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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창간호

밥은 비통한 것이다

by 성프란시스 2020. 6. 30.

박 경 장 (글쓰기 교수, 문학평론가)

 

 

빗물 그 바아압

                                                                                                                                                                    권 일 혁

 

장대비 속에 긴 배식줄

빗물 바아압

빗물 구우욱

비이무울~ 기이임치이~

물에 빠진 생쥐새끼라 했던가

물에 빠져도 먹어야 산다

이 순간만큼은

왜 사는지도 호강이다

왜 먹는지도 사치다

인간도 네 발 짐승도 없다

생쥐도 없다

오직 생명뿐이다

그의 지시대로 행위할 뿐

사느냐 죽느냐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오로지 먹는 것

쑤셔 넣는 것

빗물 반 음식 반 그냥 부어 넣는 것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글쓰기 교수로 부임한 2008년 첫해, 4기로 입학한 권일혁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센터 실무자 사이에서 이미 유명한 분이셨다. 입학지원서 마감일 날, 술로 떡이 된 채 센터로 찾아와 “나 인문학 하고 싶다”고 해, 실무자가 구두진술을 받아 지원서를 냈다는 권 선생님. “인문학? 다른 분은 몰라도 권 샘은 안 될걸요” 센터 실무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고 했다.

 

얼굴의 짙은 흉터로 선생님은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외모도 외모지만 선생을 더욱 눈에 띄게 하는 건 그의 달변이다. 5기 입학식에서 권 샘의 졸업생 축사를 들은 삼성의 한 임원이 삼성직원연수의 그 어느 프로강사보다 쉽고, 재밌고, 흡입력 있다고 놀라워했다. 선생의 달변 뒤에는 수십 년 동안 책, 옛날 돈, 골동품 등을 팔아온 외판원 경력이 있었다. 얼굴 흉터는 옛날 돈 가방을 날치기하려는 강도에게 흉기로 맞은 것이라고 했다.

 

수업 중에도 "에~" 가래 끓는 듯한 소리를 쉬지 않고 내는 통에 얼굴을 찌푸리는 동기생도 더러 있었다. 그 때문에 고시원에서도 쫓겨난 선생은 피시방이나 만화방을 전전하며 지냈다.

“교수님,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습니까?” “그냥, 많이 쓰세요.” 내가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이 말을 선생님은 금과옥조처럼 가슴에 새기고 피시방에서 밤을 새며 글을 써댔다. 인문학과정 한 해 내내, 그리고 졸업 후 12년 동안 그가 쓴 시가 어림잡아 1500여 편. 오늘도 피시방에서 선생님은 매일 두, 세편씩 자판을 두들긴다.

 

<빗물 그 바아압>은 선생님이 피시방에서 밤을 새며 두들겨 댄 1500시편 중 하나다. 비 오는 날 거리배식 풍경을 묘사한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난데없는 ‘찌름’의 통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정지한 사진에서 화살처럼 튀어나와 가슴을 찌르고 상처 입히며 마술처럼 사로잡는 어떤 강력한 힘, 롤랑 바르트가 ‘푼크툼(punctum)’이라 명명한 ‘찌름’ 말이다. ‘밥’, ‘국’, ‘김치’가 ‘바아압’, ‘구우욱’, ‘기이임치이’로 빗물에 불리더니, ‘먹는 것’, ‘쑤셔 넣는 것’, ‘부어 넣는 것’으로 평면을 튀어나와 화살처럼 박히는 ‘찌름.’ 다시 읽는데 살아나는 통증이 아직도 얼얼하다.

 

2008년 9월 초순이었다. 수업 중 밑도 끝도 없이 권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님, 명색이 대학인데 왜 우리 학교는 스승의 날이 없나요. 전 지금부터 9월 4일을 성프란시스 스승의 날로 정했으면 합니다. 감사의 날, 감을 네 개 사서 스승에게 드리는 날. 9월 4일.” 그 일이 있은 지 꼭 일 년이 지난 화요일 저녁, 수업 들어가려는데 권 선생님이 서울역 학교 계단 입구에 앉아계셨다. “아니, 권 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교수님, 오늘이 9월 4일 감 네 개 스승에게 드리는 스승의 날 아닙니까. 수업 끝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수업 마친 후, 두 시간 동안 층계참에 앉아 기다리던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근처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제가 오늘 자활 월급 탔답니다. 사장님! 여기 맥주 오백 두 잔 하고, 치킨 한 마리요.” 주문하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주변 사람들이 모두 우릴 쳐다봤다. “지금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 교수님은 상상조차 못할 겁니다. 이곳은 제가 아무리 돈을 보여주고, 나도 돈이 있다고 들어와 맥주 한 잔 하려 해도 문전박대 당했던 곳이에요. 그런데 교수님과 이렇게 당당하게 들어와 내 돈 내고 주문을 하다니...”

 

그날 나는 맥주 반, 눈물 반 그냥 부어 넣었다. 치킨 반 쑤셔 넣었다.

 

(* 성프란시스대학에서 13년째 글쓰기를 강의하고 계신 박경장 교수님의 칼럼 ‘역전칼럼’은 서울역 앞의 거리 선생님들이라는 뜻과 인생역전이라는 뜻을 함께 담아 교수님께서 칼럼명을 직접 지어 주셨습니다. 앞으로 계속 선생님들의 글에 담긴 의미들을 풀어 설명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EBS 시민의 탄생 4부 당신은 누구세요? 인터뷰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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