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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7호

[인물 인터뷰] 김봉은과 함께 맞는 비

by vie 2021. 7. 3.

글/ 김연아
인터뷰어/ 강민수, 김연아
인터뷰이/ 김봉은
(성프란시스대학 17기)

15기 자원활동가로 처음 뵈었던 김봉은 선생님(67). 저는 김봉은 선생님 때문에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거 그냥 연아샘이 알아서 하면 되잖아.”라는 말 한마디였는데, 서울말씨만 듣고 자라온 어린 저에게 경상도 사나이의 무뚝뚝한 말투가 저를 공격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누구보다도 가슴이 따뜻한 분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게 해 준 분도 바로 그 무뚝뚝한 말투의 김봉은 선생님이셨습니다. 15, 16기 자원활동가로의 활동을 마치고 성프란시스대학 17기 학생으로 입학하신 김봉은 선생님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Q:
봉은샘, 어떻게 17기 할 생각을 하셨어요?

A: 그 전부터 한 번쯤 하고 싶었어요. 안에 들어가서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그런 기회가 없었거든요. 이번에 코로나 때문에 입학하는 사람도 적고 하니까 기회가 생겨서 하게 됐어요. 저 이후로도 뒤늦게 두 명 더 입학해서 지금 17기는 모두 15명이에요.

 

Q: 성프란시스대학 입학기준으로 주거취약계층이 있잖아요. 해당되시는 건가요?

A: 저도 현재 다시서기센터를 통해서 소개받은 매입임대주택에 살고 있어요. 대학 졸업장이 있다뿐이지 나도 기초생활수급자고 주거취약계층이거든요. 나는 여기 선생님들하고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더 어려운 분들이 올 자리를 내가 빼앗는 게 될까 봐 조심스러웠어요. 근데 이번에는 운 좋게도 코로나 때문에 자리가 비어서 그 자리를 메운 거라 나한테는 어떻게 보면 행운이라고 볼 수 있는 거지요.

 

Q: 15, 16기에선 자원활동가로 활동하셨어요. 학생이 되고 나서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A: 학생일 때 긴장을 더 많이 해요. (웃음) 내가 좀 튀잖아요. 누가 뭐라고 한마디 하면, ‘, 조심해야겠다.’ 생각해요. 그전에도 긴장은 했는데 지금은 긴장 강도가 더 높아졌어요.

 

Q: 봉은샘 말 많다고 누가 그러셨어요(웃음)?

A: 농담으로 그랬어요. 나보고 활동적이라고. 아무래도 사람들하고 사귀려면 좀 다가가야 하잖아요. 근데 그렇게 다가오는 걸 싫어하는 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서 조심하는 거예요. 그래도 지금 17기 선생님들하고 많이 친해진 거 같아요.

 

Q: 현재 17기 수업은 온라인으로 하고 있나요?

A: 대면수업이에요. 심화강좌만 줌으로 하고요. 우리 중에서 한 명 빼고는 다 백신 맞았어요. 코로나 검사도 일주일에 한 번씩 하고. 강의실에 칸막이도 있고 수업시간엔 철저하게 마스크 다 쓰고. 만약에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큰일이니까요.

 

Q: 지금 독서모임도 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안성찬 교수님이 번역하신 페르난도 사바테르의 윤리,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17기 선생님들과 하신다고요.

A: 처음에 한 번 얘기했을 땐 그냥 넘어갔었는데, 두 번째 지나가는 이야기로 하니까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네 사람이 모였어요. 처음에는 각자 하고 싶은 거 좀 쉬운 걸로 이야기했는데, 그냥 자연스럽게 이 윤리 책을 보게 됐어요. 저자가 청소년 대상으로 책을 써서 이해하기 쉽고 우리한테 너무 좋은 거죠. 그런데 지금은 한 분이 병원에 입원했다 나오셔가지고 세 명이서 하고 있거든요. 세 명이서 각각 책의 한 부분을 맡아서 준비하는데, 한 사람은 그냥 읽는 식으로 하고 다른 사람은 본인이 정리한 거 좀 이야기하고 그러면 내가 질문하고 그래요. 이거 끝나고 철학 책하자고 그랬더니 합시다.” 하면서 따라오니까 다행이에요.

