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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17호

[인물 인터뷰] 재미있는 삶에 대한 자부심, 성프란시스 19기 한상규

by 성프란시스 2023. 7. 12.

/성지후

인터뷰어/성지후, 박석일

인터뷰이/한상규

(성프란시스 19기 자치회 회장)

 

 

오늘 소개할 인터뷰이는 성프란시스대학19기 재학생 대표 한상규선생님입니다선생님은 야구를 참 좋아하신다고 합니다. 야구장 입구에서 관중석으로 가는 좁은 통로를 돌고 돌아 어느 순간 ''하고 넓은 하늘과 운동장이 나타날 때는 여지없이 감동이 몰려온다고 해요. ''하고 나타날 그 날을 위해 인생의 통로를 굽이 굽이 거쳐 왔을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합니다.

 

Q : 선생님 아침 일찍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성프란시스 대학은 언제 부터 알고 계셨는지 궁금해요.

A : 제가 숙대센터(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에 처음 온게 6년 쯤 전인데.. 그때 하던 일이 잘 안 되서 빚은 지고 나이가 있다 보니 새 직장도 얻기 힘들고 이렇게 살아서 뭐하겠나 싶어 술을 마시고 천호대교에 갔어요.

 

Q : ~다리에서 투신하려고 가신거예요?

A : . 근데 누가 신고를 했는지 경찰관과 소방관들이 오셔서 저를 서울역 희망지원센터에 데려다 줬어요. 거기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숙대센터로 갔지요. 그렇게 입소상담을 하고 일주일간 숙대센터에서 먹고 자다가 자활을 시작했어요.

*자활 : 근로능력 있는 저소득층이 스스로 자활할 수 있도록 자활능력 배양, 기능습득 지원 및 근로기회를 제공하는 사업.

 

Q : 그런 일이 있었군요.

A : 당시 인문학 교실이 후암동에 있었는데 그 윗층에 있던 길카페에서 자활을 했거든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성프란시스  인문학대학을 알게 됐어요. 카페에 책이 많이 있었는데 당시에 핸드폰도 없다보니 거기 있는 책들을 거의 다 읽었어요. 또 책을 워낙 빨리 읽다보니 하루에 두, 세권 씩 읽었버렸죠.

 

Q : 그 전에도 책을 좋아하셨나요?

A : 아버지가 군인이셨는데 퇴직하고 종로서적에서 일을 하셨어요. 지금도 생각나는데, 주말이랑 방학 때면 아버지 따라 서점에 가서 책을 읽곤 했어요.

 

Q : 그때의 기억이 아주 좋은 추억인 동시에 선생님께 참 좋은 영향을 미친거 같아요.

A : . 공부를 그렇게 썩 잘하진 못했지만 항상 중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인거 같아요. 아버지도 책을 많이 보셨거든요. 아버지에 대한 몇 안되는 좋은 기억 중 하나예요.

 

Q : 몇 안되는 좋은기억이요?

A : 원래 아들은 아버지를 별로 안 좋아해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지만 당시에는 몰라요. 지금은 제가 제 아들한테 잘못하고 있어서 그런지 아버지 생각 많이 나죠.

 

Q : 아버지께서 직업 군인이셨군요.

A : . 아버지, 작은 아버지 모두 군인이셨어요. 그래서 저도 당연히 군인이 될 줄 알았죠. 해군사관학교에 합격까지 했는데....

 

Q : 그런데요?

A : 당시에는 연좌제라는게 있었어요. 알지도 못하는 먼 친척 중에 북한에 다녀온 사람이 있었다는게 밝혀지면서 합격이   취소가 돼버렸어요.

 

Q : ...

A : 그때는 민주화가 완전히 이루어 졌다고 보기 어려운 시대였으니까요. 김영삼대통령 시절이었죠. 제가 졸업하고 3년인가 있다가 대입이 학력평가에서 수능으로 바뀌고 연좌제 같은 것도 없어졌을 거예요.

 

Q : 정말 너무 아까워요.

