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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16호

[인물 인터뷰 | 다시 꾸는 꿈. 여재훈 다시서기 센터장님]

by 성프란시스 2023. 3. 20.

글/ 성지후

인터뷰어/성지후, 박석일

인터뷰이/여재훈(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센터장)

 

 

 

오늘 소개할 인터뷰이는 2009년부터 2019년까지 10년 간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대한성공회유지재단) 센터장 겸 성프란시스대학 학장을 역임하셨던 여재훈신부님 입니다. 성공회대학 총무처장으로 잠시 마실을 가셨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다시 돌아온 신부님을 기쁜 마음으로 찾아 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멋진 기도를 들어주신 거 같습니다.

Q : 센터장님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정말 뵙고 싶었어요.

A : 반갑습니다. 다시서기 센터장 여재훈이라고 합니다.

 

Q : 저를 포함해 많은 분들이 환영하고 있어요.

A : ~싫어하는 분들은 얘기를 하셨나 봐요?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Q : ~그래요?

A : 제가 동안 꼰대가 되었는지 여기저기 다니며 자꾸 잔소리를 하고 지적 질을 해요. 요즘 실무자들과 일대일 면담 시간을 갖고 있는데 자리에서조차 잔소리가 나와서 이거 큰일났다 싶네요. 생각을 젊게 가져야겠다고 결심했어요.

 

Q : 다시서기 센터장님으로 다시 돌아온 기분은 어떠세요?

A : 워낙 아는 곳이고 애정이 있는 곳이라 부담은 없어요. 다만 이전보다 덩어리가 커지면서 보수적인 조직이 될까 염려가 되지요. 그럴 일수록 실무진들의 역동성이 필요한데 저도 늙고 기존 실무자들도 연령대가 높아져 잘 해낼 있을지 걱정되지만 젊은 실무자들이 있도록 뒷받침을 해야지요.

 

Q : 성공회대학교 총무처장으로 보낸 3년 어떠셨어요?

A : 성공회대학교는 주인이 많은 학교예요. 그걸 조율하는 일이 쉽지 않더라고요. 거기에 매년 살림살이가 적자가 나서 재정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쉽지 않았죠.

이전에 센터장으로 있을 일이 너무 많아서 주말도 없이 집에서 잠만 자고 나오는 생활을 했어요. 가족들한테 원망도 많이 듣고 건강도 좋아졌죠. 그래서 학교 업무는 쉬울까 하고 갔던거 같아요.. 사실 여기서 도망 나간 거예요.

 

Q : 탈출에 실패하신거네요?

A : . 하나님 명을 어기고 도망갔지만 결국 니느웨에 당도한 선지자 요나처럼 저도 도망갔다가 다시 잡혀왔네요.

 

Q : 어릴 때부터 성직자가 꿈이셨나요?

A : . 저는 원래 교회 목회를 하고 싶었어요. 아이들을 좋아해서 아동, 청소년 목회에 관심을 갖고 신학대 다닐 때부터 준비하고 있었죠. 예배 드리기 가장 좋은 시간이 오전 11시인데 시간이 성인 예배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시간을 아동, 청소년에게 내주고 싶었고 그런 교회를 꿈꿨지요.

 

Q : 그럼 다시서기에 오시기 전에는 교회 목회를 하신 건가요?

A : 아니요. 대학원을 졸업하고 교회 발령을 받아야 하는 시기에 우연치 않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봉천동 나눔의 아동, 청소년 전문 사역자로 가게 되었어요. 성공회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회선교(기독교 정신에 따른 사회봉사) 시스템이 있는데 그때 사회선교를 처음 접하게 되었어요.

그때가 90 중반이었는데 판자촌에 공부방이 2, 가출청소년 쉼터, 여자아이들 그룹홈, 주일학교까지 총괄하는 역할이었어요. 정말 해보고 싶었던 일이라 갔는데 그곳에서 처음 빈곤을 봤어요. 아빠한테 매일 맞아서 팔이 부러진 아이, 보일러실에서 숨어 자다가 죽은 아이, 단순히 불쌍하다가 아니라 훨씬 잔인한 빈곤의 민낯을 많이 봤지요.