 

Q: 낮 시간에 하시는 건가요?

A: 지금 다행히도, 일하는 사람들 쉬는 시간에 맞춰서 하고 있어요. 이걸 함으로써 나도 책 한 번 더 읽고 사람들 보게 되고 좋지요. 공부도 되고. 게을러서 혼자서는 잘 안 하게 되거든요.

 

Q: 봉은샘이 게으르다고요?

A : 나 진짜 게을러요 진짜. 공부 안 하거든. 진짜. (웃음) 공부 안 해. 내가 범생이로 산 거는 딱 한 번이에요. 직업상담사 공부할 때 하루 5시간 이상 공부했어요. 태어나서 육십몇 년 만에 그렇게 공부한 거 처음이었어요. 대학교 다닐 때도 그렇게 공부 안 했는데. 근데 이 독서모임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다 모이는 거니까 내가 먼저 해야 하잖아요.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도 밑줄 치면서 하고 있어요. 근데 내가 글 쓰는 데 재주가 없나 봐. 성프란시스대학 글쓰기 수업시간에도 할 때마다 꼭 검사받는데, 내가 먼저 나가서 빠꾸되거든. 지적받고 또 고치고.

 

Q: 그렇게 하면서 나아지는 거죠. 가장 먼저 나가세요?

A : 내가 나가야지, 안 그러면 나가는 사람 없잖아. 내가 나가줘야, 이렇게 한 방 얻어먹어야, ‘, 얻어맞아도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웃음)

 

Q: 성프란시스대학 매 기수마다 다음카페가 있잖아요. 봉은샘 별명은 여전히 형님인가요?

A: . 제가 예전에 인천의 달동네에 있을 때 경희대학교 치대 친구들이 만든 의료연구회라는 동아리를 알게 됐어요. 그 친구들이 약간 운동권이었어요. 의료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아주 강하게 활동을 하는 거죠. 사회를 위해서. 이 친구들이 달동네 와가지고 진료를 하는 거예요. 당시에는 우리 때 문화가 여자나 남자나 다 형님으로 통했거든요. 여자도 남자 선배한테 전부 형님이라고 불렀어요. 그때 의료연구회 친구들보다 내가 나이도 훨씬 많으니까 나한테 형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해서 그걸 지금껏 별명으로 썼어요. 그리고 사회생활하면서도 내가 항상 나이가 좀 많은 편이었어요. 선배들도 소수고. 형님 소리를 많이 들어서 그 애칭을 계속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Q: 원래 고향은 부산이시죠?

A: . 그러다가 90년도에 서울 올라왔죠. 원래 그때는 돈이나 좀 벌어가지고 내려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계속 사람들 만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네요.

부산에 있을 때 사회에 눈이 좀 뜨이기 시작했어요. 그 당시 서울에서 도시산업선교회 이런 곳들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잖아요. 가톨릭에서는 지오세(JOC/가톨릭노동청년회)가 있었고요. 아무튼 그런 활동을 한다는 게 되게 부러웠어요. 부산에서 하루는 일하다가 라디오를 듣는데 YMCA에서 야학 학생 모집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가보니 검정고시 공부하는 게 아니고 일반적인 사회문제 공부를 하는 거예요. 사회야학이라고 하는데, 노동야학과 검정고시야학의 중간 정도 되는 곳이었어요. 기간도 한 6개월 정도로 짧았고요. 그렇게 대학생들이 가르치는 야학에서 공부하게 됐어요.

 

Q: 대학생들이요?

A: . YMCA에서 주최를 해서, YMCA 간사분이 만든 거죠. 부산대학교에서 가르치러 오고 그리고 서울에서 공부하다 내려온 친구들도 있고, 그때 좋은 친구들 많이 만났어요.

하루는 아파서 병원에 누워있는데, 책을 한 권 주더라고요. 황석영의 객지. 노가다판을 배경으로 거기에서 일어나는 모순을 보게 되는 내용인데, 읽고 막 흥분이 됐어요. 한번 읽어보세요. 정말 괜찮아요. 책을 읽고 내가 몰랐던 걸 알게 됐잖아요. 그래서 사람들 만날 때마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서 사회 모순을 알아갔어요.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었어요. 그 당시에 나도 87년도 노동항쟁을 겪었는데, 나는 사실 현장이 없었어요.

