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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22호

[인물 인터뷰]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강경진 자원활동가님

by 성프란시스 2024. 5. 17.

글: 이현아

인터뷰어: 이현아

인터뷰이: 강경진(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자원활동가)

 

Q. 선생님, 안녕하세요. 먼저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저는 사회복지사고 우리나라 나이로 쉰 일곱이구요,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았으면 좋겠어서, 공정, 공평한 세상이 되기를 바라고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 활동하고 염원하는 사람입니다.

 

Q.    성프란시스대학과는 어떻게 연을 맺게 되셨나요?

A.    처음엔 아웃리치 활동부터 시작을 했어요. 저는 원래 서울에 살지 않았고 광주광역시에 살았고 주말부부였어요. 남편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애들은 각자 대학을 다니느라고 네 군데 살림을 했는데요, 그러다 남편이 뇌경색 전조증상이 와서 제가 광주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지금은 후유증 없이 잘 마무리가 되었어요. 서울에 막 올라왔을 때가 쉰 다섯살이었는데,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동안 일 잘 한다는 얘기도 듣고 큰 프로젝트도 했었는데 그 때 제 나이가 애매한 나이더라구요. 서울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뽑아주지를 않는 거에요. 정규직으로 나름대로 잘 나갔는데 여기 와서 그게 안 되니까 저는 고립이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실업급여는 받고 있지만 고립된 거에요. 느낌이 그랬어요.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직장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낮 시간에 저 혼자 있어야 되는 거죠. 그 고립이 그 외로움이 표현하기 어려운데 그런 것 때문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길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노원에 사는데 노원구 복지관에서부터 자원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러다 너무 한 동네에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제일 번화가가 어딘지 보자, 했더니 제가 아는 곳이 서울역밖에 없는 거죠. 서울시 사회복지사협회 사이트를 보면 구인구직 사이트가 있어요. 거기를 쭉 보다가 여기 희망지원센터에서 아웃리치 활동가 공고를 본 거에요. 그때가 2022 11월이었는데 혹한기 상담을 집중적으로 해야 하는 기간이 1115일부터 315일 정도까지거든요. 제가 그걸 시작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이제 같이 아웃리치 하는 활동가 중에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자원활동을 하고 계신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저한테 우리 문집 <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를 읽어보라고 주셨어요. 제가 그걸 읽고 정말 충격을 받았어요. 참 부끄러웠던 게 저는 사회복지사이면서도 저도 모르는 편견이 분명히 있었다고 자백해요 제가. 이런 글들이 나온다는 것을 보고 그동안 제가 참 편협한 시각으로 사람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저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Q. 문집을 보시면서 어떤 점이 가장 놀라우셨어요?

A. 문집을 보면 초등학생이 쓴 것 같은 천진난만한 글부터 말 그대로 그 어떤 사람보다 철학적인 글까지 다 있는데요, 특히 권OO 선생님의 시를 보고 너무 놀란 거에요. 그분의 글은 지금 제 생각에 책으로 내서 세상 사람들이 다 봤으면 좋겠다 싶은 그런 글이었어요. 문집 첫 페이진가 두 번째 장에 그 선생님의 시가 있어요. 그 시를 보면서 저는 생존이라는 게 뭔지, 인간 존엄이라는 게 뭔지 생각을 하게 되고 머리를 꽝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그분의 시로 제가 정말 많이 깨졌어요. 저는 그 분의 글로 보는 세상이 조금 더 넓어지고 깊어 졌어요. 산다는 게 뭔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뭘까 그런 고민을 하게 된 글이었어요.

 

Q. 사회복지사 일은 얼마나 오래 하셨나요?

A. 2009년도부터 사회복지사를 했어요. 처음에는 사회복지사가 아니었어요.

 

Q. 그럼 그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 하나만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A. 저는 섬유공장의 노동자였어요. 제가 사번이 자그마치 84번이에요. 40년차 노동자에요.