A : 뭐 태어나는 시기를 제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 일이 있고 나서 늦은 사춘기가 찾아왔어요. 합격이 취소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학교도 안가고 집에 있는 책이며 물건을 다 집어 던지며 개판을 쳤죠.

 

Q : 얼마나 상심이 컸겠어요. 지켜보는 아버지 심정도 무너졌을 거 같아요.

A : 할머니랑 작은아버지 가족이랑 같이 살 때 였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더라구요. 아버지도 많이 속상하셨을 거예요. 그래도 말없이 가만히 계시더라구요. 말려도 안된다는 걸 아신 거겠죠. 제 마음이 풀릴 때까지 두신거 같아요. 그러다 밖에 나가서 더 큰 사고칠까 싶으셨는지 일찍 군대에 보내시더라고요. 졸업하고 한 달 뒤에 입대했어요.

 

Q : 군 생활은 어땠어요?

A : 괜찮았어요. 체질에도 딱 맞고 좋았죠. 그래서 일반병으로 입대했다가 하사관으로 지원해서 7년을 군에 있었어요. 지금 되돌아 보면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사관학교 못 갔을 때고 가장 후회되는 때가 군에서 제대한거예요.

 

Q : 군생활이 정말 잘 맞았나봐요. 그런데 왜 제대를 하셨어요?

A : 매일 똑같은 일과지만 정시에 일어나서 규칙적인 하루를 보내는게 좋았어요. 다른 뭔가를 배우고 시도해 봐야겠다는 의욕과 여유도 있었고요. 그런데 군대만큼 정직하면서도 부조리한 곳이 없어요. 진급하려면 눈치도 봐야했고 병사들과 장교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다 사회나가면 더 낫지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때 당시 여자친구 문제도 생기기도 해서 제대를 했죠.  27살이었으니 세상 무서울게 없었죠.

 

Q : 제대를 안 하셨다면 계속 직업군인으로 사시는거죠?

A : 그렇죠. 그때 버텼으면 정년까지 가는거죠. 그랬다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이 됐겠죠. 처음 한 달은 군에서 꼬박꼬박 모은 돈도 있고 좋았죠. 근데 제가 졸업 하자마자 군대를 갔으니 사회를 잘 모르잖아요. 그런 상태에서 사회에 던져지니 갑자기 생긴 자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던거 같아요.

 

Q : 알아요. 감당 안되는 자유.

A : 저 군에 보내면서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간하고 쓸개는 여기에 두고 가라'고 그 만큼 힘든 곳이니 성질대로 하면 큰 일난다고요.  그리고 제대 한다고 할 때 그러시더라고요. '네가 살면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한 일이 군대 간 거였는데 제대한 게 가장 후회하는 일이 될거다' 라고요.

 

Q : 정확히 알고 계셨네요?

A : . 다 알고 계셨던거죠.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 가슴에 못박는 일이었죠.

 

Q : 지금 아버지랑은 어떠세요?

A :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제가 10살 때 돌아가셨구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저희 집에 오셔서 같이 사시다가    할머니, 아버지, 여동생이랑 다 같이 작은아버지 댁으로 들어갔어요.

 

Q :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나요?

A : 정확한 기억보다는 어머니가 차도 많지 않은 동네에서 차사고를 당하신 날 혼자 집에 있었는데 그때의 오묘한 분위기가 아직도 생생해요. 병환이었다면 대비라도 했을 텐데.... 할머니가 부모님 결혼을 반대하셨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작은 어머니에게 어머니 흉을 보시는 걸 제가 우연히 듣고 '엄마 욕하지 말라'고 울었던 기억이 나요.