 

Q: 현장이라는 게?

A: 공장에 소속되는 것같이,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외곽에서 많이 활동했어요. YMCA 풍물패를 만들어서 강사를 모시고 대학생들, 노동자들 데려와서 탈춤 강습도 하고 그러면서 어울리고 술도 마시고. 제일 좋은 게 함께 술 마실 수 있다는 거였지요.

하여튼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했어요. 처음엔 건설회사에 있다가, 인천 조선소에서도 일했다가, 거제도에 있는 조선소에서도 있다가. 내가 바람기가 있어가지고.

87년도 6월 민주화 항쟁이 있고 나서 노동항쟁이 있었거든요. 그때 노동조합이 많이 만들어졌어요. 나도 작은 노조를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 돼서 부산 영도로 갔어요.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영도 지역모임을 만들었는데, 옆에서 대표하라고 해가지고 대표를 맡았어요. 내가 좀 잘난 척해서 탈인데, (웃음) 근데 이상하게 젊었을 때도 어떤 모임에서건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았어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있긴 했는데, 내가 술을 많이 마시니까. 떠드는 사람이 필요하다면서요.

 

Q: 여러 가지 일을 정말 많이 하셨네요.

A: 그 일을 좀 하다가 인천으로 올라왔어요. 근데 내가 또 돌아다니는 거 좋아하고 부산에서도 교회를 다녀서, 교회를 한번 찾아갔어요. 송현샘교회라고, 인천 달동네에 있던 건데, 지금은 없어졌죠. 거기서 우연찮게 선배를 한 사람 만났어요. 지금도 내가 정말 존경하는 선밴데, 그 선배를 만나면서 서울로 진출을 하게 된 거예요. 한국노동운동협의회(이하 한노협)라고 당시에 전국을 아우르는 아주 큰 단체가 있었어요. 저는 인천에서 노동조합 위원장도 하고 사무국장도 하면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 선배가 할 일 없으면 와서 일이나 하라고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고 덜컥 한노협의 총무부장이 됐어요. 그러고 사무국장 하다가 사무처장까지 하게 됐어요.

 

Q: 주요 직책 다 맡으셨는데요? 실질적으로.

A: 권력을 등에 업었지요. (웃음) 근데 실력은 사실 없었어요.

 

Q: 그러다가 어떻게 공부할 생각을 하셨어요? 대학교까지 갔다고 하셨죠?

A: . 그렇게 사무처장을 하다가 나 연결해 준 선배님이 자리를 내려놓으셔서 저도 따라서 그만뒀어요. 그러고 인천 달동네로 갔어요. 그 당시에 후배가 전도사인데 무슨 일을 했느냐면 노숙인 쉼터를 하고 있었거든요. 거기서 일을 하다 보니까 동네에 있는 애들을 위한 공부방을 만들게 됐어요. 또 나중엔 음식 나누는 푸드뱅크도 하고 그랬죠. 그러다가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을 느꼈어요. 사실 내가 만날 농땡이 쳐가지고 초등학교 졸업장도 겨우 받았거든요. (웃음) 근데 활동가를 하더라도 인맥이 있어야 하고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좀 많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갑자기 공부가 하고 싶더라고요. 사실 공부할 조건이 안 되는데 억지로 서울 영등포에 있는 검정고시 학원을 새벽같이 다녀서 중·고등학교를 패스한 거예요. 그 과정이 진짜 많이 힘들었어요.

 

Q: 중학교를 못 가신 건 경제적인 사정 때문이었나요?

A: 그 당시 엄마 혼자 벌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사정도 있었고, 내가 문제아라서 그런 것도 있고.

 

Q: 그럼 중학생 나이에 일을 먼저 하신 거예요?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A: 그때는 어려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어요. 섬유공장이나 철공소 이런 곳에 내 나이대 아이들도 많이 일했어요.

 

Q: 70년대에요?

