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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16호

[역전 칼럼] 나는 살아 있다

by 성프란시스 2023. 3. 20.

박경장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글쓰기 교수)

 

 

인문학 10기 김대인 선생님

 

영락없는 해리포터였다. 2014년 인문학 10기로 들어온 김 선생님을 처음 보았을 때, 해리포터가 한국에서 태어나 60대 초로에 들면 딱 저런 모습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감지 않아 기름 떼 낀 단발머리에 귀걸이 줄을 한 동그란 안경, 안경 너머 호기심 가득한 말간 눈, 늘 웃음기 머금은 입술. 오다리에 뒤뚱 걸음. “김 선생님! 인문학 마법학교 호그와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설렘과 기대로 파릇한 봄학기 어느 날, 후암동 인문학교실에 들어섰는데, ‘! 내가 정말 마법학교에 온 건가.’ 김 선생님 손엔 마술봉이 들려있었던 것인데. 안경 너머 동그란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마술봉을 흔들기 시작했다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Mama, put my guns in the ground/I can’t shoot them anymore.” 나도 모르게 스르르 혀가 풀리면서 그 주문을 따라했다. “낙낙 낙킹 온 헤븐스 도어~~~”

그렇게 선생님과 나 사이에 맺어진 예술과 주술의 연이 시작됐다. 때로는 사제 간으로 때로는 벗으로. 일 년 간 글쓰기수업에서 선생님이 쓴 글은 단 한 편에 불과했지만, 내가 들은 선생님의 연주와 함께 부른 노래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선생님은 7-80년도에 미8군과 이태원 등지의 클럽에서 기타연주자로 활동하신 예술가셨다. 우리나라 내로라하는 1세대 기타리스트들과도 함께 연주하고 무대에 선 프로 기타리스트였다.

하지만 이젠, 손이 떨려 기타지판도 잘 안 잡혀요라고 말할 정도로 선생님은 주술(酒術)’에 빠져 있었다. 선생님과 후암동 시장골목 포차에서 술자리를 몇 차례 했다. 다행인 건 선생님은 폭음도 하지 않았고 주사도 전혀 없었다. 계란찜과 노가리 안주에 각각 막걸리 한 병씩 마시고 일어나는 정도였다. 문제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는 것. 수십 년 그러셨으니, 간이 온전할 리 없고, 관절염으로 걸음이 뒤뚱거리는 것 또한 당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눈이 맑을 수 있을까. 음악의 주술 탓일까.

그해 여름, 우리는 동해안으로 인문학 여름수련회를 떠났다. 첫날 한계령에서 오색 방향으로 수려하게 내리뻗은 남설악 흘림골계곡등반을 했다. 당연히 다리가 불편하신 김 선생님은 차에 계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막무가내로 따라나서는 게 아닌가. “선생님, 걸으실 수 있겠어요?” “아이~~몰라요. 무조건 따라갈래요.”

시작부터 가파른 고갯길인지라 선생님은 서너 걸음도 떼지 못 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선생님 안 되겠어요. 올라타세요. 이제부터 제 등이 한계령 능선입니다. 꽉 잡으세요.” 체격이 건장한 센터 실장님과 번갈아가며 선생님을 등에 업고 3시간 반 설악산 계곡등반을 했다. 8년이 지난 지금도 오십 중반 나이에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눈 휘둥그레진 물음에 나는 무슨 무용담처럼 늘어놓곤 하는데, 아마도 등에 업힌 늙다리 해리포터가 무슨 마법을 부렸거나 주술을 걸었음에 틀림없다. 선생님을 업고 가파른 능선을 넘어 흘림골 제일 비경 여심폭포를 함께 훔쳐보았을 때 그 짜릿함은 함부로 발설되어서는 안 된다.

매 기수마다 일 년 인문학 과정이 끝날 즈음 시와 노래로 문예발표회를 연다. 나는 대뜸 선생님께 선생님, 이번 문예발표회 때 기타로 무대를 확! 뒤집어버리면 어떨까요?” “아이! 교수님, 말도 안 돼요. 기타 안 친 지가 몇 년인데, 손도 떨리고, 기타도 앰프도 모두 없어요.” “기타나 앰프는 제가 어떻게 해볼 테니, 먼지 쌓인 가방을 다시 여는 겁니다. ‘돌아온 장고’.”

