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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18호

[인물 인터뷰] 우리 천천히 함께 가요, 성프란시스 학무국장 문민수

by 성프란시스 2023. 9. 12.

/성지후

인터뷰어/성지후, 박석일

인터뷰이/문민수  (성프란시스 인문대학 학무국장)

 

오늘 소개 할 인터뷰이는 성프란시스대학 학무국장 문민수 사회복지사님 입니다. 세상이 나눈 쓸모와 쓸모없음에서 쓸모없는 것들로 분류된 편에 서는 사람 문민수 국장님... 걸쭉한 막걸리가 생각나게 하는 그의 말과 웃음과 이야기를 담아 보았습니다.

 

Q :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A : 저는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 실무 전반을 담당하고 있는 학무국장 문민수입니다.

 

Q : 이전 기수 학무국장을 하셨던 적이 있나요?

A : 아니요. 인문학 담당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전에는 센터에서 임시주거상담과 노숙인 복지 관련 여러 일을 했어요.

 

Q : 다시서기센터에서 노숙인 임시주거를 담당하셨군요. 입사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A : 2010년도 입사니까 13년 됐네요. 다른 사람들이 좀 하겠다고 했으면 제가 인문학을 안 맡았을 텐데 말이죠.

 

Q : 센터 사회복지사분들이 인문학 학무국장직을 꺼려한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이 특히 힘드신가요?

A : 인문학은 이젓저것 사소하게 챙길게 많아요. 학생 선생님들을 비롯해 교수진과 자원활동가까지 사람 관리도 해야 하고요. 또 수업이 저녁시간이다 보니 일상이 거꾸로 되어 버리니까 그 부분도 힘들어 하죠.

 

Q : 최대 오래하신 분이 몇 년을 하신 건가요?

A : 3년 간 인문학을 맡은 실무자가 있어요.

 

Q : 2년을 넘기기가 힘든 거 같은데 각오가 어떠세요?

A : 사실 처음 저한테 왔던 제의가 아니었어요. 근데 다른 직원들이 전부 못 한다고 손사래를 치니 어쩔수 없이 '정 할 사람이 없으면 내가 하겠다'고 했어요.

 

Q : 자의로 하신 거네요?

A : . 자의로 한 거예요. 힘들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못할 건 없으니까요. 인문학을 통해 선생님들과 더 밀접한 관계도 맺고 재미도 있겠다 싶었어요제가 정년퇴직이 5년 남았는데 신부님(다시서기센터장 여재훈 신부님)께서 '간 김에 정년퇴직도 거기서 해라' 그러시더라고요.

 

Q : 그럴 생각이세요?

A : 못할 건 없죠.

 

Q : '재미도 있겠다'라고 하셨는데 어떤 재미를 상상하셨나요?

A : 1년의 인문학 과정은 재미가 없으면 못 버터요. 공부도 수업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재미있게 노는 거지요. 이번 19기 선생님들께 제일 먼저 제가 한 말도 '우리 1년간 재미있게 놀아보자' 였어요. 학무국장으로서 저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Q : 한 학기를 마무리 해놓고 보니 어떠세요? 재미있었나요?

A : . 재밌있었어요. 나이가 있다보니 체력이 좀 안 따라줘서 그렇지 일은 재밌어요.


Q : 재미있다는 말이 참 좋네요. 기억에 남는 재미난 일이 있나요?

A : 옥상에서 박스 깔고 쭉 둘러앉아 삼겹살 파티할 때 선생님들이 너무 좋아하셔서 재미있고 기분도 좋았어요.

 

Q : 맞아요. 참 좋아보였어요. 그럼에도 힘든 부분도 있었을 텐데요?

A : 선생님들 챙기는 건 별로 힘들지 않아요. 다들 알아서 잘 하시고 재미있게 노시니끼요. 다만 아까 말한 것처럼 챙겨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이 힘든 부분이죠. 제가 사소하게 챙기는 것을 잘 못하거든요저는 인문학은 학생, 교수진, 자원활동가 라는 세 축으로 굴러간다고 생각하는데 이 세 축을 조율하는게 가장 힘든 부분이예요.

Q : 힘든 부분을 돌파하는 방법이나 그 시기를 버티는 원동력이 있나요?

A : 원동력은 우리 선생님들이죠. 제가 19기 자랑을 좀 하자면 역대급 출석률 이런 게 아니예요. 선생님들이 굉장히 많이 바뀌었어요.


Q : 한 학기만에 벌써 그걸 느끼세요?

A :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영ㅇ선생님이 동료들과 친해지려고 먼저 다가가는 모습, 소극적이었던 성ㅇ선생님의 적극적인 모습을 볼 때도 느끼죠. 재ㅇ선생님은 새로운 일에 도전하겠다고 배달일을 시작했고 상ㅇ선생님은 장애인 활동지원사 공부를 시작했어요.