A: 그렇죠. 내가 69년도에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니까. 14살 이럴 때 아이스케키 장사도 하고, 섬유공장에도 다니고. 가출도 많이 하고.

 

Q: 섬유공장이라면, 장시간 노동하던 곳 아닌가요?

A: 맞아요. 나뿐만 아니라 10대 여자애들이 엄청 많았어요. 남자들은 그래도 중학교라도 보내고 그러는데, 여자애들은 더 안 보냈으니까요. 물론 못 간 남자애들도 많았고. 나는 그때 근무시간이 기본적으론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매일 최소 10시간 이상씩 섬유공장에서 일했어요. 보세공장이라고도 얘기하는데, 주로 와이셔츠를 만들어서 수출하는 곳이었어요. 다 하청업체이기 때문에 일단 오더가 떨어지면 작업이 마칠 때까지 철야해야 했죠. 열몇 시간은 기본이고, 정해진 시간이라는 게 없었어요.

 

Q: 그렇게 일하시다가 객지를 읽으면서 사회의 모순을 느끼셨다는 건가요?

A: 그건 좀 나중에, 20대 돼서 객지를 읽으면서 느꼈고요. 일할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했죠. 20대 돼서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았는데, 그게 뭔지도 잘 몰랐고요. 사회에 대해서 별로 배운 것도 없고. 근데 사람들 만나면서 세상이 이렇다는 걸 좀 알게 된 거지요.

 

Q: 대학교는 언제 들어가신 거예요?

A: 검정고시 졸업하고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가지고, 성공회대학교 지원까지 한 거예요. 예전에 활동할 때 알게 된 사람들 네 사람을 만나서 추천서를 받아왔어요. 옛날 YMCA에 있던 선배, 인천에 다녔던 교회 목사, 그리고 내가 아는 선배, 민주노총 위원장 추천서. 그리고 자기소개서엔 지금껏 살아온 이야기를 썼더니 어떻게 합격이 됐어요. 51살에.

 

Q: 정말 대단하신 거 같아요.

A: 근데 입학금이 없었어요. 일단 합격은 했는데, 그때 돈 모은 것도 없고, 좀 암울하더라고요. 그래서 포기하려고 했어요. 근데 술 한 잔 먹고 후배들한테 전화하고 미국에 간 친구도 돈을 보내줘서 입학금을 마련했어요. 그렇게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05학번이 됐어요.

운이 좋아서 1학기는 어떻게 하다 보니까 수석도 하고, 전체 장학금도 받았어요. 1학년 때는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하잖아요. (웃음) 근데 2학기가 되니까 다들 열심히 하더라고요? 그런데 또 어떻게 하다 보니까 차석도 하고. 그렇게 2학년이 됐는데, 나도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까, 그때부터는 장학금 받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휴학도 3년하고, 그래도 제 어려운 상황을 고려해 총장장학금도 몇 번 받으면서 7년 만에 졸업했어요.

졸업했는데, 생활 문제가 해결이 안 됐죠. 학교 다닐 때 대학원생들하고 동아리 활동하면서 청소년들하고 인문학 배우는 활동도 하고 여하튼 한 게 많은데, 그때 대학원생이던 다시서기센터 이형운 팀장님을 알게 된 거예요. 서울역 다시서기센터에서 아웃리치 상담원을 뽑는다는 거죠. 제가 인천에서 노숙인 쉼터 일을 한 경력도 있고 해서 서울역과의 인연이 시작된 거예요.

 

Q: 봉은샘 인생스토리가 어마어마하네요. 더 젊으신 줄 알았는데.

A: 이게 철따구니가 없어서 그래. 철따구니가 없어서. (웃음)

 

Q: 그럼 아웃리치 상담원하시다가 성프란시스대학 자원활동가를 하게 되신 건가요?

