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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15호

[인물 인터뷰] 그리듯이 사는 삶, 아까운 사람 김순철

by 성프란시스 2022. 12. 2.

/성지후

인터뷰어/성지후, 박석일

인터뷰이/김순철

(성프란시스 18)

이번 호 인물 인터뷰의 주인공은 성프란시스대학 18기 김순철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의 손과 마음을 거친 글과 그림을 볼 때면 혼자 떠돌며 마주한 선생님 안에 차곡차곡 쌓인 세상이 궁금해지곤 했습니다. 긴장되고 들뜬 마음으로 선생님과 마주 앉았습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감도는 기대감과 함께 였습니다.

 

Q : 선생님 소개 부탁드려요.

A : 저는 학교(성프란시스대학) 들어오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떠돌이에 알코올 중독자 행패쟁이 였어요. 그런 사람이 인문학에 들어와서 180° 완전히 바꿨어요.

 

Q : 그 말을 들으니 처음 선생님과 대화한 날이 생각나요. ‘저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는데 지금 많이 변했어요. 수업 들으려고 술을 많이 자제하거든요. 주변에서 다 놀라요라고 하셨잖아요?

A : 예전에는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사회복지사님이 와도 문도 안 열어주고 계속 마셨는데 지금은 음주 습관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혼자가 아니라 같은 외로움을 지닌 동료들과 같이 마시다 보니 술에 대한 좋은 감정까지 생겼다고 할까요.

 

Q : ! 그때도 담담하고 솔직한 자기고백이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는데. 또 하나 순철이는~’ 라고 스스로 성함을 부르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지요.

A :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하는 거 같아요. 내 이름을 기억해주면 좋으니까.

 

Q : 성프란시스대학에 오시기까지 선생님의 인생 여정을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세요.

A : 내가 교수님들께 뻥을 쳤어요.

 

Q : 뻥이요?

A : 내가 부모님 얼굴을 모른다고 했는데 어머니 얼굴은 모르지만 솔직히 아버지는....진짜 나빴어요. 고흐(반 고흐)가 아버지한테 구박 당한 것처럼 나도 그랬어요. 나한테는 악마였죠.

 

Q : ~아버지를 기억 하시는군요?..

A : 우리 아버지가 나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다 서울에서 우리 어머니를 만나 나를 임신했는데  능력이 없으니 고향 보성으로 같이 내려오셨어요. 내가 3살이 됐을 때 아버지 앞으로 영장이 나와 군대를 가야 하니 아버지 자존심에 어머니에게 서울 친정에 가있다 제대하면 오라고 했대요. 어머니가 어린 나 때문에 버텼는데 아버지의 폭행이 너무 심해지자 도망치듯 집을 나가 버리셨다고 할머니가 그러시더라구요. 어머니 생사는 몰라요.

 

Q :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그럼 아버지가 군에 가시고는 누가 돌봐 주셨나요?

A : 할머니랑 큰 집에서 살았어요. 근데 큰 집도 가난해서 할머니가 눈치를 많이 보셨대요. 아버지는 제대하고 동네 여기저기 머슴살이를 했대요. 나는 8살 때까지 할머니랑 살다가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아버지랑 새 어머니랑 살기 시작했어요. 새어머니는 나보다 10살 많았는데 저를 친자식처럼 정성껏 잘 보살펴주셨어요.

 

Q : ~다행이네요.

A : 근데 9살 때 동생이 태어나면서 드라마처럼 완전 바뀌어버렸어요. 내 존재 자체를 보기 싫어하더라구요. 아버지는 어린 아내가 얼마나 소중 했겠어요? 어머니가 나를 싫어할 때마다 나한테 고통을 주는 거예요. 겨울에 그 추운 날 옷 다 벗기고 밖에 끌고 나가 찬물을 막 뒤집어 씌우고 그랬어요. 어리니까 도망도 못 가고 그냥 붙어 살았죠.

 

Q : ~얼마나 무서우셨어요?

