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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17호

[길벗 광장] 노숙과 자유

by 성프란시스 2023. 7. 11.

                                                                                                                      김동훈 (성프란시스대학 예술사 교수)    

서양 문학의 고전들에는 고향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전쟁이 끝난 후 신들의 저주를 받아 집에 돌아가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는 이야기를 다룬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멸망한 트로이 왕국의 왕자로 나라를 잃고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떠돌다가 결국에는 이탈리아로 이주하게 되는, 고대 로마의 건국 영웅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조상 아이네이스의 이야기를 다룬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영웅들만 이렇듯 방랑하는 것은 아니다. 오디세이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의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은 평범한, 평범하다 못해 어떤 면에서는 찌질하기 까지 한 사람이다. 자신이 집을 나서면 자기 부인이 정부를 집에 들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는 아침에 집을 나선다. 어디 그뿐이랴. ‘방황하는 네덜란드 사람’(The flying Dutchman)이라는 명칭을 가진 유령선에 얽힌 괴담은 망망대해를 영원히 정처 없이 떠돌도록 저주받은 영혼의 이야기다.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해 이 저주받은 영혼이 구원을 받으려면 여인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첨가했고 그것이 독일의 위대한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영감을 주어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 사람>이 탄생하기도 했다.

이렇듯 고향, 일정한 거처를 상실하고 떠도는 모습을 인간의 삶, 인간 영혼의 본질로 해석한 이들도 있었다. 낭만주의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영원한 이상에 대한 동경, 노스탤지어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그러므로 낭만주의자들에게 세상은 언제나 도달해야 할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나그넷길이었다. 초기에는 낭만주의의 세례를 듬뿍 받았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자 게오르크 루카치도 <소설의 이론>에서 근대 인간의 근본적 특성을 초월()적 노숙상태로 정의했다. 인간은 무언가를 경험하기 이전에 이미 의지할 곳, 거처할 곳을 잃은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든 사건의 원인이, 신화의 형식을 빌리기는 하지만, 분명하게 설명되는 세상에 살았다. 하지만 근대인들에게 세상은 그 존재 근거가 설명되지 않는 곳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근대인들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존재자다. 그렇기에 태어나 존재하게 되는 순간부터 이미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편안하게 깃들어 살 수 있는 고향, 집을 상실한 상태로 존재한다. 어떤 본질적인 삶의 의미도 미리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만들어나가야만 한다.

이 말을 이어받아 러시아의 위대한 문학평론가 미하일 바흐친은 언어적 노숙상태에 대해 말한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소설은 이데올로기적 세계가 언어의 면에서도 의미의 면에서도 탈중심화한다고 여김으로써 시작한다. 그것은 문학적 의식이 갖는 일종의 언어적 노숙상태다.” 바흐친에게 세계는 오히려 처음에는 우리를 억압해 오는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다가온다. 그것을 넘어서서 소설의 저자는 모든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모험으로 자신을 던진다. 루카치에게 초월()적 노숙상태가 벗어나야 할 천형과 같은 것이라면, 바흐친에게 언어적 노숙상태는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작가의 의식이 작품 속에 실현해내는 혁명적 상황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그는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세계를 든다.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기존의 가치관과 질서가 증발하여 버린 듯한 일종의 진공 상태는 무한한 자유의 터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발적으로 선택할 때 노숙은 모든 억압과 간섭에서 벗어난 영혼의 자유를 뜻하게 된다.

사람들이 대개 부정적으로 해석하면서 가능하면 벗어나야 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로 치부하는 노숙을 바흐친처럼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한 철학자도 있다. 독일의 현대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다. 그는 진정한 본향에 도달하려면 고향을 떠나야만 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 중에서 가장 섬뜩한 존재자인 이유가 바로 이렇게 자신의 고향을 떠나 언제나 존재의 모험을 감행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일컫는 소포클레스 작 <안티고네>의 합창 가사에는 인간은 모든 존재자 가운데 가장 섬뜩한 존재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앞에서 언급한 인간의 속성에 대한 묘사가 그 뒤를 따른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이렇듯 가장 섬뜩한 존재자가 될 수 있는 근거로 바흐친이 말한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안주하지 않고 거기서 벗어나 존재의 모험을 감행하는 영혼의 자유로움을 들고 있다. 물론 이데올로기적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옛 자아거나 이데올로기적 세계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유로운 영혼을 바라보는 이들은 이 섬뜩함을 회피하겠지만,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려면 그러한 섬뜩함을 향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하이데거는 주장한다

성서에서도 인생은 끝없이 본향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라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나온다. 기근에 못 이겨 이집트 땅에 와 자기 아들 요셉이 섬기는 이집트 파라오 앞에 선 야곱은 이 세상을 떠돌기 벌써 백삼십 년이 됩니다. 얼마 되지는 않으나, 살아온 나날이 궂은 일뿐이었습니다.”라고 말했고 시편에서 다윗 왕은 야훼여, [] 조상들처럼 나 또한 당신 집에 길손이며, 식객입니다.”하고 노래했다. 시편 119편 저자는 자신이 땅 위에서 나그네임을 숨기지 않는다. 이때 성서에서 말하는 나그네는 한편으로는 고달프고 힘든 삶을 사는 이를 뜻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때문에 신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그네에게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소유물인 집이 없다. 정처 없이 떠돌다 보니 최소한의 물품만 소유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그네는 가난한 사람의 원형이다. 예수가 복 있는 사람으로 거론한 바로 그 가난한 사람 말이다.

20대 청년 시절 가난의 성자 프란체스코의 삶을 오래도록 동경했었다. 그때 깨달은 매우 중요한 사실은 자발적으로 아무것도 소유하려 하지 않을수록 그만큼 더 모든 면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 가난한 이들이 사는 여러 곳을 찾아가면서 느낀 것은 가난한 사람들은 위선의 탈을 쓰는 경우가 많은 것을 지닌 사람들에 비해 엄청나게 드물다는 사실이었다. 17년 세월 동안 성프란시스대학에서 만났던 많은 학생에게서도 마찬가지 사실을 느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진리라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기 어려운, 최희준의 <하숙생> 가사처럼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것임을 깨닫고 내가 가진 것, 가지고 싶은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는 정말 힘들다. 하지만 감히 고백건대 서울역의 성자들과 만나면서 얻게 된, 계속 겸손해지고 내 속에 있는 집착을 덜어내야 한다는 깨달음이 어쩌면 훨씬 더 고달프고 힘들었을 내 삶을 그래도 살만하고 행복하게 해준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그러기에 노숙은 벗어나야 할 천형이 아니라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는 축복일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매우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내 속의 참된 가난을 일깨우는 일, 진정으로 소중한 가치에 눈 뜨는 일, 그래서 욕망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이 역설적으로 내게 채워준 풍요로움을 누리는 일이 그것이다. 매일의 일상이 힘들더라도 그 일상을 스스로 받아 안고 내 일상으로 만들면 행복한 시지푸스가 될 수 있다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우리는 매일 매일의 인생 여정을 자신의 힘으로 행복으로 채울 수 있다. 성프란시스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의미도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떠돌든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행복할 수 있는 건 여행길 자체를 자유와 해방의 공간으로 만드는 우리의 선택에서 말미암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 길벗들과 서로 어깨 기대며 함께 할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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