Q : 제대 후에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A : 제대하고 딱 한 달 쉬고 지금은 없어진 대우자동차에 입사했어요자동차 영업일을 했는데 처음부터 성과가 나는 일이 아니니까 기본급만 받다가 한 6개월 지나니 그 동안 쌓아왔던 노력이 터지면서 돈도 많이 벌었죠. 제일 많은 달은 1,800만원까지도 벌었어요. 거의 매일 차 한대 씩 출고 시켰으니까요. 첫 차 출고할 때 진짜 날아갈 거 같았어요. 그렇게 성과가 보이니 주말에도 안 쉬고 일만 했어요. 그렇게 2년 정도 일하니 돈도 좀 벌었겠다 내 사업 한번 해 보자 싶어 요식업으로 넘어왔죠.

 

 

Q : . 요식업을 오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A : 다른 일을 하기에는 배움이 짧고 그때 친구들이 포장마차, 치킨집 같은 걸 하고 있어서 '난 술집을 한 번 해보자' 하고 시작했어요. 98년도 IMF 터지고 난 직후였어요. 곧 좋아질 줄 알고 은행에서 대출받고 여기저기 지인들에게 돈을 빌렸죠.

 

Q : 당시에는 다들 곧 회복될거라 믿었으니까요.

A : 제가 초,,고를 다 성남에서 나왔는데 그때 장사가 안돼 망하다 보니 동창들하고 연락이 다 끊겨 버리더라고요

 

Q : 선생님이 연락을 안하신 건 가요?

A : 못하는거죠. 빌린 돈도 못 갚고 그러니까... 근데 서운하기도 했어요. 동창들 학생일 때 나는 직업 군인이어서 외박 나오면 내가 술도 다 사주고 했었거든요.

 

Q : 그러셨겠네요.그 후엔 어떻게 되었어요?

A : 천안으로 갔어요. 여동생이 대학을 천안으로 가면서 가족들이 천안에 살고 있었거든요. 천안에서 웨이터부터 다시 시작했지요.

 

Q :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셨네요?

A : 먹고 살려면 뭐든 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몇 년 일하다 애 엄마 만나서 결혼도 했어요.

 

Q : 그땐 정말 행복하셨겠어요?

A : 제가 30대 중반 애엄마가 20대 초반 이었는데 어린 신부를 맞이 하니 더 좋았죠. 잘 살았는데 부부라는게 그렇잖아요? 좋을 때가 있고 안 좋은 날도 있고.. 서로 안 좋은 감정들이 깊어지다 보니 헤어지게 됐어요. 아들은 엄마가 키우고 있고요.

 

Q : . 아들은 몇 살이예요?

A : 15살 됐어요.

 

Q : 보고 싶으시죠?

A : 아내랑은 가끔 통화를 하는데 얼마 전에 대뜸 노숙하냐고 묻더라고요. 누가 봤다는 말은 안하는데 애한테 연락도 하지 말고 전화도 하지 말라는 거 보면 아무래도 아들이 저를 본 거 같아요. 그 전에는 애랑 통화하고 싶다는 걸 막은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Q : 실제로 노숙을 하는건 아니지만 서울역에서 사람들과 얘기 하는 걸 봤을 수 있겠네요.

A : . 애 입장에서는 창피할 수 있으니까요.

 

Q : 기분이 어떠셨어요?

A : 멘탈이 완전히 나갔었죠. 서울역에 있는 제 자신이 너무 싫었어요. 서울 벗어나서 어디 멀리가서 노가다나 뛸까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같은 서울에 있다 보니까 자꾸 생각이 나서 한참 또 술만 먹고 '이러고 살아서 뭐 하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Q : 이해해요. 잘 하고 싶다가도 어느 순간에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때가 있죠.

A : 내가 죽으면 누가 올까? 아들은 어떡하지? 그런 생각도 들고 혹시 다 커서 아빠를 찾았는데 일찌감치 죽어버렸다고 하면 안되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거죠.

 

Q : 지금은 괜찮으세요?

A : 같이 인문학 수업하는 형님들은 이보다 더 힘든 일은 겪고도 이겨내려고 일도 하고 인문학 수업도 하시잖아요? 그 분들과 얘기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교수님들도 좋은 말씀 해주시고 하니까.. 만약 혼자 였다면 벌써 술병나서 정말 거리에서 술만 드시는 분들 처럼 됐을 거예요. 그리고 할 일도 있으니까요.

