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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정 발자취/2020년 16기

좌절, 인문학, 그리고 꿈 (16기 이용은 선생님 글)

by vie 2021. 5. 12.

이용은 선생님 (성프란시스대학 16기 수료)

설 연휴 하루 전, 난파된 몸을 이끌고 다시서기센터에 찾아 들었다. 흘러간 시간을 되짚어 그리워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파편으로 뗏목이라도 만들어 어떻게든 항해를 재개해야 했다. <자립 의지>를 방해하는 요소를 외면했으며 통증으로 괴로워도 주저앉아 하소연하지 않았다. 자기변호는 그저 변명이며 합리화를 위한 쓸모없는 과정. 일체의 모든 것은 깎고 버려야 하는 납덩이에 불과했다. 매섭도록 추운 새벽, 목적지 없이 센터를 나설 때마다 뭉텅이로 버렸다. 자활과 일자리를 거치며 의식주는 해결 됐지만, 삶의 방향을 고민해야 했다. 재화에 대한 욕심이나 예전 누렸던 모든 것이 사상누각처럼 생각되고 그 굴레에 다시 들어서고 싶지 않았다. 살아갈 방법을 다시 모색하고 이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를 정립하고 싶었다. 그즈음, 여러 사람에게 <인문학> 이야기를 들었고 제의가 들어왔다. 예술, 철학, 한국사, 문학, 여러 선생님이 고통스러워하던 글쓰기. 고민과 맞물려 독서와 사유하는 시간을 점차 늘려갔다.

나를 들추고 마주했다. 마음에서 쏟아내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록했다.

<나>를 여과없이 토해내는 과정. 타인을 보듯 냉정하게 뱉어놓고 보니 누구나 그렇듯 경제활동에 매몰되어 꿈 한 조각 남지 않은 메마른 존재. 균형을 잃고 쟁기를 끌던 마른 삶은 사고 한 번에 부러지고 남은 것은 사회적 허울, 각질 같은 껍데기 뿐이었다. 무채색 삶을 끝내자. 힘들어도 꿈을 꾸는 인간이 되기로 했다.

제 버릇 누굴 주겠는가. 어느새 또 적립만 하는 은행 잔액. 포기했던 음악을 하기 위해 기타, 그리고 삶의 빛을 담을 카메라를 과감하게 샀다. 그림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시간은 어디로 이끌려 하는 걸까. 오래전 연락이 끊겼던, 좁은 연습실에서 부대낀 친구들과 하나 둘 연결이 되었다. 어느덧 중년이 되어버린 녀석들. 굴곡진 삶 가운데도 음악을 놓지 않고 있었다. 재즈를 이야기하고 서로의 연주를 듣고 합을 맞추며 연습하고 돌아오던 날, 만감이 교차하는 눈물이 흘렀다. 왜 그토록 먼 길을 돌아야 했을까.

내게 교류는 또 다른 삶의 원동력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대상을 관찰하는 도구다. 야학의 어르신, 돌을 조각하는 석공, 불꽃을 튀기는 용접공 등 주위에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을 카메라에 담고 사는 이야기를 들으며 같이 밥을 먹고 식구가 되어간다. 이전에 지위나 규모로도 가질 수 없었던 평온함, 그리고 감사한 날들. 추락사고는 지친 나를 멈추게 했고, 인문학은 지나온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는 과정에 들어서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여러모로 힘든 출발을 했던 16기. 코로나19라는 거친 해일을 맞아 침몰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지닌 채 너울을 힘겹게 넘어야 했다. 비쩍 마른 곽노현 학장님은 내게 이렇게 협박했었다. 무조건 10명 이상 졸업하게 하라고. 마명철 국장의 눈물겨운 헌신이 있었다. 어찌 되었든 식은땀 나는 여행이 끝나고 목적했던 항구에 정박했다. 짧게 느껴지는 항해. 고마움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흩어질 때가 왔다. 벌써 그리워지는 내 책상. 이름이라도 새겨 놓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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