기타나 앰프 같은 거야 언제든지 낙원상가 친구들한테 빌리면 되지만, 손이 굳어버린 데다가 떨리기까지 하니 . . .” “! 선생님, 오늘부터 한 달, 굳은 손을 푸는 겁니다. 선생님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성탄절 며칠 앞두고 열린 10기 문예발표회, 후암동 교사 문화공간 길카페 무대 위에 마침내 돌아온 장고가 올랐다. 검고 낡은 가방에서 꺼내든 전기기타에 잭을 꼽아 앰프에 연결하고 음향을 조절하며 튜닝 테스트하는 동작 하나하나에 전문가의 포즈가 배어났다. 세팅이 끝나고 자세를 잡자 일동 정적. “~~~” 귀걸이 줄에 매인 동그란 안경 너머 눈에서, 어깨끈에 매인 전기기타에서 번개와 천둥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 징가 지징가 지지지지~ 징 에잉~~이 이잉~~.” 이어지는 속사포 같은 애드립 스케일, 앰프조작으로 순간순간 튀어나온 기괴한 사운드, 볶은 콩 튀듯 지판 위를 날아다니는 손가락, 미친 듯 물어뜯는 이빨연주까지. 그날 밤 연주 내내 우리는 인문학 호그와트 마법학교 선생님의 연주술에 넋을 뺏긴 좀비 같았다. 마지막 연주곡인 밥 딜런 ‘Knockin' On Heaven's Door’로 선생님 스스로가 주술을 풀 때까지.

 

10기 문예발표회에서 김대인 선생님 연주

 

그렇게 1, 인문학이라기보다 예술과 주술의 마법학교를 졸업한 선생님은 졸업문집에 시 한 편을 제출했다.

 

/ 김대인

 

사랑하자 미치도록, 아니 죽도록

해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아직도 남은 저 먼 길을 걸어가자

나는 살아 있다

 

사랑하자 미치도록, 아니 죽도록

낙엽 떨어진 그 먼 길을 걸어가자

추운 겨울 내리는 흰 눈은 얼마나 아름답더냐

해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나는 살아 있다

사랑하자 미치도록, 아니 죽도록

 

곡만 안 부쳤다 뿐이지 영락없이 노래가사를 염두하고 쓴 게 분명하다. 선생님의 삶은 돌아온 장고무대를 계기로 다시 충전됐다. 비록 술로 인해 몇 주 지속되지 않았지만, 후배들을 위한 주말 기타교실을 열기도 했다. 후암동 쪽방에 사시기에 졸업 후에도 학교 오가는 길에 선생님과 자주 마주쳤다. 아이처럼 뒤뚱 웃음으로 달려와 반가운 인사 건네시는 선생님. 가끔 길카페에서 통기타 두 대로 함께 노래 부르기도 하고, 수업 후 후암동 시장 골목에서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다.

