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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12호

[인물 인터뷰] 제가 배우는 교실이지, 가르치는 교실이 아니에요

by vie 2022. 5. 7.

글 / 김연아
인터뷰어 강민수김연아
인터뷰이 / 김응교

(성프란시스대학 교수, 문학 담당)


2021년 성프란시스대학 17기 문학 수업을 맡아주셨던 김응교 교수님. 우리 선생님들과 처음으로 1년을 함께하신 소감이 어떤지 궁금했습니다. ‘시인 김응교’로 성함만 들어보고 교수님이 쓰신 글만 읽다가 실제로 뵙고 싶기도 했고요. 이번 17기를 졸업하신 한 선생님께서는 교수님이 사주신 삼겹살이 그렇게 맛있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전해주셨습니다. 무려 2시간 동안 줌으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교수님의 인생 전반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줌으로 진행한 김응교 교수님 인터뷰


Q:
안녕하세요, 교수님. 처음 뵙겠습니다. 교수님 소개를 좀 부탁드릴게요.

A: 안녕하세요. 성프란시스대학 문학 담당 교수 김응교라고 합니다.

 

Q: 고향이 어디신가요?

A: 용산이요. 이태원에서 가까운 삼각지예요. 미군부대 옆이요. 저희 집에서는 한때 미군 부대 PX 물건을 판 적이 있어요. 못사는 동네에서 그나마 잘사는 편이었지만, 곧 그 장사를 그만두셨죠. 대학교 들어갈 때까지는 뭣도 모르다가 대학교 다니면서 좀 깨달았던 것 같아요. 내 삶이 뭔가 좀 잘못되지 않았나. 저도 한때 징 박은 바지 입고 고고장 다니고 그랬거든요. 근데 그 당시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나고, 저도 많이 바뀌었지요. 아버지께서 파주 백석교회 담임 목사님이 되셔서 신촌역에서 파주역까지 기차 타고 다녔는데, 기차가 얼마나 느린지, 지금은 자동차로 30분이면 가잖아요. 그때 기차 안에서 행패 부리는 미군들도 많이 보면서 ‘나만 잘 살면 안 되는 사회구나. 이 사회가 뭔가 같이 힘을 모아야겠구나.’ 하고 반성하기 시작했어요.

 

Q: 독재정권 때 대학생이셨군요.

A: 예. 83년도에 김근태 선생님께서 만드신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에 85년에 들어갔어요.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다가 몇 번 수배당하고, 결국 구속까지 된 거죠. 근데 전과가 생기니까 한국에서 취직할 수가 없었어요.

 

Q: 학교는 어디였나요?

A: 연세대 신학과를 나오고 국문학 석사를 받은 후 구속됐어요. 감옥에서 나온 후 국문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장학생으로 96년에 일본 유학을 갔어요. 도쿄외대를 거쳐 도쿄대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연구하다가 98년에 연세대 국문학과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그때 와세다대학교 한국학 교수 제의를 받았어요. 윤동주 시인을 오랫동안 연구하시고 윤동주 묘지도 찾아내신 오무라 마스오 교수님께서 불러주신 거죠. 저는 한국어를 기본적으로 가르치고, 한일 비교문화 강의를 했어요. 근데 1999년에 영화 ‘쉬리’가 흥행하고 2002년에 겨울연가의 욘사마가 떠오르면서 한류가 시작됐어요. 이때 영화로 배우는 한국어나 한국문학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수업, 무라카미 하루키의 등단작이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수업도 했지요.

 

Q: 홈리스와 관련해선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신 거예요?

