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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15호

[성프란시스 글밭] 옛집 | 글/최경식

by 성프란시스 2022. 12. 14.

누나의 전화를 받았다. 뜬금없이 홍천 옛날 집에 한번 가보자고 했다. 죽기 전에 한번 가봐야지. 나는 가슴이 덜컹 했지만 그래 한번 가보자 했다. 누나는 대구에서 올라오고 나는 서울에서 내려가 원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만났다. 70 먹은 할머니답지 않게 누나는 몸에 꼭 끼는 검은 데님바지에 새빨간 스포츠 자켓, 선글라스를 끼고 버스에서 내렸다. 야야, 우리 술부터 한잔 하자. 누나는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일흔 살 먹은 할머니와 예순다섯 살 먹은 동생은 터미널 앞 식당에서 대낮부터 고기를 구워 숨을 가다듬고 뜸을 들이며 술을 마셨다. 누나는 맥주에 소주를 타서 약처럼 들이켰다. 원주도 많이 변했다 그자? 그래 많이 변했네. 그런데 와 군인들이 안보이노. 여어가 군인도시 아이가? 그러게 군인들이 안보이네. 대낮에 군인들이 보일 턱이 없지만 나는 괜스레 몸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는 척 했다. 우리는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횡성 갑천을 건너고 그 옛날 그렇게 높고 험했던 삼마치 고개를 넘었다. 누나는 가는 내내 내 손을 꼭 잡고 가끔 눈가를 훔치기도 했다.

세월이 꽤 흘렀지만 강변의 소읍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기야 55년이란 세월이 무어 그리 긴 세월인가. 겨우 55... 우리는 옛 추억과 옛 길을 더듬으며 우리 살던 옛 집을 찾아갔다. 이 길이 그 길이가? 이래 좁았나? 이 집 보래, 고야나무가 아직 있네! 내가 이 집 고야 몰래 따먹다가 오빠야 한테 들키갖고... 누나는 키득거리고, 연신 놀라고, 감탄하며 그때마다 내 손을 움켜쥐었다. 마치 나를 놓칠까 봐 겁내는 듯이. 나는 누나의 호들갑을 모른 척 했지만 그 길이 눈에 훤했다. 팬티만 입은 단발머리 소녀가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뛰어 내려가던 길, 판자에 시커먼 콜타르 칠한 제재소 담장길. 어머니가 두 손에 애기포대기 끈을 쥐고 니 죽고 나 죽자며 쫓아 내려가던 길.

군인 사내는 제 아내가 집을 비우는 날이면 대낮에도 권총을 차고 집을 들락거렸다. 저 먼 경상도 시골에서 입 하나 덜자고 올려 보낸 허기진 식모 소녀들이 안방에 갇힌 채 흐느꼈다. 나는 문 밖에서 무서워서 울었다. 파월장병 군인들이 대낮부터 술에 취해 파병가를 부르며 죽으러 간다고 악을 쓰던 시절이었다.

원룸들이 늘어선 골목을 기웃거리며 몇 번 헛걸음 끝에 마침내 우리는 옛 집을 찾았다. 이 집... 맞네... 그래, 이 집이다... 골목 끝에 있는 그 집은 우리가 몇 번 헛걸음 치며 들여다보고도 너무나 쇠락해서 긴가민가한 그 집이었다. 좁고 너저분한 마당에 처마마저 한 켠이 내려앉은 그 집은 상고머리 소년이 울면서 대문을 두드리던 그 집이 아니었다. 당시엔 보기 드물었던 완강했던 철대문도 경첩이 빠져 한쪽이 기운 채 온통 칠이 벗겨져 죽음을 앞둔 노인네의 검버섯처럼 흉측했다. 나는 잡초가 무더기 진 마당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차라리 안도했다.

우리는 투다리라는 옛날 간판이 붙은 허름한 주점에 들어가 앉았다. 나와 함께 초등학교를 다녔을 법한 나이 든 여자가 허연 더께 앉은 한치를 내왔다. 누나가 혀를 차며 말했다. 좋은 술집 다 놔두고, 니도 참...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누나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야야, 나 어떴노. 이번에 보톡스 시술 했다. 어쩐지 달라 보인다 했네. 괘안나? 괘안네. 후배 아아 들도 형님 이뻐졌다고 난리굿이다. 루즈 바른 입술가에 허연 한치분을 묻힌 채 누나가 환하게 웃었다.

누나는 대구까지 택시를 대절했다. 내가 데려다주까? 아이다 혼자 갈란다. 혼자 갈 수 있다. 그래 잘 가래이. 우리도 한 시절 다 보냈다. 누나가 입을 앙 다문 채 나를 가만히 보았다. 그때 나는 그 옛날 단발머리 소녀를 다시 보았다. 어느 날 날개가 꺾이기 전, 다부지고 날렵했던 여름제비 같았던 소녀를. 택시가 어둠 속에서 멀어져 갔고 나는 어둠 속에 서서 들어가 누울 여관을 찾아 읍내 거리를 둘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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