 

Q. 사회복지사로서 일해야 겠다고 생각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실까요?

A. 소수와 약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 속에 제가 있었고 제가 그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조금 더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는 걸 저는 어린 시절부터 느꼈거든요. 저는 전남 구례의 가난한 농부의 딸인데 자그마치 딸 여섯이 쭈루룩 있고 막내가 아들인 집의 넷째 딸이에요. 그러면 셋째 넷째 다섯째 이런 애들은 사실 존재감이 없는 애들이에요. 밥상에 하나 없어도 모를 만큼 미미해요. 그렇다고 저희 부모님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하루에 20시간 일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본인이 새벽 4시쯤 일어나서 자기 땅에 일을 하고, 7시쯤 품팔이를 하러 가고 저녁 6시에 자기 땅으로 퇴근을 해요. 그럼 이제 달빛 아래서 일을 하고 9시쯤 집에 들어오는. 그렇게 해서 우리를 먹여 살리는 사람이었어요.

제가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산업체 야간학교로 고등학교를 가면서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거든요. 중학교 다닐 때에도 철 모르는 그 시절에도 등록금 고지서를 아빠한테 가져다 주기가 미안했는데 이제 고등학교에 가서 내가 돈을 벌면서 정말 편하고 좋은 거에요. 사람들이 그 시절이 힘들지 않았느냐 물어봐요. 저는 몸은 힘들었는데 마음은 편했어요. 물론 부당함도 있고 노동의 강도는 세고 돈은 적고 그랬지만. 마음은 좀 편했어요. 내 부모님이 나로 인해서 고생을 하는 구나 이런 생각은 덜 수 있었어요.

 

Q. 공장에서 경험하신 노동은 어땠나요?

A. 3교대로 일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어떤 날은 16시간 일을 할 때도 있어요. 그리고 공장에 기숙사가 있는데 기숙사가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도 교도소에 한 사람 0.5평 이렇게 된다고 하잖아요. 우리는 그것보다 더 적은 평수였던 걸로 기억을 해요. 정말 열 명이 한 방에 사는데 다섯 명이 담요 반장씩을 쭉쭉쭉 깔고 누우면 밤에 자다가 화장실을 가야 되는데 행여나 발이나 머리를 밟을 까봐 발을 떼지 못하는 그런 상태로 살았어요. 그렇지만 나는 그게 꿈을 꿀 수 있는 공간이어서 괜찮았어요. 견딜 수 있었어요. 저는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해요. 사람이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 있어도 꿈이 있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면 견딜 수 있고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때도 그랬어요. 그러니까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Q. 그 당시 선생님의 목표는 대학에 가는 것이었나요?

A. 그거였어요. 그런데 이제 그 고등학교는 학교라고 하면 좀 미안해요. 노동자들을 공장에 잡아두기 위한 학교였어요. 고등학교 졸업장을 딸 수 있다는 달콤함으로 노동자들을 3년은 잡아두기 위한 그런 데에요.

 

Q. 학교에서 대학 입시를 위한 체계적인 교육은 없었겠네요.

A. 공장에 잔업이 있으면 학교를 안 가도 출석이 인정이 되고. 회사에 일이 있으면 학교에 전화를 하면 되고. 그래서 학교는 섬유회사를 포장할 수 있는 큰 홍보 수단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입시공부를 시켜주지 않으니까 혼자 공부를 해야 하는데 재밌었어요 나름. 학교가 하루에 4시간 정도 수업을 하는데 국어, 수학, 국사, 음악, 미술이 있어요. 근데 보통 인문계 고등학교는 수업 차시가 국어 수학 영어가 일주일에 최소한 4시간 이상 있잖아요. 근데 우리는 일주일에 1-2번 있는 거고. 그나마도 40분 수업 그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교과서를 받았는데 국어를 끝까지 다 못 배워요. 1-4과 배우면 나머지 5-8과까지는 못 배우는 거죠. 지금은 이런 방법 저런 방법 해서 대학에 가는 방법이 많은데 그때는 학력고사를 봐서 가는 방법밖에 없었거든요. 딱 한 학교만 선 지원해서 시험을 보는 건데 전기대에 떨어지면 후기대 시험을 보는 거에요. 저는 전기대에 붙었어요.