A: 일본에서 생활할 때, 성경과 역사에 관련한 강연을 몇 번 했는데, 사람들이 계속 해달라고 요청을 했어요. 매달 하던 것이 히메지, 요코하마, 도쿄, 치바와 같은 지역에 모임으로 만들어졌어요. 요코하마에서는 매주 토요일마다 요코하마 국립대학 탁구장에서 강의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 연락이 왔어요. 홈리스 돕는 일을 하지 않겠느냐고요. 2000년대 초였을 거예요. 오사카에 니시나리라고 홈리스분들이 거주하는 동네가 있어요. 전 세계에서 이런 곳은 찾아보기 힘들 거예요. ‘아이린 지구’라고도 부르는데 우범지역이라고 하면서 일본 방송에는 절대 안 나오는 곳이거든요(오사카 니시나리 관련 참고 영상). LA만 해도 홈리스 거리가 있던데, 한 200m밖에 안 되더라구요. 여기는 2~3km정도로 우리로 치면 종로1가에서 동대문까지 정도의 거리예요. 1970년 오사카 만물박람회 때 모인 노동자들이 일이 끝나고도 떠나질 못하고 여기에 남아있게 된 게 시초가 됐죠. 저는 오니기리라고 삼각김밥 있잖아요? 그걸 나눠주는 봉사를 했어요. 

 

카나에 목사님이라고 계셨어요. 도시샤대학교 경제학부 출신인데, 여기서 헌신을 하시는 거예요. 4.5평짜리 집에서 머리도 깎아주고 밥도 주고. 제가 쌀도 나르고 하는 걸 보시고는 함바집에 데려가서 볶음밥을 사주시면서, 당신 일을 이어서 하지 않겠냐고 여쭤보셨어요. 그 당시 제가 와세다대학 객원교수로 있었는데 월급이 많은 편이었어요. 그런데 그 일을 이어서 하려면 그때 가지고 있던 것 다 버리고 해야 했거든요. 

 

아내가 그래요. “당신은 부잣집에서 자라서 절대로 이런 일 못 해. 5년 정도는 흉내낼 수 있지만, 절대로 평생 가난한 이들과 함께 못 살아.” 근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더라구요.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제가 감옥도 갔다 오고 여러 가지 해봤지만, 근본은 중산층 이상으로 살아가지고. 그래서 제 한계를 느끼고 카나에 목사님께 말씀 드렸죠. “선생님, 제가 부족합니다.” 그랬더니, 카나에 목사님 한쪽 눈이 안 보이시는데, 보이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로 계속 이 일을 해달라고 하셨어요. 그때 그 눈물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오도록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같아요. 이후에 죄송해서 그 지역은 가질 못하고 도쿄 우에노 공원 앞에 있는 홈리스분들에게 갔어요.

 

MBC 포토에세이 사람 : 김응교 교수님 편

 

제가 ‘냄비’라는 시를 썼어요. 2003년에 MBC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 도입 부분에도 나오는데요. 저 냄비를 제가 13년 동안 사용했거든요. 냄비는 모든 것을 군소리 없이 다 하잖아요. 냄비처럼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방송 보시면 제가 우에노 공원에서 활동하는 모습이 잠깐 나와요. 2002년이니 벌써 20년 전이죠. 우에노 공원은 니시나리와 달랐던 점이 있어요. 니시나리에서는 질서가 없었어요. 그냥 막 주거든요. 근데 여기서는 자리를 200개만 딱 마련해서 여기 앉아야만 밥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1시간 동안 행사에 참여해야 해요. 종교지도자들이 와서 강론을 하거나 저희가 화음 맞춰서 노래도 하고요. 카나에 목사님은 주기만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제가 본 바로는 밥을 주기만 해서는 사람이 변하지 않아요. 밥만 줘서는 절대로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지금 하는 성프란시스대학도 그런 거죠. 인문학을 통해서 정신의 변화를 추구하는 거잖아요.

 

Q: 개인적으로 사람을 변하게 하기 위해인문학을 한다는 말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는 해요. 집단적으로 홈리스를 변해야 할 대상, 혹은 부족한 존재로 보는 것 같거든요.

