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조 (9기 졸업동문)
늦은 봄, 어느 화창한 날이다.
차갑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센 바람이 분다.
늦은 봄 월미산 자락엔 그런 차갑지는 않지만 센 봄바람이 불고 있다.
시절이 늦은 봄이라 그처럼 화려했던 벚꽃들은 이미 사라졌고 대신에 철쭉들이 진한 분홍물감을 여기 저기 흐드러지게 뿌려놓으면서 꽃말을 밀어 올리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고,
단풍나무들은 이제 막 알을 깨치고 갓 태어난 병아리 발바닥만한 작고 예쁜 잎사귀들을 가득 달고 불어오는 봄바람에 마구 흔들리며 흐느적인다.
월미도의 봄 어느 한 날이다.
월미산 정상의 포토 존 앞에선 '중년의 여고생' 셋이서 신바람이 났다.
서로 색다른 원피스를 차려입고 월미산 정상에 올라 희희낙낙 나름의 추억 만들기에 여념없다.
제법 바람이 센 날인데도 저렇게 치마를 차려 입은걸보니 아마도 그렇게 하자고 약속을 했었을까.
멋스런 중절모도 삐딱하게 쓰고 온갖 깃털과 꽃으로 한 껏 멋부린 중년의 여인들,
하고 많은 얘기들을 늘어놓으면서 깔깔깔 들떠있으니 나에겐 꼭 여고생들처럼 보였고, 그래서 바람 타고 날리는 치맛자락이 정열의 깃발처럼 돋보였다.
여기서 우아하다고 표현하면 안 되겠다.
지금 이들은 '여고생'들이다.
'얘들아, 하얀 머리카락이 더 멋스런 나인데 ... 우린 진짜 철 안들었다 얘. 호호호'
월미도는 오랜 역사문화와 전쟁의 아픔이 어려 있는 곳이다.
특히 북한에서 태어나서 살아 온 나에게도 그 이름 '월미도'는 전혀 낯설지가 않다.
지금의 월미도는 무릉도원같이 아름답게 꾸며져있고 또 현대적 놀이공원시설과 문화의 거리가 조성되여 어느때든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이지만,
사실 월미도는 먼 옛날부터 수도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지리적 특성으로 숙종 34년에 성새가 축성되고 포대도 설치되는 등 그 중요성이 입증된 곳이다.
또한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첫 이민들이 떠나 간 허름한 포구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뿐만아니라 동족상쟁의 뼈 아픈 상처를 남긴 6.25 전쟁 땐 그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치러져 기울어가던 전쟁 판도를 뒤바꾼 역사적 승리의 전적지이기도하다.
나는 월미도를 너무 잘 알고있다.
때문에 "월미도"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높뛴다.
북한은 6.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바로 그 전쟁시기에 있었던 월미도와 인천지역을 3일동안 방어하기위해 세계 최강 미군의 261척의 군함과 7만 5,000명의 병력에 맞서 전투를 벌여 인민군대의 전략적 후퇴를 성공적으로 보장하며 목숨을 바친 해안포 1개 대대 용사들의 희생적 영웅주의를 따라배워야 한다면서 그 '사상교육'을 위한 예술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월미도에는 인민군 1개 해안포중대가 82mm 해안포 4문을 가지고 1차 방어진을 치고 있었고 인천해안지역에는 3개 중대가 각각 해안포 4문씩 가지고 산개되여 방어진을 구축했었지만,
월미도는 미군의 작전개시 5시간만에 완전히 함락되었고 인천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3일이 채 걸리지 않았었다.
북한은 '조국해방전쟁'을 제국주의 연합세력의 침략에 맞서 싸워 승리한 전쟁이라고 하면서도
패배한 월미도방어전투만 이례적으로 인정하는 데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북한은 사상교육과 사상선동을 가장 중요시한다. 그를 위해 이른바 '혁명적 문화전통'과 '혁명적 예술전통'을 체계적으로 정립해 어용도구로 활용한다.
예컨데 일제강점기 때에 항일유격대의 문화예술전통, 해방후 새조국건설시기의 창조된 문화예술전통, 그리고 '조국해방전쟁'시기의 문화예술전통, 전후복구건설과 사회주의 건설시기를 온전히 하나로 이어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그것을 '혁명적 문화예술의 전통'이라면서 국가, 사회, 인민생활의 전반에 아주 능숙하게 활용하여 북한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 - 집단주의적 사회주의체제를 완성시켰다.
때문에 정전직후 북한은 바로 예술영화 '월미도'를 만들었고 80년대 초에 또 한번 업그레이드시켜 새롭게 보급했었다.
월미도 용사들의 영웅적 희생정신을 따라 배워 당과 수령에게 죽음도 각오한 무한한 희생과 충성을 강요하려고 말이다.
... ...
푸르른 녹음이 우거진 월미도엔 70년 이상 된 수령의 나무는 단 일곱그루밖에 없다.
전화의 그날, 우박처럼 쏟아지는 '철비'속에서 모두 불타고 뿌리채 뽑히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살아 남은 일곱그루의 나무가 너무 소중하고 경이롭기까지하다.
때문에 인천사람들은 월미도의 그 나무들에 이름을 지어주었다.
244년 수령의 '평화의 어머니' 느티나무,
103년 수령의 '그날을 기억하는 나무' 은행나무, 100년 수령의 '향기로 이야기하는 나무' 화백나무,
99년 수령의 '영원한 친구' 상수리나무,
93년 수령의 '장군 나무' 소나무,
81년 수령의 '치유의 나무' 은행나무,
70년 수령의 '다시 일어선 나무' 벚나무.
(2015년 기준)
인천사람들과 해군 2함대장병들은 월미도에 나무를 심고 온갖 꽃씨를 뿌리며 정성껏 가꾸어 왔다.
그 결과 월미산엔 오색 딱따구리, 알락 할미새, 황조롱이 등 여러 날새들과 다람쥐와 청개구리, 그리고 바미구 딱정벌레 등 동물들과 곤충들이 보금자리를 잡았고 갖가지 식물들과 꽃들이 자생으로 서식하는 그런 곳이 되었다.
북한은 월미도 방어전투를 패전의 '낙천적 비극'이라고 인정하고 기억하지만,
여기 한국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자유이념의 승리로 기억되고있다.
월미도 문화의 거리에 세워진
북한에서도 너무 많이 보아 왔던 그날의 영웅적 군인들을 형상한 조각예술작품들을 이념만 걷어내고 감상해 본다면 남과 북의 그 군상들은 너무나도 똑같은 조각예술작품이다.
언제 쯤 우리는 한 눈빛, 한 감성으로 그 동상들을 바라볼 수 있을까.
문득 평화도 이념이라는 생각이든다.
가장 극단에 있는 두개의 이념이 처절하게 부딪힌 곳, 여기 월미도는 오랜 역사문화와 전쟁문화가 함께 살아 있는 그런 곳이다.
'조국의 미래, 청년의 책임'이라고 또렷이 새긴 비석위에 역동적인 젊음을 상징하는 흉상이 참으로 이채롭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늦은 참회를 해본다.
조국의 미래를 이시대 청년들아, 책임져다오 ~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건강한 조국을 기성세대인 나는 후대들에게 떳떳하게 물려주는가.
다음 세대가 좀 더 좋은 출발점에 서서 시작할 수 있는 그런 공고한 터전(나라)을 물려주고있는가.
양심이 사는 가슴위에 손을 얹고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아, 이 참회에 동참할 의지는 없는가.
월미도는 그렇게 두 개의 얼굴을 하고있다.
아, 월미도 월미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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