A : 밥을 안 주다시피 하니 동네 고구마 밭 뒤지고 학교도 못 가고 말썽이나 피우고 다녔죠. 우리 할머니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저를 다시 큰 집으로 데리고 갔어요.

 

Q : 아버지 집과 큰 집이 가까웠어요?

A : 집성촌이라 한 동네였어요.

 

Q : 할머니 마음이 많이 아프셨을 거 같아요?

A : 고모가 그러시더라고요. 내 머리카락 하나하나 뽑아서 갚아도 할머니한테 다 못 갚을 거라고. 그런데 아버지 폭력은 끝나지 않았어요. 명절날 친척들이 모여 술 한잔씩 들어가면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한테 뭐라고 하는 거죠. 순철이 저렇게 놔둘 거냐고 그러면 그 화풀이가 저한테 돌아와요. 그 날도 친척들이 아버지한테 뭐라고 하니까 아버지가 갑자기 와서는 저를 들어서 바닥에 패대기를 쳤어요. 짜부라진 개구리 같았죠.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해요. 그때 생각했어요. 나중에 크면 꼭 죽여버리겠다.

 

Q : 9살에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A : . 내가 크기만 하면 꼭 죽여버리겠다는 생각으로 이 악물고 살았어요. 그 일이 있고 이장님 댁에 꼬마머슴으로 들어갔어요.  

 

Q : 꼬마 머슴이요?

A : 옛날에는 부잣집에 머슴이 있었어요. 난 상머슴 밑에 꼬마머슴으로 들어갔죠. 문 열면 소하고 소 죽 끓이는 가마솥이 있는 행랑에서 지냈어요. 이장님이 학교는 보내주셨는데 학교 가는 척 나와서 다리 밑으로 여기저기 다녔어요. 도시락이 없으니 가기도 싫고. 갔다 안 갔다 하며 12살까지 머슴살이를 했어요.

 

Q : 도시락을 못 싸 가셨으면 점심시간에는 어떻게 하셨어요?

A : 내 최종학력이 초등학교 4학년인데 네 분 선생님 이름을 다 기억해요. 그 선생님들이 뚜껑에 친구들 밥 한 숟가락씩 퍼다가 줬어요. 그때는 한 반에 60명이 넘을 때라 한 숟가락씩 모으면 친구들 밥보다 더 많아졌죠. 나중에는 그것도 자존심 상하더라고요.

 

Q : 이장님 댁에 계실 땐 가족들과 왕래가 있었나요?

A : 할머니도 아버지도 만나지 않고 동네 다니면서 말썽이나 피우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니 내가 한 것도 안 한 것도 다 내가 한 게 되어버리는 거죠. 나보다 겨우 한, 두 살 많은 동네 형들이 벌써 담배 피우고 그랬는데 그 형 들한테 괴롭힘 당하고 그렇게 지냈어요.

 

Q : 이장님 댁 이후는 어땠어요?

A : 집 안 어른 중 한 분이 양복점을 하셨는데 저한테 양장 기술 가르치려고 저를 데려 가셨죠. 바지 밑단 뜨는 거부터 배웠어요. 그 집 애들이 나랑 동갑이었는데 걔들은 가방 메고 학교 갈 때 나는 코 묻은 손으로 바짓단 뜨는 거예요. 바지에 콧물이 다 묻으니 혼나기도 하고 그렇게 1년이 지나도 실력이 안는다고 쫓아 내더라구요. 다시 시골로 돌아왔지요.

 

Q : 시골이라면 어디 말씀이세요?

A : 고향 동네에 동갑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 집에 방이 되게 많았어요. 우체부 하시던 친구 아버지가 저를 불쌍하게 보셨는지 방 하나를 내어 줬어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으니 나무도 하고 군불도 때면서 버티고 살았어요.

그러다 눈치가 보이기 시작할 때쯤 14살 되던 명절에 백씨 아저씨라는 분이 찾아와서 같이 가자고 하더라구요. 먹여주고 재워준다 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누가 데려가든 죽이든 살리든 부모는 신경도 안쓰고 할머니는 제 얼굴 보면 마음이 아프니까 안 보고 살 때라 혼자인 거 보다 나으니 따라가는 거죠. 그렇게 간 곳이 대전에 있는 중국집이었어요.