졸업 후 3년 쯤 됐을까. 선생님은 후암동에 있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고 하시면서 무조건 대학로로 주거를 옮기셨다. 기타 들고 거리 젊은이들 속으로 들어가 예술과 주술을 나누겠단다. 그렇다. 선생님은 나는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미치도록, 아니 죽도록예술로 자신에게 사랑고백을 하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선생님은 예술로도 주술(酒術)의 마()를 쫓아내지는 못했다. 1년도 버티지 못 하고 후암동 쪽방으로 다시 돌아온 선생님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걸음은 더욱 뒤뚱거리고 더뎌 함께 걸으려면 달팽이걸음을 해야 했다. 그 후로 얼마 되지 않아 복수가 차 한동안 병원 입, 퇴원을 반복해야 했다. 어느 여름 해 거리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교수님, 이젠 걱정 마세요. 병원을 서울대병원으로 바꿨어요. 그 전 시립병원 의사는 술 먹으면 죽는다는 말밖에 안 했는데, 서울대 의사는 그런 말을 안 해요. 역시 서울대 의사는 뭐가 달라도 달라요.” “간은요?” “이식만 하면 살 수 있대요.” “언제 이식 받을 수 있대요? 비용은요?” “기다려 봐야죠. 돈이야, 은행이 있잖아요.” 난 지금까지도 귀걸이 줄에 매인 동그란 안경 너머 그 말간 눈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20183월 초, 14기 입학식에서 선생님을 다시 뵈었다. 살이 쏙 빠진 얼굴엔 병색이 완연했다. 식이 끝나고 선생님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데, 입맛이 없다고 밥 한 술을 뜨지 않으셨다. 후암동 시장 골목까지 선생님 팔짱을 끼고 달팽이걸음으로 걸어가 인사하고 헤어졌다. “선생님, 밥은 꼭 챙겨 드셔야 해요. 꼭이요

일주일 후, 선생님은 아직 많이 남아 있는 해를 뒤로하고 쪽방에서 눈을 감으셨다. 시신은 포항에서 약국을 하는 누나가 거두었다고 했다. 후암동 교사엔 귀걸이 줄 안경을 하고 미소 머금은 영정사진을 모셔놓은 빈소가 차려졌다. 나는 꽃 대신 술 한 잔과 선생님이 내게 준 피크를 올려놓고 절을 올렸다. 그리고 돌아와 성프란시스 총동문카페에 조사를 지어 올렸다.

 

 

국화 대신 피크를 / 박경장

 

몸은 팔십 노인인데 얼굴 표정은 10대 소년인 당신. 잘 걷지도 잘 먹지도 못해 병색이 완연한데도 얼굴 한 번 찡그린 적 없고, 아픈 기색 한 번 내비친 적 없던 당신. “까짓것, 간 이식수술만 하면 된다면서 삶과 죽음 사이의 빗금을 싱겁게 지워버리던 당신. 만나면 반갑다고 길거리에서 아이처럼 폴짝폴짝 뛰던 당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난 그게 항상 궁금했는데.

 

제가 선생님을 돌아온 장고라 불렀지요. 손이 떨린다며 먼지 쌓인 가방을 열고 꺼내든 전기기타. 10기 인문주간 문예발표 무대에 오른 선생님은 정말 돌아온 장고였습니다. 가방에서 꺼내든 전기기타에서 기관총같이 뿜어대던 징가징~ 사운드에 우린 모두 쓰려졌지요. 그 의기양양하던 해리포터 같은 표정이라니!

 

조금만 드셔요.” “평생을 먹은 술인걸요. 많이 안 먹어요. 아니 못 먹어요.” 후암시장 포차에서 마냥 행복해 하던 그 표정에서 제가 어떻게 술병을 치울 수 있었겠어요. 더욱 단단히 굳으라고 시멘트 같은 간에 술을 붓는 거라 해도.

 

여름수련회 설악산 흘림골 등반. 평지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선생님을 이수범 실장님과 제가 번갈아가며 업고 올라갔죠. 한계령 높고 깊은 골에 숨은 여심폭포. 그걸 보여주려고, 그걸 보고 싶어서 아이처럼 업힌 환갑 넘은 소년. ! 생각만 해도 우린 너무 장했어요.

 

인문학 안 국장님 사무실 한켠 액자에 갇혀 환히 웃고 있는 당신. 이미 소주 반병은 드셨군요. 한 잔 따르고 큰절 올립니다. 기타만 잡으면 함께 부르던 노래 'Knockin' On Heaven's Door.' 김대인 선생님! 천국문 두드리고 계신 거죠? ‘knock, knock, knock...’ 천국문 뒤엔 뭐가 있나요. ‘으흐~~기타와 술.’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술 한 잔과 국화꽃 대신 피크 하나 올립니다. 술 그만 먹으라, 시끄럽다 소리 칠 사람 하나 없는 천국에서 마음껏 기타 치시고 목축이셔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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