 

Q. 와아 (박수)

A. 지금도 저는 그 때가. 그 때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생각이 나요.

 

Q. 대학에 합격하셨을 때 아버지께서 많이 기뻐하셨나요?

A. 기뻐하셨는데.. 내가 너한테 지은 죄가 너무 많다 하시면서 제 앞에서 우셨어요. 저희 아버지가 참 멋진 사람이었어요. 집은 가난했는데 항상 집에 책이 있었고 우리 아버지도 책을 보는 사람이었고 저 어릴 때 우리 아버지는 <사서삼경>을 읽은 그런 분이셨어요. 겨울에 농사 준비를 하느라고 새끼를 꼬고 있는데 그 옆에 제가 앉아있으면 아버지가 항상 이야기식으로 우리한테 <사자소학>, <격몽요결> 이런 것들을 말로 풀어서 이야기처럼 들려주셨어요. <삼강행실>, <내훈> 이야기도 해주셨는데 <내훈>에는 지금은 우리 변해 버린 세대에 맞지 않는 그런 글들도 있거든요. 여자들이 지켜야 할 도리 이런 것들. 이런 것들을 말씀해주실 땐 아버지가 이건 듣기만 하고 기억 안 해도 돼이런 말도 해주셨어요.

 

Q. 깨어 있으신 분이셨네요.

A. 저는 그래서 대학 합격증을 보여드렸을 때 아버지가 제 앞에서 우셨던 장면, 아버지는 저에게  항상 그걸로 기억이 돼요.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버지가 굉장히 기뻐하셨어요. “시작을 해보자. 시작을 하면 끝이 난다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해보자고. 그리고 저한테 참 고마워하셨어요. 아버지가 항상 저를 생각할 때면 어찌 하() 어찌 하() 자를 쓰면서 저거를 공장에 두면 안 되는데 어떡하나 생각 하셨대요. 그러면서도 위 아래 자식들이 우르르르르 있으니까 저한테 어떤 계획이나 짬을 낼 여유가 없으셨는데 저 혼자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던 거에 아버지가 굉장히 고마워하신 거죠. 그리고 아버지가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러지 않으셨어요. 공부해서 너보다 못한 사람들도 돌아보고 그런 사람들도 너처럼 할 수 있게 해줘야 된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세상은 원래 공정하지 않아. 공평하지 않아. 근데 배운 사람들은 진짜 배운 사람들은 그런 세상을 공평해지도록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랬어요. 우리 아버지 그 말씀이 저를 사회복지사로 만든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첫 번째 스승은 우리 아버지에요.

 

Q.    선생님 대학 생활은 광주에서 하셨나요?

A.    . 88년도부터. 공부를 했는데 깊이 있는 공부는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어떤 거냐면 항상 등록금이 무서워서 장학금을 받아야 되니까 교수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시험 문제가 뭐가 나올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느라고. 깊이 있는 공부를 못했어요. 성적을 위한 공부를 했었고. 그래서 아쉬움이 있었고. 그랬어요. 제가 대학원도 했거든요. 쉰 살이 넘어서. 우리 애들 웬만큼 키워놓고 나서 대학원을 했는데 그때는 그래도 공부를 재밌게 했어요. 그래도 거기서도 장학금을 받고 싶어서 나름 교수님의 성향을 파악해가면서 공부하는 거는 습관처럼 돼있었어요. 그런데 성프란시스대학을 왔는데 여기는 성적도 필요 없지요 돈도 안 내죠. 정말 좋은 거에요. 그리고 글쓰기 수업을 하고 한국사 공부도 하고 문학 예술사 철학 공부를 하는데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곳이어서 좋았어요. 저는 수업을 마치면 1시간 정도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데 그 시간이 정말 좋은 시간이에요. 수업을 예습하고 복습도 하는 시간이에요. 그날 수업을 다시 생각해보고 또 떠올려보고. 교수님이 언급했던 작가, 책 이런 거를 사서 보기도 하고 빌려 보기도 하고. 제가 정말 인문학을 하고 있다는 걸 성프란시스대학에서 느꼈어요.