 

Q : 중국집 생활은 어땠어요?

A : 글은 내 이름 석자 밖에 모르고 오토바이는 커녕 자전거도 못 타니 걸어서 배달을 했어요. 주방장이 국자로 머리를 때려도 기술 배워야 하니 참아야 했지요.

그때 초등학교 시절 나에게 잘 해 주셨던 선생님들한테 대전에 일하러 왔다고 편지를 썼어요. 글을 모르니 주방장님이 대신 써 주셨죠. 선생님들이 답장도 해 주셨어요.

 

Q : 고향에는 안 가 보셨나요?

A : 3년 지났을 때 아버지가 찾아왔어요. 아버지는 사장한테 그 동안 일 시킨 월급 달라고 하고 사장은 자전거도 못 타고 글씨도 모르는 걸 먹여주고 재워줬는데 무슨 돈이냐고 서로 도둑놈이라 그러면서 대판 싸우는데이러니 내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아버지 모른다고 한 거예요.

 

Q : 인터뷰를 해야만 알게 되는 얘기네요.

A : 사장은 돈도 안주고 그렇다고 나를 데리고 갈 수도 없으니 아버지는 그냥 가버렸어요.

 

Q : 중국집에서 일하실 때 양자로 들어 갈 기회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A : , 단골손님 중 충남대 교수님 부부가 있었는데 그 분들이 자식이 없었어요. 저를 마음에 들어 하셔서 사장님한테 양자 삼고 싶다고 하셨나 봐요. 근데 할머니가 안 된다고 해서 못 갔어요.

 

Q : 그 때 교수님 댁으로 가셨다면 어땠을까요? 성프란시스대학의 학생이 아닌 교수님이 되어 있을 수 있었을 텐데 저는 조금 아쉽습니다.

A : 인생의 좋은 기회일 수 있었는데 놓친 거죠.

18살 때 보성에 명절 쐬러 왔다가 고향 여자 친구가 부천에 일하러 가자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여자들이 초등학교 졸업하고는 공장으로 가던 때라 그 친구 따라 신발 깔창 공장에 들어갔는데 6개월만에 망해버렸어요. 갈 데가 없으니 부천역에서 방황하다 서울로 왔어요.

 

Q : 그때 서울로 오신 거군요.

A : 서울에 와도 갈 곳이 없으니 영등포역 근처에서 서성대다 연신내 근처 갱생원에 잡혀갔어요. 전두환 때였는데 이유도 없이 무조건 잡아다가 가둬버려요.

 

Q : 갱생원이면 당시 삼청교육대 같은 건가요?

A : . 비슷해요. 먼저 가족한테 연락을 하고 데리러 오는 사람이 없으면 실미도선갑도라는 섬에 보내 버렸어요. 거기 끌려가면 죽는다는 걸 갱생원에 있는 사람들이 다 알았어요. 전 이문동에 살던 고모가 데리러 와서 6개월만에 나왔어요.

 

Q : 다행이네요.

A : 일단 고모집에서 지내며 공장에 취직을 했어요. 근데 그때 내가 한창 피가 들끓을 때라 얼마나 난폭 했는지. 아버지와 사회에 쌓인 것들이 분출되기 시작 한 거죠. 같이 일하던 형들이 감당이 안 되니 잠재워 보려고 술을 먹이기 시작했어요.

~그때 옆 봉제공장 막내라는 아가씨를 짝사랑하게 됐지요. 어느 날 술을 마시고 찾아가서 만나자고 하고는 안 나오면 박카스 병으로 내 손을 찍어버리겠다 협박을 했어요. 다음 날 약속장소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도 안 나오더라고요. 속상해서 그날 저녁 술을 마시고 옆 테이블에 시비를 걸어 경찰서까지 갔어요. 나중에 들으니 막내는 공장을 그만 뒀더라고요.

 

Q : 좀 천천히 부드럽게 다가가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A : 아버지처럼 강압적으로 세게 나가야 상대가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뭘 몰랐으니까요.