A: 내가 사이버대학 상담복지학으로 편입을 하게 됐어요. 국가장학금 받으면서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따고. 평생교육 자격증도 따고. 그 사회복지하고 평생교육 실습을 다시서기센터와 성프란시스대학에서 하게 된 거죠. 그다음에 또 기회가 돼서 직업상담사까지 공부하게 된 거예요. 앞서 말했듯이 난생 처음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 공부해서 시험을 통과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니까 뭘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어요. 물론 여러 가지 영역에서 아주 많은 사람을 알고 있지만,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은 서울역에 있는 사람들과 편안하게 만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삶 자체가 풍족하게 살아온 삶이 아니라 어렵게 어렵게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우리 선생님들이 살아온 삶을 알잖아요. 한편으로 내가 이 사람들보다 똑똑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회운동 경험이 있고, 대학물도, 지식물도 좀 먹었으니까. (웃음) 그런 것도 많이 나누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15기부터 자원활동가를 하게 된 거예요.

처음엔 사실 밖에서 만날 때는 거리낌 없이 만나도 되는데 자원활동가로 하려니 긴장을 많이 했어요. 사람들 사이에서 워낙 별나다고 소문도 나있고, 그래도 내 마음대로 해버렸어요. 너무 튀지 않을지 여전히 긴장하지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에요.

 

Q: 봉은샘이야말로 산 인문학을 통해서 내가 살아온 경험을 해석하게 된 거네요.

A: 그렇지요. 그게 만약에, 내가 그런 과정이 없었으면 나도 일반 아저씨들처럼 보수정당 쪽에서 태극기 흔들면서 살아갔을 수도 있어요. 아무래도 우리 집이 좀 보수적인 집안이었거든요. 아버지는 밖으로 돌고, 엄마는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 다녔고요. 그래도 엄마가 사람들한테 항상 나누는 거를 좋아하는 분이셔서, 내가 엄마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뭔가를 잘못하면, 그건 네가 잘못했지, 하면서 알려주시고. 나는 어린 마음에 나누고 그런 걸 싫어했는데, 내가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면, 그래도 엄마가 그렇게 하시는 모습 보고 내가 이렇게 변했구나 생각해요.

 

Q: 봉은샘 사골 같아요. 사골 같은 인생이라고 해야 되나? 주변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있네요. 계속 운이 좋다고 말씀하시지만, 봉은샘이 선한 분이라서 그런가 봐요.

A: 성격이 되게 모난데, 많이 바뀌었어요. 지금도 그런 것들이 남아있는데, 살아오면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배웠죠. 처음엔 사람들을 칼같이 갈랐는데,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들이 많이 훈련되다 보니까. 그래도 항상 부족하다고 느껴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걸 놓치고 그냥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배워야만 다른 사람들하고도 나눌 수 있으니까요.

 

Q: 17기 끝나고 계획 있으세요?

A: 개인적으로는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은 소망이 있는데, 좀 조심스럽지만 성프란시스대학 졸업생 선생님들과 함께 독서모임을 하고 싶어요. 16기 선생님 한 분이 글쓰기모임을 하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우리가 또 자원이 많잖아요? 활동가 선생님들도 많으시고, 졸업생 선생님들도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글쓰기모임을 통해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Q: 마지막으로, 인생 좌우명?

A: 없어요. 그냥 열심히 사는 거죠.

좋아하는 글귀는 있어요. 지금은 작고하신 성공회대 신영복 선생님께서 쓴 글 중에 있던 글귀인데, ‘함께 맞는 비’, 그게 난 제일 와 닿는 글귀거든요. 우산을 씌워주는 것도 좋은데, 누군가 비를 맞을 때, 같은 위치에서 그 고통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특히 서울역에서는 함께 맞는 비그 마음이 가장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해요. 작년에 그 글귀가 들어간 조그만 액자 하나가 있었는데, 15기 회장이었던 선생님께 선물로 드렸어요. 나는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가지는 것보다도 다른 사람이 갖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남을 돕는다는 게 조금만 비딱하면은 그냥 나는, 너하고 다른 사람, 이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어떤 지식이 많고 적고 이런 것보다도 동등한 사람으로 만났으면 좋겠어요. 우리 집에 선생님들 초대해서 같이 밥 먹는 것도 그런 마음으로 초대하는 거거든요. 이런 내 마음이 끝까지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흔쾌히 인터뷰 응해주신 김봉은 선생님, 감사합니다. 17기 졸업까지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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