근데 안에서 따뜻함도 봤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회선교 중에서도 빈곤 선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같아요. 후에는 인천 나눔의 원장으로 5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했어요.

 

Q : 정식으로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 소개를 부탁 드립니다.

A : 다시서기센터에 부임해 가장 독특하다고 느꼈던 프로그램이 성프란시스대학이었어요. 성프란시스대학은 쇼리스(미국의 문필) 미국에서 시작한 무료 인문학 교육과정인 클레멘트 코스를 임영인신부님이 벤치 마킹해서 만든 인문학 프로그램입니다. 클레멘트 코스의 대상은 노숙인이 아닌 주로 할렘가의 젊은이와 젊은 재소자들이었죠. 학생들이 훗날 간호사도 되고 의사도 되고 변호사도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니까 쇼리스 가난 때문에 교육의 기회가 제한되고 교육의 부재가 가난을 만들어 내는 악순환의 고리가 있다고 판단을 했지요.

그의 인문학 교육과정이 굉장히 성공적이었던 점을 착안해 탄생한 성프란시스대학의 대상은 노숙인 이었고요. 고령의 노숙인이지만 삶을 변화시키는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신 거죠.

 

Q : 신부님이 처음 발령받았을 2009년에는 번째 기수였나요?

A : 5기였을 때라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서 있었죠. 삼성코닝으로 부터 지원을 받아 예산도 안정적이었고요. 우리 선생님들이 대학에서 누릴 있는 모든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고 운영해 나갈지 고민하면 되었죠.

 

Q : 당시 인문학교실은 동자동에 있었다고 들었어요.

A : 설립 당시에는 서울역 13번출구 빌딩3층에 교실이 있었어요. 좁은 공간 안에 오밀조밀했지만 역동성이 있었죠. 그만큼 친밀감도 있었고요. 그러다 풍족한 지원 덕분에 후암동으로 옮겼어요. 전문가가 디자인하고 우리 선생님들이 직접 벽돌도 붙이고 2층에는 카페도 있고 좋은 장소였는데 예산이 끊기면서 나오게 되었다네요.. 현재 교실이 너무 좁아서 좋은 공간으로 가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Q : 서울역 다시서기희망지원센터도 작은 컨테이너에서 시작되었다고 들었어요.

A : 맞아요. 서울역 광장에서 컨테이너 2, 직원 4명으로 시작했습니다IMF 때 거리에 노숙인이 쏟아지니 노숙인 쉼터가 어마하게 생겼어요. 그곳들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다시서기센터가 맡았어요. 서울역 YTN건물 뒤쪽에 허름한 사무실에서 시작했죠. 근데 현장과의 접근성이 떨어지고 진료소도 만들어야 해서 서울역 광장에 센터자리를 요청해도 서울역 측에서 절대 허락을 안 했어요. 그래서 임영인신부님이 새벽 2시에 9M짜리 컨테이너 2동을 바닥에 용접해서 세워 버리셨어요. 그리고는 이 공간을 우리가 쓰겠다 하면서 안에서 농성을 시작하셨지요. 

 

Q : 용접을 해버리셨다구요? ! 멋지세요.

A : 그렇게 노숙인 현장대응이 가능한 서울역 다시서기희망지원센터가 시작됐어요. 숙대입구역 부근에 있는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는 일시보호시설이 거고요. 어느 하나 허투루 만들어진 없어요. 프로그램도 하드웨어도 그렇지요.

 

Q : 그런 같습니다. 현재의 센터와 인문학 대학은 많은 분들의 열정과 노고의 결실이네요.

A : 제가 있던 10 동안에도 한번도 같은 해가 없었어요처음에는 졸업여행이나 소풍, 수련회 장소를 운영진이 일방적으로 정했다면 나중에는 선생님들의 의견을 중요시 해서 투표를 했어요. 제일 많이 나오는 곳이 어딘지 아세요? 제주도예요. 근데 예산 문제상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산 부족으로 없다 말씀드리고 선생님들끼리 토의를 하도록 했어요. 그럼 의견이 나뉘어요. 바다에 가고 싶은 사람, 산에 가고 싶은 사람 다르니까요. 그러면 교수님들이나 자원활동가들이 바람잡이가 되어 중재를 합니다. 그렇게 의견이 모이게 하고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하지요. 학사 일정 역시 선생님들 의견을 물어보고 스스로 결정하게끔 하는 방식도 시도해 보았고요. 실패한 것도 많았지만 경험 자체가 긍정적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012 성프란시스대학에서 출간한 거리의 인문학 보시면 인문학의 시작부터 있을 거에요.