그러다 20살이 됐을 때 영장이 나왔다고 당시 나주에 살던 아버지한테 연락이 왔어요. 주소지가 아버지 밑으로 되어 있으니 그리로 나왔던 거죠. 학력이 없으니 현역이 아니라 국민기초교육 3주를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앙금은 남아있었지만 3주만 지내면 되니까 아버지 집에 머물며 교육을 받았어요.

 

Q : 교육을 다 받고 다시 서울 고모댁으로 오신 거예요?

A : . 이문동에 방을 하나 구하고 봉직 공장에 들어갔어요. 가보니 공장에 고향친구들이 몇 명 있더라고요. 그 친구들하고 나쁜 장난도 많이 쳤어요. 그때는 월급 안주는 공장들이 많았어요. 월급 안주면 다른 공장이나 식당으로 옮기고 잡아주는 사람도 없으니 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그렇게 살다 8825살 때 오징어 잡이 원양어선을 탔어요.

 

Q : 얼마가 타신 거예요?

A : 1년 계약이었어요.

 

Q : 그럼 1년 동안 육지에 못 나오시는 거예요?

A : . 나는 3종 어선을 타서 다른 나라 영토에서 2마일 정도 떨어져 있어야 해서 육지에는 못 들어왔어요. 태풍이 불어도 다른 나라 영토 가까이 가면 안 되었어요.

 

Q : 배에서의 생활은 어떠셨어요?

A : 힘들었죠. 그래도 1년 일하고 나니 퇴직금 포함 860만원 정도 됐어요. 내가 통장이 없으니 회사에 보관하고 있다가 200만원을 먼저 주더라고요.

 

Q : ! 그 돈으로 먼저 무엇을 하고 싶으셨어요?

A : 그때만 해도 아버지를 용서하고 싶었어요. 내가 미워서 그런 건 아니었겠지. 그럴 수도 있지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 50만원을 들고 아버지한테 갔어요. 그동안 자식 노릇도 못했는데 제주도 한 번 다녀오시라고 드렸어요.

 

Q : 그러셨군요.

A : 말없이 받으셨어요. 근데 아마 죄책감에 괴로우셨나봐요. 이복동생들 하고 자고 있는데 술 드시고 들어오시더니 부모없이 배 타는 놈 자식도 아니다라고 하시면서 나한테는 못하고 새어머니하고 동생 들한테 화풀이를 하시더라고요. 물건을 막 집어 던지고 폭력까지 쓰면서

그때 어린시절 트라우마가 살아나서는 눈이 확 뒤집혀 버린 거예요. 가위를 가지고 와서는 아버지 목에 누르고 그만하라고 욕을 했어요.

 

Q :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신 거 같아요. 그 뒤로 아버지를 못 보신 거예요?

A : . 욕을 하고는 잘 먹고 잘 살아라. 하늘 아래 내 아버지는 없다 생각하고 살겠다. 하고는 나와버렸어요. 그랬더니 만 원짜리 50장을 마당에 뿌리면서 가져가, 새끼야!’ 그러더라고. 뒤도 안 보고 나왔어요.

 

 

그 뒤 조폭 조직에도 1년 정도 있었고 막노동도 하고 식당 일도 했어요. 인력회사에서 보내주는 곳이면 다 갔어요. 광주 아시아자동차 하청, 여수 양식장, 목포 조선소를 전전하며 살았죠.

 

Q : 처음 소개하신 대로 떠돌이 인생이었네요.

A : 다시 서울로 와서는 창신동 젤 꼭대기에 방을 얻고 처음에는 식당 일을 했어요. 그러다 2015년 인력회사 통해서 일용직 나갔다가 큰 돌이 왼쪽 손목을 덮치는 사고가 났어요. 처음에는 아픈 줄도 몰랐어요. 도마뱀 꼬리는 잘리고 나서도 한동안 달달달달 떨리잖아요? 그것처럼 손이 한동안 달달달달 떨리더라고. 30분 지나니까 그 때부터 통증이 시작되는데 온 몸이 무겁고 팔은 못 들겠고 땅에 쭉 가라앉아 있어도 사람들이 쳐다보기만 하는 거야. 노가다꾼들이 원래 무덤덤 해요. 또 원래 내 몫이 아닌 일을 시키다 그랬으니 책임지라고 할까 봐 무서웠겠지.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찍고 진료를 봤는데 약 먹으면 괜찮아 진다는 거야. 지금 생각하면 돌팔이였던 거지..

