 말이었는데 나중에는 신에게 은총을 입은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다. 베아투스에도 신에게 은총을 입었다는 뜻이 담겨 있다. 히브리어에는 영어의 blessed와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단어가 아슈레이말고도 ברך(바라크)라는 단어가 하나 더 있다. 후자가 더 진지한 의미에서 거룩하다 인정을 받았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많은 구절에서 아슈레이도 그 말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시편 1편의 인용구가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다.
이렇듯 복을 가리키는 서양 언어 자체에는 고대 중국어에 담겨 있던,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낸다는 뜻보다는 신에게 은총을 입었다는 뜻이 주로 담겨 있다. 하지만 시편 1편의 내용을 보면 궁극적으로는 여기서도 마찬가지 내용을 가리키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과 정성을 다해,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내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풍성함에 대한 언급이나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라는 구절은 신을 잘 섬긴 데 대한 보답으로 인간이 누리게 되는 물질적 축복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복에 대한 고대인들의 생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를 정리하자면, 고대 중국어에서는 정성스럽게 신을 섬긴다는 의미가, 고대 서양 언어들에서는 신들의 은총을 받는다는 의미가 복을 가리키는 단어 속에 담겨 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양쪽 모두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을 제대로 섬기면, 오늘날의 언어로 조금 바꿔 말하자면 인간의 도리를 다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산다면 그것으로 훌륭한 인간이라는 인정을 받게 되고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뜻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미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신의 은총을 입음으로 인해 얻게 되는 물질적 풍요를 복의 매우 중요한 구성요소로 생각했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사람이 복을 받았다는 구체적인 증거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가 있다고 믿었다. 五福: 一曰壽,二曰富,三曰康寧,四曰攸好德,五曰考終命. 오래 사는 것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부유한 것이며 세 번째는 건강하고 평안한 것이고 네 번째는 덕을 좋아하는 것이며 다섯 번째는 생명의 마지막을 생각해서 잘 죽는 것이다. 우선 장수와 부, 건강과 평안은 물질적인 형태의 복을 뜻하지만, 나머지 둘은 조금 다르다. 우선 생명의 마지막을 생각한다는 말은 언제 죽어도 좋을 만큼 항상 죽음에 대한 준비를 잘하고 있으라, 매일 매일의 삶을 잘 살아가라는 뜻으로 새길 수가 있다. 덕을 좋아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는 복이라고 말하기 어렵지 않으냐고 할 수 있지만 아까 해석한 한자어의 어원에 따르자면 오히려 가장 그 의미에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덕을 좋아하는 사람이 하늘의 인정을 받게 되고 그것이 바로 복이라는 뜻으로 말이다.
그런데 상서(尙書)에 나오는 이 오복과는 다르게 청나라 시대 적호(翟灝)라는 사람이 쓴 『통속편(通俗篇)』에서는 유호덕(攸好德)과 고종명(考終命)을 귀(貴)와 자손중다(子孫衆多)로 바꿔 놓았다. 이제 정신적인 의미의 복은 자취를 감추고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들만이 복의 조건이 되었다. 귀하게 된다는 것은 남보다 지위가 높거나 명예가 높아서 귀하게 여김을 받는다는 뜻이겠고 자손이 많다는 것은 결국 농사를 지을 인력이 많아져서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할 가능성이 커지며, 늙더라도 지켜주고 보살펴줄 이가 많다는 뜻이었을 테니 말이다.
오늘날 우리 상황을 살펴보면 이런 경향이 거의 최고조에 달한 상태처럼 보인다. 어린아이들끼리도 아파트 평수로 자신들 사이의 서열을 정한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오니 말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이 시대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오죽하면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겠는가? 우리는 지옥 같은, 전혀 행복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다시 福, blessed, beatus, μακάριος, אשׁר ,ברך의 원래 의미로 되돌아가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우리의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되짚어 본 행복의 의미가 성서에서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행복한 가난은 거기서 해방되어야 하는 가난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계속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이런 의문들에 대해서는 다음 지면을 통해 계속 이야기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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