 

Q : 맞아요. 해야 할 일이 있다는게 정말 중요한거 같아요.

A : 그리고 무엇보다 놓아 버리기에는 제 자신이 너무 아까웠어요. 놓을 수 없다면 '이왕이면 잘해보자' 생각했죠.

 

Q : 좋은데요. 그럼 실제 거주하는 곳은 어디예요?

A : 지금은 고시원에 있어요. 처음 말씀드린 길카페에서 자활할때는 희망주택에 있었고요.

 

Q : 희망주택이요?

A : . 지원 희망주택이라고 한 달에 20만원 인가를 내면 8만원 씩 적립을 했다가 나올 때 돌려줘요. 실제 방세는 12만원인  거죠. 고시원 같은 방 한칸 이지만 5층에 식당도 있고 아주 운이 좋았죠.

 

Q : 그러네요. 길카페 자활도 희망주택도 참 운이 좋았네요.

A : 카페 자활을 한 6개월 정도 하다가 드라마 엑스트라를 거의 본업삼아 1년 가까이 했어요. 새벽에 일어나 지방 촬영 다니고 분장도 받고 놀러 다니면서 돈 버는 기분이었죠.

 

Q : 재미있었겠어요?

A : .   <남한산성>이라는 유명한 영화에도 출연하고 MBC <미씽>이라는 드라마에서는 감독 눈에 띄어 단독 샷이 잡히기도 했어요.

 

Q : 유명한 영화 잖아요? 선생님 찾으러 다시 봐야겠는데요카페 자활때 부터 성프란시스를 알고 계셨는데 이번에 입학한 이유가 있나요?

A : 길카페 자활 당시에도 인문학을 하라는 권유를 받았는데 그때는 마음이 조급할 때라 빨리 여기를 벗어나겠다라는 생각만 했어요. 급한 마음에 요식업 일로 나왔다가 센터로 돌아오기를 반복했죠. 1년에 한 번 또는 2년에 한 번씩 반복하다 작년 9월에 다시 센터로 왔어요. 센터로 돌아와 주방에서 자활을 하며 상담을 했는데 매번 이렇게 반복하지 말고 좀 길게 보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보는게 어떻겠냐고 하시더 라고요.  그 동안 인문학을 꺼려했던 이유가 '뭐 배울 게 있겠어?' 라는 생각 때문 이었거든요근데 이번에는 내가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계속 반복되는 삶이 되겠구나. 길거리에서 죽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기 사람들 매일같이 술 먹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둘 중에 하나예요돌아가시거나 시설이나 하다 못해  교도소에 갔거나죠. 근데 반대로 기존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봤어요. 그 분들의 공통점이 인문학을 했더라구요. 그래서 결심했죠. 아직 그렇게 늙은 나이도 아닌데 뭔가 획기적으로 내 삶을 바꿔보자그렇게 시작하게 됐어요.

 

Q : 지금은 조급함을 좀 내려놓으셨나요?

A : . 저의 생활패턴이나 생각을 꼭 바꾸고 싶어서,  기간을 좀 길게 잡고 일도 하면서 다시서기 센터 도움도 받고 싶어요. 2-3년 보고 있어요인문학 1년 과정이 끝나도 심화학습이나 서울시 인문학 강의가 있으니까 꾸준히 해 보려고요. 모든 길은 책에 있다고 배웠으니까요.

Q : 요즘에도 책 많이 읽으세요?

A :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데 자꾸 정신을 뺏기지만 한 달에 한 권은 보려고 해요책을 읽다 보면 앞 페이지가 생각이 안 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책은 다시 넘겨서 보면 되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50년은 다시 돌려서 볼 수가 없잖아요.

 

Q : 그렇죠.

A : 앞으로 나가려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을 좀 되돌아 봐야 하니까 이렇게 공부하고 일요일에는 신앙 공동체 미사에도 나가고 있어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지금이 참 좋아요.