 

Q : 현재 팔 상태는 어떠세요?

A : 장애 6급을 받았다가 장애 급수가 없어지면서 지금은 경증 장애로 등록되어 있어요.

 

Q : 그 후로는 일을 못하시게 된 거죠?

A : 그 뒤로 일도 못하고 불안하고 우울하고 병 수준으로 예민해져서 싸움꾼이 되어버렸죠. 고시원 사람들과 자꾸 싸우다 보니 한 달 동안 세 번 쫓겨난 적도 있어요. 그때부터 기초수급 받으며 술만 먹는 쪽방 생활이 시작 된 거죠.

 

Q : 10년 전쯤인 거죠?

A : . 10년 전 종로에 있을 때 내가 집중관리 대상이었어요. 사회복지사님들이 고생 많이 하셨죠.

 

Q : 성프란시스대학도 사회복지사님이 추천하셨다고 들었어요.

A : 지금은 중구에 살지만 종로에 있을 때부터 인연을 맺은 최봉영 간사님이 알려주셨어요.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쪽방자치위원회 책임자이신데 정말 천사 같은 분이에요.

 

Q : 추천을 받았다고 해도 지원하고 면접 보려면 큰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요.

A : 간사님이 저를 믿고 추천해 주시니 감사해서 일단 가보겠다고 했죠. 4명을 추천해서 같이 면접을 봤는데 저만 합격했어요.

 

Q : 면접은 어땠어요?

A : 알코올에 완전히 찌들은 데다 우울증도 심할 때라 낯설었죠. 그때 박한용 교수님이 저한테 질문을 많이 하셨어요. 그러더니 마지막에 학교 들어오면 술도 끊고 우울증약도 끊을 수 있어요. 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 희망을 주더니 합격 시켜 주시더라고요.

 

Q : 그 말씀에 용기를 얻으신 거예요?

A : 사실 처음엔 안 믿었어요. 내가 남의 말은 절대 안 믿어요. 알코올중독이 심하면 의심병이 생기거든요. 근데 이젠 그 말이 맞구나~! 생각해요.

 

Q : 그런데 선생님 학기 초 5주 동안 학교에 안 나오셨어요?

A : 막상 가려니 두렵더라고요. 글씨도 모르고 띄어쓰기도 못하는 나 같은 알코올중독자가 뭘 하겠어? 그런 생각이 들고 대학이라는 단어가 낯설고 무서워서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러고는 또 방에 틀어박혀 외톨이가 되니 외롭더라고요.

 

Q : 그랬을 거 같아요. 어떻게 다시 나오시게 됐어요?

A : 외롭고 심란해서 안되겠다 싶어 막걸리 몇 병 배낭에 넣고 한강 따라 무작정 걸었어요. 걷다가 술 마시고 울고 또 걷고 그렇게 한참 걷다 알코올 회복자 선생님 전화를 받았어요. 어디냐고 물어서 그냥 걸어요그랬죠. 그랬더니 그 선생님이 저희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그래요. 그 말 듣고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한참을 울었어요. 그러고는 유재진국장님께 전화를 해서 학교 나가고 싶다고 했죠. 근데 이미 퇴학 처리 되어 회의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술을 더 마시고 다시 전화를 했어요. 왜 마음대로 나를 퇴학 시키느냐거의 협박을 했죠. 국장님이 결정이 되면 연락하겠다 하셔서 끊었어요. 마음으로는 포기를 하고 있었죠. 근데 그날 저녁 학교 나오라고 전화를 하셨더라고요. , 수업 오실 땐 절대 술 드시면 안 된다고 약속을 받아내더라고요. 그러겠다고 했죠.