A: 사실 ‘변해야 된다’가 아니라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인데, 가령 BTS 노래처럼, 노래를 듣고 느낄 사람은 느끼고 자연스럽게 변화되는 거죠. 제가 막 변화시키려고 하는 건 아니고 서로 힘을 내자는 거예요. 저도 변해야 하고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도 계속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생각하는 문학은 ‘유미주의’(*편집자 주: 아름다움 자체를 예술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예술 사조)는 아닌 것 같아요. 저는 문학을 느끼고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문학주의자는 아닌 것 같아요.

 

Q: 어느 위치가 되었든지, 실천하고 남들하고 같이 연대하고, 더 나은 뱡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시는 거죠?

A: 네, 제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많이 인용하거든요, 하루키 문학에 나오는 죽음에 대한 생각. 특히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마지막 부분, “너는 지금 어디에 있냐”고 묻는 미즈코의 질문 같은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 어떤 사회적인 개혁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그런  존재론적인 질문을 스스로 늘 해야 한다는 거죠. 저는 실존주의자예요. 짐승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실존해야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같이 찾아가자는 거예요.

 

Q: 그렇게 활동하시다가 어떻게 한국으로 들어올 결심을 하셨어요?

A: 제가 일문과였다면 일본이 맞을지도 몰랐지만, 한국어로 글 쓰는 사람이다 보니까 일본어로 글을 써도 만족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향수병을 심하게 앓다가 2009년에 귀국을 했고, 홈리스 관련 일을 계속 하고 싶은데 한국에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Q: 교수님께서 레디앙에 쓰신 글을 읽었습니다. ‘민들레 문학교실에 참여하셨는데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요? (레디앙 기사 링크: http://www.redian.org/archive/43622)

A: 여기 정확히 나오네요. 2012년 9월 8일 홈리스 인문학 교육에 참여하지 않겠냐는 연락을 받았어요. “무조건 할게요.”라고 했죠. 민들레 문학교실은 서울시와 기업의 후원을 받아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한 프로젝트였어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소속된 작가들이 서울 내 25군데의 홈리스 거주처를 교실로 삼아서 2시간씩 10번을 강의한 거죠. 숙명여대 영문과, 국문과 학생들이 노트북 하나씩 들고 와서 선생님들께서 말씀하시는 것들을 컴퓨터에 입력해주기도 했어요. 이분들이 살아온 내력을 말씀하시기 시작하면 다 장편소설이죠. 그렇게 4년을 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중지가 됐어요.

 
2012년부터 4년간 운영됐던 '민들레 문학교실'

 

Q: 성프란시스대학과 비슷해 보여요. 많이 아쉬우셨겠어요.

A: 너무 안타까웠어요. 저는 단순히 인문학 교육을 넘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실험해보고 싶었거든요. 이런 거 있잖아요. 학술·작가·연구자들이 있고, 그다음에 기업·사회단체, 그리고 더 마지널(marginal: '주변부의', 사회적 소수자를 뜻함). 우리 사회의 주변인들이 있는 거죠. 5대 주변인이라고 해요. 새터민, 외국에서 온 뉴 커머(new comer: 이주민), 외국인 노동자, 재소자, 장애인. 이분들을 지원하는 교육기관을 만드는 계획도 했었어요. 연구자들이 우리 사회 주변인들을 가르치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꾸로 연구자들을 가르쳐주는 거죠. 한양대학교 이도흠 교수님과 준비했던 <주변인들을 위한 인문학 교육>이라는 프로젝트를 예로 들어볼게요. 인문학 교육을 받는 베트남 이주민들이 있다고 하면, 그분들이 거꾸로 베트남 말도 가르쳐주고, 베트남 문화도 가르쳐줘요. 그러면 이주민 강사분들의 차비라든가 강사료, 이런 것들을 기업에서 지원해주고, 서울시 같은 지자체에서는 기업들의 세금을 감면해주는 거예요. 사회에 피가 도는 거죠. 국가에서 지원해야 할 것을 기업이 지원하게 만들고, 또 박사과정을 마친 연구자들에게도 대학교 이외에 강연할 자리가 생기는 거고요. 제가 새터민이나 재소자, 성매매 피해자에게도 문학 강연을 했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성프란시스대학보다 이 프로젝트가 훨씬 컸다고 볼 수 있죠.