 

Q : 신부님의 예전 인터뷰에서 말씀하신 '노숙인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라는 내용이 인상 깊었습니다. 학대받는 아이가 자라 노동력이 다하면 버림받고 노숙인이 된다는 내용으로 기억하는데요. 그렇다면 신부님이 만난 봉천동의 아이들과 서울역의 노숙인은 같은 사람이라고 봐도 될까요?

A : . 어릴 가난으로 학습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자라서 육체가 건강할 때는 신도시건설이나 아파트 짓는데 몸을 팔러 다니면서 사회공헌을 하죠. 그것도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일조를 하시는 거죠. 그러다 나이가 들어 이상 일을 못하게 되면 버려집니다. 배우지 못한 성인 남자가 몸까지 좋아지면 끝이예요. 기회라는 것이 엄청 불평등, 불공정하거든요.

 

Q : 그럼 우리 사회의 노숙인은 개인의 문제라기 보단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고 보시는 건가요?

A : 개인적 문제도 있죠. 하지만 우리 사회는 노숙인을 개인의 잘못으로만 몰아가요. 게을러서 모자라서 노숙인이 된다고 생각하죠. 그래야 국가가 책임을 있거든요.

 

Q : , 책임지지않기.

A : 하나 노숙인을 멸시하는 이유 하나는 나도 노숙인이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서울역 앞에 택시가 줄로 늘어서 있잖아요? 지금은 덜하지만 예전에는 택시기사들이 담배를 피면서 노숙인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곤 했지요.

 

Q :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는데요?

A : .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분들이 우리 선생님들 바로 윗 단계예요. 삐끗하면 노숙인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인 거죠. 그 두려움이 욕을 하게 만드는 거예요. 자기는 바닥으로 안 떨어질 거라고 스스로 위안하는 거죠. 두려우니까요.

 

Q : ~

A : 그런 마음들이 노숙인을 자꾸 개인화시키는 거죠. 사회복지 사각지대애서 지원을 받고 성장하여 사회의 변두리에서 맴돌다가 몸이 나빠지고 정신이 피폐해져서 밑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는데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회가 책임감을 갖고 같이 바라봐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인문학수업은 박탈당한 교육기회와 공동체생활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무너진 자존감을 세우고 남은 인생의 방향을 바꿔 나가는 거지요.

 

Q :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이 생각보다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같습니다.

A : 낙인을 찍어버리면 사람들은 이상 올라갈 수가 없어요. 우리 사회가 너무 잔인해서 일반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중년에 외줄타기 하다 떨어지면 올라갈 없어요. 우리 사회는 계단이 없고 줄만 있어요. 줄이 끊어지면 끝인 거죠.

 

Q(박석일) : 저도 IT스타트업을 했다가 투자를 받아 말아먹고 직원들 밀린 월급 주고 남은 4만원 들고 서울역에 왔어요. 말씀하신 거처럼 떨어지니까 올라갈 없었어요.

A : ~ 그런사연이 있으셨구나. 너무 힘드셨겠어요? 고생하셨네요.

 

Q(박석일) : 대부업체에서 계속 찾아오니 주민등록증을 말소시켜 버렸어요. 통장을 만드니 일도 못했고요.

A : 파산면책은 하셨어요?

 

Q(박석일) : 아니요. 다시서기에서 전일제 일을 주셨는데 조건이 신용회복이었어요. 달에 30만원씩 갚고 있는데 스트레스를 받으니 너무 좋죠. 저는 혜택받은 사람 이예요.

A : 신용회복 과정이 년씩 걸리겠지만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노숙인들분들 상당수가 너무 선해서 문제인 경우가 많아요. 쉽게 말해 털리는 거죠. 내주고 무일푼으로 나오는 거예요.

 

Q : 맞아요. 그런거 같아요.