Q. 성프란시스대학은 선생님께 진짜 배움을 준 곳이군요.

A. 작년에 졸업 여행을 가서 각자 소감을 나누는데 저는 울기부터 했어요. 이렇게 좋은 과정을 내가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게 기쁘고 좋았어요. 그리고 그냥 세상에 모든 사람을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고 성프란시스대학은 그런 눈을 나에게 줬고 그런 눈이 생긴 거에요. 그 전의 나는 사회복지사로 소수와 약자를 위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 이면에 편견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거든요. 그런데 인문학을 하면서 알게 됐어요. 더 확실히 알게 된 거에요.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 그리고 노숙인이라고 사람들이 말을 하는데 그 말 속에 얼마나 많은 편견이 있으며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노숙인을 대하는지. 제가 남편한테도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느낌으로 일을 하는지를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이 무슨 일을 하는지 말을 해요. 그런데 제가 29년을 같이 살고 이렇게 말을 하는데도 저희 남편에게는 아직도 편견이 있었어요. 그래서 작년에 한 번은 남편을 데리고 온 적이 있어요. 글쓰기 수업이었는데 남편이 많이 놀랐어요. 일부러는 아니었고 지방 출장을 갔다가 서울역으로 올라온 남편을 우연히 글쓰기 수업에 초대해서 같이 수업했어요. 그날 이후로 우리 남편이 저에게 인문학 그만 둬라 어째라 이런 말을 안 해요. 그 전에는 우리 남편도 노숙인에 대한 생각이 있었겠죠. 아웃리치를 하게 되고 인문학교실을 한다고 했을 때 좀 불안한 마음이 있었나 봐요. 그리고 제가 고립되어 있는 느낌 때문에 힘들어 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자기가 해결해줄 방법은 없으니까 자원활동 하는 것을 지켜봐주고는 있었지만 내심 불안해하는 게 있어서 저한테 이제 좀 그만 두면 안될까 이런 말들을 했었거든요. 근데 같이 수업을 하고 나서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제가 같이 할래? 이런 말을 하면 바빠서 못 온다고 그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 편견이 있는 사람들을 한번 데리고 와서 같이 수업을 하면 많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을 해요. 제가 스물 일곱 먹고 스물 여덟 먹은 아들도 있고 딸도 있는데 할 수 있으면 우리 20기 선생님들이 그걸 받아주실 지 모르겠지만 저는 할 수 있으면 우리 애들도 시간이 되면 한번 참석을 했으면 좋겠어요.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더 달라질 것 같단 생각을 해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같이 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노숙인을 대하는 태도가 좀 달라지고 생각이 많이 변할 것 같단 생각을 해요.

그리고 19기 처음 입학식 하던 날 제가 그때도 회사 반차를 내고 왔는데 그때 우리 19기 선생님들은 쭈삣쭈삣하고 이렇게 약간 주눅 들어있는 눈치보는 모습이 있었거든요. 그런 선생님들한테 저도 처음엔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서 어려웠는데 먼저 이렇게 안녕하세요, 말하고 제 이름 말하고, 같이 쭈삣쭈삣하면서 만났어요. 지금은 이렇게 만나면 포옹도 하고 토닥토닥도 해요. 얼마전에 19기 졸업생 중에 이천 하이닉스에 취업해서 가시는 선생님도 계셨어요. 같이 모여서 밥 먹고 웃고 떠들고 그랬는데, 제가 “OO쌤 거기서 누가 괴롭히거나 못 살게 구는 사람 있으면 전화해. 엄마가 왔다 하고 때려줄게그랬거든요. 그랬더니 다른 19기 선생님이 나도 가서 삼촌이 왔다, 해줄게그러는 거에요. 그러면서 서로 이렇게 관계를 맺어간다는 거 그게 참 좋았어요.

 

Q. 앞으로 노숙인 문제 혹은 성프란시스대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신가요?

A. 성프란시스대학을 졸업하고 가시는 선생님들이 저한테 가끔 연락을 하시는 경우가 있어요. 저한테 엄마같아서 얘기하는 거에요하면서 외로움을 얘기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면 이분들이 사회에 잘 적응을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되는데 우리 성프란시스대학이 조금 더 넓은 자리에. 공부하는 자리만 아니고 조금 더 괜찮은 공간이 생겨서 졸업생들이 언제나 와서 차도 마시고 얘기도 하고 책도 읽고. 탁구대로 하나 있어서 신체 활동도 해보고 그럴 수 있는 정말 좋은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솔직히 지금 공간이 진료소 한 공간을 빌려서 쓰는 거라서 눈치보일 때도 있고 그렇거든요. 진료소에서 근무하시는 선생님들도 우리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실 거에요. 그래서 좀 더 독립된 공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요.