 

Q: 성매매 피해자 대상으로 한 강연은 어떤 것이었나요?

A: 사실 처음에는 어떤 경험을 하셨는지 전혀 모르고 여수에 있는 트리니티라는 카페에서 인문학 강의를 요청하셔서 열댓 번 정도 강의를 한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조금씩 알았지요. 성매매 피해자분들이 동네 주민들과 함께 제 강의를 들으셨던 거예요. 알고 보니 전국에 이분들이 모여서 2~30명 단위로 함께 거주하는 곳이 9군데가 있대요. 자립을 위해 바리스타나 네일아트 교육을 하기도 하고 김치 담그기라던가 수세미, 행주 만드는 것부터 판매하는 것 등등을 하더라고요. 제가 인문학 수업을 하고, 화가 선생님들이 그림 그리는 걸 도와 ‘마법그림책’이라는 책을 출판했어요. 열 분이 각자 자서전을 만드셨는데, 그걸 모아 단행본으로 만든 거예요.

마법 그림책 - 김응교

 

Q: 다양한 활동들을 해오고 계셨군요.

A: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매년 2월 16일, 윤동주 시인의 기일인데요. 6년째 백사마을에 가서 연탄 나누는 봉사를 해오고 있어요(참고 영상: 제6회 윤동주가 만난 어진 사람들). 공릉동 주민들이 가장 많이 참여하시고요, 숙명여대에서 제 윤동주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도 함께 참여해요. 또 한남교회 김민수 목사님, 인하대 김영 교수님, 나희덕 시인, 동덕여대 이재현 교수도 매년 참여하시죠. 이런 활동들을 해오고 있는데, 곽노현 학장님께서 성프란시스대학에 대한 말씀을 주셔서 민들레 문학교실 이후 6년 만에 문학 수업을 맡게 됐습니다. 음식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배우면서 나도 변화되고, 함께 변화되는, 사람이 변화되는 기적을 체험하는 대단히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Q: 앞서 말씀하신 민들레 문학교실과 성프란시스대학 문학 강의, 어떤 점이 다를까요?

A: 작년 17기 하셨던 분들을 보면 제가 민들레 문학교실에서 뵀던 분들보다 생활 여건이 더 나은 것 같아요. 민들레 선생님들은 그야말로 서울역 지하에 계셨던 분들이에요. 어떤 분은 제가 “뭐 드셨어요?” 하니 사무실에 있는 인스턴트 커피를 봉지째 입에 털어넣고 물 한 컵 마시고 들어왔다고 얘기하시는데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구요. 그분들 사시는 하꼬방(판잣집)이나 지하방도 찾아가 봤죠. 지금도 만나고 있어요. 대여섯 분 오시라고 해서 중국집이나 칼국수 집에 모시고 갔었죠. 성프란시스대학도 마지막 수업 하고 나서 선생님들께 미성식당에서 갈비탕 한 그릇씩 대접하려고 했거든요. 도착하고 보니 이미 삼겹살과 소주까지 시키셨더라고요. (웃음) 다들 힘내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감사히 모셨어요. 그 이후로 페이스북으로 저한테 얘기하고, 전화도 주시고 그래요.

 

Q: 다들 그때 기억이 좋으셨나봐요. 17기 선생님 한 분께서 삼겹살 사주신 게 그렇게 좋으셨대요.

A: 예. 제가 감사하지요. (웃음) 그날 각자 살아오신 이야기들도 나눠주셨는데, 민들레 문학교실과 비교하면 여기 성프란시스대학 선생님들은 경제적 자립이 어느 정도 가능하신 분들 같았어요.

 

Q: 수업 내용 면에서 비교하신다면요?

