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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4호

[역전칼럼] 존재, 참을 수 없는 가벼움 혹은 무거움

by bremendhk 2020. 12. 22.

                                                                                                                                        박경장
(글쓰기 교수, 문학평론가)


내 수업시간인데도 선생님들 대화에 감히 말 한 마디 끼어들지 못할 때가 있다. 바로 이럴 때다.

“소주에다 양주까지 병나발 불고 태종대 자살바위 끝에 섰는데, 아! 글쎄, 정신이 말짱하더라고, 발이 바위 벼랑에 딱 붙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거야.” “바다에 뛰어내렸는데 목구멍에 물이 넘어와 숨이 막혀 나도 모르게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는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근처 물질하던 해녀가....” “소주 한 박스 사들고 여관에 틀어박혀 며칠을 마시다 벽선풍기 걸이에 전홧줄로 매달고 의자에서 뛰어내렸어. 그런데, 이런! 발이 바닥에 닿는 거야. 전홧줄이 길었어.” “어디 죽는 게 내 맘대로 되는 줄 알아.”

무슨 대화 끝에 나왔는지, 이 말들이 한 시 한 곳에서 나온 건지, 누가 물꼬를 텄는지 기억이 흐리다. 분명한 건 자살에 대한 대화를 매듭짓고 다시 본 수업으로 돌아가게 한 마지막 말은 ‘자살미수, 위암 3기, 교통사고’로 죽음의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긴 선생님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게 넘긴 고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60을 넘기지 못하고 결국 술로 사망하셨다.

온 우주보다도 더 무거울 생명이 농담처럼 가볍게 오가는 서울역. 이곳에선 70을 넘긴 거리 선생님을 찾아보기 힘들다. ‘존재의 무게가 너무 가벼워서일까, 무거워서일까. 존재의 무게라는 게 정말 있기나 한 걸까. 있다면 얼마나 될까. 아니 얼마나 되어야할까. 몸무게처럼 사람마다 다를까. 다르다면 얼마나 다를까. 무거운 게 좋을까, 가벼운 게 좋을까.’ 지난 12년 동안 서울역을 오가며 수없이 떠올린 물음들이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을 소설적 성찰로 끌어들인 이가 있다. 밀란 쿤데라. 그는 역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주인공 토마시를 ‘존재,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무거움,’ 그 경계의 끝까지 가보게 한다. 의사인 토마시는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까지 떼어주며 부모와도 관계를 끊고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바람둥이다. 이혼 후 그는 무수히 많은 여자들과 ‘에로틱한 우정’을 맺는다. 이 요상한 우정은 ‘두 사람 중 누구도 상대방의 인생과 자유에 대한 독점권을 내세우지 않는, 감상이 배제된 관계’라야 행복할 수 있다고 토마시가 지어낸 행복한 관계론이다. 이 에로틱한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자신만의 ‘3의 규칙 (짧은 간격으로 만날 땐 3번 이상 만나지 말며, 길게 사귈 때는 3주의 간격을 두고 만날 것)’을 세운다. 삶의 무거움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그만의 포석이다. 하지만 이 규칙은 테레사라는 여인을 만나면서 깨지고 만다. 그녀는 무거운 삶의 표본이다. 6번의 우연이 겹쳐 필연이 돼버린 테레사와의 만남에서 토마시 삶의 추는 한없이 무거운 쪽으로 기운다.

소설 머리에서 쿤데라 자신이 등장해 토마시는 “한 번은 중요치 않다 (einmal ist keinmal)”는 독일속담에서 태어났다고 밝힌다. 해서 토마시 머리에는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고,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늘 맴돈다. 그러고는 쿤데라는 토마시의 이런 생각과 극단에 있는 철학자로 니체를 소환한다. 니체 사상의 핵심인,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영원회귀.’ 영원히 반복된다는 영원회귀는 무거움의 표상이다. 한 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인생을 영원회귀 옆에 놓으면 인생은 너무도 덧없어 아무런 무게감도 갖지 못한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이렇게 소설 머리에 존재의 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철학적 성찰의 향연을 에세이 형식으로 펼친 후, 쿤데라는 이 철학 주제를 인물의 구체적인 삶이라는 소설의 몸으로 들여온다. 하지만 쿤데라는 토마시가 산 두 극단의 삶을 보여줄 뿐 어떤 삶이 더 행복한지, 옳은지 말이 없다. 쿤데라가 생각하는 소설은 가설의 세계요, 의문의 세계인 까닭이다. 작가는 그 물음을 되묻고 답을 궁구해야할 짐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삶을 택하겠는가? 무거운 삶, 가벼운 삶. 아니 나에게 묻는다. ‘너라면. . .’