 

Q : 선생님 말씀들으니 저도 참 좋네요.

A : 예전에는 잡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요. 근데 회장이라는 직책을 맡다 보니 저 자신만 생각 할 수가 없잖아요? 누가 결석이나 결근을 하면 무슨 일이 있는지 찾아 가 봐야 하고... 시간이 드는 일이지만 그게 참 좋은거 같아요.

 

 

 

Q : 19기 회장님도 되셨지만 입학식 때 신입생 대표로서 인사도 하셨어요. 신입생 대표는 어떻게 되신 거예요?

A : 입학지원서에 쓴 지원동기를 보고 학무국장님이 결정하신 거 같아요.

 

Q : 지원동기를 아주 잘쓰셨나봐요?

A : 면접 볼때 교수님들이 뭐라고 하셨냐면요. 지난 몇 년 동안 본 지원동기 중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하시더라고요.

 

Q : 한 번 읽어보고 싶어요. 19기 카페에 쓰신 글만 봐도 참 잘 쓰세요.

A :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들었던 수업 그리고 심화학습 내용까지 쭉 이어지는 생각을 노트에 써요. 그렇게 한 번 정리하고는 다음날 카페에 올리면서 한 번 더 정리해요. 예전에는 일 마치면 술이나 한잔 할까? 했다면 이제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하는거 같아요.

 

Q : 인터뷰 하시면서 지난 날을 돌아 보셨는데 어떠신가요?

A : 되돌아보니 제대하고 한 이십여 년 간 여유롭지 않았지만 나름 재밌게 살았던 것 같아요. 국가 공무원(군인)도 해보고 대기업(대우자동차)에도 다녀 보고 두 번이나 크게 망했지만 자영업도 해봤잖아요. 바닥도 쳐보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나쁘게 살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Q : 제가 들어도 참 재미있게 사신 것 같아요.

A : . 재밌게 살았어요다만 제대하고 사회에 나왔을 때 갑자기  자유가 주어지자 안 좋은 습관이 생긴 것 같아요. 그땐 뭐든 술로 풀려고 했으니..좀 절제를 했다면...당시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거나 어학연수를 가거나 자기개발을 했다면..내가 그때 생각을 조금만 바꿨다면...지나고 나니 다 후회가 되요.

 

Q : .

A : 아마 이런 생각을 인문학이나 센터 이용자 분들이 다 할 거예요. '그때 내가 진짜 술을 조금 덜 먹었다면.. '그때 내가 그 친구 말을 듣지 않았다면..' '내가 그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렇게요. 근데 이제는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고 다들 참고 있다는 거잖아요.

 

Q : 참고 있다?

A :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거니까요처음에 20명이상 시작해서 12명 밖에 졸업을 못하는 건 그 습관을 못 참고 똑같은 것을 반복하고 그러다 떨어져 나가게 되는 거잖아요.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많이 참고 있는 거죠.

 
 
 
 
 

Q : 참는다는 게 진짜 대단한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그 동안 보아온 인문대학 선배 중 기억에 남는 분이 계세요?

A : 18기 한명희 선생님 같은 경우 매일 먹던 술을 몇 달간 딱 끊었잖아요.

 

Q : 맞아요. 한명희 선생님이 여러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많이 주고 계신 것 같아요.

A : 인문학을 하면서 알게 된 사이지만 저랑 성향이 좀 비슷해요. 동갑이기도 하고요.

 

Q : 감수성이나 섬세한 부분이 많이 닮았어요. 두 분다 글도 잘 쓰시고요선생님 최대 3년을 보신다고 하셨잖아요? 그 뒤 계획 같은건 안 여쭤 볼께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A : . 저도 아직 모르겠지만 그 3년 동안 다시 뭔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초만 닦아 놓고 싶어요. 건축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지금 땅은 파고 있고, 그 다음엔 기초 골조가 올라가야 되잖아요. 그 기반을 다져 놓고 싶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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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잘하실 거예요. 응원하겠습니다.