A :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진창이 아닌 마른 풀싶에라도 데려다 놔야 살아가잖아요.

 

Q : 노숙인이 신분이 아닌 과정이라고 표현하신 글도 좋았습니다.

A : 노숙인은 타이틀이 아니라 단지 힘든 시간 속에 있는 과정일 뿐입니다. 과정 속에 있는 사람들을 낙인 찍듯이 신분화하면 안되지요. 노숙인이라는 말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일본에서도 그냥 홈리스라고 하거든요. 가정을 잠시 잃었을 다시 되찾기 위한 과정일 뿐인데 부정적인 인식으로 보는 시선이 아쉽습니다.

 

 

Q : 인문학과정  기수가 입학하고 졸업하기 까지 많은 인적자원이 투입되고 있잖아요?

A : 그렇죠. 중요한 그룹- 노숙인에 대한 이해도가 풍부한 교수님그룹, 자원활동가그룹, 실무자그룹 이렇게 축이 있어요.

제가 근무할 계셨던 교수님들이 그대로 계시는데 분들과 달에 번씩 머리를 맞대고 운영위원회를 열어 여러 상황을 협의해 나갔어요.

자원활동가들은 선생님들과 수업을 함께 들으면서 친밀해 지다 보니 저나 교수님, 학문국장한테 하는 얘기를 자원활동가들에게는 솔직히 얘기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외부에서 모셔오던 학무국장을 현장 실무자로 대체하면서 사례관리가 용이해졌고 여러 필요한 자원들을 찾고 지원, 보급하는 일을 담담했어요.

저는 학무국장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어요. 학무국장들에게 말했죠. 교수진이나 관리자들과 싸워도 좋다. 무조건 선생님들 편을 들어서 선생님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원하는 방향이 무언지를 파악하고 선생님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적극적인 학무국장들은 운영위원회 운영진들과 계속 대립을 했어요.

 

Q : 제가 옆에서 지켜봐도 학무국장님들이 정말 애를 많이 쓰시더라고요.

A : . 선생님들의 손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죠. 선생님들 쪽방에 가서 자다 피부병이 옮기도 하고 3년간 학무국장을 정경수 대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나오시는 선생님들 집까지 찾아가고 그랬어요. 매일 찾아가서 무슨 일이 있는지 묻고 상담하고 밥을 같이 먹고 그랬죠.

 

Q : 보이지 않는 많은 노력들이 지금의 기수까지 오게 만들었네요.

A : 센터 전체 직원이 지금은 60명을 넘지만 당시에는 25 남짓 됐어요. 급여도 엄청 박봉이었죠. 처음 부임했을   급여가 150만원이었는데 5년 지나니 20만원 올려주더라고요. 모든 직원들이 같았어요. 다른 사회복지기관과 비교가 정도였죠. 새로운 실무진들에게 예전 같은 상황을 요구할 없지요. 그때는 직업인 사회복지사라기 보단 활동가로서 일을 했으니까요. 사람들이 이제 간부급이 되었는데도 아직 야근을 해요.

우리 센터의 최대 강점은 실무진들의 역동성입니다. 조직이 노화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생각이나 방향까지 노화되지 않도록 늘 고민합니다. 하지만 잘 될 거예요. 실무자들 조직 구조가 워낙 탄탄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Q : 센터와 실무진들에 대한 자부심이 보기 좋습니다. 센터장님.

A : 노숙인 센터 저희 센터가 제일 크고 선도적인 센터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전국의 노숙인 시설에서 견학을 정도지요. 많은 노숙인 프로그램이 여기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렇게 있었던 실무진들이 함께 꿈을 꾸었기 때문이예요. 대상자에게 필요한 무엇인지 고민하고 인문학이, 진료소가, 문화 카페가, 자전거공장이 필요하다고 아이디어를 내고 실천했기 때문이죠. 남영역 밑으로 내려가면 자전거 수리공장이 있는데 일자리 제공을 위해 저희가 설립했어요. 많은 졸업생들이 거기서 일하고 있죠. 꿈꾸면 이루어지거든요.

 

Q(박석일): 신부님 제가 17이거든요.

A : ~ 17 선생님이시구나. 코로나로 인해서 아쉬운 17기셨네요.