Q : 좋은 소식이 많네요.

A : 나머지 선생님들도 대부분 일자리 서비스에 참여하고 있고 졸업 후 방향을 같이 고민하고 있고요.

 

Q : 성ㅇ선생님 벌금 문제도 해결하셨잖아요? 어떻게 된 일이었죠?

A : 성ㅇ선생님이 과거에 미납한 벌금 250만원이 있었나봐요. 얼마 전 수업 마치고 집에 돌아가니 집 앞에 사람들이 벌금 받으러 와 있다고 전화가 왔어요. 인문학 운영위원회 의견에 따라 우선 후원금으로 벌금을 내고 매달 조금씩 갚도록 했죠근데 벌써 전전 달 100만원, 지난 달 100만원을 갚고 이제 50 만원 남았어요. 금방 갚아 버리시더라고요.


Q : 한 학기 동안에도 많은 일이 있었네요. 표면적으로는 같이 재밌게 놀자! 이지만 안으로는 중요한 임무가 많은 자리인 거 같습니다. 선생님들께는 어떤 학무국장이 되고 싶으세요?

A : 소몰이 할 때 이리야~이리야는 가라는 거고 워~~하면 서라는 거잖아요? 저는 선생님들께 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다들 선생님들께 빨리 가라고 하니가...천천히 가도 충분하다고 어차피 늦었으니 천천히 가자고 말해요. 자꾸 빨리 일어나라! 이거 해라! 이러면 어디 스트레스 받아서 살겠어요? 넘어져 있다가 일어나서 뛰려고 하면 되겠어요? 다시 넘어지죠. 거북이도 천천히 걸어 결국 완주 하잖아요. '제발 좀 빨리 가지 마. 재밌게 놀아도 괜찮아' 라고 하죠. 천천히 가면서 주변도 돌아보는 인문학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Q : 다들 어서 뛰라는 세상에서 국장님 말이 선생님들께 굉장한 위로가 될 것 같아요. 국장님 개인적인 삶에도 조급함이 없나요?

A : 저도 사실 누가 결석하면 막 심장이 뛰고 불안하고 조급해지죠. 다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 하죠.

 

Q : 다시서기 입사하기 전에는 다른 시설 사회복지사로 일하신 건가요?

A : 사회복지사 자격증은 다시서기에 온 이 후에 땄어요. 신부님이 자격증 하나만 꼭 따라고 하셔서 늦게 땄죠.

 

Q : 그럼 다시서기에는 어떤 인연으로 오시게 된건가요?

A: 수원 다시서기센터 1년 정도 일을 하다 사람 만나는 일이 지쳐 잠시 쉬고 있을 때, 서울 다시서기 실장님의 입사 제의를 받고 오게 되었죠.


Q : 그 뒤로 13년이 흘렀네요.

A : . 오래 있었죠.

 

Q : 수원 다시서기 전에는 어떤 삶을 사셨는지 궁금합니다.

A : 제가 20대 때는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우리 선생님들하고 거의 비슷한 생활을 했어요. 2010년간 경제활동을 한 기간이 한 2년 정도밖에 안됐으니까요.

 

Q : 노숙생활을 하셨다는 뜻인가요?

A : 주거지는 있었지만 2년의 경제활동 기간 빼곤 허구헌날 싸움박질 하러 다녔죠.

Q : 방황의 시간이었나요?

A : 그건 아니고요. 직장 다닐 때 노동운동을 하다 해고가 됐어요.

 

Q : 노동 운동을 한 괘씸죄로 해고가 되신 거군요. 복직하시려고 계속 이어 나가신 거구요?

A : . 8년간 일을 못하니 주변 형, 누나, 친구들이 제 생계를 책임지다시피 했죠.

 

Q: 복직은 되었나요?

A: 고등 법원까지 가서 승소 판결을 받아 복직은 했는데 편히 다닐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만 두고 전국 농협노조 채용 상근자로 취업했어요. 거기서 30대 중반까지 한 5년 일했어요.

Q : 노동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A : 아무 것도 없는 집안에서 자라, 고등학교 졸업하고 먹고 살려고 고향 군산에서 수원으로 올라와 공장에 취업했어요. 일을 하다 보니 회사의 부조리함도 보이고, 한참 노동 운동을 많이 하던 90년대 였기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된거죠.

 

Q : 두렵지 않으셨어요? 해고되면 밥벌이가 없는데 이 운동을 계속하는 게 맞는 건지가? ... 내 밥그릇 잘 챙기는게 맞지 않을까? 같은 생각이 많이 들었을 거 같아요.