 

Q : , 정말 잘 하셨어요.

A : 이젠 졸업이 얼마 안 남아서 그게 무서워요. 수업이 3주밖에 안 남았어요. 우리 국장님보다 내가 일정을 더 잘 알아요. 아쉬우니까 자꾸 세어보거든요.

 

Q : 카페에 올리신 글만 봐도 선생님이 얼마나 아쉬워 하시는지 느껴져서 마음이 아픕니다.

졸업 후 계획을 좀 생각해보셨나요?

A : 일단 마무리를 잘하고 한달 정도 틀어박혀 이게 그림이구나하는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요. 언젠가는 붓과 물감 챙겨서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며 나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기도 하고요. 피리부는 사나이처럼. 그림과 봉사는 평생 하고 싶어요. 선생님처럼 성프란시스 자원활동가는 못해도 시민으로서 봉사활동은 계속 하고 싶어요.

 

Q :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세요?

A :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에는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 봉사를 하고 오후에는 복지센터에서 단주 교육도 받고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해요. 저녁에는 인문학 수업에 가고요.

 

Q : 많은 분들이 그림을 언제부터 그리셨는지 궁금해하세요.

A : 중구로 이사오기 전 종로에 살 때 복지센터에서 컬러링북 색칠과 일기쓰기를 매일 하게 했어요. 강제성은 없었지만 열심히 했어요. 컬러링북 채색이 생각보다 정교한 작업이어서 도움이 됐죠. 지금은 습관이 돼서 몸이 자동으로 그림을 그려요.

 

Q : 주로 언제 그리세요?

A : 맨 정신 일 때보다 약간 맛이 간 상태에서 주로 그려요. 내 방이 방보다 화장실이 더 넓은 구조여서 화장실 바닥에 돗자리 깔고 그리죠.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

 

Q : 국회 회관에서 열린 시화전에서 유일하게 개인 부스를 열고, 작품까지 팔린 진짜 작가님이 되셨어요.

A : 자리를 만들어주신 자원활동가 선생님들과 교수님들 덕분이죠. 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 그림은 내 것이 아니에요. 내 몫은 한 45%고 나머지는 학교 몫이죠. 더 많이 팔렸으면 우리 학교에 더 도움이 되었을 텐데고흐처럼 죽은 뒤에라도 그림이 잘 팔려서 학교에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Q : 고흐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고흐 같은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A : 고흐만큼 좋은 그림을 그리진 못하겠지만 저만의 그림을 그려서 팔린다면 사회에 환원도 하고 싶어요. 지금이야 성프란시스에 한 달에 만원 기부하는 게 전부지만.

 

Q : 멋있으세요.

A : 멋있어야 해요. 멋 없는 삶은 삶이 아니에요.

 

Q : 선생님이 만약에 슈퍼맨 같은 초능력자 된다면 무엇을 제일 하고 싶으세요?

A : 사랑하고 싶어요.

 

Q: 원하던 대답입니다.(웃음)

A : 내가 우리 아버지처럼 여자를 대할까 겁나고 능력이 없는데 자식 낳아서 나처럼 키울까 무서워서 결혼은 상상도 못 하고 살았어요. 근데 지금은 못다한 사랑을 한 번 해보고 싶어요.

 

Q : 선생님 마지막으로 선생님 꿈을 듣고 싶어요.

A : 더 이상 욕심은 없어요. 성프란시스 오기 전 삶이 너무 고생스러워서 더 바라는 건 없어요. 옛날로 돌아가지 말고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자. 넘어지더라도 다시는 옛날로 돌아가지 말자! 그게 꿈이에요. 순철이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예요. 순철이는 순철이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마주할 때 우리 일상의 불평은 한 없이 작아집니다. 김순철 선생님의 삶 앞에서 듣는 이들은 작아졌고 돌아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은 한 없이 커 보였습니다.

평생 그림을 그리고 봉사를 할 그의 손과 마음을 기억하고 믿겠습니다. 우리는 순철이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요.

인터뷰에 응해주신 김순철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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