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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17호

[역전 칼럼] 침향(沈香)

by 성프란시스 2023. 7. 11.

                                                                                                                   박경장(성프란시스대학 글쓰기 교수)

 

 

학기 초 첫 번째 글쓰기 숙제는 자기 이름을 삼행시로 지어 카페에 올리는 것이다. 100% 제출완료. 두 번째는 단어 속성(屬性)에 관한 연습으로 두 단어를 골라 서로에게 하는 칭찬과 비난을 대화로 작성하기다. 60-70% 제출. 세 번째는 묘사연습으로 자신이 자주 가는 장소 묘사하기다. 30-40% 제출. 네 번째는 문단나누기 연습으로 두 문단 글쓰기다. 10% 미만 제출. 이쯤 되면 난 숙제 내주는 것은 포기하고 수업 시간 중에 글을 쓰는 마구쓰기에 집중한다. 하지만 말이 마구쓰기지 내용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거나 마구쓰라 해도 마구써지지 않는 게 글쓰기 아닌가. 게다가 즉석에서 발표까지 시키니 난감해하는 선생님이 한 둘이 아니다. ‘자유연상기법이니 브레인스토밍이니 하는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마구쓰기 기법을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막상 펜을 들면 망부석처럼 굳어버리기 일쑤다. 물론 두려움 없이 아무 글이든 쓱쓱 잘 쓰시는 분도 있다. 하지만 글이라곤 마음먹고 써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들 앞에 놓인 백지나, 어찌하든 그 백지를 뚫고 나가야한다고 온힘 다해 떠밀어도 떡 버티고 선 등이나, 모두 은산철벽(銀山鐵壁)이다.

집도 절도 없고 가족 형제도 다 떠나, 부여잡을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글쓰기란 무엇일까. 이 화두를 부여잡고 지난 16년 서울역 주위를 배외했지만 난 어떤 깨달음에 이르진 못했다. 다만 매 기수 20명 안팎 인문학도반들과 마당을 쓸고 절을 하듯 글쓰기수련을 해왔을 뿐이다. 돈오(頓悟)의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마음을 닦는 점수(漸修)라고나 할까.

인문학 일 년이 끝나면 깨달은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 하산해야 한다. 하산한다고 서울역을 완전히 떠나는 것도 아니다. 서울역은 이미 이들에겐 집이요 저자거리며 수련장이다. 매 기수마다 서울역으로 환속하면서 이들이 남기고 간 것이 있다. 졸업문집. 인문학 출가 일 년 수련의 허물인 듯 벗어놓고 간 글들을 다시 읽는다.

어느 날 거울을 볼 수가 없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기가 너무 두려웠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고, 벗은 내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그만 그 거울을 주먹으로 내리쳐버렸다. 고독했다. 외로웠다. 슬펐다. 안타까웠다.” - 고성원 <거울 속의 나> 중에서

 

지하도 배식장에서 처음 급식 배식을 받았다. 그 순간 목구멍이 메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숟가락을 멈추고 피눈물을 흘리던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 양태욱 <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고> 중에서

 

두 눈을 꼭 감고 거울 앞에 섰다. 실눈을 뜨고 살짝 보려다가 곧 다시 감고 만다. 그러기를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내 모습을 똑바로 봐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덜컥 겁부터 난다.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죽을 듯이 아팠다.” - 0<거울 앞에서> 중에서

 

어디 가서 물어봐라. 노숙인이 인문학 한다고 하면 욕이나 먹지. 먹고 사는 것 자체가 힘이 드는데 꼴값한다고 다들 수군거리지 않겠는가.” - 0<철학을 배운다> 중에서

 

5층 고시원/방문을 열고 불을 켠다/어둠이 밀려 달아나고/정면의 대형 거울에

배 나오고 뚱뚱한 얼굴/오래전 절망과 비웃음을/나를 미워하고

내가 증오하던/초라한 직장의 책임자/경멸의 미소/그 모습 그대로

머리카락 새치에/시간이 눈처럼 내리고/좁은 방 대형 거울

피곤한 남자가 있어/조용히 바라본다. - 김명준 <자화상> 전문

 

까맣다/때는 보이지 않는데/스멀스멀 냄새가 나를 자극한다.

빨래할까 말까/냄새의 근원은 어딘지 고심했다/나를 먼저 씻어야겠다. - 이우영 <빨래> 전문

 

내가 등 떠밀어 은산철벽 백지 앞에 서서 마주하게 한 것은 결국 선생님 자기 자신이었을까.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 안간힘 써 인문학출가를 했는데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라 하니 펜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던 것일까. 뚫고 나아가야 하는 백지는 내 썩은 살이요, 채워 나아가야 하는 빈칸은 내 곪은 상처였을까. 바라봐야 하는 백지면벽은 냄새나는 내 얼굴이었을까. 마구쓰기란 마구찌르기였을까.

벗어놓고 간 허물에서 뱀이 나왔는지 나비가 나왔는지 모두를 확인할 길이 내겐 없다. 다만 난 그 허물에서 묻어나는 문자향을 맡을 뿐이다. 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상처 부위에 모인 수지(樹脂)가 수년, 수천 년에 걸쳐 응결된 덩어리에서 난다는 침향(沈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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