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용 (성프란시스대학 교수, 역사 담당)
1979년부터 시작된 나의 대학생활을 되돌아보면 꽤나 방황과 회의에 빠져 지냈던 시절이 있었다. 입학하고 몇 달 뒤 수업을 들어가는데 건물 앞 잔디밭에서 덩치가 큰 40대 이상 된 아저씨들이 트럼프를 치다가 강의실로 따라 들어오는 것이었다. 수업을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교수의 강의 내용과 학생들의 동태를 감시하려는 것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것이 대학이라니!
그해 10월 인문계열 1학년 110명이 ‘자연과학개론’이라는 교양과목을 듣고 있었다. 당시 문과대학에서 가장 큰 강의실에서 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가까운 친구와 몇몇 학생들이(나중에 알고 보니 선배들) 수업 도중 일어나 유신반대 전단을 나눠주고 구호를 외쳤다. 그러자 교수님은 즉시 나가버렸다.
곧 종암경찰서에서 전경들이 대규모로 파견되어 강의실을 에워쌌다. 교실 한쪽 창들은 건물의 바깥벽이었기 때문에 ‘안드로메다군단’이 줄지어 최루탄발사기를 창쪽으로 겨누고 여차하면 쏠 태세였다. 안드로메다군단이란 당시 방호복과 방호모를 쓴 전경들 모습이 스타워즈에 나오는 다스베이더의 부하들을 꼭 닮았기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교실 속 농성은 바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몇몇 주동자들은 탈출했지만 행동대장 역할을 한 내 친구는 결국 잡혀갔고 혹독한 고문과 투옥생활을 해야 했다. 학교에는 휴업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열흘 뒤인 10월 27일 신문에는 “박대통령 서거” 소식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이 모든 사건들이 내게는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것으로 다가왔다.
2학년이 된 1980년 5월에는 이른바 ‘서울의 봄’이 열렸다. 대학가의 축제는 데모로 이어졌고 나도 남들 따라 데모대에 참가했다. 이 급격한 변화를 소화하지 못한 나는 데모를 하고 학교로 돌아오면 학생회관 동아리방에서 밤을 새며 술에 취해야만 했다. 그리고 광주민주항쟁과 비극이 이어졌다.
공부가 될 리 없었다. 1학기에는 학사경고를 받고 2학기에는 간신히 학사경고를 면했다. 나는 휴학을 하고 방위로 소집되었다. 육군본부 국군과학수사연구소 꿀보직 방위생활을 하면서도 몇 번이나 사고를 쳐 영창을 갈 뻔했다. 공수부대원들의 광주학살을 알고 있는 내게는 나 자신이 방위인 것조차 혐오스럽던 시절이었다.
복학한 후 그래도 대학생활을 이어가는 큰 동력은 수업이 아니라 동아리의 농촌‘봉사’활동과 야학이었다. 주위의 숱한 동기, 선후배들이 민주화운동을 하다 고초를 겪는 것을 보고, 또 상당수는 대학을 그만두고 공장에 취업하는 것을 본 나로서는 세상을 명확하게 파악할 능력과 실천의 용기가 부족했다. 그러나 일말의 양심이랄까, 그것이 나를 더욱 야학과 농활에 매진케 했다.
그러나 여전히 허전했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낮에는 공장에 다니다가 밤에 야학에 오는 나 또래나 나보다 어린 청소년들이 야학교사들을 바라보는 부러움과 신뢰의 눈동자가 교차할 때는 무척 부담스러웠다. 이들이 대학생을 만나면서 더욱 자신의 처지에 비감해하는 속내를 느낄 때면, 나의 대학생활과 야학활동에 대해 회의가 깊어질 뿐이었다. 나는 왜 대학을 다니고 있을까? 내가 대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고민들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을 읽다 어느 글귀에서 눈이 확 밝아졌다. 1969년 탄자니아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제정된 탄자니아 교육헌장의 한 구절이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탄자니아에서 교육을 받은 청년들은 자신의 교육을 가능케 하기 위해 이 땅의 노동자 농민들이 치러야 했던 희생에 대해 보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만일 탄자니아에서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자신의 지식을 노동자 농민에게 되돌리지 아니할 때 그 청년은 조국 탄자니아를 배신한 것이다.
그야말로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이 글귀를 통해 내가 왜 공부를 하는지, 앞으로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격심한 번뇌도 상당히 사라졌다.
그러나 서울 불암산 자락의 중계동 야학은 사라졌다. 후원하시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건물을 비워줘야 했다. 근처 밭에다 비닐하우스를 쳐서 수업을 하다 1986년 결국 비닐하우스마저 철거당하면서 야학은 사라졌다. 야학학생들이 야구방망이까지 들고 지키려던 우리의 배움터는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2006년 1월 초 쯤. 20년도 훨씬 전에 야학에서 중고등부를 마쳤던 최준영군이 느닷없이 연락을 한 것이다. 다시서기센터에서 2005년 가을부터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과정으로 성프란시스대학을 개설했는데 2학기 역사과목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문학을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너무나 바빴던 나는 고사했지만, 그의 한마디 말이 끝내 17년째 성프란시스대학과 인연을 이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 옛날 당신이 야학을 하면서 지식인은 자신의 지식을 만인에게 되돌려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제 우리가 손을 내미는데 당신이 그 손을 거절할 것이냐 라는 내용이었다.
내 입이 방정이다 싶었지만 어쩔거나. 결국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성프란시스학교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젊은 날 야학을 하면서 겪었던 가슴앓이가 마흔이 훨씬 지난 시점에 되풀이되었고, 이제는 환갑도 지냈는데 청춘의 고민이 여전히 내 속에서 굳게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왜 만나는가. 가장 배고픈 이에게 가장 배고픈 학문-인문학-이 만나는 이 절묘한 궁합은 무엇일까. 이 만남을 통해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하나는 배웠다. 내가 그토록 무심코 지나치던 서울역 광장의 사람들을 보는 눈이 내게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눈에 들어와도 무심코 지워버리고 외면했던 ‘광장의 사람들’이 투명에서 흑백으로 그리고 칼라로 되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만남과 헤어짐, 오고 감의 교차로인 서울역 광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과 그들을 옭아맨 보이지 않는 동아줄의 세계를 조금씩 느꼈다. 노숙인이라는 지칭에 담긴 공동체로부터의 배제와, ‘낙오자’·‘패배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이, 그들이 광장을 떠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재작년까지 성프란시스학교는 남산 후암동의 번듯한 교실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후원업체가 끊어지고 건물주의 심각한 월세 인상 통보에 타격을 받아, 우리 학교는 다시 서울역 광장으로 돌아왔다. 옛 우체국 건물(지금은 노숙인진료센터)의 2층을 빌어 주 4일 밤에 무료로 이용하고 있다. 상황이나 실질은 다르지만 대학시절 중계동 야학이 비닐하우스로 옮기던 일이 데자뷰처럼 떠오른다. 하지만 다르다. 그 옛날 비닐하우스 야학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노숙인의 삶의 터전인 서울역광장에 다시 돌아왔을 뿐이다. 더 깊게 뿌리박기 위해서. 내 소견으로는 40년 전 중계동 야학이 서울역 광장으로 이전한 것이다. 참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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