A : 인터뷰가 잘 됐나 모르겠네요.

 

Q : 아주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부탁드립니다.

A : 지금 저희가 19기니까 20년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역할이 크다고 생각해요.  0이 라는 숫자가 끝 같지만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19기가 20년을 잘 마무리 하고 준비를 해놓으면 20기를 잘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사실 20년을 이어져 온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고 이 곳을 거쳐간 사람이 300명 이상은 될텐데 그 분들은 분명 새로운 기회를 얻는 일이었을 거예요.

 

Q : 그럴거라 생각해요.

A : 사실 정말 좋은 기회 잖아요? 어디서 1년짜리 과정을 이렇게 공짜로 하겠어요?

 

Q : 1년 과정 자체가 없죠.

A : . 1년짜리 풀코스 과정이 없거든요. 이런 커리큘럼 아래에서 이렇게 배운다는 게 좋은 기회거든요. 성프란시스대학이 더 많이 알려져서 인문학을 배우고자 하는 분들이 이렇게 좋은 혜택들을 많이 받았으면 좋겠어요그리고, 생각해보니 본업이 있는데도 시간을 내서 활동하시는  활동가 선생님들께 참 고맙더라고요그리고 상상도 못해본 좋은 대학에서 공부하셨고 일하시는 교수님들이 저희에게  수업 해 주신다는 자체가 정말 감사하고요. 전부가 열심히 배우고 집중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 재학생들도 대단하고요. 졸릴 때도 있을텐데   그래도 교실에 나와서 뭐라도 하는건 다르잖아요? 모두가 무사히 졸업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Q : 이전 기수와는 다르게 아주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회장님 역할을 다하시려 노력하시는게 보여요.

A : 좀 결이 다른 자치회를 만들어 보고자 자치회의를 통해 여러 아이디어를 내고 있어요. 19기 구호도 자치회의를 통해 직접 정했고 매달 생일자에게 상품권을 전달하자는 안건이나 행사 프로그램 정할 때도 저희 의견을 전달해요. 회의할 때는 학무국장님도 못 들어오게 합니다.

 

Q : 지금까지의 삶도 회장으로서 역할 수행도 아주 적극적이시고 능동적이신 것 같아요.

A : 어거지로 살고 있는 거죠.

 

Q : 내일 정만지선생님(19기 재학생) 신용회복절차에도 동행하시 잖아요?

A : 저 친구가 한글을 잘 모르니 누군가는 동행해야 하니까요. 혼자 보내면 불안하니까..

 

Q : 정만지선생님 한글 공부도 도와주고 계시는데 공부를 먼저 제안하신 거예요?

A : 그런건 아니고 배우려고 하니까 도와주는 거죠. 밖에 나가서 무시당하면 안되잖아요.

 

Q : 사람 돕는 일을 좋아하시죠?

A : 그런건 아니고 제가 장남이라 제가 가진 그릇에 비해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어요. 그걸 물질적으로는 못 돌려 드려도 무거운 짐을 진 노인을 돕고 임산부 석을 비워두는 거 처럼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지요. 그렇게 배우기도 했고요.

 

Q : 그 원동력은 인간에 대한 애정일까요?

A : 애정이라기 보다는 제가 조금 도와줌으로써 그 사람이 어려움을 해결하거나 세상에 나가 기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지요.

 

Q : 그게 애정입니다.

A : 그런가요?

 

Q : .

 

한상규선생님과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 오는 길 '반칠환'시인의 <새해 첫 기적>이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2년 어쩌면 3년 뒤 새해 첫 날 선생님만의 속도로 원하는 자리에 도착해 있을 선생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그 때 선생님을 만나 어떻게 지내셨냐고 묻고 싶어요. 그럼 분명 재미있게 살았다고 하시겠지요주어진 책임을 소중히 여기고 타인의 필요를 듣지 않고도 알고 주어진 삶이 아닌 주도적인 삶이 어울리는 선생님의 앞날을 응원하겠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한상규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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