 

Q(박석일): . 대면 수업은 3분의 1정도 하고 나머지는 비대면 수업을 했는데 그렇게 아쉽더라고요.

A : 맞아요. 정말 아쉬우셨겠어요. 비대면 수업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Q(박석일): 저희가 사는 곳이 쪽방이나 고시원이다 보니 교수님들의 질문에 대답을 못하는 거예요. 옆방에 피해를 줄까 봐요. 비대면 수업을 16, 17기는 동기간 유대감이 아무래도 약하고요. 18기부터 어느 정도 정상화되긴 했지만 19기부터 예전의 활기가 다시 돌아오면 좋겠어요.

A : . 맞습니다. 예전에는 봄에는 운동회하고 가을에는 야유회 가고 명절에는 교실에 모여 명절 음식 해먹으며 윷놀이도 하고 그랬죠. 코로나로 인해 동문 모임도 전혀 안되고 있다고 하니 정말 아쉬워요. 졸업생의 허전함을 잡아주는 것이 동문회인데 다시 자리매김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Q(박석일): 제가 작년에 18 선생님들을 서포트 하며 느낀 건데요. 처음에는 선생님들이 교수님들 질문에 당황하고 글쓰기도 부담스러워 하거든요. 그러다 2학기 때는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도 넘어서고 졸업이 가까워 오면 아쉬워서 1년만 하면 좋겠다. 그래요.

A : 자존감이 올라가고 자신감이 붙은 거죠.

 

Q(박석일): . 지금까지 억눌려 살던 사람들이 자존감도 찾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인문학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이제 혼자가 아니구나! 느끼는 거죠.

A :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효과 하나가 가족을 만드는 일이예요. 졸업생들이 돌아가시면 성프란시스대학 장으로 장례를 치러드립니다. 그럼 졸업생 분들이 오세요. 사람이 태어날 가장 처음 보는 사람도 가족이고 죽을 곁에 있는 사람도 가족이잖아요. 그러니까 번째 가족을 만드는 곳이 성프란시스대학이예요. 기수 동기가 가족이에요. 같이 먹고 같이 공부하고 같이 놀러 다니고 그런 유대감이 만들어지니 가족이죠.

일요일에는 인문학 교실에서 같이 예배도 드리던 졸업생 분들 동안 수명이 돌아가셨는데 명절 때는 분들 호명하고 기도하는 별세자 예배도 같이 드려요

 

Q(박석일): 인문학에 때는 나와 거리가 세상이다 싶었는데 동료가 생기고 유대감을 느끼다 보니 졸업이 두려운 거예요.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졸업생을 위한 특강 프로그램을 만들면 어떨까요?

A : . 저도 알고 있습니다. 센터 주변을 계속 맴도는 분들도 많이 있고요. 센터가 친정 같은 존재인 거죠. 좋은 후속모임이 생길 있도록 건의해 보겠습니다.

 

Q : 19 지원자가 적어서 지원기간을 연장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A : 현재 서울역 노숙인의 수가 절반 이하로 떨어졌어요. 그러니 인문학 지원자도 줄어드는 반면 서울시에서 자체 운영하는 인문학 프로그램 같은 노숙인 복지 프로그램은 확장 되고 있고요.

 

Q : 저는 노숙인분들의 수준이 예전보다 높아져 많은 분들이 지원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반대네요?

A : 현재 노숙인 복지 패러다임은 주거지원으로 가고 있어요. 하우징 퍼스트라고 주거를 먼저 지원하고 거기에 서비스를 붙이는 형태지요. 주거를 잡게 되면 이상 노숙인이 아니라 지역 주민이 되니 주민센터에서 복지 서비스 제공하기가 쉬워지고요.

 

Q : 그런 이유로 노숙인분들이 줄어드는 거군요?

A : 인문학에 들어오려면 읽고 알아야 하고 기본적인 멘탈 수준이 되어야 하는데 지원할 있는 여건과 환경이 되는 분들이 주거지원을 받아 이탈하고 알코올 의존증이나 정신질환이 있는 분들만 현장에 남는 거죠. 또는 구속 받는 싫으신 들이죠.

