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장 (글쓰기 교수, 문학평론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뿐인데 윗니 서너 개가 빠져버리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이상해 아랫니를 흔들어보니 이것들마저 우수수 힘없이 뽑힌다. 손바닥에 한 움큼 빠진 이를 쥐고 거울 앞에 서서 입을 벌렸다. 으악~~! 외마디 비명 소리에 눈을 떴다. 입에 손을 대보고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쉰다. 꿈에 이가 빠지면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는 해몽을 들은 적이 있어, 그런 꿈을 꾼 날이면 으레 아침 일찍 부모님께 안부전화를 드리곤 했다.
내겐 악몽일 뿐이어서 비명 한 번 지르고 눈뜨면 되지만, 눈을 떠도 악몽 속인 사람이 있다. 맨바닥에서 하루 이틀만 자도 몸이 찌뿌듯한데, 한데에서 몇 년 동안 거리 잠을 잔 서울역 거리 선생님들. 역사 바닥에서 이 악물고 추운 겨울을 견뎌내지만 봄기운에 언 땅 풀리면 축대 무너지듯 잇몸부터 흐물흐물해진다는 거리 선생님들. 늙으면 ‘두부 먹다가도 이가 빠진다’고 하지만 서울역 선생님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봄바람에 이가 빠진다. 해서 더욱 나이 들어 보이고 늙어 보인다.
인문학 5기 고 선생님은 마른 체격에 말수가 적고 표정 변화도 거의 없는 40대 초반의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어쩌다 웃을 때에도 입 꼬리만 살짝 올라갈 뿐 결코 입을 벌린 적이 없었다. 혹 입이 벌어질 경우엔 반드시 손으로 가렸다. 해서 입학하고 몇 달 동안은 대체 속을 알 수 없는 선생님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밤 고 선생님이 카페에 올린 글에서 나는 비로소 선생님의 꾹 다물어진 그 입속을 볼 수 있었다.
‘나의 슬픈 치아 이야기’라 제목을 단 글은 뽑힌 치아를 의인화해 제문(祭文) 형식을 갖춘 독특한 글이었다. 선생님은 의료취약계층을 위한 서울시 무료치과에서 진료를 받는 과정 중에 이 글을 올렸다. 고 선생님의 입 속을 들여다본 의사 선생님의 첫 말은 “쓸 만한 이가 별로 없군요”였다. 그러곤 갈 때마다 선생님의 이는 한두 개씩 속절없이 뽑혀나갔다. 그때의 심정을 선생님은 이렇게 적었다. “가짜를 넣기 위해 진짜를 버려야 하다니, 가짜가 진짜인 것처럼 행세하고 진짜 같은 가짜가 득세하고 저마다 진짜라고 떠벌이는 가짜들이 판치는 세상이지만, 진짜를 버리고 가짜가 대신할 수 있는 곳이 (치아 말고) 사람 몸 어느 부분이 있을까. 나의 잘못으로 나의 몸을 떠난 치아들에게 미안함의 글을 올린다.”
고 선생님은 자신의 진짜 치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만 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의 무지와 무관심과 가난함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힘들게 음식물을 씹으면서 정작 맛은 혀가 보고 말은 목과 혀가 하는데 듣기 싫은 말 나오면 ‘이빨 까지 마!’라고 하니 힘든 노동을 하며 천대와 멸시를 받았구나. 그러고 보니 이런 대접받으며 사느니 차라리 먼저 떠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며 이별 순간에도 선생님은 유머를 잊지 않았다. "현생에는 못난 주인 만나 천수를 누리지 못했으니 다음 생에는 백 년을 살고도 치약 광고 모델 할 좋은 주인 만나서 좋은 대접 받으며 살고 주인의 육신이 썩어가는 것을 지켜보기 바란다. 그동안 수고했고 그리고 미안하다."
마침내 열린 고 선생님의 입속을 보고선 ‘이렇게 문재(文才)와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고 또 놀랐다. 졸업 후 동문행사에서 선생님을 뵀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전히 말수는 적었지만 웃을 때 선생님의 손은 더 이상 입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수줍게 벌어진 입에서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들이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던지. 치아는 가짜지만 웃음과 환한 표정은 진짜였다. 이미 뽑혀 사라진 진짜에겐 미안하지만 선생님의 웃음과 표정을 되찾아준 가짜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실은 부러웠다. 가짜 글쓰기 선생이라도 좋으니 너처럼 인문학 선생님들 글에 콱! 박혀 표정 짓게 할 수 있다면, 다물어진 마음속 문(文)을 활짝 열어젖힐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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