노숙인 문제에 대해서는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나라 사회복지 정책이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지만 보편적 복지로 변해가면 좋겠는데, 지금은 내가 얼마나 가난한지 얼마나 비참한지 불행한지를 다 증명을 해야 사회복지 지원을 받을 수 있어요. 그거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선별적 복지는 그 복지 지원을 받기 위해서 내가 인간 답지 못하게 내가 얼마나 불행한지를,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자랑을 해야 하잖아요. 저는 이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보편적인 복지가 되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는 거잖아요.

 

Q.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제가 생각하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공부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적어도 안전사고로 일하다가 죽지 않고, 8시간 땀 흘려 일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세 끼 밥은 걱정하지 않고 적어도 혼자라면 10평정도의 공간을 누릴 수 있는 사회에요. 장애인이나 노인 등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회적 약자라도 최소한의 공간을 보장 받고 취미 생활을 할 수 있고 이동의 제약을 덜 받은 세상이 되면 좋겠어요.

 

Q. 선생님, 요즘도 하고 싶으신 일이나 꿈이 있으신가요?

A. 지금이 제 화양연화에요. 이렇게 좋은 시절이 없어요 정말. 그게 뭐냐면 인생에서 한 챕터가 끝난 게 올해 320일인 거 같아요. 작은 애가 대학 졸업을 했거든요. 그래서 큰 애 작은 애 둘 다 학교를 졸업을 했어요. 부모로서 기본적인 거 물론 많이 부족했지만, 기본은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맘이 편해졌어요. 그래서 지금이 제 인생에 다시 못 올 화양 연화가 시작된 거에요. 저는 다시 20대로 돌아가겠냐 하면 안 갈 거에요. 물론 그 젊음이 좋지만 저는 지금이 좋거든요. 그래서 제 꿈은 조금 더 여유가 된다면 고향에 가서 살고 싶어요. 자연인처럼은 아니어도 조그만한 텃밭이 있고 거기서 남편하고 책도 읽고 쓰고 싶으면 남편은 글도 쓰라고 하고 그렇게 사는 거. 그렇게 살다가 지금 제가 노인 복지 쪽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자기 발로 걸어다니고 먹을 수 있고 할 때까지는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있거든요. 어떤 거냐면 노인 복지 쪽에서 일을 하다가 어떤 할머니 한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500ml보다  2L 물이 더 싼데도 언제부턴가 이 할머니께서 2L를 못 사고 500ml를 사시더라고요. 2L짜리를 들 수가 없어서 비싸지만  500ml 짜리를 사서 마실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된 거죠. 지금은 아니지만 저도 할머니처럼 그런 순간이 오지 않을까. 그럴 때가 올 것 같으면 그정도의 힘이 없어진 노인이 시골에 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서 시골에 살더라도 다시 노오오오년이 되면 도시로 나와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남편하고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다가. 500ml 짜리 물병을 들 수밖에 없는 때가 되면 도시로 다시 나와서 생을 마감하면 어떨까. 그런 정도. 그리고 요즘 영어를 다시 하고 있어요.

 

Q. 영어공부는 어떤 방법으로 하고 계세요?

A. 혼자서 나름 대로 인터넷에서 보고 유튜브도 있고. 요즘은 정말 좋은 게 많아요. 하루에 30분 이상은 영어 공부를 하는 중인데 오늘은 <해외여행 가서 밥 먹듯이 쓰는 패턴 영어>에서 I’d like to를 배웠어요.

 

인터뷰를 통해 만난 강경진 선생님은 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나 혼자만 꿈을 이루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꿈을 꾸고 이룰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분이셨습니다. 성프란시스대학에 와서 진정으로 살아있는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시는 분들을 여럿 만났지만 강경진 선생님은 특히 당신은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나요라는 질문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시는 듯합니다.

인터뷰에 응해 주신 강경진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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