제일 중요한 문제는 예산이지요. 예산이 넉넉했을 때처럼 선생님들께 최고급으로 해드리고 싶어요. 어디서도 대접받아 오지 못한 힘든 상황 속에서 누구보다 가장 귀하게 대접받는 길을 빨리 찾아야 같습니다.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Q : 제가 아웃리치 활동을 2 넘게 했어요. 처음에는 활기찬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무기력과 분별심이 들더라고요. 신부님께서 일을 오래 하시면서 드는 전반적인 감정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어떻게 극복 하시는지도요.

A : 큰딸이 대학생인데 작년 여름부터 6개월 정도 아웃리치를 시켰어요. 처음에는 재기 발랄하게 하다가 3개월쯤 지나니 거리 선생님들 욕을 하는 거예요.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데 술만 마시고 치료를 안받는 건지 따뜻한 곳에 들어오시라 해도 추운 곳에서 주무시는지 이해가 안되고 그러다 감정이 나빠지니 화가 나는 거죠.

하지만 사람은 그럴 밖에 없는 상황이 있어요. 예전에 센터식당에 식사하러 오셔서 중년의 여성만 보면 이유 없이 욕을 하던 분이 계셨어요. 너무 심해서 하루는 커피 한잔 드리면서 살아온 얘기 들려달라고 했지요. 중학교 가출해서 지금까지 떠돌며 살았는데 가출한 이유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아들에게 투사한 어머니의 폭력 때문이더라고요. 분에게 모든 여성은 어머니가 투사된 대상이었던 거죠.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이해도 납득도 안되고 아무리 기회를 줘도 변하지 않는 분들을 보면서 너무 에너지를 쏟다 보면 소진 됩니다. 정작 사람한테는 영향도 주지 못하고 관계만 나빠져요. 관계가 틀어지면 상담도 서비스 제공도 없고요. 감정이 너무 매몰되지 않는 선에서 듣고 사람의 결핍을 찾으려고 한다면 좋을 같아요.

동료들 간에 얘기를 많이 하면서 해결책도 찾고 서로 위로해주기도 하고요. 동료 간의 대화는 스스로 마음을 지킬 있는 약이지요. 우리가 오은영박사처럼 해결할 수는 없어요.

 

Q : 18 졸업식 신부님의 축사가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아주 작은 각도의 변화로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인문학 수업이라고 말씀하셨죠?

A : . 인문학을 통해 너무 변화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살짝 다른 방향으로 틀어만 놓아도 길도 꾸준히 가다 보면 완전히 다른 자리에 서있는 분들을 근근히 봐요.

인문학을 거치면서 특히 대인관계가 좋아지는 분들을 많이 봤어요. 사회생활에 불편이 있을 정도로 내성적이었던 분들이 졸업하실 변화된 모습을 보면 살짝만 건드려 놓아도 변화를 내는 것이 인문학이구나. 생각합니다.

 

 

Q : 다시 꾸는 꿈이 있으세요?

 A : 현장에 남아있는 노숙인들 집중 보호가 필요한 정신질환이나 알코올 중독이신 분들이 많아요. 이제 저희도 이런 상황에 대해 전문적으로 대처할 있는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되는 거죠. 실무자들의 수련을 통해 정신전문사회복지사 자격을 갖추게 그에 맞는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 탄탄한 시스템을 만들고 안정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할 있는 여건을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다시서시센터가 만들어낸 자랑스러운 학교가 내년이면 20주년이 됩니다. 10주년 때는 심포지움을 열고 15주년때는 북콘서트를 했는데 20주년 때는 뭔가 의미 있는 기념식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학무국장들, 교수님들과 함께 TF팀을 만들어 졸업생 선생님들의 의견도 듣고 새로운 청사진을 만드는 계기가 되도록 생각입니다. 올해부터 작업을 시작해야겠지요.

Q : 기대하겠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노숙인들 뒤에는 이토록 많은 손길이 있습니다. 중심에는 여신부님이 계시지요. 평일에는 다시서기 센터장으로 주일에는 선생님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신부님으로 명절에는 번째 가족이 집안의 어른으로 딸의 고민을 듣는 다정한 아빠로 오롯이 타인의 몫인 듯한 센터장님의 시간이 부디 지치지 않길 기도합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여재훈 센터장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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