A: 이번에 물론 줌으로 해서 느낌이 좀 다르긴 하지만, 성프란시스대학 수업이 내용 면에선 좀 더 깊었어요. 대학교 수업 정도의 강의였고, 좀 더 넓은 사회 문제를 다룰 수 있었어요. 민들레에선 가난한 사람들이 쓴 글들, 가난한 상황에서 그 가난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그런 글들을 많이 읽었죠. 성매매 피해자 분들이 있던 곳에선 여성 얘기를 많이 했어요. 나혜석,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했고요. 교도소에 가면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의 글 있잖아요? 도스토예프스키라든지,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와 같은 글들이요. 근데 성프란시스대학에서는 좀 더 일반 대학교에서 하듯이 폭넓은 주제로 강의했어요.

 

17기 첫 문학수업 커리큘럼 소개 화면


Q:
성프란시스대학에서 강의하신 커리큘럼을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A: 햄릿과 같은 고전부터 김수영, 백석, 윤동주, 그리고 BTS까지 했습니다. 민들레 문학교실 때는 전혀 못 했거든요. BTS 노래 안에 문학 작품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 있어요. 사람들은 모르고 듣는데, 저는 듣다 보면 어, 이거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거네, 이렇게 알거든요. ‘Wings’라는 노래에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나오고요. 나올 때마다 알려드리는 거죠. ‘Not today라는 노래는 비정규직 사회문제도 다루고 있죠.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괴물들하고 싸울 때, 다들 무서워서 못 나가는데 오늘은 승리의 날이라고 얘기하면서 Not today라고 말하거든요. ‘날아갈 수 없음 뛰어. 뛰어갈 수 없으면 걸어. 걸어갈 수 없으면 기어.’라는 가사는 그 유명한 마틴 루터킹 목사 설교문이에요. 그러면 마틴 루터킹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황에서 이런 설교를 했는지, 그리고 왜 BTS가 이걸 가사로 넣었는지 등을 설명하죠. ‘뱁새들아, 모여’ 여기 ‘뱁새’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뱁새는 새 중에서 제일 작은 새예요. 솔개나 독수리가 잡아먹는 새여서 뱁새들은 숨어 있거든요. ‘뱁새들아, 핸즈 업’ 약자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소리 지르라고, 무릎 꿇지 말라고 얘기하고 있죠.

 

Q: 그러면 BTS 노래를 문학 텍스트로 읽는 강의를 하신 건가요?

A: 그렇죠. ‘518-062’라는 노래는 슈가 지은 건데, 5.18은 광주 민주화항쟁이 일어난 날이고, 062는 광주 지역번호죠. ‘봄날’은 세월호 노래예요. 뮤직비디오 보시면 오멜라스(Omelas)라고 써있어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유명한 문학 작품이에요. 오멜라스라는 인공도시 안에서 사람들이 매일 축제를 여는데, 그 지하에 아이들이 갇혀 있어요. 그 아이들은 약자이자 노동자이고 홈리스들인 거죠. 여기 노래 가사를 함께 보시면, ‘You never walk alone.’ 당신은 혼자 결코 걸을 수 없다고 말하죠. 함께 이 세상을 극복해 나가자고요. ‘Don't forget.’ 잊지 말라고 하고 있죠. 9시 40분, 세월호 배 가라앉기 시작한 시간이에요. 마지막 장면에서는 오멜라스를 탈출해요. ‘Not today와 비슷하죠. 탈출해서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거죠.

 

Q: 선생님들 반응은 어땠나요? 문학 수업인데 왜 BTS를 하는지 의아해하신 분도 계셔서요.

A: 전 좋았던 걸로 기억해요. 신기해하시기도 하고요. 몰랐던 것들이잖아요. 올해 7월 14일부터 3일간 BTS 국제학술대회가 서울에서 열립니다. 『연금술사』를 쓰신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 선생이 기조 강연을 하는 등 많은 해외 연구자들이 참여하는데, 저도 발표를 하나 맡았습니다. BTS가 노래에 담고 있는 내용들이 문학적으로 다룰 게 굉장히 많거든요. 그리고 성프란시스대학 선생님들은 현대의 담론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어요. 문학 수업이라고 옛날 것만 읽는 것이 아니라 현재 최첨단의 것, 다른 곳에서 대화하더라도 밀리지 않을 그런 정보를 주고 싶었어요.