인문학을 매개로 서울역 선생님들과 만나면서 수없이 그 물음과 불현 듯 맞닥뜨린 나를 보곤 한다. 내가 끼어들 수 없었던 ‘자살대화’가 그런 순간이고, <그때 그 순간>이라는 산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글은 <염쟁이 유씨>라는 연극을 보고 자연스레 죽음이 떠올라 자신이 죽으려했던 ‘그때 그 순간’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선생님은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워 죽자고 마음먹자 세 가지 생각이 떠올랐단다. 첫 번째는 “이왕 죽을 바에야 멋지게 죽자”라는 생뚱맞은 생각이 떠올랐고, 두 번째는 “죽음에 실패할 경우 장애를 지닌 채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이 떠올랐다. 세 번째는 자연스럽게 ‘죽는 방법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해서 그의 ‘자살여행’이 시작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여행을 하며 죽을 장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하고 부산에 머물렀다. 그러기를 며칠, 문득 제주행 배에서 뛰어내리면 되겠다는 생각 이 떠올랐다. 그 길로 싸구려 양주 한 병 사들고 배에 올랐다. 모두 잠 든 자정 무렵, 배 난간에 매달렸다. 손만 놓으면 배는 멀어질 터 실패할 염려는 할 필요가 없다. 헌데 도무 지 손가락이 안 펴진다. 대 여섯 차례 재시도하다 그만 날이 새버렸다. 다음 날 제주항 대 합실 TV에서 설악산 등반 도중 조난 사고로 대학생 등산객 몇 명이 동사했다는 뉴스를 들 었다. ‘아하, 이거구나. 나도 저걸 따라 해야지.’ 무릎 정도까지 푹푹 빠지는 겨울 한라산 1700m 고지쯤 올랐을 때 해가 졌다. “이제 잠만 자면 죽는구나.” 생각에 굉장히 기뻤다. 어스름 달빛이 비치는 조릿대 군락에 누웠다. 허기에 온몸이 녹작지근하니 스르르 잠이 들 었다. 굉장히 추워 눈을 떴는데 새벽이었다. “아직 안 죽었구나.” 자신이 몹시 실망스러웠 다. 누웠던 자리를 보니 조릿대 밑으로 얼었던 얼음이 체온에 녹아 파카 점퍼에 스며들어 있었다. 뜬금없이 “나 젊었을 때는 눈밭에 누워도 끄떡없었다”는 어른 말씀이 떠올랐다. 춥 기만 하고 감기조차 걸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 덤불을 긁어모아 불을 피워 쬔 후 하산했다.

죽음에 실패한 선생님은 다시 삶의 무게를 지게 됐다. 그래서 행복한가, 불행한가. 그의 선택은 잘 되었나, 잘못되었나.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권한은 애초부터 인간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외길 인생에서 모든 결단과 선택은 오직 한 번뿐이다. 우리가 내린 서로 다른 결단들에 대해 어떤 선택이 ‘더’ 옳았을지 행복할지 비교할 수 있는 제2, 제3, 제4의 삶이란 없다. 오로지 선택에 따른 결과만 있을 뿐, 비교 불가한 결과만이.

그렇다면 선생님은 ‘한 번은 아무 것도 아니다’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운 삶으로 회귀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선생님은 존재의 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그 모호한 개념이 순간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는 경계의 극단을 경험하고 돌아왔다. 돌아와 마주한 삶은 그가 버리려고 했던 바로 그 삶. 영원히 반복되는 어제 같은 오늘만 있는 삶일 뿐일지도 모른다. 약속된 미래란 없다. 다만 달라질 수 있다면 그 ‘반복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관점의 변화일 것이다. 니체는 이 ‘영원회귀’를 긍정하는 자를 ‘초인’이라고 했다.

선생님은 자살여행을 이렇게 끝맺음했다.

그런데 어제는 줄곧 오르막길이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길이 무조건 내리막길이 아니었다. 담배 피운 자리에 버린 꽁초를 주워 피우며 계곡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아! 인생도 이렇겠구나. 한라산에 죽으러 올라갔다가 죽지는 못하고 산에서 삶을 배우고 살아서 내려왔다.

인생 외길 수없는 반복 속에도 디테일이 있다. 그 디테일 속에 천사와 악마, 무거움과 가벼움, 행복과 불행이 병존한다. 영원한 반복으로 어제와 똑같은 오늘일지라도 오늘을 어떻게 맞느냐에 따라 영원히 처음 맞는 오늘이 될 수 있는 ‘해석’의 문제. 그렇다 인문학은 결국 ‘해석에 대한 방법론’이다. 선생님은 ‘자살여행’이라는 글쓰기에서 그 해석 하나를 얻어 돌아온 것이다.

글을 마치려니 헛웃음에 다 빠진 앞니를 어색하게 드러내던 50대 초반의 한 선생님의 말이 귀를 간질거린다. 죽으려고 했던 그가 “무료 틀니를 해준다기에 치과에 가 의자에 앉아 입을 벌렸는데, 무서워 온몸에 경련이 와 도망쳐나왔”단다. 후배 입학식 축사로 연단에 선 한 동문 선배가 우리대학을 소개해 유명해진 말이 있다. “우리대학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습니다. 적어도 자실미수 2범은 되어야, 유서 한 두통쯤은 몸에 지니고 있어야 들어올 수 있는 대학이 성프란시스 대학입니다.” 작년 출간된 『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는 존재, 참을 수 없는 가벼움 혹은 무거움, 그 칼날의 경계를 오가며 베인 거리 선생님들의 아슬아슬한 ‘주저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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