A : 두렵지는 않았어요. 아까 말씀드린 8년 간 저를 먹여 살려 준 주변 사람들도 있었고요. 20대인데 뭐가 두려워요? 다만 속에 불덩이를 품고 계속 싸워야 하는 점이 힘들었죠.

 

Q : 생계를 도와주신 분들은 함께 노동 운동을 하신 분들인가요?

A : . 지금도 가끔 만나는데 만나면 제가 항상 하는 얘기가 있어요. '언젠가는 그 빚을 갚겠다. 하지만 당신들한테는 아니다. 마음 한곳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이 빚을 다른 사람들한테 꼭 갚겠다' 그러죠.

 

 

Q : 그 말씀이 이미 조금씩 이뤄지고 있는거 같아요. 사회복지사로서 베푸는 입장에 계시잖아요.

A : 그래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 같긴 해요. 사회복지 쪽으로 오게 된 계기도 그 때의 경력과 이어지는 거고요

Q : 사회복지사는 적성에 맞으세요?

A : . 처음 수원 다시서기 센터에서 일을 시작할 때는 의욕이 앞서다 보니 선생님들께 기대가 너무 많았어요. 그러니 당연히 실망도 컸죠. 자꾸 실망하다 보니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서울역으로 오면서는 큰 기대하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선생님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하지 내 뜻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Q : , 인문학 대학을 통해 또 한 분과 좋은 인연을 맺으셨잖아요? 예전에 활동하셨던 자원활동가와 결혼하셨다고 들었어요.

A : 센터에서 임시주거 상담을 할 때 였는데 인문학 대학 수련회를 갈 때면 신부님이 꼭 저를 데리고 가셨어요. 그래서 열심히 쫒아다녔는데 어느 날 신부님께서 '잘 찾아봐요' 그러시더라고요.

 

Q : 신부님은 다 계획이 있었던 거네요.

A : 그래서 제가 '뭐가요?' 그랬더니 '가보면 알아요' 그러세요. 도착해서 지금 와이프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게 되고 그러다 만나게 되었고 결혼도 했네요. 저는 결혼 못할 줄 알았거든요.


Q : 왜 못하실 줄 아셨어요?

A : 가진 것 없이 제대로 못 갖추고 살다 보니 이성한테 선뜻 다가가기가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잘 만나서 늦게 결혼을 했어요.


Q : 결혼하니 어떤 점이 좋으세요?

A : 47년을 혼자 살다 누군가와 맞춰 가려니 힘든 부분도 있지만 서로 많이 아껴주니까 그런 점이 좋아요. 결혼한 지도 벌써 8년이네요.


Q : 임시주거 상담은 거리에 계시는 분들에게 임시로 거처할 곳을 만들어주는 일을 말하는 거죠?

A : . 맞아요. 지금은 의미가 좀 다르지만 당시의  임시주거의 목적은 주소지를 만들기 위함이예요. 우리나라 기초수급 신청자격은 거주지가 있어야 가능하거든요. 주소가 없으면 수급신청할 관할 주민센터가 없는 거니까요. 한마디로 임시주거는 수급신청을 위한 도구인 셈이죠.  

 

Q : ~ 임시주거지로 주소를 정하고 관할 주민센터에 수급 신청 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네요.

A : . 일단 임시주거지로 전입하고 제가 수급 신청을 하면 확정까지 한 두달이 걸려요. 수급을 받게 되면 그때부터는 스스로 방세내고 생활을 해나가는 거죠.


Q : 그럼 노숙인들이 수급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주소가 없기 때문이네요?

A : 그렇죠. 수급 신청할 관할 주민센터가 없는 거니까요.

 

Q: 집을 구하지 못해 노숙인이 되었는데, 주소가 없다고  수급 신청할 수 없는 아이러니네요.

Q2(박석일) : 신용불량자나 빚이 있는 분들은 법적 제지를 받기 싫어서 주소지를 만들지 않거나 일부러 주민등록 말소를 시키기도 해요. 저도 그래서 3년을 주소 없이 살았어요.

A : 주소지가 있으면 사람들이 빚 받으러 막 쫒아올거라 생각하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기가 힘들어요. 강제로 빚 독촉 못하게 되어 있어요. 가족들과 연락하기 싫어 주소 만들기 꺼리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요.


Q : 한 번 수급 확정이 되면 계속 유지되는 건가요?

A : 매년 갱신을 해야 하는데 그때 주소지가 없으면 수급이 중단돼요. 방세를 안내 쫒겨나서 다시 거리로 나오시는 분들이 종종 계세요. 그럼 주거지 불명으로 수급이 끊기는 거죠.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목을 쳐버리는 격이죠. 너무 안타까워요.