 

Q: 선생님들이 BTS 노래를 듣고서 자기 얘기도 많이 나누셨나요? 궁금해요.

A: 그렇죠. 뮤직비디오를 보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우에노 공원에서 홈리스에게 밥을 나누면서 느낀 것이 공부를 하면 그냥 머리로 알고 끝나는 게 아니라, move on, 움직여야 된다는 거죠. 첫 번째 행동이 바로 토론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자기 삶에 대해 얘기하게 만들어요. 두 번째가 쓰는 거죠. 이때 삶이 바뀌어요. 그러려면 이런 담론, 자기 삶에 자극을 주는 문학적인 모델이 필요하다고 보았어요. 즉,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 삶을 바꿨던 사람들, 약자였지만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감옥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글로 쓴 사람들, 이런 이야기들을 함께 읽는 거죠.

 

Q: 성프란시스대학에서는 그게 어떤 식으로 적용될까요?

A: 저는 성프란시스대학에 오신 분들을 똑같은 사회인으로 봤어요.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계신 거죠. 지금 현실이 힘들더라도,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은 사회적인 관심을 갖고 나 자신을 키우는 일이다. BTS의 노래, ‘The wings의 데미안처럼 나를 업그레이드시키고, 세월호를 다뤘던 봄날이라는 노래처럼 사회적인 관심을 갖고 나만 약하다고 보지 않고 나보다 더 약한 사람을 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얘기를 전했던 것 같아요. 17기 졸업하신 선생님들 과거를 들어보면 예전에 사회적 성취도 있었던 분들인데, 여기서 주저앉지 말고 다시 일어나서 이번엔 나만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게 봐야 하지 않겠느냐.

 

Q: 첫 수업에서 만나서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듣고서 커리큘럼을 짜신 건가요?

A: 그렇죠. 저는 어떤 강연장 가서도, 시작하기 30분 전에 가서 앉아 있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 자리에서 강연 내용을 바꾸기도 해요. 그날 봐서 그분들에게 핀포인트(“정확한 핵심을 콕 집어”)로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얘기하려고 수정하기도 하고요. 자꾸 대화하면서 해야지, 일방적으로 강의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죠.

 

Q: 17기를 하시면서 인상 깊었던 부분이나 아쉬웠던 점은요?

A: 제가 수업 전에 미리 텍스트를 드리지 못했는데 좀 실수였던 것 같아요. 17기에 실력자가 몇 분 계셨어요. 독문과 출신도 있고, 다음에 칼 융 얘기하겠다 하면 융 책을 어디선가 읽고 오시더라고요. 다음에 할 때는 미리 읽고 참여하도록 텍스트를 드릴까 해요. 17기 때는 주로 여기 와서 읽을 수 있는 짧은 글, 그러면서도 평생 잊지 못할 글들을 나누려고 했어요. 다음 수업 때에는 이런 글들을 모아서 한번 교재를 만들려고 해요. 아주 출판을 하든지, 제가 더 연구를 해서 문학 교재를 만들고 싶어요. 홈리스분들을 위한 문학 교재요. 지금까지 했던 민들레 문학교실, 성매매 피해자, 재소자, 새터민, 이런 사례들을 모아서 <뱁새들을 위한 문학교육> 이런 책을 내는 거죠. 성프란시스대학에서의 경험도 그 안에 담길 거구요.

 

Q: 어떤 글들이 담길지 궁금하네요.

A: 지난 학기에 다뤘던 정약용의 글 <밤 한 톨을 다투는 세상>을 예로 들어 볼게요.

