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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4호

[길벗광장] 노숙인 인문학의 질적 도약을 꿈꾸며

by bremendhk 2020. 12. 31.

김동훈(예술사교수)

  지구촌 모든 사람들 뇌리에 오래오래 기억될 2020년이 이제 막 저물어 가고 있다. 보통 이맘때면 사람들은 SNS를 통해 송구영신의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직접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한 해를 보내는 소회를 함께 나누었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아마도 거의 모두가 집에서 가족들과 경자년 한 해를 떠나보내고 있을 것이다.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로 숨죽인 채 말이다.

올 한해 인류가 겪게 된 충격적 사건들은 먼 훗날 역사를 기록하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언급되게 될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전 세계 인구 100명 중 한 명 꼴로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 그중 이미 2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도 이 가공할 바이러스는 힘이 꺾이기는커녕 더욱 기세등등하게 우리를 몰아세우고 있다. 지구상 최강대국이라고 하는 미국이 가장 많은 확진자와 사망자를 내고 있다. 오늘날의 국제 정치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선진문물을 구가한다고 믿었던 유럽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현실은 지금까지 우리가 국제질서와 선진국, 후진국의 구분에 있어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통념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고 있다.

한동안 방역 모범국으로 꼽혔던 대한민국도 제3차 대유행 앞에서는 무척이나 힘든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일 1,000명 대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고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던 사망자수가 두 자리 수가 된 데다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실질적 봉쇄인 거리두기 3단계 시행을 미루고는 있지만 거의 폭발 직전의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지인들과 만나 왁자지껄 떠들어가며 편하게 이야기 나눠본 적이 언제인가 싶을 정도로 기억 속 저 멀리 아득하다.

그 와중에 성프란시스대학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처음에는 신입생을 모집할 수조차 없었고 서울시와 보건복지부의 예산지원도 한정 없이 미뤄졌다. 대구발 1차 대유행이 어느 정도 잠잠해진 뒤에야 비로소 신입생 모집, 입학식, 1학기 개강 등이 이뤄졌지만 수업 일정도 15주에서 12주로 축소되었고 여름 방학 일정 대부분이 취소되었다. 특히 재학생 선생님들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추억이 되었을 여름 MT를 가지 못한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2차 대유행과 맞물려 2학기 개강도 연기되었고 그나마 3차 대유행과 맞물리면서는 전면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어 컴퓨터와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으셨던 16기 선생님들이 처음에는 많이 어려워하기도 하셨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건 졸업여행도 심지어는 졸업식도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하게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성프란시스대학은 코로나19가 아니었더라도 이미 충분히 어려운 상황 속에 있었다. 15년 동안 물심양면으로 함께 했던 기업 후원이 끝났고, 서울시와 보건복지부의 예산지원도 언제 중단될지 모르는데다, 강의실조차도 구할 수 없었던 절박한 현실이 2020년 초 노숙인 인문학의 현주소였다. 어찌어찌해서 노숙인 진료소 강의실을 빌려 쓰는 셋방살이를 시작했지만 강의실이 협소해서 원래 선발하던 25명이 아니라 14명밖에 신입생을 뽑지 못했다. 게다가 오랫동안 함께 해주시던 교수님 한분도 개인 사정으로 강의를 그만 두게 되셨는데 후임을 구하지도 못했다. 2005년 노숙인 인문학이 시작된 이래 가장 절박한 위기상황이었는데, 거기에 코로나19라는 세계사적 파국이 덧씌워졌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하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노숙인 인문학에 대해 이런 어두운 기억들만 쌓인 건 아니다. 작년부터 시작된 노숙인 인문학 15주년 기념 문집 편집을 전반기에 마무리하게 되었다. 원고를 받아본 출판사에서는 흔쾌히 출간을 허락해 주었다. 전반적으로 어려운 출판계의 사정을 고려해서 출판사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자는 작은 바램으로 8월부터 10월까지 2개월에 걸쳐 텀블벅 펀딩을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수많은 분들의 관심과 후원이 줄을 이었다. 책이 출간되자 많은 곳에서 매우 긍정적인 서평을 써주셨다. 11월에 개최한 <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 북 콘서트는 많은 분들의 참여로 열띤 분위기 속에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재정적 자립을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하지만 성프란시스대학과 함께 해주시는 후원자분들이 많이 늘어나기도 했다.

그래서 2021년을 내다보는 성프란시스대학의 전망이 어둡지만은 않다. 아니,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처럼 이제는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는 시민운동 차원에서 성프란시스대학이 거듭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2020년부터 함께 하고 계신 곽노현 학장님도 적극적으로 노숙인 인문학을 위해 팔 걷고 나셔주셨고 다시서기센터장 허용구 신부님을 비롯한 실무진들, 자원활동가들, 졸업생 동문 선생님들, 재학생들, 교수진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더 따뜻하게 서로 함께 한 한해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시간 후면 밝게 될 새해 아침부터는 노숙인 인문학, 아니 대한민국의 노숙현장 전반을 위해 더 크고 높은 꿈을 꾸고 싶다.

우선 언제 이뤄질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한 한 빨리 성프란시스대학만의 공간을 마련하고 재정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더 많은 분들과 소통하고 그 중에서 많은 분들이 후원자로, 자원활동가로, 교수진으로 함께 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야 할 것이다. 노숙인 인문학이 이 땅에서 가장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진정한 희망의 빛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함께 뛰는 한 해가 되길 바래본다.

또 대한민국 노숙 현실을 돌아보는 학문적 노력을 조직적, 체계적으로 시도해 보았으면 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노숙, 도시빈민 등의 문제와 관련된 모든 학문분야의 연구자들과 사회복지 실무자들이 함께 모여 제대로 된 현실파악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학술 연구모임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단순히 문제 제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책 대안까지 제시할 수 있도록 치열하게 고민하고 더 나아가서는 실천할 수 있는 틀이었으면 좋겠다.

노들 장애인 야학과 장애학 궁리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보여주고 있는 모범적 예에 자극 받았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고 싶지 않다. 언젠가는 대한민국에서 고통 받는 많은 이들을 위한 여러 학술적, 실천적 노력들이 더 큰 연대의 틀 속에서 함께 모여 진정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장애인, 노인, 도시빈민, 여성, 청소년, 다문화가정, 노숙인, (탈)성매매여성, 재소자 등등 사회복지와 관련된 여러 영역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며 들여다보고 하나씩 실제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그런 날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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