Q : 그러네요. 일을 하면서 받는 조건부 수급은 어떤 건가요?

A : 수급은 원칙적으로 근로 능력과 소득, 의무부양자, 재산이 다 없어야 해요. 다만 근로 능력만 있는 사람들도 있죠. 이 사람들에게 지역 자활을 하는 조건으로 수급을 지원하는 것을 조건부 수급이라고 해요.


Q : 그럼 센터에 반일제나 전일제로 일하시는 노숙인 분들은 수급 대상자가 아니네요?

A : 그렇죠. 소득이 있으니까요.

Q : 그분들은 센터에서 채용을 하는 건가요?

A : 센터직원이나 일자리 하시는 분들이 잘못 알고 계시는데 일자리 사업은 채용이 아니라 서비스예요.

 

Q :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A : 서비스가 아니라 채용이라고 생각하면 사례관리의 개념이 없어져요. 일자리는 최대 9개월 이상 일을 못해요. 물론 3개월 쉬었다가 다시 복귀할 수 있지만 9개월 후에 정식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향후 방향을 함께 고민해야 하는데 채용 관계라 생각하니 그런 고민이 빠지고 사례관리가 안되는 거죠특히 젊고 근로 능력이 있는 분들은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데 계약직처럼 9개월 지나면 나갔다 3개월 쉬고 다시 돌아오고 그 굴레에 갇히게 돼요. 일자리 제공이 서비스라는 개념이 안 잡혀 있으니까 이런 문제가 쳇바퀴 돌 듯 반복된다고 봐요.


Q : 그러네요. 일자리 서비스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시간이었어요역동적이지만 맥락은 비슷한 삶을 살아오신 거 같아요. 5년 뒤 퇴직 후에도 노숙인 관련일을 하고 싶으세요?

A : 아니요. 퇴직 후에는 귀농해서 태평농법으로 농사지으며 살고 싶어요. 조금 덜 먹고 덜 쓰면서 그렇게 사는 게 제 목표입니다.

Q :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 듣고 싶어요.

A : 선생님들이 노숙의 길로 들어 설 때는 모두 혼자가 된 상태예요. 그런 사람들이 모인 우리 1917명이 넘어지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어요. 저 역시 기댈 수 있는 등을 내주고 싶고요. 이것이 인문학의 핵심 가치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Q : 이미 많은 선생님들이 국장님께 기대고 계신 것 같아요.

A : 감사한 일이죠. 오히려 기대지 않는다고 하면 제가 너무 외로울 거 같아요. 저한테 기대고 의지하는 분들이 계시니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드는 거죠.

Q2(박석일) : 제가 지난 학기 선생님들을 만나 얘기를 나눠 보면, 인문학을 한 후 인생이 한 번에 확 바뀐 건 아니지만 '내 안에 뭔가 쌓인 거 같다' 라는 말을 자주 들어요. '내 안의 상처를 치유하고 적극적으로 살아보자' 라는 생각을 한다고도 하고요. 저는 이것이 인문학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A : 맞아요. 서울시는 인문학을 통한 어떤 획기적인 사건이나 성과를 원하고 취업자 수, 탈 노숙인 수 같은 수치를 중요시 해요. 성프란시스대학이 서울시 예산으로 진행되다 보니 그런 것들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지만 1년의 과정 동안 눈에 보이는 그런 결과가 바로 나올 수 없거든요당장은 느끼지 못하는 미세한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타날 거라 생각해요. 우리는 그 미세한 차이를 만들 작은 균열만 주는 거예요.

 

Q : 이제 곧 2학기가 시작되면 늦게 출근해서 늦게 퇴근하는 생활이 다시 시작되네요.
2학기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A : 처음 인문학을 맡다보니 1학기 때는 진짜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어요. 지금 개인사정으로 2분이 출석을 못하고 있는데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꼭 수업에 참여하지 않더라고 인문학 영역 안에만 있어주면 좋겠어요.

 

Q : 돌아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A : 돌아오면 안아줘야지요.

 

문민수 국장님과의 인터뷰를 정리하며 아주 오랜 기억 속 선생님 한 분이 떠올랐습니다. 선생님은 저의 별 감흥 없이 반복되는 그림 일기에 어김 없이 애정 어린 메모와 '참 잘했어요' 도장을 꾹 찍어주셨지요. 어린 저는 그 도장이 저의 존재를 칭찬하는 거 같아 날아갈 듯 좋았습니다.

우리 선생님들의 느린 걸음에도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참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국장님의 말씀이 우리 선생님들을 날아가게 만드는 상상을 해봅니다.

지금처럼 든든하게 성프란시스와 오래오래 함께 해주시길 기대하며 인터뷰에 응해주신 문민수 학무국장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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