“저녁 무렵 숲속을 거닐다가 우연히 어떤 어린애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숨이 넘어가듯 울어대며 참새처럼 수없이 팔짝팔짝 뛰고 있어서 마치 여러 개의 송곳으로 뼛속을 찌르는 듯 방망이로 심장을 마구 두들기는 듯 비참하고 절박했다. 어린애는 금방이라도 목숨이 끊어질 듯한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 울고 있는지 알아보았더니 나무 아래서 밤 한톨을 주었는데 다른 사람이 빼앗아갔기 때문이었다. 아아! 세상에 이 아이처럼 울지 않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저 벼슬을 잃고 권세를 잃은 사람들, 재화를 손해본 사람들과 자손을 잃고 거의 죽을 지경이 이른 사람들은 모두 달관한 경지에서 본다면 밤 한 톨에 울고 웃는 것과 같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끝이에요. 굉장히 짧죠. 성프란시스대학에 오시는 분들 보면 첫 번째가 ‘벼슬을 잃고 권세를 잃은 사람들’, ‘재화를 손해 본 사람들’에 해당되시는 거죠. 이혼하고 가족이 해체된 분들도 계시고요. ‘자손을 잃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들’도 달관한 경지에서 본다면, 다 밤 한톨에 울고 웃는 것과 같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이런 게 다 밤 한 톨에 우는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정약용은 차관급일 때 귀양 가서 권세와 재산을 다 빼앗기고, 자식이 9명인데 6명이 죽었거든요. 또 큰형은 흑산도에서 죽고 셋째 형은 천주교 때문에 목이 잘렸죠. 제가 그랬어요. 여러분은 노숙생활 몇 년 했냐고. 이 사람은 유배생활을 18년 했다고요. 지금 여러분이 노숙생활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밤 한 톨에 울고 웃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정약용의 호를 보통 ‘다산(茶山)’으로 알고 있죠. ‘다(茶)’는 차라는 뜻이잖아요. 유배지에 차 나무가 많다 그래서 제자들이 다산이라고 했어요. 근데 정약용은 이 호를 쓴 적이 없어요. 정약용이 쓴 호는 사암(俟庵), ‘기다리는 바위’라는 뜻이에요.

 

Q: 정약용의 호가 사암(俟庵)이라는 건 처음 들어봤어요.

A; 정약용의 호가 ‘다산’이 아니라 ‘사암’이라는 건 저도 우리 17기 선생님께 배운 거예요. 한번은 수업을 하면서 “노숙생활 극복하면 뭐 하고 싶으세요?” 하고 여쭤봤어요. 다시 가게를 갖고 싶다, 아니면 조그만 구루마라도 해서 포장마차라도 하고 싶다, 다양한 의견이 나왔는데, 한 분이 “사암 정약용처럼 기다리는 바위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씀하셨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이 예전에 직원도 있었던 컴퓨터 회사를 운영하셨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수업을 하다 보면 오히려 제가 배워요. BTS 노래도 대학교, 대학원 수업에서는 시도해보지 못한 거거든요. 이번에 우리 선생님들과 함께 나누고 애기하면서 BTS 노래 같은 현대예술 장르를 활용한 담론, 이야기들이 실제로 힘이 되겠다는 걸 느꼈어요. 제가 배우는 교실이지, 가르치는 교실이 아니에요.

 

Q: 교수님, 앞으로도 문학 수업을 쭉 해주시는 건가요?

A: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라, 하게 해주시면 고마운 거죠. 저도 이제 나이가 환갑이고 지성적으로 글 쓰는 게 길어야 10년이잖아요. 그래서 집중해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성프란시스대학은 계속 하고 싶어요. 언제까지든 시켜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Q: 교수님 엄청 바쁘신 것 같아서요. (웃음)

A: 아니에요. 꾀병이에요. (웃음) 저는 그냥 살아가는데, 남들한테 바쁘게 보이나 봐요.

 

Q: 그럼 앞으로도 성프란시스대학과 동행하시는 모습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오랜 시간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A: 두 분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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